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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시시한 논쟁 - 버트란드 러셀(4)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와 끝났을 때인 20년 후, 러셀은 미국의 군사정책을 지지했다. 그런데 이런 지지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커져만 가는 혐오와 동시에 일어났다.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1950년대 말에 그는 크로셰이-윌리엄스에게 편지를 썼다. “미국은 추잡해. 공화당원들은 멍청할 뿐 아니라 못되기까지 했다는 말이 나돌고 있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경찰국가의 분위기를 연구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얘기했네….나는 다음 5월에 제3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는 조지프 매카시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말콤 머거리지와 내기를 했다(러셀은 매카시가 사망했을 때 돈을 내놔야만 했다). 러셀이 수소 폭탄 반대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너무나 불합리해지기 시작한 그는 반미주의는 죽을 때까지 그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는 케네디 암살에 대한 유치한 음모 이론을 개발했다. 그리고는 수소 폭탄 문제에 따분해진 그 -러셀의 주의 집중 시간은 톨스토이처럼 꽤나 짧았다-는 베트남으로 관심을 돌려서 미국이 베트남에서 한 행동에 비난을 퍼붓는 세계적인 운동을 조직했다.
비서 쇤먼으로부터 정보를 받은 러셀은 너무나 터무니없이 날조된 이야기에 쉽게 빠져드는 희생자로 전락했다. 50년 전에 그는 연합국이 전쟁의 열기를 높이기 위해 독일이 벨기에에서 저지른 극악무도한 이야기들을 활용하는 것을 개탄했다. 그는 저서 <전시의 정의>(1916)에서 그런 이야기들의 상당수가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려고 애썼다. 1960년대에 러셀은 훨씬 타당성이 떨어지는 베트남 이야기들을 유포시키고 신뢰성을 부여하는 데 자신의 명망을 활용했다. 전적으로 미국을 향한 분노를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방법은 “전쟁 범죄 법정”(1966-1967)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가 조직한 이 법정은 미국에 불리한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스톡홀롬에서 회의를 가졌다. 러셀은 선전 선동을 위해 아이작 도이처,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유고슬라비아 작가 블라디미르 데디예르(법정의 의장이었다), 멕시코의 전 대통령, 필리핀의 계관 시인 등과 같은 쉽사리 활용 가능한 지식인들을 포섭했다. 그렇지만 이 법정은 정의나 공정함 같은 최소한의 형식도 내세우지 못했다. 러셀 자신이 이 법정은 “전쟁 범죄자 존슨, 러스크, 맥나마라, 로지와 그들의 동료 범죄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소집한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철학가로서 러셀은 항상 단어들을 정확한 의미에 맞춰 세심히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에게 충고하는 조언자로서 그는 자신에게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는 잘못된 사건에 대한 분노를 다른 이들도 공유하도록 묘사하는 습관”이 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이것이 문제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에 전문적으로 헌신해 온, 이성의 돛대에 자신의 깃발을 올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들을 격분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격분해 봐야 소용도 없는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활용이 가능했을 사람들에게만 먹혀들었다. 러셀이(1951년에) 미국에서는 “문 뒤에서 엿듣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먼저 확인하고 정치적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제정신 가진 사람치고 그의 말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우리는 미국의 미치광이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1주일 내에 모두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선언했을 때, 그가 타격을 가한 대상은 케네디가 아니라 러셀 자신이었다. 베트남에 있는 미군들이 “나치만큼 악독하다”고 말했을 때, 러셀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러셀의 생애를 통틀어 볼 때, 러셀이 경구를 들려주는 사람일 때보다 일관된 의견을 가졌을 때가 훨씬 인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밝혀야 겠다. 그의 어록은 톨스토이의 어록보다 나을 것이 없다. “신사는 1년에 1,000파운드 이상을 벌어들이는 할아버지를 가진 사람이다.” “아프리카에서 민주적 정부가 활동하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을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기숙학교에 보내야만 한다.” 미국 어머니들은 “본능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결점이 있다. 사랑이라는 샘물은 바삭 말라버린 듯하다.” “여자로부터는 삶에 대한 과학적 태도를 좀처럼 배울 수 없다.”
