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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 개요
노도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0.41km2, 해안선 길이 3.13km, 인구는 9가구 18명이다. 남해군 상주면 벽련포구에서 1.2km 떨어진 섬이다. 노도를 가려면 벽련마을로 가야 한다. 벽련(碧蓮)은 짙고 푸른 연꽃으로 3천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의 마을로, 바로 앞에 삿갓처럼 생긴 섬이 ‘노도’이다. 이곳 노도에 처음 사람이 들어온 것은 남해 바닷가에 살던 선씨라는 사람으로, 병자호란 뒤에 뗏목을 타고 노를 저어 이 섬에 왔다고 한다. 노를 저어 건너왔기 때문에 섬 이름도 노도가 된 것이다. 또 다른 유래는 노도(櫓島)는 옛날 배의 노를 많이 생산했다 해 붙여지기도 했다. 이곳은 서포 김만중의 유허지로 유명하다. 해산물이 풍부한 노도는 선씨가 가구를 이루어 살고 있으나 대부분 고령으로 힘든 일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다. 상주면 벽련포구에서 도선 노도호로 하루 4번 왕복한다. 벽련포구는 남해군 상주면 상주해수욕장 조금 못 미쳐 있다.
노도에 가는 배를 타는 백련마을 노도 둘러보기
노도는 1994년도 7월, 등대호를 타고서 경남의 섬들을 2주일 동안 순회한 후 마지막으로 들러서 하룻밤을 보낸 섬이다. 그 날 밤, 배를 대놓고 선실에서 자는데 어찌나 덥고 모기가 극성이던지 여러 번 잠에서 깬 기억이 생생하다. 꼭 20년 만에 다시 온 노도는 많이 변해 있었다. 20년 전에는 도선이 없었지만 불과 몇 년 전에야 도선이 생겨났다. 노도선착장은 섬의 북쪽 지점에 위치해 있다. 당연히 마을도 북쪽 구릉지에 형성되어 있다. 선착장은 동쪽으로 동방파제가 있고 바로 옆에 상당히 폭이 넓은 경사제가 있다. 지금은 그렇지만 예전에는 이곳에도 철부선이 다녔을 것이다. 부교에는 ‘노도호’라는 도선이 정박해 있다. 도선의 상태는 아주 깨끗한 편이다. 이곳은 하루에 네 차례 운항한다고 되어 있다. 요금은 일반인은 왕복 4천 원이고, 주민은 2천 원이다.
노도항 노도호
제법 긴 부잔교를 타고 물양장으로 나오면 바로 앞에는 공중화장실이 있고 그 옆으로 해안길이 이어진다. 이곳에 ‘노도마을’을 표시하는 돌이 서 있다.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수령이 꽤 있어 보이는 팽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무 그늘에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가 서 있다.
서포 김만중의 스토리텔링화
서포가 죽은 후 1692년(숙종 18)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묻혔던 곳이라는 표지석을 남해군청년회의소에서 제9차 경남지구JC회원대회 기념으로 세웠다. 서포 김만중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엘리트 집안에서 살다가 유배를 간 셈이다. 더구나 위리안치 즉 유배지에서 가택연금까지 당하여 얼마나 죽을 맛이었겠는가. 나그네인 우리는 잠깐 답사를 통하여 유배객의 삶을 엿보면서 그분의 삶과 소설 때문에 감동을 받고 탄성을 지른다. 서포 김만중은 조선 숙종 시대 때의 서인으로 대단한 문장력을 자랑하는 학자였다. 그는 한때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을 두루 거칠 정도로 세도를 지녔지만, 숙종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경신환국, 1689), 노도로 유배 오게 되었다. 김만중은 노도에서 유배 생활 중 국문소설인 ‘사씨남정기’를 지어 국문학사에 족적을 남겼다.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후 숙종 18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은 우리 문학사에 영롱하게 자리잡고 있다.
