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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의 무장항쟁
증 언 자 : 김행주(남)
생년월일 : 1964. 4. 12(당시 나이 17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도로공사 매표원)
조사일시 : 1989. 1
참고사항 : 김행주 씨는 당시 날마다 일기를 썼고 그때 뿌려진 유인물도 모아 두었는데, 계속 방황하며 정착을 못하던 시기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면담자들과 달리 기억도 뚜렷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어했다.
개 요
1980년 당시 광주상고 야간 2학년생이었던 김행주 씨는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 참가하다 21일 시민군 차에 탑승, 무장했다. 다음날인 22일 교도소 부근에서 계엄군의 집중사격으로 부상을 당해 기독병원, 통합병원 그리고 상무대에 있다가 석방된 후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 후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1987년 8월 도로공사에 입사했다. 5·18 부상자회의 회원으로 참가하여 초창기 홍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길 가다가 얻어 터져
나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어려서부터 외가에서 자랐다. 외가는 강진군 도암면으로 그곳에서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광주로 유학하여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동안 학비와 모든 생활비는 외삼촌이 대주셨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는 일이 내게는 항상 큰 짐이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내 손으로 돈을 벌어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져 야간학교에 진학했다. 그것이 학비를 벌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낮에는 신문 돌리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달리 사회경험도 많았고 자립심도 강했다. 1980년에는 광주상고 2학년으로 '코리아 헤럴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광주시내 전역을 다니며 수금을 하는 것이었는데, 마침 사무실이 충장로에 있었기 때문에 5·18 기간에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목격했다.
나는 1979년 박정희가 죽었을 때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5·18 당시도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었다. 그저 내가 다니는 신문사와 학교, 그리고 휴게실 같은 곳에서 소일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연일 계속되는 시위는 단조로운 내 생활에 변화를 주었다. 시내는 연일 엄청난 시민들로 들끓었고, 나는 시내 수금을 다니면서 가끔 시내의 시위대열에 호기심으로 끼어 다녔다.
그날도 신문 수금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오전 10시 30분 경 서부경찰서 앞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붙들렸다. 내가 교련복을 입은 데다가 몸집이 커서 대학생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대위 계급장을 단 놈이 다짜고짜 몸수색을 하고 곤봉으로 두들겨팼다. 길 가다가 이유도 없이 그런 봉면을 당했지만 억울하고 분한 마음보다는 너무나 무서워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서부서 앞에는 나 외에도 서너 명의 청년이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면 웃통을 벗기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공수부대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어
"나는 고등학생이고 시위도 한 적도 없다. 그냥 길을 가는 도중에 아무 죄도 없이 잡혔다"
는 등의 말을 열심히 했다. 마침 친구가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친구는 중·고등학교를 나와 같이 다녔는데,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다가(무등양말 하청일을 하는데 사람이 없어 기계를 봐주다가) 손가락이 여러 개 잘렸었다. 친구와 그의 아버님이 나를 고등학생이라고 말해주어 그 자리에서 겨우 풀려났다.
그런 봉변을 당한 후에도 나는 수금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시위를 구경했다. 구경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내 어디서든지 시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보니 시내의 관공서 앞이나 경찰서 앞에는 공수부대가 서 있었다.
5월 19일 학교에 갔더니 휴교령이 내렸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때는 버스들이 시내에서 계속되는 시위 때문에 제 코스대로 다니지 못했다. 좁은 골목으로만 버스가 다니는 걸 보며 나는 다른 생각보다 운전사의 운전 솜씨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버스가 그렇게 골목으로만 엉금엉금 다니니 내려서 걸어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버스에서 내려 시내로 걸어나갔다.
시내에서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다녔다. 소방서 앞에 이르니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밀고 쫓기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나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후문 쪽에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대한극장 쪽으로 피해 오는데 대한극장 앞에서 사람들이, "방금 공수부대가 어떤 여자의 옆구리를 칼로 쑤셔서 병원으로 옮겼다." "여자의 유방을 칼로 도려냈다."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땅바닥에는 정말 여기저기 피가 떨어져 있었다. 피를 보니 몸서리가 쳐졌다. 새삼스럽게 공수부대에게 붙들려 이유없이 맞은 생각이 들면서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그렇게 두들겨팬 놈들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거리는 공수부대에 의해 막혀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두워진 후가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광경을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소방소 앞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다. 투석을 하며 군인들과 소방서 앞에서 대치하다가 금남로로 몰려가고 또 다시 소방서로 밀려오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공수부대가 최루탄을 쏘며 몰려오는데 분위기가 살벌했다. 순간 오싹하는 기분과 함께 두려운 생각이 확 들었다. 죽자사자 도망쳐서 어디고 숨는 것이 급선무였다. 소방서 건너편의 나무가 많은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집은 기계부품상이었다. 여자 둘과 남자 한 명이 함께 들어갔는데 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주인은 그 사람들을 자기 자식이라고 말할테니 나는 다락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공수부대원이 문을 두드렸고 다급해진 나는 제품이 쌓여 있는 다락으로 급히 올라갔다. 그곳은 제고품을 너무 오래 쌓아 놓아서 먼지가 수북했는데 그런 것은 아랑곳할 여유도 없었다. 주인은 나를 구석으로 숨기고 내 몸 위로 제품을 쌓아 주었다. 그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시간이 내게는 너무도 길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아 살며시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주인이 깜짝 놀라 밖에 계엄군이 지키고 있으니 빨리 들어가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다시 들어갔다가 또 못 견디고 나와 주인에게 밀려 다시 다락으로 숨기를 여러 차례 했다. 그러다가 숨이 막혀서 도저히 못 견디겠기에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소방서 앞 도로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도로를 한겹 덮씌운 듯 돌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버스와 인적이 없는 그 길이 너무 넓고 황량하게 보였다. '언제쯤이면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을까'하고 밑을 내려다보니 담 밑에 계엄군 이 붙어 있었다. 오줌을 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무심히 고개를 치켜든 계엄군과 눈이 마주쳤다. 놈은 나를 향해 무지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순간 '죽었구나' 싶어 제품창고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그때는 거리에서는 물론 집집마다 뒤져서 젊은이들을 잡아갔는데 웬일인지 그 계엄군은 나를 잡으러 오지 않았다. 붙잡힌 사람들은 계엄군의 군화발에 사정없이 짓이겨졌다. 그때 계엄군은 총에 대검을 꽂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집에 들어간 지 3-4시간이 지났을 때 거리는 잠잠해졌다. 살며시 나와 지나가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 아주머니와 같이 갔다. 그분들은 나를 아들이라고 하고 또 조카라고 하면서 보호해 주었다. 어떤 시민들은 일부러 계엄군 옆에 서 있다가 젊은 사람들을 잡아오면 자식이라고 말하거나 친척이라고 말해 구해 주려고도 했다. 길을 가는 도중 계엄군들이 계속 제지했으나 나는 그분들 덕택에 무사하게 그 거리를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분들과는 길이 달라 헤어졌지만 별일없이 집부근인 월산동 로터리까지 왔다. 동네 골목에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그때 백운동 까치고개 쪽에서 시위대열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그냥 들어왔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밖이 웅성웅성했다. 옥상에 올라가보니 대성국민학교 사거리에 엄청난 사람이 몰려 있었다. 밤이 되니 사람수가 낮과는 또 달랐다. 5·18 이후 지금까지 시내에서 집회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작은이모와 같이 구경을 하러 밖에 나갔다. 시위를 하러 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구경을 하러 나온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은 옆 사람과 낮에 본 시위 내용, 누가 구타당한 이야기, 현재의 정치상황, 그리고 전두환이 어쩌고 등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얘기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저 흥이 나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계속 거기 있으려고 했는데, 이모가 집으로 가자고 나를 잡아끌었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신문배달을 하는 친구 홍섭이를 만났다. 홍섭이는 내일부터 시내에 같이 나가자고 했다. 나도 친구들과 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그날 밤에 홍섭이와 나가고 싶었는데 이모가 절대 못나가게 했다. 밖에 못 나가니 잠이 안 왔다.
