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로 인해 내 가정은 파괴되고
증 언 자 : 박성수(남)
생년월일 : 1937.(당시 나이 43세)
직 업 : 페인트사(현재 페인트사)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5월 19일 가톨릭센터 뒤 미도주차장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당하고 조선대로 끌려가 그날 저녁 풀려났다.
해군본부 근무시절 4·19를 맞이하다
나는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스무 마지기 정도의 농사를 짓고 있었으므로 그리 어려운 살림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 나이 열두 살 때 갑자기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집안 사정은 예전과 달라졌다.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을 따라 열여덟 살에 광주로 올라와 모자공장에 다녔다. 그 공장에서는 조선대학교 학생들의 칠각 모자를 만들었다.
나이 스무 살이 되어 해군에 자진 입대했다. 처음에는 해군 함정을 타다가 해군본부 의장대로 가서 근무했다. 해군본부 근무시절 4·19를 맞이했다. 자유당 부정선거 항의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우리 부대는 동대문 근처에 있어서 동대문에 있는 중앙전신전화국 앞에서 근무를 했다. 명륜동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무섭다고 하면서 나더러 바래다달라고 하여 근무지를 이탈하면서까지 집에 데려다준 일도 있다.
1960년 11월 제대하여 고향인 보성으로 가서 농사를 짓다가 도시에 나가 개인사업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논 중에서 일부를 팔아 다시 광주로 왔다. 군입대 전에 모자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광주모자점'을 차렸다. 그러나 사업 경험이 없어 계속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충장로 파출소 근처에 있는 양품점 지배인으로 취직했다. 그곳에서 1년여를 근무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 두고 말았다. 다시 금남로 4가에 있던 광성건재사에 취직하여 착실하게 근무했다.
그 후 어느 정도 재력도 확보되고 경험을 쌓기도 해서 1970년에 광남건재사를 했다. 2년간 운영했으나 장사가 잘 되지않아 그만두고 페인트 상회 지배인으로 들어가 3년 정도 일했다. 1978년에 그래도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 중흥동에 신진페인트사를 차렸다.
1980년 1월부터 5월까지 도청내 페인트 칠을 부분적으로 하청받아 일하고 있었다.
5월 18일은 전남대학교 후문 쪽에 새로 지은 건물 4동을 맡아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낮 12시경부터 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 학생들을 7, 8명의 계엄군이 잡아 웃옷을 벗겨 꿇어앉혀 놓고 머리를 처박게 한 후 진압봉으로 머리, 팔, 다리 할 것 없이 때리는 광경을 보았다. 더 이상 그 자리에서 볼 수도 없고 마음이 뒤숭숭하여 페인트 칠을 그만두고, 시내 쪽은 어떤가 궁금하여 시내로 나갔다. 시내도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안 식구들이 걱정되어 전화를 해보니 도청 직원이 전화를 했는데 수성색소 두 드럼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수성색소를 시위 진압중 시위대에게 뿌리기 위해서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식구들에게 수성색소를 도청에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계엄군들이 시내에 배치되어 있고, 학생,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맞고 있는 이러저러한 광경들이 보기 싫어 친구들과 증심사에 올라가 통닭에 술을 마시고 내려 왔다.
이성을 잃은 계엄군의 만행
5월 19일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하였다.
오후가 되자 어제 일들을 주위 사람들이 심상치 않게 이야기하여 확인 삼아 금남로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오후 3시경 가톨릭센터 근처에 도착해 보니 학생,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생 몇명이 가톨릭센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계엄군이 쫓아 들어가 가톨릭센터 안에서 계엄군과 시민, 학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조금 후 가톨릭센터 3층 정도의 높이에서 계엄군 한 명이 뛰어내리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계엄군들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오는 바람에 시민들은 무질서하게 여기저기로 도망을 갔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가톨릭센터 뒤 미도주차장으로 도망을 갔다. 계엄군 1개 소대 병력이 주차장까지 쫓아 들어왔다.
착검을 한 계엄군들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듯한 어린 학생을 끄집어내더니 무자비하게 그 학생의 등을 푹푹 찔렀다. 자식같은 어린 학생을, 그것도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사람을 그렇게 참혹하게 칼로 찌르는 것을 본 나는 너무 무서운 나머지 무의식중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 계엄군이 나를 가리키며 오라고 하였다. 심장이 멎는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혔으나 떨리는 두 발로 계엄군 앞에 다가섰다. 갑자기 곤봉으로 내리치고 발로 차는 등 그들은 나를 막무가내로 때렸다.
주차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리고 난 뒤에 사람들을 굴비 엮듯이 포승으로 묶어 광주시민관(현 한미쇼핑 자리) 앞에 있던 두 대의 군용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갔다. 내가 탄 트럭에는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잠시 후 도착해 보니 거기는 계엄군들이 연병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조선대학교 체육관 앞이었다.
체육관 앞에 도착한 후 트럭에서 내려 점호를 했는데 트럭에 실려온 사람들은 모두 45명이었다. 그중 40대가 넘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4명이었다.
19일 오후에는 가랑비가 유난히도 구슬프게 내리고 있었다. 계엄군에 연행되는 과정에서 군화발로, 진압봉으로 얻어맞은 곳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계엄군은 우리를 차가운 땅바닥에 꿇어앉혀 놓고는 시내 계엄군과 조선대 계엄군이 임무 교대를 할 때마다 군화발로 온몸을 차고 구타하였다. 어찌나 그 군화 발길질이 아팠던지....