서포 표지석 앞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임을 알리는 노도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조립식 건물로 된 마을쉼터가 있다. ‘노도길 1-14’에 들어선 건물로 이곳이 옛날 학교가 있던 터다. 원래는 양하초등학교 노도분교였으나 이후 양하초가 상주초등학교 분교가 되었다. 이제는 노도 주민들이 마을회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학교 운동장은 타작마당 정도로 작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사라졌지만 학교는 아직도 아이들이 입학하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비록 폐교되었지만 한때 노도사람들의 배움터였다. 섬은 비록 작지만 옛날에는 학교 앞 가게에 생필품과 문방구, 잡화까지 없는 게 없었다고 한다. 이 작은 학교에 학생 수가 과연 얼마나 됐을까? 1973년도에 23가구 주민 232명, 분교생이 32명이었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 한 분이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한 교실에 모아 놓고 가르쳤으니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어렵고 학생들은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고 한다. 학교 건물 옆에 나란히 붉은 벽돌로 된 오래된 건물 한 채가 있다. 아마도 예전에 초소로 사용되었을 건물로 보인다. 그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국립공원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관리소에서 세운 표지석으로 복원을 뜻하는 표식이다. 이 옆으로 도선안내판과 함께 ‘서포의 얼이 숨 쉬는 문학의 섬 노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마을 끝으로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약간의 경사진 길을 걸어가면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노도 표지판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 길을 따라 어느 정도 가면 이정표가 나타난다. 마을 뒷길에 있는 이정표로 여기서 유허지까지는 650미터라고 표시되어 있다. 길은 왼쪽 즉 동쪽 방향이다. 위쪽은 밭이고 아래쪽은 집과 밭. 이 주위의 밭에는 고구마가 조금 심어져 있다. 고구마 밭 옆에 조밭과 밀밭이 있다. 이 밭을 지나면 길은 오른쪽으로 꺾여 들어간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어느 정도 가면 이정표가 있다. 이 길에서 왼쪽으로 틀어야 한다. 유허지까지는 아직도 350미터 남았다. 여기서 2분 정도 걸어가면 갈림길이 있다. 왼쪽 내리막길은 초옥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 오르막길은 허묘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길은 좌우로 나누어지는데 왼쪽의 평지길은 물통 즉 해수담수화시설로 이어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계단길이 있는데 이 길이 허묘로 가는 길이다. 해수담수화시설은 지난 1998년에 만들어졌다. 말끔하게 잘 정돈된 돌계단 길이다. 쉽게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제법 가파르다. 다시 오른쪽으로 꺾여 올라간다. 꽤 가파른 층계 길 끝자락에 허묘 자리임을 알리는 표석이 놓여 있다. 그런데 표지석이 없다면 이곳이 허묘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다. 서포는 1692년 음력 4월 30일, 양력으로는 5월 30일 이승을 뜨게 된다. 개성으로 운구되기 전에 잠시 묻혔던 허묘다. 이곳에서는 ‘허묘’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서포의 ‘초장지’(初葬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포는 이 노도에서 3년 유배생활을 하다 숨졌다. 유배 생활의 흔적이 배어 있는 초옥터와 우물 가는 길로 들어선다. 갈림길에서 5분도 채 안 되어 닿는 곳에 알림판이 있다. 거리상으로는 25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돌이 깔린 길 주위로 동백나무가 많다. 얼마 가지 않아 나무들로 울타리를 친 초가집이 한 채 있다. 물론 초옥터에는 초가를 새로 지어 놓았으며 우람한 동백나무 세 그루가 이 집을 호위하는 듯했다.