계엄군에게 빵과 우유를 사주던 시민들
5월 20일 백운동 친구들과 아침 일찍부터 시내로 나갔다. 혼자 다닐 때와는 달리 친구들과 다니니 더 재미있었는데, 그 친구들과는 그날 어디서 헤어졌는지 모르겠다. 시내 여기저기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돌도 던졌다. 아주머니들이 길거리에서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김밥을 나누어주고 있었고, 거리는 여기저기 최루탄이 터져 있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매웠다.
황금동 쪽으로 갔더니 술집 여자들이 세수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그 여자들을 보니 온 광주시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평소에는 술집 여자들이 낯설고 불결하게 생각되었는데 그렇게 작으나마 성의를 다해 마음을 나누는 그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따뜻한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를 한바퀴 돌고 오후에는 시위대 차에 탑승했다. 그날 오후는 몇 번 차에 탔다가 내렸다가 했는데 처음에는 집에 가기 위해 탔다. 하지만 시위대 차는 운전사가 운전하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차를 타고 시내를 돌다가 MBC 방송국 앞으로 갔다. 그때는 방송국이 불에 타기 전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도 사람들은 뜨거운 열기로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MBC 방송국 앞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시위대열 앞쪽에서 왜곡보도를 일삼는 MBC 방송국을 불태우자고 했다. 그 당시 방송에서는 시위를 소요, 난동이니 하면서 시내에 떠도는 모든 말은 폭도들이 일부러 지어낸 유언비어라고 보도했다. 광주시내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방송국에 대해 화가 나 있었고 아무도 방송을 믿지 않았다. 나도 그런 방송에는 화가 났지만 방송국은 우리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방송국을 태우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태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다른 몇 사람과 앞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방화를 못하도록 말렸다.
"방송국은 우리 재산이므로 방송국을 태우는 것은 우리 돈을 태우는 것입니다."
다행히 불은 나지 않았다. 그때쯤에는 계엄군이 많이 보이지 않았고 시민들이 엄청나게 몰려다녔다. 그렇게 MBC 방송국 앞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흐름에 밀려 다녔다. 구체적으로 어디를 다녔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몰려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한번은 조흥은행 앞 쪽 시위대열에 참가했다. 은행 앞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 시위대열과 대치하고 있던 군인들은 시민들의 수에 밀렸는지, 아니면 오랜 진압에 지쳤는지 지휘관이 진압을 포기한 것 같았다. 군인들이 은행 앞에 추레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요 며칠간 군인이라면 이가 갈리고 죽여도 시원찮을 것 같더니, 며칠 동안 식사도 하지 못하고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니 무섭고 미운 생각보다 안스럽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돈이 걷어졌다. 당시 군인들에게는 가게에서 물건조차 팔지 않을 때였다. 광주시민 전체가 군인이나 경찰을 죽일 놈들로 생각하며 똘똘 뭉쳤다는 생각이 든다. 모아진 돈으로 빵과 우유를 구해 나눠주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서서 돌과 최루탄으로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야 하는가. 그들도 우리의 형제이고 친구인데 말이다.' 정말 맛있게 빵을 먹는 군인들을 보고 있으니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 MBC 방송국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위가 격화되고 있구나 생각했지만 그날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집으로 들어갔다.
장갑차에 탄 청년의 처절한 죽음
5월 21일 아침에 MBC 방송국이 불에 탔다는 소문으로 동네가 술렁거렸다. 그날도 집에서는 못 나가게 했으나 혈기왕성한 나이에 가만히 집에 앉을 수가 없었다.
아침 10시쯤 집에서 나왔다. 도청 근방으로는 가볼 수가 없어서 유동 쪽 금남로로 나갔다. 거기서 시위대 차로 변한 트럭에 탑승하여 돌아다녔다.
점심 때가 지나 가톨릭센터 앞서에는 엄청난 시위군중이 도청을 향해 진군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도청은 막강한 요새처럼 보였지만 곧 탈환될 것 같았다. 사람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치를 떨고 있었고 그들을 광주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마음이 되어 있었다. 대열은 도청에서 공수들이 막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가톨릭센터타 앞부터 금남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사람들은 시위대 차가 오면 길을 터주었다. 나는 시위대 차를 타고 왔다가 계엄군의 발포 때문에 차가 앞으로 못 나가자 내렸다. 그때 시민들 사이에는 별말이 다 떠돌았다.
"계엄군이 변장하고 시민군들 사이에 끼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닌다. 현혹되지 말아라."
또 계엄군들의 무자비한 만행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돌았다. 어떤 얘기가 신빙성이 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그런 말들이 시민들의 군인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미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시체를 보고서도 대해 사람들이 시큰둥할 정도였다. 시민들은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그 자리에 그렇게 모인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자기 눈으로 모든 것을 확인한 뒤였다.
시민들은 죽어도 도청을 계엄군의 손에서 빼앗아야 한다는 각오와 결의에 차 있었다. 계속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훌라송을 불렀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가 물러나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끝날 것 같은 생각에 악을 쓰고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시위대열로는 계속 먹을 것을 든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지게에 먹을 것을 지고 오는 사람, 리어커에 싣고 오는 사람들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사람들은 손에 꼭 각목을 들거나 돌을 들고 계엄군에게 대항하여 싸우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광주시민 모두가 마음은 무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시민군에게는 총이 없었다. 몇몇 사람이 카빈 두세 정을 갖고 있었지만 총알이 없어 사용을 못하고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목포, 화순, 나주 쪽으로 총을 가지러 갔으니 금방 온다고도 하고 또 뒤쪽에서, "총이 오고 있다. 화순에서 총이 왔다."는 말도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차로 도청을 밀어버리자. 차를 타고 진군하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시위대열 안에서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그 장갑차는 위 뚜껑을 열고 그곳에 태극기를 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타고 있었다. 이 장갑차가 도청 앞 광장을 한바퀴 돌고 왔는데 분수대 쯤에서 M16이 불을 뿜었다. 총을 맞고 그 차가 내 앞에 와서 섰다.
M16 총알은 그 사람의 귀밑을 맞혔다. 턱이 완전히 처지면서 두개로 나뉘어져 버렸다. 그 사람은 장갑차 위 구멍에서 팔을 뒤로 하고 처져 있었는데, 위턱부터는 완전히 뒤로 제쳐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순간 아찔해져서 뒤로 몇 걸음을 물렀다.
지금까지 트럭이나 리어커에 싣고 다니던 시체들은 피가 말라 있었고 시체가 굳어 있어 실감이 덜 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구토가 치밀어오르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 뒤로 피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생겼다.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은 사람은 행복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피만 보아도 죽음이 생각나고 무서워졌다.
