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있거라 나는간다 고향에서 서울 올 때 부르던 노래 이제 기차가 출발 했다 그리고 한강 다리를 지나게 되자 아주 옛날 내가 고향에서 중학교 졸업후 서울에 오던 일들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매질에 도망 왔으니 내나이 열여섯 얄일곱 어머니는 서른다섯 서른여섯 생각해보니 엄마가 진짜 젊은 나이였었다 엄마도 나도 참 지혜롭지는 못 했던것같다 무작정 엄마를 찿아오니 엄마는 용산역에서 전라도 아주머니들만 모아놓고 담양에서 도매로 떼어온 광주리 장사를 하는 분들이 함께 거처하는 곳 이었다 엄만 그곳에서 큰이모님 마을에사셨던 두암댁을 찿아 그곳으로 가셨고 나는 엄마를 찿아 그곳에 갔었다 식 생활은 모두 방안에 전기로 밥 짖는거 하나씩 주고 수돗물만 무료였다 끼니를 냄비에 쌀을 앉혀 밥을 해 나누고 용산 시장에서 야채거리를 모아 김치라고 할것도 없이 고추가루가 묻은듯 만듯 다행인것은 그곳에 왕초 대장님이 우리두암사돈 아주머니셨다 그래서 엄마에겐 우리사돈 우리사돈 하셨고 내게는 우리 사돈아가씨 사돈아가씨 하셨다 잠깐 나는 할일없이 놀아서는 안되어 벽보를 보고 찿아간 곳이 구로동 꽃만드는 회사였다 꽃을 만드는 양 만큼 돈을 받는 곳인데 다른 사람들은 천개 이천개 만드는데 나는 손이 느리고 몸도 허약하여 백 에서 이백개도 못한채 하루 이틀 그래도 한 삼개월은 한듯 싶다 역시 어머니도 바구리를 2~30개씩 포개어 이고 주먹밥 하나씩 만들어 가면 해가 넘어가기 전 제일 먼저 숙소로 오신다며 두암사돈이 놀렸던 기억이 난다 일찍 오셔서는 엄마는 용산 한강다리 앞에서 나를 기다리신다 나는 구로 노량진 그리고 한강다리 를 거쳐 해질 때마다 한강다리앞에서 집에 있는 동생들과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움과 걱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어머니도 나도 큰 돈을 못 번채 시간을 흘려 보내다가 지금으로 말하면 엘지 호남정유 대리점 전무님댁을 엄마가 광주리 팔려고 방문 하셨다가 그 새 부인의 권유로 그리 돌아다니며 고생말고 딸이랑 같이 집에 들어와 엄마는 집안일 도와주고 따르은 학교에 보내는것이 옳은일인듯 하다고 권유하여 엄마와 나는 그 집으로 갔다 정말 가족 모두가 좋은 분들이었다 그 전무님은 영화배우 전운 닮았고 본 부인은 정혜선 새 부인은 윤정희 그렇게 기억된다 딸 둘은 아주 튼튼했다 새 부인에겐 새살짜리 아들이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아들이 없는집으로 와 아들만 낳아주고 가려던것이 정이 들어 모두 함께 사는듯 했다 왕 힐머니도 계셨다 알고보니 본 부인이 도박으로 가산 을 모두 탕진 하다 싶이 하고 집을 나가버려 새부인이 그대로 눌러 살게 되었다 성숙 한 두 딸들과도 새 부인과 사이가 좋아보였었다 한번씩 본 부인이 찿아와 벌컥 집안을 뒤집어 놓을때만 빼놓고 당시 좋은 직장을 다니는듯 했다 나는 그곳에서 정란여자 상업전수학교 실력이 없어도 입학금만내면 가는 야간학교 에 발을 딛고 전무님 회사에 취업을했다 그때서부터 팔자가 피는가 했다 엄마도 그댁에서 꼬박꼬박 돈을 받아 적금을 하시고 나역시 월급을 적금 해서 그댁 전무님 운전기사님께 다 맡겨놓앟다 기사님은 이자까지 불려 주셨고 화곡동에 처음으로 아파트가 생길때 운전기사님이 우리돈으로도 아파트를 신청하라고 권하였다 어마랑 나는 꿈에 부풀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들 모두 데려와 함께 살 거라고 그리고 엄마는 어느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휴가를 내어 고향에 가셨다 나는 그냥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 는 언제 기사님께 통장도 챙겨 가셨었다 그리고 그 통장을 고스란히 아버지께 빼앗기고 서울로 오지도 못 하셨다 동생들 때문에... 나는 벌써 내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었다 어머니가 안 오시니 내가 그댁에 계속 있는게 마음을 불편해 하자 전무님이 회사 직영 주유소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은 남자들이 많이 밤으로 무서워 다시 숙식 제공 하는 직장을 찿아다니게 되었다 그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