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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진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사람은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시대에 살면서도 그것에 순응하거나,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추구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숭고한 이상과 불같은 정열,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로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지 간에 이기심과 속된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인과 영웅의 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일제하 35년을 포함한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어둡고 쓰라린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으나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희원하며 불같은 정열과 강철 같은 의지로써 우리 민족을 뒤덮고 있던 이민족 압제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일생을 바친 숭고한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국내와 현해탄 건너 일본은 물론 만주 벌판과 중국 대륙, 시베리아와 태평양을 건너 미주 및 유럽 제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그분들의 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요, 꺼질 줄 모르는 민족정신의 영원한 활화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분단된 상황 속에서나마 이만큼 발전하고 이제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그려 볼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러한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들의 삶의 의미를 기억하고 고귀한 뜻을 오늘에 되살려감으로써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값진 거름이 되게 하고자 그분들의 전기를 『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들이 집필한 이 열전은 1차로 한말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류인석님 등 일곱 분에 대한 것을 내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 나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아껴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성원해 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 열전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
김규식은 냉전하의 분단 상황에서 거의 잊혀져간 인물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통일의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고 납북된 이후의 최후가 밝혀지면서 그의 삶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많다. 외교관·정치가·교육가·학자, 그리고 좌 우 대립 속에서 중도파 로 불렸다. 그만큼 그의 생애는 조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폭이 넓었다. 누구보다도 일찍 일본의 침략에 눈을 떴던 동래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4살 때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숙부의 손에 맡겨져 하마터면 세상에 존재도 없이 사라질 뻔 했던 그가 지닌 영어·중국어·일어·불어·러시아어·독일어·라틴어 심지어 인도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았던, 어학에 천재적인 재능과 명석한 정치적 분석력을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까닭이다. 그의 일생은 나라 잃은 민족의 대변인으로서 국제사회에 한국의 존재와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일생이었으며, 반제국주의와 항일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국제적인 협력을 끌어내어 반일통일전선을 구축하는데 헌신한 생애였고, 분열된 독립운동세력들의 대동단결을 위해 좌 우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고 민족 단결을 이루고자 헌신하였던 생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애정의 사람이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조용한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독립과 통일된 조국의 건설을 위해 살았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분단된 동족의 상잔 속에서 납북되어 ‘조국’과 ‘통일’을 되뇌이다가 눈보라치는 만포진의 산골에서 숨져 갔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 통일을 눈앞에 그릴 수 있게 된 이 시점에서 남북이 서로를 적대하게 했던 그 이데올로기가 무엇이었던지 좀 더 냉정한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광기의 시대에 민족단결이라는 외로운 목소리를 높였던 한 천재 선각자의 행동과 외침을 새롭게 돌아본다. |
김규식은 1881년 1월 27일(양력 2월 28일)에 경상남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김규식의 유년시절과 청년 시절은 이정식, 『金奎植의 生涯』, 新丘文化社(1974)를 주로 참고하였다). 김규식이 태어난 당시는 외세에 의한 침탈뿐만 아니라 안으로도 통치 질서가 문란해지고 위정자들의 학정이 심하여 정국이 극도로 불안하였으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김규식은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인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한 청풍 김씨(淸風金氏) 5세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 김중방(金仲房)의 22세손인 인백파(仁伯派) 김지성(金智性)과 경주 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인 규찬[奎贊(김규찬)]은 백부인 우성[友性(김우성)]의 양자로 입양되어 김규식이 실제로 맏아들과 다름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고, 개항 직후 외교 관리로 발탁되어 러시아·일본 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자전거를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했다고 한다. 그 후 동래부 관리로 부임하였는데, 김규식은 부친이 동래부의 관리로 근무하고 있던 중 태어났다. 그러나 본적은 강원도 홍천이다. 본래 청풍 김씨는 충북 청풍과 충주에서 대대로 거주한 문족으로, 3대 정승을 배출하였고 백여 명의 문과급제자와 명망있는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이다. 청풍 김씨 6세인 관[灌(김관)]의 셋째 아들 경문[敬文(김경문)]이 충주에서 해주로 이주하였고, 해주에 정착한 자손들 중에서 일부가 강원도로 옮겨와 살았는데, 김규식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홍천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이 태어날 당시 조선은 강압에 의해 1876년 조일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부산 등 3개항을 개항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과 체결한 조일무역장정에 의거하여 부산구 조계조약을 조인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부산항에 군함을 띄우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력 시위하면서 일본인 거류지역을 확보하고 본격적인 경제침략을 단행하였다. 우선 우편국과 금융기관을 창설하여 일본통화를 한국에 유통시켰고, 조선산 금을 싼값에 사들여 일본으로 유출시켰다. 그리고 조선중기 이후 서울 육의전 상인들이 동업자 단체를 조직하여 정부에 대한 각종 부담금 총괄하면서 상품판매권을 독점해 왔던 도중제도(都中制度)를 폐지하도록 요구하여 근대적 자유통상무역의 길을 열고는 앞을 다투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일본 상인들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많이 수입하여 한국의 농촌과 도시로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한국의 전통적인 수공업이 점차 해체되어 갔고 이로써 시작단계의 한국의 산업은 피폐되었다. 한편 조선의 농산품들은 일본에서 수입된 공산품에 비해 헐값으로 일본에 수출되어 나갔다. 일본인들은 일본전관거류지를 거점으로 하여 주변의 토지를 매수하고 각종 이권을 점탈하면서 부산 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1880년에 일본은 종전에 관리관청이라 불렀던 부산 일본공관을 부산영사관이라 고치고 그들의 영사를 부산에 주재시키면서 부산의 북빈(北濱) 일대를 새로운 조계지로 흡수하였다. 부산주재 일본영사는 이 조계지를 일본의 준영토시하면서 조계행정을 감행하였고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영업·상업·가옥·교육·경찰·위생·병원·선박 등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여 실시하는 등 식민통치의 첫발을 내디딜 준비를 갖추었다. 이러한 일본의 침투에 위협을 느낀 한국정부에서는 수출과 수입에 대한 정책적인 해결방안을 강구하여 사태를 조정해 보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김규식이 태어난 이듬해인 1882년에는 임오군변(壬午軍變,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다. 청나라 역시 민비(명성황후)세력의 요청을 받아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여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납치하고 정권을 다시 민씨(명성황후) 세력에게 넘겨주는 등 한국내정에 간섭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일본과 청이 대립하는 대결장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침략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일본은 경제적 침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더욱 혈안이 되었다.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가장 심했던 곳의 하나가 부산이었다. 부산의 일본 영사관은 부설 경찰소를 두고 자체적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한편 1885년에는 재판소를 두고 영사재판을 하면서 미처 자본주의 상품경제체제를 갖추기도 전인 한국에서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무역에 있어서도 온갖 이권을 점탈하여 한국을 일본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편입시켜 나갔다. 이 무렵 동래부 관리로 있었던 김규식의 아버지 김지성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한국이 부당한 피해를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상인들의 횡포가 심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었다. 김규식의 아버지는 개항 직후 외무관계 관리로 발탁되어 일본과 러시아에 파견된 바 있으므로 어느 정도 국제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의 강압으로 개항한 일본이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인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 들어와 무역에서 불평등을 강요하며 한국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고 있던 실정을 지켜보면서 김규식의 아버지는 큰 울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임금께 올렸다. 그러나 김규식의 아버지는 이로 말미암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규식의 집안은 급속히 몰락해 갔다. 더욱이 어머니마저도 돌아가시게 되어 김규식은 만 4세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돌보아 줄 사람이 없게 된 어린 규식(김규식)은 부산 동래에서 서울로 올라와 숙부집에 의지하게 되었다. 숙부는 몰락한 양반으로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 규식(김규식)을 부양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규식(김규식)의 숙부는 당시 조선에서 선교 중이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를 찾아가 새로 설립한 고아원에 규식(김규식)을 맡기려 했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규식(김규식)은 다시 숙부댁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도 없이 낯선 환경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규식(김규식)은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충격과 영양부족으로 중병에 결렸다. 어린 규식(김규식)의 병세가 절망적이라고 단정한 친척들은 규식(김규식)을 방 한구석에 뉘어 놓고 병풍을 둘러놓았다. 규식(김규식)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 목사는 약과 우유를 가지고 규식(김규식)을 찾아가 그를 진단하고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어린 애를 버려 둘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가 데려다 키우겠다고 제의하자 가족들은 쾌히 승낙하였다. 언더우드가 규식(김규식)을 고아원으로 데려오려고 하자 의사들과 다른 선교사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당시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의료 활동을 하였던 선교사들은 치료 중 환자가 죽을 경우에 서양귀신이 잡아갔다는 소문이 퍼져 선교사업에 큰 장애가 되었으므로 가망이 없는 환자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김규식을 데려와 극진히 치료하고 간호하였다. 점차 병세를 이기고 정상적으로 소생하였으나 김규식은 그 후 평생 동안 건강한 신체를 갖지 못하였다. 김규식의 생명을 구해 준 언더우드는 185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하였으며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선교활동을 위해 인도로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한국으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에 따를 것을 결심하였다. 1885년 4월에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서울로 와서 곧바로 선교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언더우드는 고아와 극빈한 아동들을 수용하여 기술을 가르치는 일종의 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세우고자 계획하고, 정동에 한옥을 구입하여 1886년 5월 11일 학생 한 명으로 고아학교를 열었다. 건강을 회복한 규식(김규식)은 그 후 언더우드 목사 댁에 입양되어 1887년부터 고아학교에서 서양의 근대교육과 한문교육을 수업 받았다. 두뇌가 총명하고 인품이 충실했던 김규식은 학교에서의 교육을 열심히 익혔는데, 특히 영어를 매우 정확히, 빨리 익혀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유년 시절 김규식은 본갑이라고도 불리었고,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언더우드 목사 부부는 ‘꼬마 존’이라 부르며 사랑하였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비록 언더우드 목사 부부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았다 해도 어린 규식(김규식)에게는 결코 행복한 생활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고아원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사회신분을 중시하던 시절에 부모 없는 고아 취급을 받아야 했던 규식(김규식)은 주변 아이들의 놀림을 받을 때마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어린 규식(김규식)은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를 때면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 부친을 찾겠다고 고아원을 뛰쳐나가 거리를 헤매었다. 이는 자신은 결코 천대와 멸시의 대상이 아니며,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몸짓이었다. 그러던 중 규식(김규식)은 아버지가 귀양에서 풀려나와 서울로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했던 규식(김규식)은 보고 싶은 마음에 언더우드목사 부부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고아원을 나와 아버지를 만났다. 규식(김규식)은 아버지를 만난 그 길로 아버지의 품에 안겨 본향인 홍천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해후는 얼마가지 못하고 짧은 만남으로 끝이 났다. 오랜 귀양 생활로 인해 건강을 해친 아버지는 어린 규식(김규식)을 두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의 규식(김규식)의 나이는 10살이었다. 아버지의 산소는 고향인 홍천 화천면 답기동에 있다. 애타게 그리워하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규식(김규식)은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한가닥 의지할 수 있는 끈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규식(김규식)은 절망의 끝에 서게 되었으나 이제 다시 돌아서서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홀로 개척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의 경험은 김규식에게 굳건한 자립심을 키워주었으며 더불어 사는 단결심과 협조심을 키워 주었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배움을 일깨워 주었다. |
