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7:1~12)
노아의 홍수 대목을 묵상하는 요즘,
국지성 호우에 의한 수재가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단 며칠의 집중호우만으로도
기간시설이 잘 조성되었다는 도시지역에서
속수무책으로 피해가 발생하는데
40일 동안 어머어마한 양으로 쏟아부었다면
살아남을 것이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이번 국지성 호우의 집중 피해지역은 강남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와 권력이 집중된 곳이라고 하는데도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힘 앞에
무기력 한 것은 참 아이러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외제차를 손해 보거나
일부 집 수리 정도에서 대부분 끝나지만
정작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반지하나 부자 동네 강남에서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 존재했던 그늘과 같은 지역에서만
발생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험난한 난세에 선택을 받은 이유를 한 문장을 통해 발견한다.
하나님의 명령에,
"Noah did all that the Lord commanded him."
사실 냉철하게 이성적으로는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는 절대 쉽지 않다.
날도 맑은데 홍수가 오니 준비하라고 하니
많은 사람이 우스워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여겼을 것이다.
다수의 의견과 관성을 역류하는 것은
거의 멘탈이 붕괴되고 때로는 목숨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하는
심각한 것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또한 그 어마어마한 방주를 거의 노아 혼자 만들라고 하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 엄두가 나기는 했을까? 등 등.
거의 불가능하고도 회괴망측한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절대(!)순종했다.
노아라는 인간이 절대 완벽할 수 없어서
허점도 많고 부족함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런 노아를 전체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그러한 면은 있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결정적' 선택과 순종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걸려 있다.
그것은 외형적, 부수적인 부족함과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를
직접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아는 훌륭한 신앙인이라 칭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고 인정받는 것이다.
'나 비록 흔들리고 부족하나
내 인생의 향방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의 선하신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가? 혹여 나의 모든 세상의 것, 건강, 부, 가족과 친우를
잃는다해도 천국을 사모하며 인내하며 순종의 길을 멈춤 없이
따를 수 있는가?'
오늘 묵상에세이에서
어떤 목회자가 분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네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겠나?'라는 하나님의 물음에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이라면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해결받는 모습을 본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분함을 체념하는 순간이다.
어떻게? 모든 억울함과 분을 체념하고
인간의 모든 악하고 더러운 죄를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사랑과 희생'의 용광로에 집어 넣는 행위로.
둘째가 치킨게임을 하듯이
마음 속에서
자신의 분으로 질주하고 있다.
억울함과 잘못의 시시비비를 상식 선에서 따지는 정상적 행동과는 별도로
마음의 분으로 멈춤 없이 질주할 때
그 결과는 결국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수순에 이른다.
아들은 몸이 반응한다.
앞의 목회자도 자신의 분을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멈추지 않고
질주했더라면 그 나쁜 결과가 몸과 마음에서 폭발하여
자신과 남을 모두 해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의 억울함의 종국은
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내가 웅켜지고 질주해서는 안 된다.
의로우시고 확실한 해결자 되시는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의탁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장 선하신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당신께서 그렇게 해결하실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이생에서 내가 할 조처들을 갑자기 멈추거나
손을 놓아버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마음의 방향, 보이지 않은 궁극적 태도를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둘째를 지켜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