그때의 심정을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점심때가 지나 배가 고팠던 때였는데도 전혀 식욕을 느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김밥을 먹으라고 하도 권해 어쩔 수 없이 몇 입 우겨넣었다.
총 들고 지역방위에 나서
그 이후 충장로로 들어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사람들이 광주공원에 집결하라고 소리쳤다. 광주공원에 갔더니 그곳에는 총이 있었다. 21일부터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다녔다. 나에게 총을 가지러 갔다 오라고 했으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화순, 나주, 해남까지 총을 가지러 간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해남 군부대, 일신방직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밤이 되었다. 헬기는 여전히 위협적으로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다. 시민군들이 "6시 이후 돌아다니는 사람은 발포하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이미 계엄군들이 도청을 제외한 광주시내 전지역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광주시내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발포령을 내렸다. 나는 그때 광주공원에서 집이 멀지 않아 집에 가려고 그곳을 나왔다. 광주공원에서 구동시장까지 처마 밑으로만 숨어서 갔는데 그때가 5시 40분경이었다. 계속 공중에 서는 헬기가 선회하고 있었고, 아무래도 집에 도착하기 전에 6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전화를 했다. 집에서는 들어오라고 야단이었으나 집에 도착하기 전에 계엄군 총에 맞든지, 시민군의 6시 이후 발포령에 걸릴 것 같아 못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계엄군의 총에 맞느니 시민들과 함께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광주공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밤이 되니 가로등이 환하게 켜졌다. 옆사람이 카빈을 주며 가로등 때문에 헬기에 우리가 노출이 된다며 가로등을 쏴버리라고 했다. 광주공원에서 서현교회 쪽의 길가 가로등 2개를 총으로 쏘아 깨트렸다. 처음 쏴보는 총이었다.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조를 짜기 시작했다. 기동타격대는 아니었고 그 시초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우리는 질서를 지켰다. 각 조에 차와 총이 배당되었다. 내가 있던 조에는 버스가 배당되었다. 우리 조에게는 일신방직에 가서 거수자 색출을 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우리는 일신, 전남방직을 살피러 갔다.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더니 수위가 나왔다. 그렇게 정찰을 하러 천변도로로, 라이트를 끄고 서행으로 운전을 하며 카빈을 들고 창밖으로 바깥을 살피며 갔다. 그때 나는 군중심리로 그렇게 총을 들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본 시체와 도청 앞에서의 그 상황은 나의 행동에 자부심과 의무감까지 갖게 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화정동에도 내려갔다. 그때 통합병원에서는 시민군들이 계엄군과 대치중이었다. 통합병원 쪽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왔다. 공단입구에 서보니 어두운 달빛에도 송정리 쪽 도로에서 탱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도청 접수 소식에 사기충천
그래서 우리는 그쪽으로 가지 않고 시외곽을 돌아보기로 했다. 백운동 철도를 거쳐 화순 가는 길목으로 갔다. 그렇게 차를 타고 다니다가 도청 점거 소식을 들었다. 어둡고 추운 밤이었지만 이 소식은 우리의 사기를 충천시켜 주었고 우리는 모두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때는 너무 컴컴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동쯤에서 우리가 타고 있는 차 안에 LMG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차 안에서 누군가가 계엄군이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해서 그 산에 대고 LMG 1천5백 발을 공포탄으로 쏘았다. 물론 위협사격이었다.
시내를 그렇게 한바퀴 돌고 나니 새벽 2-3시쯤 되었다. 다시 집결지인 광주공원으로 돌아왔더니 사람들이 쉬라고 했다. 매우 피곤했다. 그때 우리 차에는 2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23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버스 유리가 다 깨져서 무척 추웠다. 그래도 유리창이 다 깨진 버스들은 거의 운전사 보호용 모래주머니를 부착했었다. 우리는 그 버스 안에서 구부리고 새우잠이라도 자야 했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누가 깨웠다. 그때가 새벽 6시쯤 되었나 보다.
날이 너무 추우니 유리창이 온전한 차로 옮기라고 했다. 우리가 옮긴 차는 중형 버스였는데 그 차로 14명쯤이 옮겼다. 그 차로 옮기고 조금 있으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7시쯤이었다. 누가 시내를 한번 돌아보자고 했다. 날씨가 아주 좋았다.
화순 쪽을 돌고 시내로 들어오는데 광주역 쪽으로 오니까 흠집도 없이 깨끗한 광주고속버스가 막 나가고 있었다. 선두차를 잡고 어디를 가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서울에서 차가 없어서 운행을 하지 못하고 있어 서울로 가야 된다며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서 의심없이 그냥 보내주었다. 그런데 차가 10대나 길게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차가 많은 줄 몰랐는데 그것을 보니 순간 그 차들이 계엄군을 실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서라고 소리쳤으나 그 차들은 호남도로 쪽으로 속력을 내어 도망 갔다. 우리는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차들은 고속버스였고 우리 차는 중형버스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교도소 앞에서 총에 맞아
우리들이 고속도로로 계속 쫓아가니 차들이 교도소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들은 서울 쪽이 아닌 부산 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 차가 죽기 살기로 도망가는 만큼 우리도 죽기 살기로 쫓아갔다. 갑자기 운전수가 "계엄군이다, 엎드려!"하고 악을 썼다. 논이 있는 둑 밑에 계엄군이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운전수의 악쓰는 소리를 듣고도 멍해 있었다. 밤을 거의 꼬박 새워 몹시 피곤한 데다 새벽녘에야 든 잠이 덜 깨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춥기도 하여 나는 버스 옆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멍청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렸더니 옆사람이 나를 끌어당겼다.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엎드려 있었다. 본능적으로 나도 엎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닥을 보니 김밥과 음료수, 달걀 등이 짓이겨져 쓰레기장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더러운 바닥에 그냥 엎드릴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옷을 새로 맞춰입은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엎드리지는 않아도 고개를 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마다 부착된 손잡이를 잡고 바깥에서 안 보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밖에서 보일 것 같아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쭈그리려고 허리를 막 굽히는데 총소리가 났다. 바닥을 뚫고 총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M16을 자동으로 놓고 갈기는 모양이었다. 계엄군들이 길보다 낮은 둑 밑에서 총을 쏘았기 때문에 총알이 차 밑면을 스치며 바닥으로 들어온 것이다. 운전사는 미친 듯이 운전을 하고 있었고, 차는 꽁지에 불이 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바닥을 보니 불꽃이 팍팍 튀었다. 앞사람 의자 밑에서 총알 인지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도 불꽃이 팍팍 튀고 있었다. 어쨌든 과속으로 달리는 차 속에서 순식간에 생긴 일이라 뭐가 뭔지 판별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동부주유소 못 미처 두암동 진입로에서 차가 멈췄을 때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경황에도 운전수가 무사한지 먼저 봐졌다. 차를 과속으로 몰아서인지 다행히 운전사는 무사했다. 차가 엉거주춤 섰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일어섰다. 누구 총 맞은 사람 없냐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얼핏 불빛이 튀길 때 왼쪽 손이 따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매를 걷어 손을 보니 엄지손가락이 뭉텅 나가고 그 자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손가락은 겨우 얇은 살갗으로 연결되어 달려 있었다. 그제야 아프다는 생각이 들면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뼈가 불거져 있었다. 왼쪽 다리도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바지를 유행에 맞춰 펑펑하게 입고 있었는데 바지 가랑이를 들추어보니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오른쪽도 마찬가지였다.