그가 거처했다는 초막집은 동백나무 옆에 아담하게 서 있다. 고증에 의해서 새로 지은 집이라 세월의 흔적은 볼 수 없지만 바다가 확 트인 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방문을 열고 보아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왼쪽에는 부엌 아궁이에 솥 두 개만 있을 뿐이다. 서포가 유배 당시 거처하던 곳을 추정하고 지은 모형이다. 초옥 옆으로 산길 비슷한 길이 좁게 나 있다. 서포가 직접 팠다는 우물터로 가는 길이다. 우물은 지저분하다. 서포는 자기가 파 놓은 샘에서 물을 마시면서, 솔잎 피죽과 해초를 채취해 먹으며 근근이 연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득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 / 방장산과 봉래산에 못지않은 절승(絶勝)이 가까이 있도다 / ...남들은 나를 보고 신선이라 하겠구나’. 서포 김만중이 유배지인 노도에서 남긴 시 일부다. 기록에 의하면 김만중의 노도 유배는 ‘위리안치(圍籬安置)’, 즉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게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친 가장 무거운 벌이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서포 김만중보다 170년 전 남해도에 귀양 왔던 자암 김구는 이곳 노도를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한 점 신선의 섬(一點仙島)’이라고 했다. 이 우물터에서 앞을 바라보면 남해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마을이 바로 남해 ‘두모마을’이다. 벽련마을 옆에 움푹 들어간 전형적인 피항지다. 초옥에서 나와 포장도로를 타고 해안 쪽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면서 왼쪽을 바라보면 무성한 잡초와 나무들뿐이다. 집터 아래쪽 덤불 사이에 작은 돌샘이 하나 숨어 있어 이곳이 사람 살던 집터였음을 입증한다고 하는데 겉으로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노도는 아주 작은 섬으로, 농토도 물도 너무 부족하였다. 전기도 늦게 들어오고 도선도 마찬가지이다. 천상 유배의 섬이었다. 그 대신에 해산물이 풍부한 바다가 있어서 전문적으로 고기를 많이 잡아 가까운 여수에 내다 팔았다. 그래서 바다 건너 벽련마을의 논밭을 구입한 것이다. 벽련마을 대부분의 농토는 노도 사람들이 주인이란다.
노도를 떠나면서
노도는 섬 중의 섬이다. 지금도 멀지만 조선시대 한양에서 가장 먼 땅인 동시에 천혜의 유배지였던 그 남해에서도 다시 남쪽에 있는 노도가 서포의 유배지다. 몇 년 전까지도 도선이 없어서 어선을 이용해야 했던 섬, 영락없이 20세기에도 유배지나 다름없던 곳이다. 이런 평범하면서 조용한 오지마을인 노도가 5년 전부터 들썩이기 시작했다. 서포 김만중 유배지로, 유배 당시 모습을 재현하는 각종 시설들을 만들어 스토리텔링화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유배지까지 와서 바른 말을 했던 서포의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날씨도 너무 좋고 바다는 잔잔하였다. 당시의 흔적들이 조금 남아 있어 다행이다. 특히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지와 함께 들르는 필수 코스이다. 고도 중에서도 절해고도인 손바닥만 한 섬 노도에서 아버지 없이 자란 서포는 그 한을 사모곡에 담아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그 당시 한글은 언문이라 폄하하고 한문으로 쓴 글만을 문장으로 평가받던 시절에 순 한글체로 소설을 기록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다. 그보다도 존경스러운 일은 서포는 글을 쓰면서도 ‘정의’를 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에 서포에게 세 번의 유배 없이 계속 집권세력으로 남았다면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유배문학을 남겼을까? 그는 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한글소설문학의 선구자이며 문학계의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 되었다. ‘부드러움이 능사는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여기서 김만중의 강직한 성품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에 성공을 하려면 꼭 단정한 품행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는 법이다. 때로는 배짱과 모험과 단호함도 필요하다.
김만중(金萬重, 1637~1692)
국문학사를 빛내고 있는 한글소설 <구운몽>의 저자인 서포 김만중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동부승지로 있을 때인 1674년 인선왕후가 작고하여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한 이후 유배의 생활을 하게 된다. 다시 등용된 그는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으로 전직된 후 김수항이 아들 김창협의 비위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방환되었다. 그러나 박진규 · 이윤수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에 유배된 그는 3년 정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1692년(숙종 18)에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직언을 잘 하던 신하 김만중은 이처럼 그의 생애 중 세 번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강원도 금성과 평안도 선천에 이어 노도가 그의 마지막 유배지였다. <구운몽>은 그가 선천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작품이라고 하며, <사씨남정기>나 <윤씨행장(行狀)>, <서포만필> 등은 모두 이곳 노도에서 썼다고 전해진다.
서포 김만중 유배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남정기>라고도 하는데 확실한 창작 연대는 미상이나,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하다가 마침내 남해도로 유배, 배소에서도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므로, 1689년(숙종 15)에서 작자가 세상을 뜬 1692년(숙종 18) 사이에 창작했을 것으로 본다.
작자는 한국문학이 마땅히 한글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 한문소설을 배격하고 이 작품을 지었는데 이는 소설을 천시하던 당시에 참된 소설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 소설을 씀으로써 이후 고대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한국의 섬 - 경상남도·경상북도, 2021. 06. 15., 이재언)
2022-09-2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