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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김산 평전 1,730매를 탈고했습니다. 물론 초고입니다. 여기 에필로그 부분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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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1937년 김산의 아내 조아평은 출생 3개월이 된 아들 영광(永光)을 하북성 안국현에 있는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하북성 중부지역에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녀는 1939년 황경(黃敬)1)에게 남편의 안부를 물었고 “그는 벌써 죽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 뒤 부녀회의 주임 자리를 잃고 보통 학생이 되어 감시 속에 살았다. 1945년 일본군 점령지구 지하공작자의 지시로 장가구 시의 부녀회 주임에 임명되었으나 심사 후 탈락되었다. 그러나 그 뒤 북경에서 부녀간부학교 부교장, 중앙임업부 교육사부사장 등을 맡았다가 은퇴했으며 말년에 심장병을 앓다가 1989년에 사망했다.
8년 동안 외조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그의 아들 영광은 1944년 외가를 떠나 어머니가 있는 진찰기변구(晉察冀邊區)2)로 갔고 조아평은 다음해인 1945년 고(高) 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다. 아들 영광은 계부의 성을 갖게 되었다.
고영광은 영민하여 공부를 잘했다. 1949년 계부가 북경으로 전근을 가게 되고 영광은 수도 북경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1962년에는 천진의 남개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했는데 거기는 아버지 장지락이 도산 안창호의 천거로 잠시 입학했던 학교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하얼빈에서 일하다가 1978년 북경으로 옮겼다.
그가 아버지가 조선의 독립투사였다는 사실과 자신의 출생내력을 안 것은 문화혁명기간인 1960년대 말로 30세가 넘어서였다. 그 때 느닷없이 박해를 받았고 아버지로 인해 ‘교육이 필요한 청년’으로 분류되어 고생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 무렵 어머니와 나청 등 아버지의 동지들로부터 들었다. 그가 태어난 직후 편지로 써 보낸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는 호적이나 신분증에 쓰게 되어 있는 민족 표기를 조선족으로 바꿨으며 두 아들도 그렇게 호적에 조선족으로 등재했다.
1978년 국가기획위원회 과학기술사 개발처 처장으로 일하던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에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한 심의를 요청했고 1981년 극히 초보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그리고 1983년 중국공산당 중앙의 조직부로부터 공식적인 통보를 받았다.
김산에 대한 처형은 그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잘못 처리된 사건이다. 따라서
그에게 씌워진 일체의 무고한 죄명을 취소하는 동시에 그 명예를 회복하여 당적을 회 복한
다.
김산의 처형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중국 공산당 기록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나 공산당은 가족에게도 열람을 불허하고 있으며 고영광에게 통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공식화하지 않고 있다. 다만 조선족혁명열사전 제2집에 수록된 아래 기록이 유일한 공식문헌이다.
1938년 섬감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김산 동지의 경력을 심사했다. ‘반역자는 아닌가?’ ‘일본
의 특무는 아닌가?’ ‘트로츠키 파는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심사했지만 결론을 내릴 근
거가 없었다. 그래서 강생은 ‘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 동지는 무고하게 희
생되었다. 그 때 그는 33세였다.
김산의 유일한 혈육인 고영광은 2006년 광복절에 아버지의 조국 서울에 와서 조국이 아버지에게 주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는 올해 70세로, 중국 상무부의 전신인 대외무역경제합작부 과기국 부국장을 지내고 은퇴했다. 역시 중국 정부 관리인 부인 왕옥영(王玉榮)은 62세이며 34세와 32세 된 두 아들이 있다.