일어서지도 못하고 엎드려서 앞사람 어깨를 오른손으로 두들기니 쳐다봤다. 내가 다친 것 같다고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이 깜짝 놀라 돌아서서 상처를 보고 사람들에게 내가 다쳤다고 소리를 질렀다. 앞쪽에 있던 두사람이 지혈을 위해서 옷을 찢었다. 다리도 다친 것 같다고 말하니 또 옷을 찢어서 지혈을 해주었다.
여기저기 병원을 옮겨다니며
거기서 병원을 찾아 동신전문대 쪽으로 오는데, 두암동 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에 병원이 하나 있었다. 차를 세웠다. 부축을 하려고 해 혼자 가겠다고 했다. 팔꿈치로 손잡이를 짚고 승강구를 혼자 내려가다가 무릎이 꺾어졌다.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병원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이 사람 살리라고 울부짖으며 총으로 병원문을 두들겼다. 병원에서 들것을 들고 나와 안으로 데리고 가서 응급처치를 했다. 쉽게 제거를 할 수 있는 왼손에 박힌 총알을 빼고 약으로라도 응고를 시켜야겠다며 널판지를 대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
엑스레이를 찍고 수술을 해야 한다며 아무래도 손가락을 잘라야 될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나왔다. 여기서는 수술이 불가능하다며 적십자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던 지프를 세웠다. 옆사람들이 나를 들고 차에 태웠다. 병원까지 가는 동안 차가 몹시 뛰어 고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사람들은 병원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이리저리 편한 자세로 내 몸의 위치를 바꿔주었다. 밖에서 시민군들이 노래를 부르며 호위를 해주었다. 그것이 어찌나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는지 나는 무의식중에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적십자병원에서는 병실도 없고 수술할 사람이 너무 많다며 대학병원이나 기독교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데리고 간 사람들이 항의를 하다가 안 되겠든지 앞뒤에서 다시 호위를 하여 기독병원으로 갔다. 기독병원도 누울 자리가 없을 만큼 환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도 기독병원에서는 우선 누울 자리라도 마련을 해주려고 했다. 정형외과 진찰과장실 안 복도에 누웠다. 복도 끝에서 두번째 자리에 누워 있었다. 환자들이 계속 들어왔다. 내 옆에는 간호원 3명이 붙어서 끊임없이 몸의 위치를 옮겨주었다. 진통제를 계속 주었다. 시간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얼마쯤 있으니까 의사가 이모 이름을 대면서 아는 척을 했다. 집에서 알고 있으니 금방 올 거라고 안심하라고 했다. 출혈이 계속 되었고 붕대를 감은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마취제를 썼는지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 있으니 이모부가 오셨다. 21일날 집에 못 간다고 전화를 하고 그 이후 집과는 불통이었다.
그런데 적십자병원에 들렀을 때 학생증을 놓고 왔던 모양이다. 집으로 시체 확인을 하라고 두 번이나 전화가 오고 세 번이나 동사무소에서 찾아와 얼마나 놀랐든지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외할아버지와 중풍에 걸려 기동을 못 하시는 외할머니만 계시던 집에서는 너무 놀라 온 병원에 다 전화를 해본 모양이었다. 기독교병원에 전화를 하니 마취과장인 김영일 씨가 그런 연령에 비슷한 인상착의의 사람이 있다고 알려주어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큰이모부가 오셨다. 뭘 사왔으나 먹을 수가 없었다. 물이 정말 먹고 싶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잡고 통사정을 했으나 아무도 물을 주지 않았다. 전쟁영화를 보면 총을 맞은 사람한테는 물을 주지 않던 것이 생각났지만 갈증으로 나는 곧 미칠 지경이 되었다. 내가 어떻게나 애걸복걸 했던지 물을 한바께쓰라도 다 마실 것 같은 내게 의사에게 허락을 받고 왔다면서 우유로 한 모금씩 입만 축이라고 했다. 그때는 오른손과 입 밖에 못 움직였는데 오른손에 그나마 링게르 맞고 있어서 옆사람이 먹여주었다. 계속 우유를 조금씩 먹다가 결국 4개를 먹어버렸다. 배는 몹시 불렀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통증이 계속 심해졌다.
7발의 실탄 제거 수술
그 후 긴 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손은 신경, 동맥, 뼈가 나갔다고 했다. 겨우 껍데기로 손가락이 붙어 있어서 완치되려면 3년 정도 걸리겠다고 했다. 13주 진단이 내렸다. 손가락은 못 살릴 줄 알았으나 수술이 성공했다. 왼쪽 다리는 세 겹을 꿰맸다.
나는 손에 3방의 총알이 맞고 양쪽 다리에 4방을 맞아 혼자서 총알을 7발이나 맞은 것이다. 아직도 왼쪽 다리에는 총알이 하나 박혀 있다. 오른쪽 다리는 뼈를 다쳐 회복이 더뎠다. 손도 꿰맨 자국이 붙지 않아 꽤 애를 먹었다. 나를 부축해 왔던 사람들이 내가 엉거주춤하게 있지 않고 바닥에 엎드렸으면 그대로 심장에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장시간 수술 후 2병동 9호실의 회복실로 옮겼다. 그 병실은 1등실이었는데 2명이 있었다. 회복실에 와서 누워 있는데 소변이 막혀버렸다. 그런데 불편하게도 바로 같은 병실에 있던 장선호라는 사람이 의상실에서 일했는지 아가씨들이 많이 면회를 왔다. 그래서 침대에서 소변을 보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병원에서는 호스로 소변을 보게 해주었는데 그게 늘상 막혔다.
그 후 8병동에 있는 정형외과의 조용한 병실로 옮겼다. 그 병실은 2인용이었는데 4명이 썼다. 당시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이순근 씨와 현용식이라는 영암 사람, 그리고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전남대생 오용식 씨였다. 그 전남대생은 오른쪽 다리를 잘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거의 일반환자는 없었다. 항상 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한번에 13알까지 약을 먹고, 찔러볼 구멍이 없을 정도로 주사를 맞았다. 엄청난 환자로 인해 병원이 환자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큼 많은 약을 복용하고 주사를 맞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그 후 간호원실 앞 16호실로 옮겨 거기에서 6월 20일 퇴원할 때까지 있었다. 그 병실은 넓었고 6명까지 함께 있었다.
병실에서 합수부의 조사를 받고
그때가 27일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새벽에 LMG 소리가 벼락치듯 들려왔다. 계엄군들이 광주도청을 향해 진격하던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그 총소리에 병원에 있던 환자들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때는 침구도 없어서 환자들이 시트를 하나씩 덮고 있었다. 나는 몸이 불편해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내가 있던 병실은 기독교병원 옆 샛길을 바라보게 되어 있었고 옆에는 라디오를 켜두었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여자 목소리의 경고방송이 계속 나왔다. 그 목소리가 그렇게 귀에 거슬릴 수가 없었다. 모두 총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시트를 뒤집어썼다. 방림동 쪽 야산이었는지, 학동 건너서인지 총소리가 콩볶듯이 드르륵거렸다.