서울로 다시 올라온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와 재회하였다. 규식(김규식)은 고아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고아학교는 그 후 민로아학당 혹은 구세학당으로 불리워졌고, 1905년 경신학당으로 발전하였다. 김규식은 그 학당에서 교육을 받고 1896년 사회로 나왔다. 그 무렵 개화파들에 의하여 주도된 갑신정변(1884)이 실패로 끝나자 정변(갑신정변, 1884)을 제압한 청이 한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 동학농민전쟁, 1894)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게 되어 한반도는 다시 청과 일본의 힘의 대결장이 되었고 급기야는 청일전쟁(1894)으로 발전하였다. 이 전쟁(청일전쟁, 1894)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일본은 조선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권고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이 설시되었다. 이 때 갑신정변(1884)의 주모자로 외국에 망명해 있었던 박영효·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비(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취하여 일본의 세력 구축을 방해하자 일본은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일본의 만행에 분개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1896)하여 친러세력과 함께 그곳에서 집정하였다. 온건개화파들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하여 자주독립권을 확고히 세우고 조선왕조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개혁정치를 단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내부대신으로 취임한 박영효는 자신과 함께 갑신정변(1884)에 참여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의학을 전공, 개업하고 있던 서재필을 국내로 들어오게 하여 개혁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맡아줄 것을 종용하였다. 귀국한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뒤이어 동년 7월 2일에 독립협회의 창립을 도왔다. 학교를 졸업한 김규식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활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규식은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면서 독립협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독립신문』은 당시 서재필·주시경·이상재·윤치호·남궁억 등 기독교인들이 편집을 맡고 있었으므로 언더우드의 소개를 받은 김규식의 취업은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김규식은 독립협회 일반회원이면서 이상재·신흥우·신채호·이기현 등과 함께 내무부문서부 서기장 및 과장, 부장급(內務部文書部書記長及課長副長級)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김규식의 독립협회에서의 활동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면서 김규식은 서재필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독립신문』을 애독하면서 국내는 물론 국외정세에 대한 안목이 생기게 되었고 의식세계 또한 크게 확대되었다. 서재필은 많은 청년들에게 미국유학을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는데, 의식 있고 총명한 김규식에게도 유학을 권고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김규식은 1897년 17살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김규식은 1897년 가을학기부터 미국 동부 버어지니아주에 있는 로녹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하였다. 로녹대학의 학장인 드레허(Dreher)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인물인데, 그는 1892년에 워싱턴에 있던 한국대표부를 찾아간 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93년 한국인 학생이 처음으로 입학한 후 의친왕 이강(李堈: 義親王)을 비롯한 30여 명의 한국학생이 이곳 학부를 다녔다. 이 대학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특별했던 것은 졸업식 때마다 대학 잡지에 한국에 대한 소식을 싣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학생들이 졸업할 때는 주미한국공사가 참석하여 졸업하는 학생들을 축하해 주었다. 이처럼 한국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로녹대학에는 1897년에 김규식을 포함하여 5명의 한국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김규식은 1898년 6월에 준우등의 좋은 성적으로 예과를 1년 만에 마치고 졸업하였다. 그리고 바로 가을학기부터 학부 1학년에 입학하였다. 김규식은 1학년 때 필수과목으로 영어·라틴어·불어·일어·역사 및 수학과 몇 가지 자연과학 과목을 이수하였고, 선택과목으로 심리학·정치경제학을 이수하였다. 전공과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외국어와 역사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의 성적은 동물학에서 75점을 맞은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균 90점 이상의 우수한 성적이었다. 특히 어학성적은 뛰어나 라틴어 93점, 불어 94점, 독일어 95점을 받았다. 김규식은 영어·중국어·일어·불어·러시아어·독일어·라틴어 심지어 인도어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하니 어학에 관한 자질은 과히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규식은 재정적으로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유학생활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그래서 1899년 여름방학 중에 워싱턴에서 취업한 바 있으며 1901년에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뉴욕 어빙턴에서 취직하였다. 그해 가을 학기에는 두 과목만을 택한 후 1902년 봄학기까지 학교에 등록하지 않았다. 어렵게 공부를 마친 김규식은 미국에 온 지 6년만인 1903년 6월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김규식은 재학시절 학내 웅변클럽인 데모스테니언 문학회(Demosthenean Literary Society)에 가입하여 미국 및 세계의 정치문제를 토론하면서 식견을 넓혔다. 이 클럽에서는 매 주일 토론 주제를 가지고 찬반 팀을 구성하여 클럽원들 간의 웅변술을 연마하는 동시에 매년 자기 팀내에서의 웅변시합을 가졌다. 김규식은 「대통령 예선은 중앙정부가 관리하여야 한다」·「영미동맹은 미국에 유리할 것이다」·「비스마르크는 글래드스턴보다 더 위대한 정치가이다」라는 토론 주제에서는 반대팀에 「학교에서의 영향은 가정에서의 영향보다 청년의 장래에 더욱 중요하다」·「흑인교육은 미국남부에 유익하다」·「미국은 군비를 강화하여야 한다」라는 토론주제에서는 찬성팀에 참가하여 토론하였다. 이러한 토론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자신의 견해 또한 논리정연하게 발표해야 했으므로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김규식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견식을 넓혀갔다. 김규식은 자신이 가입한 클럽에서 1898년 3월에 통신서기로 선출되었다. 1900년 1월에는 기록서기로, 동년 11월에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1902년 1월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김규식은 외국 학생들 사이에서도 클럽을 이끄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습득하기도 어려운데, 김규식은 1900년 6월에 개최된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대학 잡지에는 어느 학생들보다 많은 글을 기고하여 뛰어난 문필력을 보여주었다. 1900년 5월호에 「한국어」라는 제목으로 한글과 한국말을 영어·불어·독일어·라틴어·산스크리트어까지 인용해 가며 비교하여 소개하였고, 1902년 2월호에는 「동방의 서광」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게재하여 암흑 속에 있는 한국은 필경 외국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였다. 1902년 4월호에는 「양반과 그의 조카」라는 제목의 설화를 유창한 영어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1903년 5월호에는 「러시아와 한국문제」라는 글을 발표하여 정치평론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 글은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한 것으로, 한국정부를 신랄하게 공격한 후 결국 러일전쟁(1904)은 불원간에 일어날 것이며 한국은 러·일(러시아·일본) 두 나라 중에서 전쟁에 승리한 나라에게 먹혀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전쟁의 결과는 확실치는 않지만 일본의 생사가 전쟁 결과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일본은 악착같이 싸울 것이므로 일본이 승리할 것 같다고 예언하는 동시에 극동을 위해서는 일본의 승리가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러시아가 이긴다면 한국민족은 러시아의 물욕을 채워주기 위하여 죽도록 일을 해야 할 것이며, 일본이 승리한다면 한국민족은 그들의 모든 재산과 권리를 박탈당할지언정 최소한 먹고 입고 배우기는 할 것이며, 섬나라 제국의 신민이 되도록 강요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졸업 때에 김규식의 성적은 평균 91.61로, 전체 졸업생 중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이었다. 김규식은 다른 학생들 4명과 같이 졸업기념 연설자로 선정되었는데, 그의 연설제목은 「극동에서의 러시아」였다. 이 졸업연설문은 로녹대학 잡지에 발표되었고 『뉴욕 선(Newyork Sun)』지에도 게재되었다. 그 연설문의 내용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것으로, 러시아는 유럽에서 다른 민족들을 짓밟고 자기 세력을 팽창시킨 것 같이 극동에서는 바야흐로 한국을 삼키려고 호시탐탐하고 있으며, 한국을 삼킨 후에는 중국에 손을 뻗쳐 5억의 황색인종을 자기 수중에 넣고 억압하려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일어나는 일본의 세력을 지적하고 러시아와 일본 양국은 머지않아 전쟁을 하게 될 것이며 러시아는 패배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김규식은 자신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는 졸업 후 일 년간 뉴욕에서 머문 후, 자신의 이상을 고국에서 펼칠 것을 결심하고 1904년 봄에 귀국 길에 올랐다. |
김규식이 고국에 돌아왔을 때 한국은 러일전쟁(1904)의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일본은 영일동맹(1902년)을 체결한 후 유리해진 형세를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권 인정과 한국철도를 만주까지 연장할 것을 요구하였고, 반대로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독립보존, 군사적 목적에 의한 일본의 대한제국 영토 이용 거부, 한반도의 도선 분할과 그 이북지역의 중립화, 만주에서의 일본의 이권 거부 등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양국은 전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1904년 일본의 도발로 전쟁(러일전쟁, 1904)이 시작되었다. 러일전쟁(1904)은 예상을 뒤엎고 김규식이 예언했듯이 일본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김규식이 귀국했을 때 고국 땅은 남의 나라의 전쟁터가 되었고,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된 후의 조국의 장래는 자신이 예언했듯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었다. 23세의 유망한 청년에게 접근한 것은 한국 땅에 진출한 구미각국의 상사(商社)와 은행, 그리고 광산회사들이었다. 그들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입사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김규식은 일신의 출세보다는 국가와 만족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정열을 바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1905년 1월 2일에 일본이 여순(旅順)을 함락하자 그는 자신의 모교인 로녹대학에 1월 18일자로 「근래의 세바스토폴리의 함락」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은 대학잡지 5월호에 게재되었는데, 크리미아전쟁(크림전쟁, 1853)의 예를 들어 여순의 함락으로 러일전쟁(1904)도 곧 끝날 것이라고 예상한 정세분석의 글이었다. 러일전쟁(1904)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재하여 강화회담(포츠머스 강화회의, 1905)을 알선함으로써 종식되었다. 8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회담(포츠머스 강화회의, 1905)이 개최되는 것으로 발표되자, 김규식은 회의(포츠머스 강화회의, 1905)에 참석하여 한국의 입장을 선전하려 서울을 떠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여권을 발행해주지 않았다. 김규식은 구미(歐美) 방면으로의 연락과 교통이 원활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고 강화회의(포츠머스 강화회의, 1905)가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김규식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러·일(러시아·일본) 간에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 1905)이 체결되었다. 