장지락이 스스로 첫사랑이라고 생각한 서간도 삼원포 교회 안동식 장로의 딸 안미삼은 경신참변 때 죽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이 처참하게 죽은 불운을 씻으려고 이름을 안지숙으로 바꿨으며 동명학교 교원인 조지청과 결혼해 길림에서 학교 교원 으로 일했다. 광복 후 남편과 함께 서울로 왔으며 1993년 당시 83세로 서울에 살았다.3)
한 때 그를 사랑했던 제숙영은 그를 평생 잊지 않았다. 해방 이후 그녀의 남편 장소(張蘇)4)를 시켜 그의 생사 여부를 알아보았고, 호석규(胡錫奎)5)에게 직접 물었다. 호석규는 처음에는 “지금 없다”고 말했으나 간곡하게 호소하자 “병사했다”고 대답해 그가 죽었음을 알았다. 그 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처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조직에서 처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김산과의 먼 옛날의 관계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 당 조직은 그녀에게 조직에서의 활동을 잠시 정지한다고 통고했다. 그녀는 항일전쟁 중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등영초*)와 함께 활동하기도 하여 그쪽에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 김산이 1983년에 아들 고영광의 청원으로 복권된 뒤 비로소 당 활동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와 가장 가까웠던 동지인 김성숙은 김산이 죽었다는 사실을 정률성으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박건웅과 함께 연안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상해에서 머물렀다. 그는 김산과 함께 조직했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이끌고 김약산이 이끈 민족혁명당, 유자명이 이끈 조선혁명자연맹과 통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이라는 연합전선을 결성했는데 뒷날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다.
이 조선의용대는 주력이 황하를 건너 홍군지역으로 이동했으나 지휘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통합되었다. 그는 이때 임시정부로 들어가 국무위원을 맡았고 광복 후 다른 국무위원들과 함께 남한으로 귀국했다. 두군혜와 두 아들을 중국에 두고 귀국한 그는 본처와 재결합했다.
해방 조국에서 그는 중도좌파로 정치일선에 나섰지만 이승만과 우파에 밀려 불우한 세월을 보냈으며 두 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1969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중태에 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 가는 극빈 속에 숨을 거두었다. 1982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아들들을 키운 두군혜는 1981년에 죽었다. 두 아들 두겸( *)과 두련( *)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으며 중국사회에서 성공했다.
김산에게 실천하는 혁명가의 진면목을 보여 준 오성륜은 1929년 상해에서 그와
헤어진 뒤 만주로 가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윈회 선전부장, 반석현 서기 등을 지내
고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2사 정치부주임으로 일했다. 1938년에는 동북
항일연군 제1로군 정치부주임 겸 군수처장을 지냈다. 그러나 1941년 1월 무송현
(撫松縣)에서 관동군에게 생포되어 친일로 변절해 만주국 치안부로 들어갔다. 열하
성 경무청 경위부로 일했으며, 일본 패망 뒤 북경 근교 승덕(承德)에서 한교동맹(韓
僑同盟) 위원장겸 조선 독립동맹 승덕시 책임자가 되었으나 팔로군이 진주한 뒤 체
포되었다. 1947년 임서(林西)에서 사망했다. 일제 패망 직후, 연안에 머물다가 만
주 로 진군한 조선의용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그를 몹시 아꼈던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김성숙과 더불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가 조선의용대로 발전시키고 대장이 되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홍군지역으로 이동한 뒤 지휘부 병력을 이끌고 광복군과 통합, 광복군 부사령과 임정 군무부장을 맡았다. 남한으로 귀국했으나 중도좌파에게 탄압이 가해지자 월북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내고 숙청당해 1958년에 사망했다.
그를 선배이자 스승으로 생각하고 따랐던 정률성은 작곡가로 대성했다. 김산이 죽은 뒤에도 연안에 남아 지금 중국의 국가로 사용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작곡했다. 광복 후 북한으로 귀국해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했으며 1949년 개교한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으로 일했다. 1950년 중국으로 돌아가 활동하다가 1976년 사망했다.
그가 연안에서 만났던 청년, 헬렌 포스터 스노와의 만남에 여러 차례 동행했던 서휘는 광복 후 북한으로 귀국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의장 등 요직을 거쳤다. 그러나 1958년 연안파 종파사건으로 일신이 위태해지자 중국으로 탈출해 여생을 보냈다.
중국인 동지로서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나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북경시 정치협상위원회 부주임, 시회과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수년 전 죽을 때까지 책상 중앙에 김산의 사진을 모셔 놓고 살았다.
