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조동화는 이런사람이다.
자유인 조동화 그는 누구인가?
친구를 보면 그사람을 안다고 했던가!
김호균은 경북 경산이 집으로 나와 철도학교 동기생이고 철도에서 사장을 제외하고 철도공사의 주요직책을 두루 거치며 한국철도 ktx 발전의 선구자역할을 한 친구였다.
김호균은 동기생회장이며 조동화는 사무국장이다.
조성곤 그는 전북정읍이 집으로 나와 철도학교 동기생이며 김제조씨 종친으로 철도학교 입학시 인연이 된 친구로 용산에서 하숙을 같이했으며 철도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서울대학교로 전근, 총장아래 행정처장으로 퇴직한 친구였다.
조성곤은 철도학교시절 여름방학때 나의집 생가 와룡을 방문하였으며, 정읍의 조성곤 생가를 방문하여 천태산에 올라 성곤아우들과 산책한 추억이 있다.
황한용 그는 국교1년후배이며 이리중학1년 후배이기도 한 고향마을 와룡 농촌에 정착한 죽마고우이다.
죽마고우 황한용은 농사를 지으며 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며 장남은 육사를 졸업하여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다.
황한용 죽마고우의 어머님은 92세로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며, 우리어머님보다 2살아래이시다.
나는 어머님이 아니계시니 어버이날이 되어도 보답할길이 없어, 나의 어머님 연일정씨 정순봉 기일(4/28)을 맞아 죽마고우의 어머님에게 카네이션과 작은 봉투를 드렸다.
죽마고우의 어머님 “태미떡” 어린시절에는 이름으로 알았으나 시집온 지역명으로 칭호하였다.
“태미댁”을 사투리로 “태미떡” 그렇게 불렀다.
죽마고우의 어머님은 2살위의 나의 어머님이 69세에 빨리 가시었다고 서글픈 마음을 표시하며 눈물을 글썽이었다.
죽마고우 황한용친구의 어머님이 건강하게 활동하시기를 조동화는 늘 기도하며 살아갈 것이다.
죽마고우 황한용 어머님 감사합니다.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가 아니계시니 풀지못한 이야기를 풀길이 없어 그냥 사모곡만 부르는 조동화는 어머니 없는 곳에서 사모곡으로 대신합니다.
김제와룡 김제조씨 조선식문중 묘역에서
2021년4월의 햇살은 따스하고 포근하기만하다.
조선식은 나의 조부님이시며 1983년8월3일 하늘의 부름을 받아 저세상으로 가시었다.
묘역에는 납골당을 조성하여 고조부 증조부 작은어머니의 유골함이 안치되여 있고, 봉분으로 조부님과 할머니합장봉분이 있으며 나의 부친과 모친봉분이 있으시다.
작은어머니는 남원에서 시집온 박금례님이시다.
숙부에게 박금례님은 시집와서 딸과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 기승을 낳고 2년만에 저세상으로 가시었으니, 커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지하에서 얼마나 통한의 시간을 보내시었겠는가.
숙부 조병무님과 숙모 박금례님은 신혼의 보금자리를 시골집에서 대가족이 함께 같이 살았기에 금실이 좋은 모습을 보아왔다.
세월은 덧없고 무정하여 그 아들도 장성하여 아들 둘을 둔 아버지로 변하였다.
조동화는 한 시절을 회고하며 2021년 4월을 거의 매일 오가며 묘역을 다듬고 바라보며 세상의 잡념을 버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내왔다.
숙모 작은어머님이 살아계시었다며 풀지못한 이야기를 풀수 있을텐데 사람의 운명은 어찌할 수가 없구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50대 후반의 사촌아우의 건승을 빈다.
내고향집에 얽힌 이야기
내고향 김제 용지와룡267번지
내가 어린시절 할아버지가 이집을 사서 이사오시었다.
그시절에는 담으로 경계만 하고 살던시절로 윗집은 홍씨 형이살으셨고 아랫집은 홍씨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동생이 살고 있는집을 나의 조부님이신 조선식님이 사서 이사를 왔다.