러일전쟁(1904)에서 완전한 승리를 굳힌 일본은 한반도에서 독점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러·일(러시아·일본) 간에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 1905)이 체결된 지 2달 후인 11월 17일에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이로써 한국은 실질적인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지켜보면서 김규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규식은 좀 더 자신의 실력을 쌓고자 다시 미국의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학업을 계속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일제 통감부가 김규식의 여권신청을 거부함으로써 무산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인들이 고등교육을 받기 위하여 해외로 유학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더욱이 유학시절 반일적인 글과 말로써 자신의 의사를 밝혀 온 김규식에 대해서 일본 당국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이 무렵 김규식은 일본 통치하의 한국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또는 존재를 잃어버릴 것 같다는 우려를 모교에 머무르고 있는 동창에게 편지로 호소하였다. 김규식의 주변에는 여전히 그를 스카웃하려는 회사들이 있었으나 김규식은 언더우드목사를 도와 선교사업과 교육사업에 자신의 능력과 신념, 그리고 신앙심을 발휘하고자 결심하였다. 언더우드부인은 이러한 김규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김규식은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돌보아주고 교육시킨 새문안 교회에 충성으로 봉사하였다. 새문안교회는 예배당을 신축하기 위하여 1907년에 현재의 종로구 신문로 1가에 대지를 구입, 건축을 시작하여 1910년 5월에 준공하였다. 김규식은 건축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어 교회건축을 완수하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1910년 5월 29일에 있었던 교회헌당식날 김규식은 건축위원회를 대표하여 교회건물의 증서와 열쇠를 언더우드 목사에게 증정하였다. 1910년 12월 18일에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장로로 장립(將立)되었다.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한국군대는 해산당하였고, 사실상 모든 주권이 일제에게 강탈당하였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1907년 9월 한국 장로교회는 외국선교부의 소속에서 벗어나 독립된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총회를 조직하고자 전국적으로 노회조직을 서둘렀는데, 1911년 12월에는 새문안교회의 경기·충청 노회가 조직되었고 김규식은 노회서기로 선출되었다. 김규식이 선교사업과 교육 사업에 전념할 당시 한국교회는 상당히 어려운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일제는 1905년 11월에 「종교에 관한 규칙」을 발포하여 종교계에도 침투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1904)을 기점으로 한국에 침투해 들어온 일본 기독교세력들은 1907년 이후에는 조선전도론을 내걸고 한인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회유공작을 펴고 있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탄(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한 이후에는 「105인사건」을 일으켜 일본통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였다. 일제 데라우치 총독이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고자 평안남북도를 순시할 때 암살계획이 있었다고 날조하여 1911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평안도를 중심으로 600여 명의 민족지도자들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이 중 128명이 기소되었고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105인사건」이다. 이는 일제가 한국교회의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뿌리 뽑고자 날조한 사건이다. 일제는 “대개 조선인을 통제하는 방책은 추상열일(秋霜裂日) 같이 털끝만큼도 가차 없이 우선 그 처음부터 토벌하는 데에 있다. 토벌하고 나서 위압하고, 위압하고 나서 어루만져 평안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고 나면 조선 국토가 비로소 평안하게 될 것이다.”라는 통치방향을 세우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한국기독교에 대해 회유정책도 펴고 있었다.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일부 교회와 YMCA에 많은 돈을 기부하여 교회건축사업과 선교사업을 원조한 것은 바로 그런 예들이다. 이와 동시에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은 책임있는 자리에서 내몰았고 심지어 추방까지 하였다. 그 결과 「105인사건」의 날조를 국제사회에 폭로한 YMCA의 질레트(P. C. Gillett) 총무는 한국에서 추방당하였다. 선교사업에 위협을 받자 선교사들은 일본 통치를 칭찬하면서 일본총독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미국 장로교회 외국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 J. Brown) 같은 이는 “일본 통치는 조선이 다른 나라에 통치되는 것보다 훨씬 좋으며 또한 조선이 스스로의 손에 의하여 다스리는 것보다도 훨씬 좋다.”라는 망언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국제위원회 모트(J. R. Mott) 박사에게 영향을 행사하여 한국 YMCA가 중국·한국 및 홍콩 YMCA 전체위원회에서 탈퇴하는 문제를 검토케 하고 한국 YMCA 이사회 구성에 일본인이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을 하도록 뒤에서 조종하였다. 이 결과 일본의 정책에 영합한 YMCA 인사들은 1911년 11월에 열릴 중국 YMCA 전국대회에 이 문제를 상정하여 한국은 전체 위원회에서 탈퇴하고 일본 YMCA와 손을 잡는다는 원칙을 결정하였다. 이를 막기 위하여 김규식은 신흥우·질레트 등과 함께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결과는 일제의 뜻과 같이 되어 버렸다. 김규식은 26세인 1906년 5월 21일, 같은 새문안교회의 교인이며 과거에 군수를 지낸 조창식(趙昌植)의 15세 된 무남독녀 조은수(趙恩受) 양과 결혼하였다. 김규식과 조은수의 결혼은 전통혼례로 치러졌다. 결혼 후 김규식은 전통 교육만을 받은 부인을 정신학교에 입학시켜 신식 교육을 받도록 배려하였다. 1910년 그들 부부사이에 장남 진필[鎭弼(김진필)]을 낳았으나 6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이후 1912년에 둘째 아들 진동[鎭東(김진동)]을 낳았다. 가정적으로는 안정되어 갔으나 김규식에게는 항상 일제의 감시와 회유공작이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김규식은 자신이 다녔던 고아학교가 정식 학교로서 발전한 경신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구쯔다마라는 일본인이 김규식을 포섭할 의도로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기를 계속 권고하였다. 한편 언더우드목사는 일제 총독부와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선교사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자구책이지만 이것이 김규식에게는 많은 갈등을 안겨 주었다. 1912년 9월에 명치천황이 죽자 다수의 일본인이 참석하고 김규식도 장로로서 참석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총회장·부총회장 및 서기를 총독부에 보내 천황의 서거에 대해 총회의 애도와 동정을 표하기로 가결”하였다. 언더우드 목사 아래서 총회 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된 김규식은 민족적 양심과 선교우선의 교회사업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이러한 김규식의 고뇌를 지켜 본 언더우드 목사는 김규식이 오로지 종교활동만으로 일생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김규식의 머리에는 무너진 조국을 부활하고자 하는 의식과 신념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105인사건」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통치권을 벗어나 조직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다. 김규식도 일제의 회유와 감시가 심해지면서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 왔던 사업들을 계속 진행 하는데 큰 곤란을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형국에 좌절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김규식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김규식은 망명 전까지 새문안교회 장로로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동 교회 회집시에는 서기로서 집회를 주도하면서 신앙생활에 충성을 다하였다. 김규식은 1913년 6월 15일자로 서기직에서 물러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학원과정을 공부하고자 한다는 소문을 내었다. 김규식이 국내에서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을 중지하고 유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
망명길에 오른 김규식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그의 나이 32세 때인 1913년 4월 중순 경이었다. 김규식이 상해를 망명지로 택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1911년에 발발한 신해혁명의 성공에 크게 고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아편전쟁(1840년)에서 영국에 패배함으로써 그 허약성을 드러내었다. 이는 서구자본주의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에 침략해 들어오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중국인들은 열강의 침략에 항거하여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보수적인 청조(淸朝)의 무능함 때문에 나라는 거의 열강들의 준식민지로 전락해 갔다. 중국인들은 만주족인 청조를 타도하여 중국의 운명을 구하고자 혁명을 기도하였다. 손문(孫文)을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들이 몇 차례 거사를 기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청조가 외국의 차관을 들여와 간선철도를 국유화하려는 시도를 하자 이에 반대하여 사천성에서 큰 봉기가 일어났고, 이어 무창(武昌)에 있는 주둔군이 봉기에 가담함으로써 신해혁명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1911년 10월 10일). 혁명군은 남경에 중화민국을 수립하고 손문을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하였으며 대내외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식민지 청년들에게 신해혁명(1911)의 소식은 큰 감동을 주었다. 청년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중국으로 가 혁명에 참여하고, 중국과 연합하여 반일투쟁을 벌리고자 하였다. 예관 신규식은 1911년 봄에 일찍이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파들과 접촉하고 혁명에 직접 가담하기도 하였다. 김규식의 오랜 친구이며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김필순(金弼淳)은 그의 학우였던 이태준(李泰俊)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밀의하고 먼저 1911년 12월 31일에 중화민국정부가 수립된 남경으로 망명하였으며 이어서 이태준도 망명하였다. 김필순은 뒷날 김규식이 상처한 후 재혼한 김순애의 친오빠이며 이태준은 훗날 몽고에서 김규식의 사촌누이와 결혼하였다. 당시 남경에 유학 온 한인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학도병으로서 혁명군에 가담하여 북벌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중국혁명의 성공을 조국광복의 서광으로 알고 독립투쟁을 하듯 혁명에 투신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과 분열정책으로 국내의 모든 민족운동이 좌절되어 갈 때 국외로 망명한 지사들은 노령(러시아령), 만주와 북경·남경·상해 등지를 중심한 중국 본토, 그리고 미주지역에 흩어져 있으면서 광복의 기회를 포착하고자 상호 분주히 연락하고 있었다. 김규식도 일찍부터 국외의 독립운동세력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갖고 망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규식이 망명하자마자 독립운동세력과 연결되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사실로써 알 수 있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창호 자료 중, 1913년 8월 12일자로 된 김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김규식은 학생을 포함한 청년 8명을 미국에 보내면서 안창호에게 상륙처리를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를 띄우고 있다. 이중에는 길선주 목사의 맏아들로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 사경을 해매고 있었던 길진형도 있었다. 그리고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8월 27일경 몽골로 향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실제 김규식은 이듬해인 1914년 봄에 앞서 망명한 이태준과 함께 몽골로 갔다. 김규식과 안창호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은 면에서 연관을 맺고 있다. 즉 안창호는 1895년 김규식이 다니던 고아학교가 발전한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이곳에서 수업하였고 김규식은 이 학당에 1896년까지 있었다. 그리고 안창호는 1897년에 독립협회에 참가, 활동하다가 1902년에 미국으로 가는데, 김규식 역시 1896년에 독립협회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협회 활동에 가담하였다. 아마도 김규식이 미국에 유학중일 때 두 사람이 서로 연락관계를 맺고 있었으리라 본다. 안창호는 1907년에 국내에 돌아와 신민회를 조직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고, 1909년에 안중근 거사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대성학교에서 체포되었다가 이후 무혐의로 석방된 바 있다. 그 후 안창호는 1910년 4월에 신민회회원들과 중국 청도(靑島)로 가서 이른바 「청도회의」를 갖고 독립운동방략을 숙의하였다. 청도회의 후 안창호는 동년 9월경 노령(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노령(러시아령)과 만주 그리고 중국 지역의 독립운동세력과 계속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연락하고 있었다. 김규식에게 주어진 임무는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건설사업의 일환으로서 몽고지방에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관학교를 세우기 위한 사전 답사를 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이 망명한 상해는 19세기 이후 동양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한 곳으로 구미 각국의 자본가들이 본국의 제국주의 침투에 힘입어 산업자본을 집중투자하여 당시 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도시로서 면모를 갖춘 상해는 동서문화가 어우러진 각양의 물질문명과 문화의 집산지였으며 당시 수준으로 보아 경제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가장 진보한 곳이기도 하였다. 