새벽 조용할 때라 총알 날아가는 소리까지 씽씽 들렸다. 총소리가 지독했다. 커튼도 없는 창문의 흔들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온 건물이 진동했다. 피웅피웅 총소리는 계속 났고,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수피아여고 담을 넘어 계엄군이 쫓아다니더라"는 얘기를 했다. 모든 사람들이 겁에 질려 떨었다. 여기 있으면 꼼짝없이 죽겠다 싶어 나는 침대를 복도로 끌어내주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침대는 낡아서 바퀴가 빠져 있었고 움직이지 않았다. 참다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덮고 있던 시트로 커튼을 만들어 달았다.
아침 나절이 되니 총소리가 잠잠해졌다. 도청이 함락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총소리가 나지 않으니 우선 살았다 싶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고 신경을 써서 극도로 피곤해 하루종일 잠을 잤다.
28, 29일쯤 합수부에서 나와 조서를 쓰라고 했다. 양다리가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조사를 받았다. 다리를 조금만 아래쪽으로 내려놓아도 피가 몰려 퉁퉁 부었다. 형사가 내 말을 받아썼는데 계속 유도심문을 했다. 나는 별의식 없이 사실대로 다 말을 했는데, 그때 명노근 교수님의 사모님이신 간호감독님이 옆에서 계속 꼬집으며 말을 꾸며서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때는 할말을 다 해버린 때였다. 이후 말을 돌려서 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 형사에 의해 조서가 다 꾸며진 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죄명은 교도소 탈취기도에 계엄포고령 위반, 불법 시위, 내란음모죄 등 7, 8가지나 되었다.
통합병원으로 후송
그 후 사회단체들이 위문을 왔다. 종교계 여성단체, 한국부인회 등 여러 단체가 와서 사진을 찍고 위문을 했다. 한참 부잡한 나이에 돌아다니는 일을 하다가 병원에 누워 있으려니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뼈를 상하지 않은 왼쪽 발로 밀면서 뒤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병원생활을 하고 있는데 6월 20일이 되었다. 병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간호감독이 일어나라고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옷을 입고 짐을 챙기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퇴원하라는 것이었다. 군부대로 후송을 시킨다고 했다. 나는 보호자도 없었고 챙길 짐도 별로 없었다. 주위 사람들은 계속 나를 안쓰러워하며 혀를 쯧쯧 차고 불쌍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내가 가면 맞아죽을 거라고 하며 뒤에서 울기도 했다. 뭔지 모르지만 눈물이 났다. 그 상황에서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어차피 닥친 일이라고 생각하며 갖고 있던 것들을 정리했다.
위문왔던 단체들이 주고 간 돈을 쓸 곳도 없으니 할아버지 오시면 전해주라고 하고 몇 가지 있던 짐도 놔두고 나왔다.
이동식 침대에 실려 일층 현관으로 내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쌌다. 그 동안 나를 많이 걱정해 주시던 의사 선생님, 서무과 직원들이 나를 가운데 두고 울면서 기도를 했다. 나는 가슴에 커다란 돌멩이가 얹혀 있는 것 같은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으라고 밥을 주는데 자갈을 씹는 것 같았다. 내가 밥을 못 넘기고 있으니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강제로 하나를 먹었는데 도저히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기독교병원 엠뷸런스를 탔다. 천변도로를 타고 사이렌을 울리며 가는데 차가 정말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이런 기분일까 싶고 정말 가기 싫었다. 그래서 차가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차 안에는 간호감독과 간호원이 같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몸이 아프니까 천천히 가자고 부탁을 했다. 그분들이 부탁을 하니 차를 천천히 모는 모양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커튼이 쳐진 창문 틈새로 밖을 보니 천변도로의 가로수의 가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광주천의 그 더러운 물이 나와는 상관없이 그냥 흐르고 있는 것까지 슬프게 보였다. 바깥 세상은 나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통합병원에는 눈 깜박할 사이에 도착했고, 간호원이 나를 넘기며 잘 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간 뒤 군인이 와서 옷을 갈아입혔다. 그때는 군인만 보면 무서웠다.
위생병이 통합병원 환자복으로 갈아입히더니 휠체어가 올라가는 계단으로 침대를 밀고 올라갔다. 경사진 곳이라서 올라가기가 힘들었는지 몸이 쿵쿵 부딪혀서 통증이 심해 천천히 올라가자고 했다. 병동에 올라가니 군기를 잡는다고 했다. 그 병실이 605병동이었는데 1백여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들어가기 전에는 2백 명 가까이 되었는데 많이 나갔다고 했다. 거기서 체온계를 꽂아주고 혈압을 재더니 주사를 놓았다.
휠체어를 타고 중상환자 수발에 나서
병실에 막 들어가니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한테 바깥 상황을 물어봤다. 그때 통합병원은 입구에 보초가 총을 들고 서 있었고 병동 입구와 면회장에도 총을 든 보초가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삼엄한 경비를 펴고 바깥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후가 되니 이모가 면회를 오셨다. 면회를 왔다며 나오라고 해서 면회를 시켜줄 줄 알고 밖을 내다보니 면회장이 어딘지를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얼굴도 못 보고 넣어준 빵과 우유를 받았다. 괜히 눈물이 나오고 빵이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단체에서 면회를 와 통닭이나 돈을 주고 가기도 했는데, 내가 들어갈 때쯤에는 그런 일도 없었는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나눠주었다. 이모는 2, 3일마다 한 번씩 면회를 왔다.
그날 오후가 되니 기독병원에서 처음에 같이 있었던, 정복철과 현용철을 포함해 3명이 기독병원에서 왔다. 정복철이라는 사람은 순천에서 지금 운전을 하고 있는데, 5·18 당시 장갑차에 타려다가 장갑차 윗문에 손이 끼어 완전이 바스라진 사람이다. 다리는 온전해서 걸어 들어왔다. 현용식은 대퇴부가 부러져 전신에 기브스를 하고 있었는데 이동식 침대에 실려왔다.
현용식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대변을 보는 일이나 잔심부름을 시켰다. 나도 힘들었지만 휠체어를 타고 가서 대변기를 대주는 등 수발을 해주었다. 그곳 위생병 중에 상고 선배를 하나 만나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편하게 지냈다. 처음에는 안쪽에 있었는데 면회장 가까이로 옮겨주었다.
2, 3일 뒤 2차로 사람들이 나갔다. 남은 사람이 얼마 안 되었다. 현용철 씨와 정복철 씨도 그때 나갔다. 그래서 빽빽하던 침대도 정리가 되고 휠체어가 남아 나한테 3개가 왔다. 나보다 상처가 더 심해서 아예 드러누운 박병준이라는, 다리를 자른 사람과 화순에 사는 신치호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휠체어를 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환자들은 별로 없고 교수님들 같은 사람만 남았다.
그 이후 할아버님이 면회를 오셨다. 그때는 선배가 침대를 면회장 가까운데로 옮겨주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면회장을 내다보니 유독 키가 크신 할아버지가 고개를 길게 빼고 내 쪽을 쳐다봤다. 반가와서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데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물이 나와 혼났다. 내가 어쩌다 저 늙으신 분을 이렇게 고생을 시키는가 싶어 말도 못 하고 손만 흔들었다. 그때는 유리창이 회전되며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개도 못 내밀고 보고 있는데 손수건을 꺼내서 자꾸 눈물을 닦으셨다. 그래서 얼른 가시라고 손짓을 했다.
