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상실의 영토에서 피어난 불멸의 색채
― 에드바르드 뭉크, 《병든 아이》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병든 아이(The Sick Child)》,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119.5 × 118.5cm,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오슬로) 소장.
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얼룩
시간이 흐르면 슬픔도 언젠가는 희미해질 것이라는 세상의 위로는,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닿지 않는 말일 뿐이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상실은 시간이 지나면 증발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침전되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는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공기와 소리, 손끝에 닿던 차가운 감촉은 어느 날 문득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남겨진 사람의 시간을 멈춰 세운다.
에드바르드 뭉크의 《병든 아이》는 바로 그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평생 함께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백이다. 이 그림은 한순간의 슬픔을 기록한 작품이 아니라, 상실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를 오랜 세월에 걸쳐 증언한 한 편의 자서전과도 같다.
② 죽음의 방, 평생 지워지지 않은 누나의 기억
오늘날 뭉크를 떠올리면 대부분 《절규》를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뭉크 자신은 《병든 아이》를 자신의 예술세계를 여는 출발점으로 여겼다. 그만큼 이 작품은 그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 할 수 있다.
뭉크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었고, 열네 살에는 가장 가까웠던 누나 소피에마저 같은 병으로 떠나보냈다. 병상에 누운 누나가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던 장면은 그의 기억 속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훗날 그는 "나의 예술은 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의 방에서 태어났다."고 회고했다.
1885년부터 1886년에 걸쳐 완성한 《병든 아이》는 이러한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이 작품은 눈앞의 현실을 충실히 재현해 온 오랜 서구 회화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억과 감정 자체를 화면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훗날 독일 표현주의의 전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며 근대미술의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러나 처음 전시되었을 당시 평단의 반응은 냉혹했다. 거칠게 갈라진 화면과 형태가 흐려진 인물 표현을 두고 평론가들은 미완성 작품이라거나 서투른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당시 대중에게는 회화란 눈앞의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예술이었기에, 기억과 감정을 따라 흔들리는 붓질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하지만 뭉크는 자신의 방식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 그림은 한 장면을 묘사하는 작품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다시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물감을 덧입히고 긁어내기를 반복하며 화면을 끊임없이 수정했다. 마치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여러 겹의 붓질을 쌓아 올렸고, 그렇게 만들어진 거친 화면은 상실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게 되었다.
뭉크는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다. 여섯 점이 넘는 유화와 여러 판화를 제작하면서도 그는 늘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죽음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기억이라는 사실이었다.
③ 상실을 예술로 견디는 힘
현대 심리학은 깊은 슬픔과 외상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채 억압될 경우, 오랫동안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한다. 상실을 애써 잊으려 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때로는 기억을 더욱 깊은 곳에 가두어 둘 뿐이다. 반대로 고통을 자신의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하는 과정은 상처를 새로운 의미로 바꾸어 가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뭉크에게 그림은 바로 그런 과정이었다. 그는 누나의 죽음을 반복해서 그리며 슬픔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억을 끝까지 바라보고, 붓질 하나하나에 자신의 시간을 새겨 넣었다. 그의 그림은 죽음을 극복한 기록이 아니라,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평생 배워 가는 여정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Amor Fati)', 곧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사유와도 맞닿아 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비극을 미화하거나 체념하라는 뜻이 아니다. 삶에 찾아온 고통과 상실마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경험을 통해 다시 삶을 창조해 가려는 인간의 의지이다.
뭉크에게 예술은 슬픔을 피해 가는 비상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상실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며, 그 고통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색채로 바꾸어 가는 삶의 실천이었다.
④ 상실을 기록하는 당신에게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상실을 견딘다. 어떤 이는 침묵으로, 어떤 이는 눈물로, 또 어떤 이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지나간 시간을 천천히 되새긴다.
슬픔을 마음 깊은 곳에만 묻어 두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기록하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 그것은 아픔을 과시하는 행위가 아니라, 상실 속에서도 삶을 이어 가려는 조용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뭉크가 거친 붓질 끝에 끝내 한 점의 그림을 완성했듯, 기록은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먼저 떠난 존재가 남긴 빈자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끌어안고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가는 사람에게 상실은 더 이상 파괴의 흔적만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되고, 언젠가 비슷한 상실을 견디는 누군가에게 말없이 곁을 지켜 주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 위에 자신의 삶을 다시 써 내려가며, 상실의 영토에서도 끝내 살아갈 이유를 발견해 나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 작품 캡션
어린 시절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누나 소피에의 죽음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형태를 의도적으로 허물고 거친 화면을 만들어 기억과 상실의 감정을 이전과는 다른 회화적 언어로 시각화했으며, 훗날 표현주의 미술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준 근대미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