조선대에서 풀려나
조선대 주둔 계엄군 중에는 중령이 두 사람 있었다. 그중 한 중령이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들 앞에 다가와서는 한참을 훑어보더니 '나 대위'라는 장교를 불러 어떻게 나이든 사람들이 네 명이나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나 대위는 나에게 와서 물어보았다.
"왜 나이든 사람이 연행되어 왔소?"
"나는 나이도 많이 먹고 제대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데모를 했겠소."
"왜 거짓말을 해요. 김대중이한테 돈을 얼마나 받고 데모를 했소."
"나는 모르오."
"김대중이한테 20만 원을 받고 데모를 하지 않았소?"
"나는 그런 일 없어요. 김대중이를 만난 적도 없소."
이런 승강이를 서너 번 정도 하고 있는 중에도 나의 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미도주차장에서, 그리고 조선대학교에 끌려와서 무수히 구타를 당한 관계로 엉덩이는 상할 대로 상해서 아픔이 말아니었다.
나와 나대위 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중령은 40세이 넘은 4명은 내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부축하여 겨우 일어섰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들만 걸어나간다면 또다시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나대위에게 데려다달라고 하니 조선대학교 앞 철로까지 데려다주었다.
몸도 쑤시고 나이 어린 계엄군에게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4명은 남광주 학동우체국 옆에 있는 대폿집에 들어가 술을 마셨는데 이때가 대략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을 것이다.
술집에서 다른 세 명은 별로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나는 글라스로 소주를 마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4명 중 한 사람은 나와 전부터 안면이 있는 목수 노정복 씨였다. 그는 조선대학교에서 풀려난 후 그 사실을 말하고 다녔다는 이유 하나로 유언비어 유포죄라는 혐의를 받아 다시 계엄군에게 붙들려가 한 달 이상 말못할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우리 4명은 술을 마신 후 화순 쪽에서 오는 택시를 타고 각자의 집 앞에서 내렸다. 나는 중흥동 가게 앞에서 내려 가게 문을 두드리고는 그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왔을 때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자 부축하여 방에 데리고 들어갔다. 눕히고 옷을 벗겨 보니 온몸이 상처투성이여서 온 집안 식구들이 울고 난리가 났었다 한다.
그 후 나는 계엄군에게 끌려가 맞았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까 두려워 말도 하지 못하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리는 통증을 술로 달래며 지내고 있었는데 동생이 와서 병원에 가보아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집안 동생 박치연의 소개로 22일 전남공고 앞에 있는 외과병원에서 X-Ray 촬영을 해보니 갈비뼈 7늑골 1하가 부러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 입원하려고 했으나 병원에는 이미 많은 시민,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여 치료받고 있어서 병실이 없었다. 그래서 깁스만 하고 약만 받아가지고 병원 문을 나섰다. 병원을 나서고 보니 병원 건물 옥상에 시민군인지 계엄군인지 확실히 기억할 순 없지만 총을 들고 누군가가 서 있었던 것 같다.
1980년 이후 계속적인 가정파탄
그 후 50여 일 동안 방안에서 단방약과 양약을 먹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1985년까지 중흥동에서 건재상을 계속하였으나 몸도 아프고 장사도 안 되고 하여 가게를 처분하였다. 생계가 어렵게 되자 아내는 나 몰래 전세 5백만 원을 주고 대인동에 여인숙을 얻어 광주여인숙이라는 이름의 숙박업을 시작하였다.
나는 인간적인 양심과 자식들의 교육상 대인동에서 여인숙을 한다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며 극구 말렸으나 아내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여인숙을 운영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아내와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아내는 나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자식들을 생각해서 이혼하지 말자고 얘기했지만 아내가 끈질기게 이혼을 요구하여 1987년에 이혼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형제들과 주위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화정동에 방을 얻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혼한 아내는 이혼 후 여인숙을 계속하면서 3남매를 데리고 살았으나 여인숙을 그만두면서 자식들은 내가 데리고 살게 되었다.
큰아들은 군대를 갔으나 1980년 5월 19일 사건 이후 계속적인 가정파탄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겪었는지 정신질환을 일으켜 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큰딸은 올해 대학에 합격하였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이고 막둥이는 얼마 전 가출하여 연락도 없는 상태이다.
1980년 이후 8년 정도는 그날의 악몽 때문에 경찰이든 군인이든 제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치가 떨렸다. 내가 1980년에 계엄군에게 잡혀가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혹시 누가 알까봐 무서움에 떨었으나 신문에 5·18 부상자와 사망자 신고를 받는다는 광고를 보고,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충고에 따라 1988년 1월 8일 부상자 신고를 하게 되었다.
작년에 시에서 보상금 3백만 원을 받아 현재의 전세방을 얻었다. 큰아들이 모델하우스 경비를 하여 받아오는 월급 15만 원과 내가 인부들을 데리고 페인트 칠을 하여 받은 돈으로 딸이 해주는 밥을 먹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그때 다쳤던 부위가 지금도 아프고 간염, 췌장 등의 합병증을 일으켜 지금까지 계속 기독교병원에 다니고 있다.
앞으로 빠른 시일 내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폭도로 몰렸던 광주 민주시민에 대한 명예회복,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위령탑 건립, 묘지의 성역화, 그리고 유가족, 부상자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허혜자)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