상해는 만주·일본·노령(러시아령)·미주·유럽 등 세계 각지와의 교통과 통신 시설 등 연락시설이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국제적인 여론이 형성되어 정보수집이 용이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는 데에 최고의 환경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각국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정치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리하여 상해는 식민치하의 약소민족 국가에서 정치운동을 하던 지사들이 피란, 망명하기에 알맞은 곳이기도 하였다. 상해의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던 일본은 상해가 장차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책원지(策源地)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1910년 이전부터 상해에 주재한 일본영사관을 통해 상해 거주 한인들에 대한 동태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일본은 상해로 이주해 온 한인들이나 유학 온 학생들에게 일본총영사관에 주소와 성명을 제출하여 등록할 것을 강압하는 등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김규식은 김성(金成)이라는 가명으로 활약하였다. 김규식은 상해에서 북경으로 가서 잠시 머물다가 이태준과 함께 몽고로 가게 되었는데, 이는 계획보다 6개월 뒤에 이루어졌다. 이태준은 김필순과 세브란스 의전 동기로서 신해혁명(1911)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경에 망명하였다가 김규식과 함께 합류하여 몽고에서의 군관학교 설립의 임무 수행을 위하여 동행한 것이다. 그러나 몽고에서의 군관학교 설립 계획은 자금이 확보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태준은 몽고 고린[庫倫 : 지금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자력으로써 독립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는 고린(울란바토르)지방에서 의사로서 명성을 떨쳐 몽골의 모든 왕족을 치료해 주었고 그에 대한 신임은 상당히 두터웠다고 한다. 1921년 레닌정부는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을 제공하기로 하였는데, 이중 40만 루블을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치타로 옮겨왔고, 치타에서 상해까지의 운반 임무는 고린(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이 맡았다. 그는 고린(울란바토르)에서 장가구, 장가구에서 다시 상해까지 40만원을 수송하는 임무를 띠고 자동차 하나를 구입하여 북경을 출발하여 치타로 향하였다가 혁명으로 혼란한 외몽고를 통과하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이 임무는 조응순에 의해 달성되어 상해로 전달되었다. (김원봉에 의하면 이태준이 의열단에게 폭탄제조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헝가리인 마자알을 김원봉에게 소개하고자 그와 동행하여 북경으로 오던 중 세묘노프 장군의 군대와 당면, 반혁명군내의 일본인 참모인 요시다라는 자가 그를 알아보고 현장에서 총살하였다고 한다. 이는 마자알이 김원봉에게 전한 내용이다.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김규식은 상업에 종사하면서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후일 김규식은 “몽골에서 가죽을 팔았고, 화북에서 성경을 팔았으며, 상해에서 발동기를 팔았다”고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이처럼 김규식은 몽골·북경·상해 등지를 전전하면서도 독립운동세력과 연결을 갖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김규식은, 앞서 상해 망명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1912년 7월에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였고, 이곳에서 1913년 12월 17일(음력)에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영어를 교수하였다. 박달학원은 중국내지나 구미지역으로 유학하기 위하여 상해로 온 청년들에게 체계적인 어학교육을 시키고 모자라는 학력을 보습교육하며, 유학생들의 입학을 주선하여 고등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신규식이 주축이 되어 설립하였다. 당시 박달학원의 교수진으로는 김규식을 비롯하여 신채호·박은식·조소앙·조성환·문일평·홍명희 등 쟁쟁한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청년들에게 국어·국사·지리 등의 과목을 통해 「대한혼」을 키워주는 교육을 실시하여 상해지역에서의 민족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김규식은 유학 온 청년 학생들뿐만 아니라 망명애국지사들에게도 영어를 교수하였다. 김규식의 영어 강의는 철저하고 치밀하기로 이름이 났다. 당시 신채호도 김규식에게 영어를 교습 받았다고 한다. 신채호는 이미 외국의 역사책들을 독파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력을 더 쌓을 요량으로 김규식의 강의를 들었다. 신채호에게 영어수업의 필요성은 영어원서로 된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는 실력을 키우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김규식의 강의는 발음까지도 확실하게 하는 정확성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채호는 김규식의 까다롭고 완벽을 요하는 강의방식에 짜증을 내며 “발음은 쓸데 없으니 뜻만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그 사람이 꽤 까다롭게 그러는군.” 하며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있다. |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해외에 전전하고 있던 한인들은 조그마한 계기만 마련되어도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는데, 세계대전(제1차 세계대전, 1914)의 발발은 한인들에게 대단한 사건이었다. 자체 힘을 갖지 못하고 국외에서 투쟁해야 하는 한인들은 일본과 적대하는 세력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유리한 기반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러일전쟁(1904) 이후 일본과는 적대 관계였던 러시아에서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조직체로써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전쟁(제1차 세계대전, 1914)은 일본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즉 러시아는 예상과는 달리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어 일본의 요구에 따라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였고 권업회를 비롯한 민족운동단체들을 해산시켰다. 대한광복군정부를 주도한 이상설은 러시아의 협조를 받기는커녕 일본인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당국에 의해 연해주에서 추방당해 상해로 왔다. 그리고 일본은 전세에서 유리해지자, 중국에 21개조의 굴욕적인 조항을 강제하여 체결하였다. 한인들은 일본과 적대적인 중국과 독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당연히 독일이 승리할 것을 예상하였다. 독일이 승리하면 일본은 패전할 것이며 이때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것이다. 노령(러시아령)으로부터 추방된 이상설은 상해의 박은식·신규식 등과 합류하여 1915년 3월에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신한혁명당을 설립한 목적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보고, 독일은 전쟁 후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래서 독일과 중국을 상대로 사전공작을 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신한혁명당은 국내에 조직원을 파견하여 고종을 망명케 하여 추대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한혁명당의 예측과는 달리, 일본은 러시아·프랑스·영국을 도와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하였고, 오히려 국제적으로 유리한 정세를 조성해 가고 있었다. 이럴 즈음 김규식은 능통한 외국어실력을 바탕으로 중국 각지에 진출한 서양인 상사들과 쉽게 교제하여 1916년 독일인 계통의 앤더슨마이어회사에 입사하였다. 독일과 일본이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예단하고 독일계 회사를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이 회사는 북경의 장가구(張家口)에 지사를 두고 있었는데 김규식은 이곳에 취업하기 위해 몽고를 떠났다. 김규식은 2년간 이곳에 거주하면서 국내에 남기고 온 부인, 아들과 합류하여 가족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부인은 1917년 당시로서는 불치병인 폐병을 앓아 작고하였다. 장가구에 있으면서 김규식은 상해와 미주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수시로 연락하였다. 1917년에 들어오면서 세계정세는 큰 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제정이 무너졌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압제하에 있었던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피압박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미국은 1917년 4월에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하고 연합국 측에 가담하였다. 중남미의 각국도 연합국에 가담하여 새로운 세력을 구축해 가자 독일을 중심한 동맹국들의 패전이 확실해졌다. 한편 중국에서는 1916년 원세개정권이 무너져 광동(廣東)에 호법정부(護法政府)가 세워졌고 동정부는 연합군에 합세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맹관계와 적대관계라는 정세를 이용하고자 했던 한인들은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한 방향을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해를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 17명은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에게 대동단결을 호소하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대동단결을 위하여 통일기관, 통일국가, 원만한 국가를 달성해야 함을 주창하였다. 이 선언에는 신규식·조소앙·신석우·박용만·한진교·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성환·이용혁·홍위·박기준·신빈 그리고 김규식이 참여하였는데, 김규식은 김성(金成)이라는 가명으로 선언에 참여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해외동포사회에 널리 유포되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갖게 하였고, 또한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한 후, 김규식은 1918년 3월에 앤더슨마이어회사가 외몽골의 수도인 고린(울란바토르)에 지점을 열게 됨에 따라 이곳의 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고린(울란바토르)으로까지 가서 근무한 김규식은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만주에 땅을 사는데 투자하고 이를 개척하여 목장을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김규식이 이러한 계획을 갖게 된 데에는 아무런 생활대책이나 경제적 기반 없이 독립운동에 뛰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허망한 것인가를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투쟁을 벌이기 위하여, 그리고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깨닫고 김규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여기서 김규식의 합리적인 사고의 일면을 엿보게 된다. 1918년 11월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의 연합세력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일본을 포함한 전승국 27개국은 1919년 1월 18일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집합하여 강화회의를 열고 전후 대책을 강구하였다. |
제1차 세계대전은 약소민족들에게는 의미있는 전쟁이었다. 피압박민족인 인도·인도차이나의 민중들은 그들이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군대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고 러시아에 귀환한 한인들도 제정러시아군대에 편입되어 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여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식민지 지배국에 대해 자치권 내지 정치적 독립을 얻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폭압적이고 착취적인 식민주의, 제국주의는 정의와 평화, 인도주의와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새로운 질서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제국이 무너지고 볼셰비키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에 의해 약소민족의 해방이 주창되자 한인을 비롯한 약소민들은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또한 미국 윌슨대통령은 미의회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약소민족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세계의 모든 질서가 억압과 착취의 불의로부터 정의와 인도의 인류애로 나가려 한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변화하는 세계의 정세를 느끼고 있었던 상해의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18년 8월 하순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11월 말 미국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이 파리강화회의(1919)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를 위한 환영대회에서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여운형이 참가하였다. 크레인은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에서 전후 식민지문제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피압박민족의 의사를 존중하여 반영될 것이라고 연설하였다. 이에 여운형은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에 중국대표로서 선정된 왕정연(王正延)에게 크레인과 면담을 부탁하였다. 크레인과 만난 여운형이 한국독립의 가능성을 문의하자 크레인은 윌슨의 선언 중 제5항에 제시된 “모든 식민지 문제의 공평한 조치”는 모든 약소민족에게 해당 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여운형은 면담을 마친 후 신한청년당에 돌아와 동지들과 파리강화회의(1919)에 대한 진정서 제출 문제와 대표자 파견문제를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김규식을 한국의 대표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한국대표가 파리강화회의(1919)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크레인 특사와 토마스 밀라드(Thomas F. Millard)를 찾아가 한국문제가 상정되기를 희망하는 진정서를 각국대표에게 전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발간되는 『밀라드 리뷰』지의 사장인 밀라드씨는 파리강화회의(1919)에 중국대표단 고문 자격으로 참석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김규식은 업무관계로 북경에 와 있었는데, 여운형은 김규식에게 파리강화회의(1919)의 한국대표로 활동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규식이 대표로 선정된 것은 그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정세를 분석해 내는 능력이 독립운동계에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로 선정된 김규식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어떻게 하면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그는 미주에 있는 박용만에게 편지를 내어 협조를 요청하였고, 나름대로 백방으로 업무수행을 위한 정보를 수접하는 등 준비에 들어갔다. 