할아버지가 김치하고 편지에다 돈을 넣어주고 갔다. 면회실에 그것을 찾으러 갔더니 경상도 헌병놈이 "니 나한테 얼마 줄끼고?" 했다. 할아버지가 5천 원을 넣어주셨는데 그걸 나눠주라는 소리였다. 괜히 경상도놈이면 미웠는데 이놈은 미운놈이 한술 더 떴다. 그래서 그 돈으로 세면도구가 없는 사람들한테 세면도구도 사서 나눠주고 담배도 나눠서 피웠다. 집에서는 몸보신을 해야 된다며 개고기, 쇠고기 같은 것을 졸여서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찜통에 쪄서 밥을 했는데 소화도 안 되고 반찬도 형편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곳에서 담배를 처음 배웠는데 무섭고 괴로운 그 상황에서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담배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어서 좋았다.
그때 특별히 내가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뭘 나눠준 것은 아니었고 없는 사람이 있으니까 같이 나눠주고 담배도 같이 피웠는데, 사람들이 나를 무척 좋아해 내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괴로운 장소에서도 웃고 지냈다.
정신병자가 된 고등학생
지금도 그곳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심묘섭이라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는데 키도 작고 귀엽게 생겼었다. 그는 이마가 쑥 들어갈 정도로 계엄군의 개머리판에 심하게 얻어맞아 정신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미친 짓을 하다가도 가끔 울면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많이 울렸다 .
우리를 괴롭혔던 것은 더운 날씨에 목욕을 못해서 생기는 피부병이었다. 옴을 비롯해서 피부병은 종류도 다양했다. 나도 신경성 습진에 걸려 무척 고생을 했다. 선배는 나를 일광욕도 시켜주고 1층으로 치료하러 가면 면회장까지도 데리고 가주기도 하고 기브스한 곳을 가리고 목욕도 시켜주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비해 고생을 덜 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시트를 줄로 연결하여 2층에서 탈출을 했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조서를 쓰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조사를 받으러 나갔다 오면 사람들이 얻어터져서 얼굴이 퉁퉁 붓고 피가 터져서 들어왔다. 그래서 누가 견디다 못해 탈출을 한 모양이다. 초비상이 걸렸고 담배가 금지되고 필기도구가 회수되었다. 부쩍 감시와 닥달이 심해진 것이다. 그래서 침대 밑을 찢고 담배를 숨겼다. 우리는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싶어서 욕을 많이 했다.
한번은 사람들이 저녁에 잠이 안와 뒤척거리는데, 경상도 일병놈이 "개새끼들, 잠 안 자나?"하며 악을 썼다. 사람들이 안그래도 낮에는 조서 쓰느라고 얻어 터지고 긴장해서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그렇게 밤에 일병놈까지 욕을 하니 갑자기 다들 화가 나버렸다. "이놈아, 너는 에미 애비도 없냐?"하며 싸움이 벌어졌다. 그게 얼마나 크게 번져버렸는지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그곳에는 운동권 사람이 많았고 분위기도 그렇게 살벌하지 않아 그런 시위가 가능했다. 그 후 대장이 와서 사과를 하고 진정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이런 것도 해봐야 하는구나 하고 웃었다.
하루는 저녁에 아는 군인에게 부탁해서 소주를 사다가 마셨다. 나는 당시 중환자여서 구타도 당하지 않고 군인들이 잘해줬다. 그곳에서는 하루에 두 번 호명을 했다. 구속이 되는 사람은 오전에 호명을 하고 석방되는 사람은 오후에 호명을 했다. 그래서 밤마다 내일 아침에 불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고 일부러 오전에 호명할 때 일어나 있지 않으려고 사람들이 늦게 잤다.
상무대 교회로
9월 3일이 되었다. 오전에 호명을 하는데 두 개로 나눠 불렀다. 하나는 병원으로 갈 명단과 또 하나는 상무대로 갈 명단이었다. 그런데 상무대로 갈 명단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때는 날마다 긴장해 지내는 것에 질려 차라리 이름을 부르니 자포자기 상태로 후련했다. 그래서 교도소로 가든지, 죽든지 될 대로 되라 하는 마음으로 대답을 했더니 짐을 챙기라고 했다. 기독병원에서 넘어올 때 환자복을 입고 왔으므로 나는 사제 옷이 없었다. 그래서 통합병원에서 나눠준 넝마 같은 군복을 입고, 내가 짚고 있던 목발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목발은 수량이 정해져 있어서 줄 수 없다고 했다. 선배에게 부탁을 해도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도착하면 보내주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목발 1개를 얻어 짚고 나갔다. 죽으러 가는지 살러 가는지도 모르는 처지에서 그걸 얻기 위해 이곳저곳에 통사 정을 했다.
군용 트럭에 실려 상무대로 갔다. 당시 문병란 선생님, 이덕후 씨 등 여러분과 함께 갔었는데 상무대 부근의 교회에 차를 세웠다. 교회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가더니 군기를 잡는다고 이것저것을 시켰다. 그리고 나서 확인명단을 부르는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 손을 들었더니 나는 여기 올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치호라는 사람이 오지 않았다며 대신 내가 온 모양이라고 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일단 목욕을 하라며 군인들 목욕탕으로 들여보냈다. 그때는 교회로 데리고 가면 석방이 된다는 말이 있었고, 게다가 오랜만에 물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다른 사람들도 어린애들처럼 물장구를 치며 목욕을 했다. 나도 씻으려고 갔다가 내가 기브스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났다. 이제는 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긴장이 풀려 있어 그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괜히 허탈해져서 씻지도 못하고 목발을 짚고 절둑거리고 나왔다. 교회 쪽으로 다시 모이니 사병들이 험하게 인상을 쓰며 욕을 하고 거칠게 다루었다. 장교가, "무섭게 다루지 마라. 이분들은 나가실 분이니 좋게 해라."고 했다. 교회가 좁으니 바깥에서 식사를 하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 환자라고 편하게 지내서 밥을 찾아먹는 훈련이 안 되어 있었다. 모두들 잽싸게 움직이는데 내가 가만히 있었더니 옆사람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밥을 나눠주는데 꽁보리밥에 위는 맹물이고 아래는 시커먼 데다가 두부가 두 쪽 가라앉아 있는 된장국을 주었다. 밥을 먹는데 돌이 계속 씹혔다. 어두운데서도 콩알만한 돌이 보였다. 일부러 넣었을 리도 없는 흙덩이까지 씹혔다. 낮에 밥도 안 먹어서 배가 고팠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에다 밥을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밥을 해봐서 쌀을 일줄 알아 국에다 밥을 일어 먹었다. 그 다음날부터 요령이 생겨서 그렇게 해먹었는데 그래도 돌이 씹혔다. 그렇게 2박 3일 동안 정신교육이랍시고 '지금까지 보고 들은 내용을 발설하지 말 것' 등을 교육받았다.
나올때에는 학생들은 보호자가 와서 각서를 썼다. 나는 외할아버지와 담임 선생님이 오셨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훈시를 하는데, 나는 죄목이 너무 많아서 주동자급이고, 그 래서 20년 징역을 살아야 되는데 학생이라서 선도의 차원으로 내준다며 군밤을 때렸다.
반강제적인 휴학
나와서 보니 동네에서는 내가 스타가 되어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 부근에서는 1명이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내가 그중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다들 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왔다며 반가워했다.