김산의 생애를 햇빛 속에 드러낸 사람들 중 가장 공이 큰 사람은 당연히 그를 황토고원에서 찾아내 인터뷰를 하고 책으로 펴낸 헬렌 포스터 스노일 것이다. 그녀는 김산과 인터뷰한 노트 일곱 권을 들고 1937년 말 연안을 떠나 서안으로 갔으며 거기서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행방불명된 것으로 판단하고 그녀를 찾으러 온 남편 에드거 스노와 만났다. 그녀는 1939년에 필리핀의 바기오(Bagio) 컨트리클럽에서 김산의 이야기를 집필했으며 1941년 펄 벅(Pearl. S. Buck)이 경영하던 더 존데이 컴퍼니(The John Day Company)에서 영문판 「Song of Ariran-The Life Story of Korean Rabel, by Kim San and Nym Wales」를 출간해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와 공동 저자로 책을 내겠다는 약속도 물론 지켰다.
그녀는 1945년 2차 대전 승전 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뉴잉글랜드 주의 작은 도시 메디슨에 정착했다. 1949년 남편 에드거 스노와 이혼한 뒤에도 이곳에서 소설을 쓰며 살았다. 그녀는 김산이 처형당해 죽은 것을 말년에야 알았으며 1997년 메디슨 시에서 사망했다.
감산의 불꽃같은 생애를 재조명하고 복원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중 가장 큰 공로자는 서울의 동녘출판사 이건복(李鍵馥) 사장일 것이다. 친구인 조우화(가명)가 내민 번역 원고를 읽어본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전율을 맛보았다고 한 인터뷰에서 술회했다. 공산주의 항일운동가의 전기 출간, 그것은 분단모순이 심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1980년대 초반에는 그야말로 ‘감옥 문이 훤히 보이는’ 일이었는데도 ‘내고 뛴다’는 각오를 출간을 감행했다. 이미 영문판과 일본어판이 국내에 들어와 있었고 1946년에 서울의 월간 종합잡지 신천지가 한국어판을 연재한 바 있지만 넓게 파급되지는 못했다. 그의 결심 때문에 비운에 찬 독립투사의 모습이 수많은 독자의 가슴을 적셨던 것이다. 그는 그 뒤에도 보충서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 그 후를 냈다.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은 1987년 헬렌 포스터 스노를 찾아가 인터뷰해 이 책에 쓰지 못한 것들을 세상에 펼쳐 놓았으며, 미즈노 나오끼와 함께 아리랑의 노래 각서를 공동 저술해 이 책에 대한 충실한 해제를 이룩했다. 북경 중국중앙공산당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던 최용수는 김산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다. 김산에 대한 1차 자료 대부분은 그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밖에 임영태 ․ 백선기 ․ 홍정선 ․ 한홍구 ․ 장세윤 등 연구가들은 자료들을 체계 있게 정리하고 분석했다.
김산은 비운의 최후를 맞았지만 그만큼 연구가들의 주목을 받고 독자의 사랑을 받은 독립투사는 거의 없다. 죽음밖에는 아무것도 나를 좌절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던 김산. 조국은 분단되어 있지만 지금 그의 영혼은 행복할 것이다.----끝
1)1911년 절강성 출생으로 국민당 고위간부가 백부였으나 1935년 화북학생운동에 참가했다. 건국
후 제1기계공업부장 등 고위직을 지냈다.
2)산서, 차하르, 하북을 하나로 묶은 중국 홍군의 항일근거지. 3)김정남, 「김산의 첫사랑」, 길림성 민족사무위원회, 장백산, 1993. 2. 104~106쪽. 4)1901년 하북성 출신으로 1927년에 중공당에 가입, 북경, 장가구 지역에서 지하 활동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전인대상무위원회위원, 최고인민검찰원부검찰장을 지냈다.
5)1896년 호북성 출신으로 1925년 공산당에 입당해 북경시위원회 서기로 있다가 5년간 투옥됐다.그 뒤 공산당 열하성(熱河省)위윈회 서기를 지내고, 건국 후 인민대학 부학장을 역임했다.
첫댓글 우리가 죽은 후 누군가가 "지금 그의 영혼은 행복할 것이다"라고 써준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밤입니다. 몇 번이고 입속으로 중얼거려 봅니다. 지금 그의 영혼은 행복할 것이다. 그의 영혼은 행복할 것이다......
놀랍고 감동스럽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열정. 건강하시죠?
불꽃같은 생애를 산 분이군요. 읽어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