마지막 문장은, 러셀의 생애 마지막 10년이 거의 전적으로 정치적 선언과 결부돼 있기는 했지만, 그도 한때는 “우애 결혼[피임과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험적 결혼]”, 자유연애, 이혼 개혁, 남녀공학과 같은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주제들에 대한 관점으로 악명이 높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러셀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여성의 인권에 대한 주장을 지지했으며, 여권 주창자들로부터 자세한 설명도 들었다. 그는 여성을 결혼 제도 안에서나 밖에서나 평등하게 대할 것을 요구했고, 진정한 윤리적 토대가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도덕관념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성적인 자유는 향유돼야 한다. 그는 “전통적으로 ‘미덕’으로 간주됐던 터부와, 인간을 희생시키는 교리들”을 혹평했다. 여성, 사회적 삶, 자식과 인간관계에 대한 러셀의 관점은 많은 점에서 셸리의 관점의 반복이다. 실제로 러셀은 셸리에게 특히 헌신적이었다. 그는 삶의 대한 자신의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한 시로 셸리의 시를 꼽았다. 그는 셸리가 1812-1813년에 공동체를 결성하려고 노력했던 웨일스 지방에 거주했고, 그의 저택 플라스 펜린은 포트매덕 강어귀에 셸리의 친구 매덕스를 위한 저책을 지었던 건축가의 작품이다.
그런데 여성을 대하는 러셀의 실제 행동은, 셸리와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 내세운 원칙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우며 관대한 미국인 퀘이커 교도였던 러셀의 첫 아내 앨리스는, 셸리의 아내 해리엇이 그랬던 것처럼 남편의 커져만 가는 바람기의 희생자였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듯이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러셀은 20대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섹스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견지했다. 2대 백작인 형 프랭크가 첫 아내를 버리고 이혼과 재혼을 한 1900년에 러셀은 새로운 형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만찬에 참석한 프랭크에게 새 여자를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충고했다(프랭크는 나중에 중혼죄로 하원 재판정에 고발당했다). 그런데 러셀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앞선 시대 사람인 빅토르 위고처럼 변해 버렸다. 더욱 호색적이 됐고 사회의 규범을 따르는 것이 편리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규범을 따르려 들지 않게 됐다.
앨리스는 결혼 16년째인 1911년 3월 19일에 러셀의 아내 자리에서 효과적으로 떠밀려 나갔다. 이때 러셀은 “블룸즈버리의 호스티스”인 오톨라인 모렐 부인이 거주하는 베드포드 광장 44번가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녀의 남편 필립이 예기치 않게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게 된 러셀은 그녀와 사랑을 나눴다. 러셀의 설명에 따르면, 그날 밤 오톨라인 부인과 “완전한 관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앨리스를 더나기”로 결심하고는 오톨라인 부인이 “필립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모렐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는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모렐의 남편이 “우리 둘 다를 죽일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하룻밤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대가는 치를 용의가” 있었다. 러셀은 앨리스에게 즉시 그 얘기를 꺼냈다. 앨리스는 “벌컥 화를 냈고, 오톨라인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이혼을 하겠다고 말햇다.” 몇 차례 말다툼을 벌인 후, 러셀은 그녀가 협박한 대로 한다면 “나는 그녀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서 자살을 해야만 한다”고 “단호하게” 말햇다. 그 결과 “앨리스는 분노를 참기 어려워햇다. 그녀가 퍼붓는 몇 시간 동안의 폭풍이 지나간 후, 나는 조카에게 로크의 철학을 강의했다.”