김규식은 부인과 사별한 후 홀로 지내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새문안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할 당시부터 알고 있었고, 그와는 오래전부터 돈독한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던 김필순의 누이동생인 김순애와 재혼하였다. 김순애는 정신여고를 나와 1910년 당시 학교선생으로 재직중이었는데, 일제가 학교에서 한국역사교육을 금지시키자 역사책 몇 권을 감추어 놓고 자신의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역사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활동이 일인들에게 발각되자 김순애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그의 오빠인 김필순도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므로 김순애는 오빠와 함께 망명하였다. 김순애는 중국 남경에서 명덕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김순애는 김규식의 부인과는 정신여학교 동창으로 친분이 있었고, 본래는 김규식이 혼인하기 전부터 혼담이 오고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 와서도 양쪽 집안사람들은 독립운동의 동지로서도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지냈다. 김규식의 부인은 병이 깊어지자 김규식에게 자신의 동창인 김순애 여사와의 결혼을 부탁하고 임종하였다. 김규식과 김순애의 결혼은 남경의 어느 선교사댁에서 삼사인의 증인 앞에서 서약하는 의식으로 치루어졌다. 김규식은 결혼한 그날로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위해 상해로 갔다. 그리고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파리강화회의(1919)에 대표파견 문제를 의논하였다. 김규식을 포함한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한국민족의 주장과 청원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 세계에 알릴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김규식은 자신은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에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며, 국내를 비롯하여 일본·만주·노령(러시아령) 등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독립선언을 하도록 하는 양면운동을 전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의견이 받아들여져 국내에는 서병호와 김순애, 그리고 몇몇 사람을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12개 항목에 걸친 임무를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에서 수행할 것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활동임무는 다음과 같다. 파리강화회의(1919)에 한국대표로 김규식이 파견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밀사들에 의해서였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이후에 국내에서 3·1운동(1919)이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였다. 혈혈단신으로 파리에 도착하였으나 3·1운동(1919)의 소식을 접하고 용기를 얻은 김규식은 우선 파리 시내 중앙 샤토당가(街) 38번지의 집을 세내어 한국대표관을 설치하였다. 김규식은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 스위스 뚜릭대학에 재학 중인 이관용(李灌鎔)에게 급히 와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졸업시험 중인 이관용은 김규식의 전보를 받고 즉시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5월 초순에는 상해에서 김탕(金湯)이 도착하였고, 미국지원병으로 구주전쟁(제1차 세계대전, 1914)에 출전한 바 있는 황기환(黃玘煥)이 6월 3일 독일에서 파리로 와 사무를 담당하였다. 김규식은 황기환을 서기장에 임명하였다. 이어 6월 그믐에 조소앙이, 7월 초에 여운홍이 상해로부터 도착하여 대표관 사무를 도왔다. 대표단의 사무는 전등이 없어서 밤이면 촛불을 켰고, 밤을 세워 일을 하기도 하였다. 각처에서 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각 처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여 정리하였으며, 신문사와 유력인사들을 방문할 계획을 구상하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는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국외의 한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한국독립운동의 실정을 세계에 선전하고 한민족의 정당한 주권을 주장하고자 국내외 각처에서는 임시정부수립운동이 일어나 국내에 3개처, 국외에 2개처에 임시정부수립이 발표되었다. 국내외 각처에서는 김규식이 이미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어 활약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러 곳의 임시정부에서는 김규식을 각료로 선임하였다. 1910년대 초반 한인민족운동의 요람지였던 노령(러시아령)에서는 1919년 3월 27일 대한국민의회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김규식을 강화회의 대표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상해의 신한청년당원들이 주축이 되어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김규식을 외무총장에 임명하였다. 국내에서는 천도교의 주도로 4월 1일에 기호지방에서 전단(傳單)적 정부 형태인 대한민간정부가 수립되는데, 여기서는 의정부장관으로 선임되었고, 4월 17일에 평안도지방에서 수립된 신한민국정부에서는 외무차장에 선임되었다. 또한 4월 2일에 인천의 만국공원에서 집결하여 23일에 13도 대표 25명의 국민대표의 명의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에서는 학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 주파리대표위원으로 임명하여 신임장을 파리에 송부하였다. 이에 따라 김규식은 한국대표관의 명칭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부위원장에 이관용을, 서기장에 황기환을 임명하였다. 김규식은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신임장을 프랑스정부를 비롯하여 각국 원수 앞으로 발송하고 신한청년당·대한국민회,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한편 4월 26일에는 파리위원부에 통신국을 병설하고 『통신국 회보』를 출간하였다. 이 회보 창간호에서 김규식은 현순 목사가 제보한 3·1운동(1919)의 소식을 상세히 전하였다.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가 열리자 김규식은 5월 10일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 석상에 「공고서」를 제출하였으나 열강들의 냉담함으로 한국 독립문제를 상정시키지 못하였다.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는 약소국들의 의견은 무시되었고 전쟁에 승리한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이권도모를 위한 회의로서 제국주의적 본질을 드러내었다. 회의에 상정되지는 못하였으나 「공고서」는 사본이 작성되어 별도의 비망록과 함께 동봉되어 각국의 원수들과 정부, 그리고 국회에 보내졌고, 각국의 정치가들과 신문사 및 주요 기관에 배포되어 한국민들의 주장을 널리 전파하였다. 이처럼 분주한 활동을 전개하자 일본 외무성과 대회에 참석 중인 일본 대표들은 김규식의 활약을 주의 경계토록 하고 하루에 세 차례씩 프랑스 신문사에 전화하여 한국대표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문지상에 게재치 말라고 요청하는 등 방해 공작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이후로 한국문제는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한국독립을 지원하자는 국제여론이 일어났다. 공고서의 제목은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이었다. 공고서와 비망록은 역사적 사례와 국제관계, 국제법 등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격하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2. 일본의 부도덕성을 지적하였다. - 한국민의 민족자결의식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은 한국인 학교의 수를 규제하고 한국말과 한국역사교육을 금하고 한국학생의 외국유학을 방해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있다. 근대화의 목적도 한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에 목적이 있다. 양자의 관계는 완전히 주종관계로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에 위배된다. 일본은 제국주의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한국내의 기독교 및 서양선교사의 활동을 탄압하고 있다. 이는 로마제국의 시이저(케사르)가 기독교인을 박해한 것보다 훨씬 심하다. 연합국이 싸워 온 독일이나 일본은 전쟁을 통하여 패권을 추구하는 똑같은 부도덕한 나라들이다. 독일이 병합했던 소위 동쪽 제주(諸州)에 있어서 폴란드인,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의 덴마크인, 알사스 로렌의 프랑스인에 대한 강압적인 독일인화 작업에 비하여 일본의 한국민의 일본신민화 작업은 엄청나게 혹독한 것이다. 그 예는 농지의 수탈, 부(富)의 규제의 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은 인도 및 동남아 식민경략에 있어서 토착민의 이익을 존중하고 있다. 양자간의 관계는 상호신용의 정신으로 이어져 있다. 일본인은 부도덕한 성관습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확산시키고 있다. 전 아시아 -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 모든 중국의 항구 뿐 아니라 사이공·방콕·싱가포르·페낭 나아가 봄베이, 카라치까지 일본의 홍등가가 퍼져 나가고 있다. 3. 열강에 대한 일본의 위협을 강조하였다. - 일본의 한국독점이 계속된다면 이를 발판으로 중국의 인력과 자원을 장악하여 전아시아의 패권을 구축할 것이므로 이는 동남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영국 및 프랑스·네덜란드 이익에 큰 위협이 될 것이고 나아가 일본은 호주 및 미국에 대한 일본인 이민정책 및 적도 이북 도서의 해군기지화 작업을 통해 태평양의 독점적 지배를 꾀할 것이며 이는 영국과 미국의 이익에 해가 된다. 무역에서 일본의 한국시장 폐쇄 정책은 문호개방원칙에 위배되며 이로 미루어 보아 일본은 전 극동에서 대외봉쇄정책을 취할 것임에 틀림없다 4. 한국민의 독립투쟁을 알리었다. - 한국민은 한달 전인 3월 1일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혁명을 시작했다. 혁명의 주체는 한반도·중국·시베리아·하와이 및 미국에 산재한 1,870만 한국인을 대표한 300만으로 구성된 민족독립연맹이다. 4월 7일 동연맹은 파리한국민 대표단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통보해 왔다. 5. 파리강화회의(1919)가 한일합병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무효화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었다. - 이 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은 기만과 강압 상황에서 체결되었으므로 국제법상 합법적인 문서가 아니다. 순종(純宗)은 일본의 괴뢰 황제였고 이 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체결할 권리가 없다. 한국민의 동의가 없는 이 조약은 합법성이 결여되어 있다. 합병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에 관한 제조약에 의한 국제적 보장에 위반된다. 이와 같은 국제적 보장은 국제법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나라가 파리강화회의(1919) 같은 국제적 대회에 참가한 열강들의 동의없이 행한 일방적 행위는 국제법에 위반된다. 파리강화회의(1919)의 목적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개조에서 표명된 제원칙에 입각하여 참석 국가들 사이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국제문제 해결의 원칙으로 14개조를 받아들인다고 이미 표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인민과 민족의 동의없이 한국의 주권을 계속 유린하고 있음은 명백히 이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는 한일합병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이 무효함을 선언하거나 이를 폐기함을 포고해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7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2차 인터내셔널회의인 만국사회당대회가 개최되자, 파리위원부에서는 이관용과 조소앙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이 결의안은 참가한 25개국의 찬동을 얻어 통과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조소앙은 한국독립승인 결의안을 확정짓기 위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제2차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에 참가하여 다시「한국독립문제실행요구안」을 제출하였다. 이 요구안은 각국 10개국 대표들은 이미 스위스에서 통과된 한국문제를 가지고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각자 국회에서 이를 통과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역시 영국·벨기에 대표들의 찬동으로 요구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일제가 외국의 정치가를 매수하고 언론에는 집중적으로 선전 활동을 하여 일제의 한국지배를 ‘정당화’함으로써 구미인들에게 잘못된 한국관을 키워주고 있을 당시 파리위원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파리위원부는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를 취재하려온 각국의 신문기자들과 외교관들, 그리고 프랑스의 국회의원들과 교분을 갖고 8월 6일 외국기자클럽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에는 80여 명의 명사들이 초빙되었는데, 불어로 된 한국독립선언서와 조오지 드크록이 쓴 『가난하나 아름다운 한국』이라는 책자와 조그마한 한국 깃발이 기념품으로 배부되었다. 연회석상에서 김규식은 참석한 내빈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한 후,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고 한국에는 평화가 없으며 한국인은 독립을 원한다는 요지로 연설을 하였다. 김규식에 이어 중국 북경대학교수인 이유영과 전 모스크바 시의회의장인 미노, 『뉴욕타임즈』의 셀돈, 프랑스의 시의원인 마린과 미국의 주간 잡지인 『하퍼즈』의 기본즈 기자 등이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한국의 주창에 찬동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김규식은 여운홍과 함께 8월 8일 미국으로 향하였다.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가 종료된 직후부터 김규식은 여러 차례 이승만으로부터 함께 미주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받았다. 김규식이 미국으로 감에 따라 파리위원부는 이관용이 위원장대리가 되었고 황기환이 서기장이 되어 위원부의 업무를 계속하였다. |