그 후 학교를 다니려고 했는데 수업일수가 부족하다며 휴학을 하라고 했다. 나는 휴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안그래도 호적이 늦게 되어 있어 애들하고 같이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휴학까지 하면 못 다닐 것 같았다. 애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며칠 쉬어서 친구들에게서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병문안을 왔던 친구들이 동정심으로 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깁스를 해서 거동이 불편했지만 학교를 가는데, 집에서도 휴학을 권유하고 학교에서는 반강제적으로 휴학을 시키려고 했다. 아마 정부나 교육청에서 무슨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하고 어영부영 집에서 놀았다. 그 사이 월산교 앞 대성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석방 후 병원을 찾아가니 상처를 보고 살아난 게 용하다며 의사들이 놀랐다. 그래서 그것이 신의 도움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기독교병원에서부터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신을 믿고 있었던 나는 목발을 짚고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광주에서는 영 할일이 없어 그해 가을에 시골로 내려갔다. 강진에서도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고 했다. 시골 애들이 축구하는데 따라다니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술을 배웠다. 갈증이 나는데 술을 마시니 통증도 잊을 수가 있어서 괜찮았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술을 마시게 됐다.
한번은 겨울에 마을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국민학교에서 놀다가 눈보라가 치고 너무 추워서 집으로 와야 했다. 친구하고 같이 오는데 바람은 차고 내가 목발을 짚고 걸음이 늦어서 급했던 모양인지 내 손을 잡고 뛰었다. 친구에게 끌려가면서 다리가 몹시 아팠지만 내가 뛸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 어떻게 보면 내 다리로 뛴 것도 아니고 기브스에 의지해 뛰었던 것인데도 말이다. 그때 당시 물리치료도 전혀 받지 못했고 왼손 엄지손가락의 신경이 죽어 종이 한 장도 못 들 정도여서 병신이 되나보다 하고 절망적인 상태였는데, 그때 내가 뛰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대견스러웠다는 생각이 난다.
불면증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겹쳐
시골집에는 동생과 어머님이 있었는데, 동생은 내가 죽을 줄 알았다가 살아 움직이니 무척 좋았던 모양이다. 내가 가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심하게 때리기도 했는데도 불편한 나의 수발을 군소리 없이 잘해주었다. 게다가 불면증이 있어서 내가 더 귀찮게 했는데도 동생은 짜증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리의 기브스 상태가 몹시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다리가 몹시 부은 상태에서 기브스를 해놓아서 부기가 빠지고 다리에 살이 빠지기 시작하니 다리와 기브스가 따로 놀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가 되었다. 더구나 간지러운 증세가 심해졌다. 그래서 뼈도 붙었으니 풀어야겠다 싶어 밤에 대톱을 가져다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이불 속에서 기브스의 석고를 잘랐다. 다 자르고 동생을 깨워서 기브스가 가렵고 귀찮아서 잘랐으니 닦아야겠다고 물을 데우라고 했다. 기브스를 잘라 놓고 보니 털이 5, 6센티미터 정도가 길어 있고 욕창이 약간씩 생겨 있었다. 간지러울 때마다 대나무를 깎아서 집어넣고 긁었더니 상처가 생긴 모양이다. 발바닥도 허물이 계속 벗겨졌다. 그러고는 내가 가지고 있던 붕대로 어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기브스 두께만큼 감았다. 그뒤부터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그 전에는 깁스 힘으로라도 걸어다녔는데 영 못 돌아다니게 되어서 엉덩이로 밀면서 다리를 끌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조금씩 운동을 하여 그래도 걸을 수 있게 되어 광주로 올라왔다.
광주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진교회 강신석 목사님이 교회신도들의 헌금을 모았다며 얼마의 돈을 주셨다. 기독병원에서도 부상이 심했던 사람들에게 보내주는 돈이라며 돈을 보내주셨다. 항상 고마운 분들이시다.
복학도 안 된 채 퇴학당해
시골에서 올라온 후 신학기가 시작되어 복학신청을 했더니 복학되기 전부터 학교 상담실에서 오라고 했다. 상담실에 가니, "요즘 어떻게 사는가. 그런 일에 이제 참가하지 마라."는 소리를 하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계속 불렀다. 처음에는 '나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가기 시작한 학교도 몸이 완치되지 않아 결석이 잦았다. 그 전에는 합기도 등의 운동을 해서 무척 건강했는데 몸도 약해져 버렸다.
학교에서는 교복 자율화로 교복이 바뀌었는지 복학을 하니 교복을 바꿔 입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 전의 교복을 그대로 입고 다녔다. 하루는 시험을 보고 있는데 기도부장 선생이 와서 교복을 보고 이게 뭐냐며 가랑이를 잡아챘다. 그만 바지가 쫙 나가버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교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문 앞 튀김집에 앉아 있는데 친구들이 나와서 들어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대충 시간만 떼우고 4교시가 끝났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이 폭발을 해버린 것이다. 나는 악에 받쳤다. 그래서 선생이 보이기만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결심을 하고 밖에 나가서 교복을 입고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고 나서 교문 앞에서 기다리니 교련선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왔다. 어디로 가나 보고 있었더니 학교 앞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무래도 나오지 않아 다방으로 올라갔다. 들어가서 할말이 있다고 했더니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시 나와서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들어가보니 어느 사이에 도망을 가버리고 없었다.
그 뒤로는 결석을 더 자주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몸이 안 좋아 학교에 못 가겠다고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은 선생이 복학처리가 안 돼 있으니 학교에 나올 필요없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학교에 다니고 싶어 상담실에까지 불려다니는 수모도 참았던 내가 철저하게 우롱을 당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몸도 아프고 심지어는 집에서 차비를 타는 것도 눈치가 보여 학교는 가기도 싫었다.
얼마 후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이 왔다. 퇴학처분이 되었다고 했다. 도대체 언제 복학이 되어 언제 잘렸는지 어이가 없었다. 담임에게 찾아갔더니 학원을 다녀서 검정고시를 보라는 말밖에 없었다. 그 뒤로 학교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검정고시 학원을 두어 달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친척집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정규학교도 아닌 학원을 다니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방탕아로 생활
학원도 중도에 그만두고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다가 새벽이 되어 버스가 클랙슨을 누르면 깨어나고, 그래도 잠이 덜 깨면 산에 가서 자기도 하는 생활을 몇 개월 했다. 계속 친구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건강은 엉망이 되었고 모든 것에 자포자기 하여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참 그렇게 생활을 하는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광주로 올라와보니 정말 초상이 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를 지극히 귀여워하시며 나를 막내 아들로까지 입적을 시키려 하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니, 산다는 게 허무했다. 갑자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무턱대고 광주로 올라왔다. 시내 막걸리홀에서 웨이터를 하기도 하며 돈을 벌었는데 어머님이 서울 작은아버지 집에 가서 사업을 배우고 일을 하라고 하셨다. 그때가 1982년 겨울이었다. 서울에서의 일은 내게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작은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싸우고 내려왔다.