러셀의 이기적인 설명은 앨리스의 실제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엄청난 자제력과 온화함, 신심에서 우러난 사랑으로 남편을 대햇고, 러셀이 오톨라인 부인과 계속 바람을 피울 수 있도록 (공중도덕을 지킨다는 규범에 따라 모렐의 남편은 아내의 불륜을 묵인했다) 집을 떠나서 오빠와 같이 살겠다는 데 합의햇으며, 1920년 5월가지는 이혼을 미뤘다. 그녀는 남편을 계속 사랑했다. 트리니티 칼리지가 러셀의 연구원 자격을 박탈했을 때, 그녀는 러셀에게 편지를 썼다. “제게 100파운드가 있어요. 재무부 채권에 투자하려고 모아 둔 거지만, 그 돈을 당신께 드리겠어요. 제가 걱정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모든 박해가 당신의 수입에 큰 지장을 줄까 봐 걱정되네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녀는 말했다. “매일같이 너무나 크게 슬퍼하면서 당신을 생각해요. 그리고 밤마다 당신의 꿈을 꿔요.” 러셀은 1950년이 될 때까지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
앨리스와 결별하는 과정에는 거짓과 속임수, 위선이 무척이나 많이 개입됐다. 러셀은 오톨라인 부인과 은밀히 만나는 동안 정체를 감추기 위해 한동안 수염을 면도하기도 했다. 러셀의 친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나서는 충격을 받았다. 늘 그렇게 진실하고 개방적인 주장을 펼치던 러셀이 그런 짓을 하다니, 러셀은 이 에피소드로부터 성적으로 혼란스러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톨라인 부인과 맺은 불륜은 만족스럽지 않은 것으로 판명됐다. 러셀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내가 농루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이썼다. 농루오 인해 내 입 냄새는 무척이나 불쾌해졌는데, 나는 그런 사실도 몰랐다. 그녀는 그렇다는 얘기를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식어 버렸다. 1913년에 알프스에서 “정신분석학자의 아내”를 만난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오톨라인 부인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애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여자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녀의 반감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러셀은 “그녀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어서 그는 1914년에 시카고에서 젊은 아가씨와 남부끄러운 관계를 맺었다. 헬렌 더들리는 러셀이 강연하는 동안 머물러 있던 저명한 산부인과 의사의 네 자매 중 한 명이었다. 러셀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그녀의 부모 집에서 이틀 밤을 보냈는데, 두 번째 밤은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녀의 다른 세 자매는 부모님이 다가올 경우 경고를 해 주기 위해 보초를 섰다.” 이혼 수속 중이던 러셀은 그녀가 그해 여름에 영국에 와서 공개적으로 자신과 동거해야 한다면서 일을 꾸몄다. 그는 오톨라인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밝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사이에 그가 입 냄새를 치료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톨라인 부인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다. 여하튼 헬렌 더들리가 런던에 도착한 1914년 8월에는 선전 포고가 있었고, 전쟁에 반대하기로 결심한 러셀은 “개인적인 스캔들로 내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스캔들은 나의 발언의 권위를 떨어뜨릴 것이다” 그래서 그는 헬렌에게 둘만의 아기자기한 계획은 끝이 났다고 마랬다. “가끔씩 그녀와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전쟁은 “그녀를 향한 내 열정을 죽여 버렸고, 나는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희귀한 질병의 희생자였다. 그 병은 처음에는 그녀를 마비시켰고, 그다음에는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것으로 헬렌은 끝이었다.
사실, 러셀은 그 사이에 다른 애인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콘스탄스 맬러슨은 콜레트 오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사교계 여자였다. 두 사람은 1915년에 만났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들은 “침대로 직행하지는 않았다”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반전론자였다. 두 사람이 처음 섹스를 하는 동안 “우리는 갑자기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추잡한 승리의 함성을 들었다. 침대에서 튀어나간 나는 체펠린 비행선이 화염에 싸여 추락하는 것을 봤다. 용감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거리에서 승리의 함성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그 순간 내게는 콜레트의 사랑이 도피처였다. 탈출이 불가능한 잔인함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으면서 느끼게 된 고뇌에 찬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처였다.”
러셀은 얼마 안 있어 고뇌에 찬 고통을 이겨냈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콘스탄스 부인을 잔인하게 대했다. 콘스탄스 부인은 오톨라인 부인과 러셀을 공유하는 것을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두 여자는 1주일 동안 번갈아가며 그를 방문했다. 콘스탄스 부인이 이해한 바에 따르면, 오톨라인 부인은 현재의 남편과 결혼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러셀이 이혼했을 때에도 그의 애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 토대 위에서, 그녀는 1920년 5월에 러셀이 이혼 가(假)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증거”를 제공해 줬다. 그런데 러셀은 이제 또 다른 여성인 무척이나 젊고 자유분방한 페미니스트 도라 블랙에게 빠져들어 임신을 시켰다. 도라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부정했기 때문에 결혼할 의향이 없었다. 그렇지만 “내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기를 바라지 않았던 러셀은 결혼을 고집했고, 출산을 하기 “6주일 전에” 식을 올리게 됐다. 따라서 콘스탄스 부보인 내버려졌고, 도라는 그녀가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결혼”이라고 부른 것에 강제로 편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