미국에 있는 한인들은 1904년에 설립된 공립협회를 기반으로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인국민회에서는 필라델피아에 대한민국공보국을 설치하고, 서재필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미국인들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재필도 7월 16일 외교전권대사로 임명받아 정부의 공식대표로 활동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의 자격으로 1919년 5월에 워싱턴 콘티넨탈 빌딩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두고 구미위원부를 설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8월 25일에 이 기구는 한국위원회로 발족되는데, 김규식은 구미위원부 의장으로 임명교섭을 받고 이를 받아들여 미주에서 외교활동을 벌리고자 미국으로 향하였다. 김규식이 도착한 후 한국위원회는 9월에 구미위원부로 개편되었다. 그 후 구미위원부는 파리위원부와 필라델피아 외교통신부를 흡수하여 구미 각지에서 시행할 정부행정을 대행하였고 외교업무를 통합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김규식은 임병직의 보좌를 받아 외교업무를 수행하였다. 김규식은 이승만·서재필과 함께 미국무성과 당국자들을 개별 접촉하여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한국에 대한 후원을 요청하는 등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어 한국의 입장을 밝히고 미국정부 각 기관에 서한을 보내어 미국이 일본의 침략정책과 야만적인 압제를 견제해 주도록 운동하였다. 한편 구미위원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여 누구보다도 한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헐버트(H. B. Herbert)와 스코필드(F. W. Scofield) 등은 한국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열어 일제의 포악한 만행을 폭로하였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한국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문명의 길로 나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친일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활동은 미국인들이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고 일본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구미위원회는 한·미(한국·미국)관계를 역사적으로 회고하고 민족독립의 불타는 염원을 소상하게 기록한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를 구미위원부의 고문으로 위촉받은 변호사 돌프(Fred A. Dolph)가 「한국문제」라고 이름하여 미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미조리주 출신의 상원의원 스펜서(Spencer)는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언급하고 1882년 한·미(한국·미국)간에 체결한 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 1882)에 의거하여 미국이 한국에 대한 어떠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지의 여부를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다. 이후 여러 명의 미의원들이 미의회에 한국문제 전반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처럼 미의원들이 한국문제에 대하여 발언한 내용은 미의회의사록에 기록되었는데, 이에 대한 기초 자료는 모두 구미위원부에서 제공하였다. 한인들이 미국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은 전후 미국이 국제사회에 새로운 지도국가로서 표면에 떠올랐고 국제연맹을 구성하여 세계의 판도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미위원부는 미국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양대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에 대해서도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구미위원부에서는 1919년 7월 1일부터 필라델피아에서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언론을 통한 선전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김규식은 자신의 그간의 생각을 정리하여 1920년 11월에 간행된 9호에 「극동정세(The Far Eastern Situation)」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글이 『한국평론』지에 실릴 때는 이미 김규식이 상해를 향해 미국을 떠난 후였다. 이 글에서 김규식은 자신의 국제적 안목에 대한 논리를 정연하게 펼쳐보였는데,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팽창을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면 15년 뒤에는 일본세력이 미국·영국 등 각국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강대국들이 편의주의에 치우쳐 일본이 한국과 같은 약소국가를 희생시키는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의 영·미(영국·미국) 각국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도 이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하였다. 당시 김규식은 국제관계와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외교 방향은 도덕적이며 감정적인 울분만으로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기에 앞서 일본의 팽창이 강대국들의 이익에 위배됨을 들어 일본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김규식의 예상은 거의 맞아 일본은 후일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는 태평양 연안에서의 이권을 두고 격돌하게 되었으니 김규식의 국제적인 안목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외교활동 결과, 일부 미의원들은 한·미(한국·미국) 간에 수호 조약(한미수호통상조약, 1882)을 폐기하고 일본의 한국 통치를 보장한 정부의 처사를 공격하고 한국을 동정하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일본과 협조관계를 맺고 이를 기반으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지원받을 수 없었다. 김규식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잦은 두통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증상은 파리위원부에 있을 무렵부터 있었다. 많은 신경을 써야 했던 김규식은 증상이 더욱 심해져 편지를 쓰기에도 곤란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김규식은 고통이 찾아올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조용히 앉아서 쉬면서도 측근 인사들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알리지 않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였다. 그러나 증상은 더욱 악화되어 눈이 보이지 않아 업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김규식은 워싱턴에서 두골의 전면 좌측을 파헤치는 대수술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수술이 끝난 후 1년 반 동안은 일체 활동을 하지 말고 정양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규식은 수술이 끝나고 퇴원하자 바로 활동에 들어갔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업무들을 두고 편히 휴양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리한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수술 후유증으로, 김규식은 20년간 간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두골이 절단된 부분에서 혹이 생겨, 김규식의 호는 혹 있는 선비라는 뜻인 우사(尤士)가 되었다. 해외 독립운동계에서는 김규식의 혹이 독립운동하다가 생겨났다고 하여 ‘독립혹’이라고도 불렀다. 김규식이 유럽과 미주에서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열중하고 있을 때,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러시아령)의 국민의회정부, 그리고 한성의 임시정부는 단일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임시정부가 상해로 통합되자 각지에서 활약 중이던 독립운동계 인사들이 정부 조직을 갖추어 가기 위해 속속 상해로 집결하였다. 상해에서는 1919년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임시의정부회의가 개최되어 통합 임시정부 각료를 확정하였다. 여기에서 김규식은 학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통합임시정부의 조직은 한성정부안을 따른다는 결정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주에서 외교활동에 전념할 당시 김규식의 직책은 임시정부 학무총장 겸 구미위원장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김규식은 주로 미국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의욕적으로 선전활동을 하였지만 결과는 미의회에서 한국문제가 간헐적으로 논의되었을 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미주에서 활약 중인 1920년 2월에 그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노백린·신익희 등과 함께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학무총장임에도 불구하고 외교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가 정리됨에 따라 미국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임시정부에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을 사임하고자 하였으나 수리되지 않자 임시휴가를 얻어 1920년 6월에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동년 12월 14일에 호놀룰루에서 남경호를 타고 다시 상해로 향하였다. 김규식이 떠난 구미위원부는 현순 목사가 대리로 위원장직을 맡았고 서재필과 정한경이 위원으로써 업무를 계속하였다. |
김규식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21년 1월이었다. 임시 정부 요인들과 상해의 한인들은 환영회를 열어주고자 하였으나 김규식은 형식과 허례라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앞서 상해에 도착한 대통령 이승만은 환영회를 가졌는데, 김규식이 거절하자 이를 두고 건방지다고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입장이 곤란해진 김규식은 주변의 주선으로 1월 27일에 상해 인성학교에서 개최된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규식은 자신이 환영회를 거절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김규식이 다시 돌아온 상해는 혼돈의 와중에 빠져 있었다. 당시 통합 임시정부의 과제는 전 해외 한인들의 통일 정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주와 노령(러시아령)지역을 결속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노령(러시아령) 국민의회 대표인 원세훈과 수차례 협상을 통해 통합에 합의하였고 결과 이동휘·문창범 등 노령(러시아령)측 인사들이 상해에 도착하였다. 본래 협상에서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 해산하기로 되었으나 그대로 존속하면서 임시정부개조안과 임시 헌법개조안을 가결 통과시키고 상해 임시정부의 개조작업을 완료하였다. 이렇게 자신들이 협상하던 내용과는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자 노령(러시아령)측 인사들은 크게 반발하고 정부각료의 취임을 거부하였다. 한편 이동휘를 중심한 상해의 한인공산주의자들이 임정하고는 별개로 활동 기반을 넓혀 반임정 세력을 형성하였고, 1920년 9월에 북경에서는 반임정세력들이 모여 「군사통일책진회」를 구성하고 임시정부에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등 임시정부는 전민족적인 결집에 실패하고 있었다. 이렇게 임시정부가 출발부터 난산을 거듭하자 임시정부측에서는 미국에 있는 대통령 이승만과 학무총장 김규식이 조속히 상해로 돌아와 직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김규식은 상해에 도착한 후 이러한 사태를 파악하고 이를 수습하고자 임시정부 제도변경안을 제출하였다. 그 안이 받아들여져 김규식은 신규식·안창호와 함께 제도변경 기초위원으로 피선되어 현 임시정부의 제도를 검토하였고 임시정부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고심하였다. 김규식의 안은 대통령은 집정관 총재로 하며 국무총리를 없애고, 임시정부의 국부(局部)의 직책을 조정하되 각부와 노동국은 그대로 두고, 총장은 부장으로 하며 각부의 차장·국장·참사·서기를 하나의 명칭과 계급으로 통일하여 부원으로 통칭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각 지역에서 나름대로 독립운동의 공적을 쌓은 역량있는 인사들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각료 구성에서 서열이 정해짐으로써 오는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 안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문제는 단순히 제도적인 측에서 기인했다기보다는 당시 여러 가지 안팎의 정황이 임시정부에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불안정 때문이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5월에 국내와의 연결을 시도하여 비밀조직인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였지만 일본의 극심한 탄압으로 거의 파괴당하고 말았다. 또한 임시정부는 만주에 있는 독립군 단체들을 통할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은 만주의 군벌들에게 외교적 위협을 가하고 그들과 연합하여 독립군들을 감시함으로써 피차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대통령 이승만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승만이 미국교포들에게 애국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에는 적은 액수만을 보내고 구미위원부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하였다는 소문에다가, 1918년에 윌슨 미대통령에게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청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대통령에 대한 탄핵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극렬히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확고한 친미노선으로 일관하였고, 이동휘는 친소노선을 취하였다.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이러한 혼란과 분열을 수습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노령(러시아령)의 한인들과 굳건히 단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구미위원부 시절 이승만과 함께 활동하였지만 미국정부가 우리의 독립운동을 원조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않았다. 당시 안창호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오히려 신흥 노농 국가인 소련에 한국독립 원조의 기대를 걸었다. 러시아 한인들은 1863년 이후 시베리아지역에 집단적으로 이주하였고 한인들은 불모의 땅을 개간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시베리아의 연해주 등지에 한인촌을 형성하며 정착하였다. 한인들은 차츰 자치적인 한인들의 민회를 조직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민족운동단체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시베리아국민회 지방총회와 권업회인데 1910년 초반에 이들 단체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1914)이 발생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종래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전쟁동맹국이 되었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러시아 당국은 한인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인들이 조직한 단체들은 해체당하였고, 독립운동가들은 추방당하거나 투옥되었다. 