허리가 아파도 산부인과로 가야 하다니
서울에서부터 아프기 시작한 허리가 집에 내려온 후 더 심해졌다.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병원에 갔다. 그때 우리 집은 영세민 2호로 급수가 매겨져 보험카드가 있었는데 그 카드는 지정된 병원을 순서대로 가야 했다. 1차로 지정된 병원인 강진읍내 병원에 갔다. 증세를 얘기했더니 젊은 의사가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그동안 병원에 질리도록 다녀 의사가 얘기하는 폼만 봐도 전문의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을 정도인데 아무래도 말하는 게 시원찮았다. 그래서 2차 병원으로 갈테니 소견서를 써주라고 했다. 그런데 병원을 나와서 보니 세상에 산부인과가 아닌가. 1차 병원이 산부인과라니 어이가 없었다. 2차로 지정된 도립병원을 가보려고 했는데 절차가 너무 복잡했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입만 벌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파서 비실거리는 모습도 한두 번이 아니고 식구들도 지겨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폼으로 광주에 올라왔다. 할 수 있는 일은 옛날에 해본 술집 웨이터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금동에 있는 술집에 들어갔다. 허리는 꾸부정하여 제대로 눕지도 못하는데 손님을 받고 홀 청소를 하며 지냈다. 몸은 불편했지만 그래도 집에 있으며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편했다. 그렇게 7개월을 허리디스크로 고생을 했다.
부상자회에 가입
나이를 먹어가니 친구들은 하나둘 군대에 갔다. 그러다 부상자 모임에서 연락이 왔다. 이미 초창기의 모임 준비에 함께 참가했었는데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1차 모임이 성사됐던 모양이다.
2차 모임을 가톨릭센터에서 가졌다. 그래서 1980년 당시 척추가 마비된 김용대 씨를 만났다. 그 사람은 강신석 목사의 도움으로 부인이 미용기술을 배워 미장원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도 모두 군대에 가고 쓸쓸하던 차에 나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니 기쁘기도 하여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한번은 다른 사람들과 김용대 씨와 충장로 여관에서 함께 무슨 일을 했다. 그런데 김용대 씨는 대소변을 잘 가리지 못했고 방바닥에 대변을 봐버렸다. 사람들이 다 피해 버렸는데 내가 아무 말 없이 치워주었더니 그게 무척 고마웠던지 보상금으로 천만 원을 받았다며 오락실을 차리고 싶은데 함께 일을 하자고 했다. 동운동 금호고 모퉁이에 있는 가게였는데 목이 좋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가게일을 봐주었다.
도저히 사격을 할 수 없어
얼마후 방위영장이 나왔다. 병무청에 갔더니 진단서를 끊어오라고 했다. 진단서를 끊어갔지만 정형외과의 완치기준은 뼈가 붙었느냐에 있다며 그것으로는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왼손 엄지손가락이 신경이 죽어 따로 놀았지만 그것도 병역문제의 기준에 해당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입대를 했다.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했고 총기 소제까지도 했는데 이상하게 사격을 할 수가 없었다.
훈련관이 와서 "너 혹시 여호와 증인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하고 내가 사격을 못하는 이유는 아마 5·18 때 부상을 당해서인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 후 구타도 많이 당하고 억지로 사격을 해보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사격만은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안 되겠으니 저 사격표를 전두환이라고 생각하면 쏘아지겠지 하고 사격장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나를 정신병자라고 했고 훈련관은 때리다 못해 지쳐버렸다. 하지만 사격장에만 들어가면 27일 새벽에 총알이 담을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진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그때 총소리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공포스러웠나보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수백 번 다짐을 해도 사격장에 들어가면 도로아비타불로 주눅이 잔뜩 들어서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무반장실에까지 가서 사격을 못하는 이유를 말해야 했다. 사람들은 나를 반병신 취급을 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2주일의 교육이 끝났다.
자대배치를 받아보니 하필이면 도암지서 무기고를 지키는 타격조였다. 근무지는 집에서 4, 5킬로미터 거리였다. 날마다 걸어다녔다. 몸이 성치 않아 한번 잠을 자면 업고 가도 모를 정도로 자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신을 신고 자기도 했다.
한번은 부대에서 고참들이 내가 술집 웨이터 한 사실을 알고 기를 죽이려고 집단구타를 했다. 그러잖아도 군대생활이 내 몸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는데, 그런 일까지 있고 보니 죽을 지경이었다. 그곳에서도 결국 사격은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격장에서 사격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사격장 밑에서 혼자 놀았다. 병실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군대생활을 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면제되는 길을 사방으로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면에 있던 친구 형이 진단서에는 해당사항이 없으니 영세민으로 손을 써보라고 했다. 동생이 만 20세가 되기 바로 며칠 전에 아슬아슬하게 아버님도 안 계시고 장남에 미성년인 동생이 있는 영세민으로 병역이 면제되었다. 입대한 지 3개월 보름 만이었다.
도로공사 매표원으로
그렇게 방위를 제대한 후 광주로 올라와 김용대 씨의 오락실 일을 다시 봤다. 그 후 시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더 이상 오락실 일을 보기가 힘들었고, 또 그 전과는 달리 나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1987년 5월 말에 도로공사에 이력서를 냈다. 그 이력서를 내고 나니 오락실 일이 전같이 성실하게 되지 않았다.
그동안에도 계속 부상자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우리 모임은 초창기에는 가톨릭센터에서 5·18 자체행사가 있었는데, 한빛교회와 시간이 중복되기도 하고 다른 곳과 안 좋은 일도 있어 다른 5·18 관련단체와 합동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고 얼마 후 도로공사에서 회신이 왔다. 면접을 치른 후 그달 17일부터 출근을 했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을 톨게이트 매표원이다. 격일제로 근무를 하는데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면 다리가 굳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게다가 왼쪽 손가락이 성치 않아 표를 세는데 손에 쥐가 나기도 한다. 이런 나를 보고 상사는 가끔 짜증을 내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날씨가 갑자기 추웠는데 사무실의 난로가 고장나 다리가 마비되어 혼난 적이 있다.
결혼은 1988년 12월에 했다. 처가집에서는 병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줄 수 없다고 극구 반대를 했지만 아내가 밀어붙여 식을 올렸다. 지금은 장모님이 사위 몸보신 하라고 약을 자꾸 만들어 보내신다.
보상은 꼭 이루어져야
청문회에서 어떤 부상자는 증인으로 나와 우리는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소수이다. 현재 생활이 엉망이 되고 가정이 풍지박산이 된 사람들, 건강이 완전히 가버린 사람들이 엄청난데 주변의 말없는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상자나 유족에 대해서는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특별법을 제정하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지금 당장 발급된 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 가면 치료라도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5·18에 대한 내 생각은 일부 군인들의 정치적 음모에 광주시민이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광주시민은 전부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인들의 만행에 분노하여 자기도 모르게 일어섰고 관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정치세계에 나와 있는 5·18 관련 사람들도 대개가 그렇게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처절하게 싸웠던 사람들은 뒷전에서 조용히 있는 것 같다.
현재 6공화국은 5공청산이니 국민화합이니 유행어만 남발하고 말과 행동은 하나도 맞지 않는다. 5·18광주민중항쟁은 광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4천만 국민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이것을 계기로 더 이상 군사독재, 몇몇 일부 몰지각한 정치군인 이나 이들에게 아부하는 세력이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모아 일치단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 힘으로 민주화가 되고 모두 잘사는 나라가 될 때까지, 분단을 넘어 통일이 되는 날까지 나름대로의 투쟁목표를 세워 열심히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송강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연휴 마지막 일 이네요 행복한 시간 보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