등기지적도상에는 나의집 마당이 윗집땅으로 되어 있으나 마당에 시암(우물)이 있고 또한 치간(화장실)과 뒤엄자리, 블로크로 지은 방도 있으며, 닭과 돼지를 기르던 작은 축사도 있다.
윗집은 주인이 바뀌어 자기땅을 찾고 싶어 측량을 하여 철조망으로 경계를 했으나, 우리집마당에 있는 우물이며 치간 축사를 임의적으로 철거할 수가 없다.
땅주인과 건조물주인이 다른 경우를 많이 보아왔는데, 기존에 건조물을 땅주인 마음데로 철거할 수가 없다.
나는 이집에서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을 보내었고 신혼생활도 했으며, 부동산사업을 하시여 성공하신 나의 숙부님이신 조병무님(수원거주)도 이집에서 신혼생활을 하시었다.
그러하기에 폐가의 시골집을 철거할수 없답니다.
철거하면 철거비를 행정계통에서 지원한다하나 조동화는 현상유지가 최선의 길이다.
기차길옆 내고향 옛집 와룡이여!
호랑이 담배피우던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호남선 기차길 옆 내고향 옛집 와룡이여!
내가 결혼하여 신혼때 교통이 불편한 와룡에서 익산까지(약15km) 출퇴근을 하였는데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였다.
호남선 와룡역은 작은 간이역으로 하루에 열차가 완행열차만 2-3개열차만 정차하였다.
버스도 없던 그시절 교통수단은 오직 열차만 있으니 신혼부부의 애환을 상상해 봅시다.
우리집에서 50여미터 떨어진 호남선 철길은 기차가 매일 수십차례 달린다.
내가 신혼시절 호남선 철길을 지나는 화물열차에 승무시 기관조사 조동화의 편리를 위하여 기관사님은 잠시 나의집 앞 철길에 기차를 정차시키면,
아내는 도시락을 기관차로 가지고 오던 추억이 있었다.
김제 와룡의 나의 어린시절은 우리의 전통사회 씨족 3대4대가 살았기에 우리집도 상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들과 대가족이 살아왔으나, 핵가족 개인주의 시대로변한 한국사회상은 돈과 이익앞에 패륜사회로 변한 것을 신문지상을 통해 많이 본다.
조동화가 와룡에서 태어났을적 나의 둘째고모 조병례님은 나를 안고 엎고 귀여워 하시다 김제로 시집을 가시였다.
나의 둘째고모 조병례님께서 2021.3.5. 91세로 세상을 떠나시여 풀지못한 이야기를 풀길 없어 아쉬움이 사무쳐 온다.
나는 김제에 사시었던 조병례 고모님 살아생전 한달에 한두번 늘 아내와 방문하여 문안을 드리곤 하였다.
나의 고모님과 고무부님이 안치된 유해가 성남시 분당구 새나리오79번지에 있으니 하늘에 계신 고모 조병례, 참전용사이셨던 고모부 홍이표님을 뵈러 갈 것이다.
장조카인 나를 안고 엎고 그렇게 이뻐하시었던 고모 조병례님이 저 세상에 가고 없으니, 온갖 아쉬움으로 점철된 조동화의 인생사 지나간 날을 회상하며 고모부 홍이표님이 내가 문안하고 나오면 차 뒤 꽁무니가 안 보일때까지 배응하던 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 4월은 조동화에게 세상사 속세의 잡념을 버리고 조상에 대한 참회의 시간이 되어 감개무량하다.
이세상에 아니계신 님들이여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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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어머님 기일 하루전 조동화는 조상묘역을 찾아 술잔을 올리다>
<조동화는 와룡의 죽마고우 92세이신 친구 어머님을 4/27 문안하며 카네이션꽃과 작은 봉투를 드렸다.
죽마고우 어머님은 정신이 아주 좋으시며 기억력이 좋으시고 조동화는 건강하게 활동하시기를 기도하며 살아갈것이다.
죽마고우 황한용은 어머님 모시고 살고 있으며 시골 와룡의 순박한 농부이다. >
<옛날 옛적의 사진속 고향 어른들은 저세상 하늘 나라로 가시었으나 추억을 세기고자 회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