그리하여 노령(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은 상당기간 침체되었다가 러시아혁명(1917)이 극동 시베리아에까지 전파되자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부흥하게 되었다. 볼셰비키혁명(러시아혁명, 1917) 세력들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공격하며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열렬히 지지한다고 공언하였다. 이에 고무된 한인들은 러시아혁명(1917)의 성공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를 분쇄해 버리고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파악하였으며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혁명세력을 도와 함께 투쟁하였다. 그러나 혁명(러시아혁명, 1917)의 파급을 두려워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제 간섭군을 시베리아로 파견하여 혁명의 기운을 끊어 버리려 하였다. 미국이 체코슬로바키아군 구원을 위한 공동출병을 제창하자 영국·프랑스·일본 등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국제 간섭군이 성립되었다. 이 때 일본은 최대의 병력을 연해주와 흑룡주에 파견하여 불법 점령하고 시베리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획책하면서 시베리아에서의 혁명운동과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이 한인들의 독립투쟁의 열정을 식히지는 못하였다. 한인들은 혁명세력과 연대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한인들의 빨치산투쟁은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한인들이 목숨을 바쳐 혁명에 참여한 것은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쳐 혁명을 완수케 함과 동시에 전쟁의 경험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기를 공급받아 앞으로 있을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혁명(러시아혁명, 1917) 이후 노령(러시아령)의 한인들은 전러한족회중앙총회라 하는 전노령(러시아령) 한인의 조직체를 구성하고 일본이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당히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령(러시아령)의 한인들은 간도와 국내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고 독립선언을 하고자 준비하던 중 국내에서 3·1운동(1919)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노령(러시아령)에는 많은 한인들의 무장결사단체가 조직되어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노령(러시아령)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인동맹단」은 강우규를 국내에 파견하여 일본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기세를 올리자 일본의 무장군대는 한인촌을 습격하여 촌락을 파괴시키고, 독립운동가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다른 간섭군들이 철군한 후에도 계속 시베리아에 주둔하여 독자적인 권익을 확보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정부는 극동시베리아에까지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일제와의 전면 전쟁은 회피하였다. 그래서 치타에 일종의 완충정부라 할 수 있는 극동공화국을 수립하고 이를 앞세워 일제와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면에서는 언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한인 독립운동세력을 이용하고자 독립운동가들을 원조하고 한국의 독립을 후원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1918년 6월에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으며, 3·1운동(1919)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4월에 박진순을 모스크바 레닌정부에 파견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을 후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운동자금을 제공받았다. 그리고 취임은 하지 않았으나 통합 임시정부의 외교총장으로 임명된 박용만은 1920년 늦은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노농정부는 피차의 이익을 위해 공동 동작을 취하며 노농정부는 중·로[中·露(중국·러시아)]지방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군대 주둔 또는 양성을 승인하고 이에 대하여 무기를 제공한다는 등의 비밀조약을 체결하였다. 한인들은 일제와의 결전의 날을 기다리며 만주·노령(러시아령) 등지에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노농정부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또한 한인들은 치타의 극동공화국과도 「독립군과의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비밀협정」을 맺었는데, 치타정부의 통치관할 안에서는 독립군의 주재(駐在)와 양성을 허용하며 독립군은 공산주의 아래서 양성함은 물론, 치타정부 지정자의 절대 지휘를 받아 제3국과의 개전(開戰) 때에 독립군을 이용할 수 있고 독립군이 사용하는 무기탄약은 치타정부에서 이를 공급하는 데 다만 영원한 급여가 아님을 약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들 비밀조약들은 모두 군통치권은 노농정부 측에 있음을 확실히 하고 있으나 독립군의 존재를 인정하고 한인들과 연대하여 일본에 결전하고자 하는 양측의 의도를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약속들로 인해 한인들은 소련과 연대하여 독립을 달성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대신 소련 측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초기에는 그들의 요구대로 공산주의를 선전하였다. 한편 1920년 말경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2차 대회에 한형권을 대표로 파견한 이동휘는 노농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으로 60만 루블을 받고, 이중 40만 루블이 김립을 통해 12월경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 자금을 둘러싸고 임시정부의 민족진영과 이동휘의 상해공산당 진영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분열하였다. 그러나 이 자금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자금,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1922) 파견 한인의 여비, 그리고 국내에서는 『신생활』잡지 발간 자금 등에 유용하게 쓰여졌다. 해외 독립운동의 독립자금은 미주동포들의 의연금에 크게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로써 양국의 관계가 정세에 의해 결렬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미국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소비에트정부와 연대관계를 맺어 독립운동에 대한 우방국가의 지원을 받으려는 이 같은 의도는 당시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한인들의 일정한 추세였다고 보여진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방략은 한인군인을 양성하여 전쟁준비를 하면서 비밀리에 모스크바 노농정부와 교섭하고 중국배일세력과 연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중국·러시아 3국 연맹 체제를 만들고 3국 대표자들로 하여금 연맹의 최고 기관을 조직하며,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3국이 모두 최고기관의 명령을 따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3국 연맹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에 돌입하면 일본 내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선전하여 일본 국내에 내란을 일으키고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진영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안창호도 그의 일기(1921년 2월 3일·5일자)에서 혼란한 시세를 수습하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안을 제시하였다. 2. 사업진행책은 해외 동포의 민적(民籍)을 실시하여 납세와 병력, 볍률복종의 의무를 다하는 국민을 모집하고 이를 통치하는 기구를 설치하여 조직과 단결을 강화한다. 3. 지원병을 모집하고 둔전(屯田)제도 같은 것을 실시, 응모한 군인에게 직업을 장려하여 규율있게 편성, 서로 연락이 있게 하고 군사훈련을 하였다가 장차 시기가 올 때에 독립군으로서 참가한다. 4. 러시아·중국·한국 3국간에 비밀동맹을 체결하고 연맹 결과에 따라 무장과 군수품을 갖추고 일본 안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선전하여 내란을 조성하고 미국과 일본간의 혼란을 일으켜 전쟁을 촉진시킨다. 5. 그 중 당면한 일은 러시아에 밀사를 보내어 레닌정부와 연락하고 노령(러시아령)에 있는 한인공산당과 타협함으로 북경·상해 등지에서 정부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봉쇄할 것과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던 다수 청년을 지원병으로 수용·훈련함으로써 청년층의 불평 행동을 제거한다. |
일본이 극동지역에서 군사적으로 팽창되어 가자, 미국은 건함(建艦) 경쟁으로 인한 자국의 재정부담을 줄이려고 하는 한편, 일본의 세력 팽창에 주목하고 이를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8월 11일 미국의 하아딩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1914)의 전승국인 미국·영국·중국·일본 등 9개국 간에 해군군비 축소와 아울러 태평양의 평화와 중국의 영토보존과 정권독립 등 극동지역에서의 문제들을 토의할 것을 제안하였다. 워싱턴회담(워싱턴회의, 1921) 개최소식에 접한 한인들은 회의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앞서 이를 파리강화회의(1919)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 독립을 성취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태평양회의연구회를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숙의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신익희를 대표로 선정하여 파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규식과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1919)에서 강대국들의 회담이 결코 약소국들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었던 경험에 비추어 이 회의(워싱턴회의, 1921)의 성과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으며 대표로 파견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김규식은 워싱턴 군축회담(워싱턴회의, 1921)이 만주 및 몽골에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던 미국이 앞서 중국의 영토와 이권을 잠식하고 있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개최하려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기대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워싱턴 군축회담(워싱턴회의, 1921)에의 대표는 이승만과 미주에 있는 서재필·정한경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은 본회의의 참가를 이유로 1921년 5월 20일 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가서, 「군축회의를 위한 한국위원회」를 발족하고, 미국의 고위층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청원 및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코민테른에서는 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한 워싱턴회의(1921)가 개최되자 이에 대향하여 극동피압박민족대회의 개최를 제창하고 각 민족들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새로이 임시정부를 창조하려는 파들이 노령(러시아령)의 인사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고 레닌정부는 한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므로 모스크바에 인원을 파견하여 공식적으로 구체적인 사업을 상의하려 하였다. 안창호는 혼란한 임시정부를 개혁하고 레닌정부와의 연합을 꾀하고자 김규식과 이 문제를 상의하고, 앞서 안창호 일기에서 제시한 방략을 진행시키고자 하였다. 그럴 때 동방피압박민족대회 개최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동방피압박민족대회는 처음에 이르쿠츠크에서 워싱턴 군축회의(워싱턴회의, 1921)와 때를 같이 하여 열릴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22년 1월 21일로 연기되었다. 명칭도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이 참가함에 따라 극동인민대표대회(1922)로 바뀌었다. 일본 대표들이 참석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의 무산 계급과 피압박민족간에 공동전선을 펴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워싱턴대회(워싱턴회의, 1921)에 참석을 거부한 김규식과 여운형은 소비에트 노농정부야말로 한민족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나라로 보고 이 대회의 참석을 결심하였다. 이 대회는 소련·중국·몽골·일본·인도·자바 등에서 144명의 정식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한국대표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포함하여 상해·치타·이르쿠츠크에서 활동 중인 한인 52명이 참가하였다. 이는 각 국의 파견 대표 중 가장 많은 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한인들이 본 대회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었던가를 알 수 있다.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대회 참석을 앞두고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당후보로 입당수속을 하였으나 곧바로 탈당하였다. 상세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회의 참석과 레닌정부의 원조를 받고자 입당하였다가 정치성에 얽매이지 않으려 탈당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 일행의 여행경비는 이동휘가 레닌정부로부터 받은 40만 루블 가운데에서 지급되었다. 김규식은 여운형·나용균과 함께 1921년 11월경 상해를 떠나 만주를 지나서 소련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미행을 당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북경 장가구(張家口)로 가서 그곳에서 몽골을 통해 소련으로 들어갔다. 이 경로를 택한 것은 아마도 김규식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장가구에서 활동했을 때 친분이 있었던 북경 대학의 콜맨(Coleman) 교수의 아들이 장가구에서 모피장수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도움을 받아 김규식 일행은 장가구에서 몽골의 고린(울란바토르)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었다. 고린(울란바토르)에서부터는 마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 걷기도 하면서 소련 국경지대인 트로스차스카라에 도착하였다. 김규식 일행이 외몽골지역을 거쳐 온 시기는 당시 러시아제정파의 거두인 웅겐 남작이 2만여 명의 반혁명군을 이끌고 볼셰비키세력과 반항전을 계속하다가 전멸한 직후로, 외몽골은 독립자주를 선언하고 고린(울란바토르)에 있는 중국 관료들을 모조리 내쫓아 무정부상태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마적단까지 출몰하여 이 곳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지대였다. 이곳을 무사히 통과하여 소련국경에 도착한 김규식 일행은 이르쿠츠크로 떠나기 앞서 사하로프(Safarov)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고, 베르크노이딘스크에서 사흘을 보낸 후 시베리아철도를 타게 되었는데, 이때의 상황을 여운형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 만주의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한편 국내로 자꾸 진격해 들어와 일본군을 공격하며 식민통치에도 영향을 끼치자,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조선에 주둔 중인 나남사단(제19사단)과 시베리아에 출병 중이던 제21사단을 만주에 집결시키고 만주에 주둔 중이던 관동군과 긴밀히 협조하여 3면에서 독립군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자 한 것이다. 일제는 만주지역 군벌에게도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협조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일본은 중국영토인 만주에 군대를 출동시키기 위해서는 적당한 구실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하여 마적으로 하여금 일본 영사관을 습격케 한 이른바 「혼춘사건(훈춘사건, 1920)」을 일으켰고 이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토벌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독립군은 원래의 근거지를 떠나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고자 백두산록으로, 혹은 중·소(중국·소련) 국경지대와 나재거우 밀산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였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연합 독립군 부대는 이동하던 중 일제의 토벌군과 격전을 벌여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이 전투가 청산리대첩(청산리전투, 1920)이다. 독립군에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1920년 10월 초순에 북간도 전역에 침입하여 민간인에게 분풀이를 자행하였다. 무차별적인 살인·폭행·방화 등으로 1만여 명의 한인을 살해하였고 3천 5백여 호의 민가와 무수한 학교·교회 등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경신참변[庚申慘變(간도참변, 1920)]」으로, 이때 생존한 사람들과 선교사들은 당시 일본군의 잔악성이 극에 달하고 있었음을 증언해 주었다. 경신참변(간도참변, 1920) 후 독립군들은 새로이 조직을 재편하고 동북만주와 북간도에서 활약하던 독립군 단체들의 통일을 기도하였다. 소비에트의 지원을 약속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연해주로 들어가 시베리아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였던 한인부대들과 함께 합류,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 : 지금의 스보보드니)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시베리아에서 볼셰비키와 함께 투쟁한 한인부대들은 정치 및 군사 양면에서 첨예하게 대립 중이었는데, 이르쿠츠크파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시베리아의 모든 독립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파와 대한독립군단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이르쿠츠크파와 소비에트동맹군은 독립군단을 포위하고 즉시 무장해제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양측에 의해 전투가 발발하여 독립군 수백 명이 죽고 포로가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포로가 된 한인들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김규식 일행이 도착한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동족간의 분열에 의한 자책도 있지만 시베리아에서 어느 정도 혁명이 성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이 시베리아 철군의 조건으로 한인의 무장해제를 계속 요구하였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1920년 한인 빨치산부대가 일본군대와 결전하여 한인 빨치산부대가 대대적으로 승리한 「니콜라이사건」 이후 소비에트 측에 모든 한인무장 부대를 무장해제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일본과의 시비를 두려워 한 소련정부는 국제군을 조직하여 시베리아영내에 한인부대를 편입시켜 한인부대 존재를 은폐하고 있었다. 소비에트혁명을 위하여 열렬히 투쟁했던 한인들이 이제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곤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만주지역에 있는 한인들까지를 포함한 한인독립군부대가 자유시에 집결하자, 자유시 사령부측에서는 독립군에 무장해제를 명하고 이르쿠츠크로 철수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시참변(자유시사변, 1921)이 발생한 것이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김규식 일행은 재판의 진행을 볼 수 있었다. 이르쿠츠크 공산당원으로 입당한 여운형은 재판에 배심원으로 배석하여, 일제와 독립투쟁을 벌여야하는 한국의 젊은 청년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먼 지방으로 유형을 가고, 징역에 처해지는 것을 목도하였다. 이때의 심정을 여운형은 “이 재판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애석의 정과 암담한 우울로 나의 마음을 몹시 누른 사건이었다.” 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이러한 심정은 김규식 일행 모두의 공통된 심정이었을 것이다. 12월 하순 한창 대회준비에 분주하고 있던 김규식 일행은 대회장소가 모스크바로 변경되었으니 모스크바로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여 일간의 여정 끝에 1922년 1월 7일에 김규식 일행은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대회일정과 장소가 변경된 것은 각국의 많은 대표들이 먼 거리로부터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한 워싱턴회의(1921)가 끝나기를 기다려 제국주의의 정체를 폭로하자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에 취해졌다고 하며, 또한 민주적 성격과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던 극동공화국의 영역인 이르쿠츠크에서 회의가 개최되면 그 입장이 약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취해졌다고도 한다. 어쨌든 모스크바에 도착한 대회 참석 대표들과 김규식일행은 군대와 수만 명의 군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회의장인 그리스정교 신학교에 숙소를 정하였다. 당시 모스크바에 간 대회 참석자들은 러시아인들의 궁핍한 생활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나 소비에트정부가 교육에 대해 강조하면서 표면상 인종차별을 하지 않은 것과 약소민인 아시아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주고 있음에 고무되었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열정에 불타고 있는 분위기에 감동을 받았다. 대회는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개회총회로부터 시작되어 2월 2일 페테르그라드(레닌그라드)의 폐회총회까지 12차례의 총회를 개최하였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제3국제공산당 위원장 지노비에프(Grigorii Erseevich Zinoviev)는 기조연설을 통해 세계혁명을 통한 공산주의의 승리를 부르짖고 서구의 개혁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유럽중심주의를 공격하였으며 아시아가 서구로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시아제일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식민지민족에 대한 문제의 해결은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의 기치하에서 단결함으로써만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이어 지노비에프는 1월 23일의 제2차 회의에서 「국제정세와 워싱턴회의(1921) 결과」라는 의제 연설을 통해 워싱턴회의(1921)가 군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엇을 약속했는가, 조선과 같은 나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그 회의에서 어떠한 약속을 했는가, 중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떠한 약속을 했는가, 극동제민족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약속했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요구하고 제국주의의 위선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한인대표들에게 워싱턴에 걸었던 기대가 철저히 무시당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한국대표는 1월 24일의 제5회의에서 「극동에서의 조선의 지위」라는 제목하에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제적인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까지의 역사적 배경과 일본의 각 분야에서의 침탈, 그리고 한인의 3·1운동(1919) 등 민족적 저항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은 박기영이라는 가명으로 조선의 혁명 운동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여기서 한국혁명의 시작을 「동학당의 난(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1894)」으로 잡았고, 1895년부터 1905년은 혁명운동의 과도기로서, 이 시기에 한국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강행하는 일본 식민정책의 희생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해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의 위협을 인식한 한국의 혁명적 농민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영웅적으로 투쟁하였으며, 또한 애국적 사회문화를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한국은 강제적으로 일본에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되었고, 국내외에 운동세력들이 이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이어서 그는 3·1운동(1919) 결과 수립된 임시정부가 기만적인 구미외교에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실태를 일일이 지적하고 이에 대한 한인의 저항을, 특히 국외에서의 독립군의 투쟁을 소개하였다. 1월 25일의 제6차 회의에서는 조선의 경제 상태와 노동정세,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대중운동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25일 오후에 열린 제7차 회의에서는 지노비에프의 「국제정세와 워싱턴회의의(1921) 결과에 대하여」라는 보고가 있었는데, 이때 김규식은 토론에 참가하였다. 26일의 제8차 회의에서는 조선노동자대중이 직면한 문제 등 한국문제에 대한 전반적 보고와 토론이 있었다. 본회의에서는 한국의 민족운동은 진보적·혁명적 노동자들의 긴밀한 연대에 의하여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한국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즉, 한국에는 공업발전이 미약하여 계급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계급운동은 시기가 빠르며, 한국의 대다수의 주민이 저수준의 농민이니 이들이 공명하는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계급운동자는 이 운동을 지도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는 명칭만 과대하고 실력이 이에 동반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유감이 허다하므로 개혁할 필요가 있으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광범한 민족연합전선의 형성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극동근로자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 1922)는 이제까지의 국제적인 어느 대회보다도 한국에 보여준 관심은 대단하였다. 이 관심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한국에 대해 보여준 열렬한 지지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김규식은 레닌과도 만나 회견했다고 하는 데 회견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회가 진행될 당시 취재를 위해 본 대회에 참석한 미국기자 에반즈(Ernestine Evans)는 김규식을 취재하고 이를 미국잡지 『아시아(Asia)』 1922년 12월호에 게재하였는데, 김규식은 대회 참석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젊은 김(김규식)씨는 로녹대학 졸업생인데, 그는 한국 임시정부 각원으로서 파리강화회의(1919)에 갔었다. 상해의 지도자들 간에 윌슨대통령에게 끈질기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는 다시 워싱턴에 가서 대표부의 위원장 일을 보았다. 그런데 그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냉소적인 사람이 되도록 하였는데, 만일 그가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대일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았던들 그처럼 냉소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공산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정세 판단을 보았고,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동방에서는 개혁적인 전술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만일 한국이 모스크바에서 정신적 또는 물질적인 소망을 가질 수 없다면 한국은 갈 곳이 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최후의 희망처를 찾아 온 것이다. 나는 한국대표들 숙사에서 그 사람과 마주앉아 그의 나라의 장래를 논하면서 그가 이 길을 쓸쓸한 마음으로 택한 것이라고 느꼈다. 김규식은 첫째로 시베리아의 극동공화국은 아직 일본군을 격퇴하지 못하고 있고, 몽골은 지리적인 조건과 통신의 어려움으로 협력할 수가 없으며, 중국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한국민족은 홀로 일본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말한 다음 중국은 한국의 투쟁에 대하여 한 치의 협력도 하지 않았고, 몽골은 한국의 투쟁이 자기들에게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며, 일본의 무산대중은 오히려 중국과 한국의 무산계급을 그들의 착취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통박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반문한 김규식은 첫째로 극동문제는 일본이 전쟁에 들어가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과,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 세계의 무산계급은 일본의 제국주의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일본에 도전하여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김규식은 미·일(미국·일본)전쟁의 가능성과 러·일(러시아·일본)전쟁의 가능성을 여러 가지 조건을 들어 세밀하게 분석한 다음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어서 다음으로 그는 중국에서의 일본의 침략상태를 일일이 지적한 다음 그때까지 서 있던 북경정부는 필경 망할 것이나 불원간 새로운 혁명세력이 일어나 중국대륙의 안정을 가져오고 발전을 이룩하여 필경 일본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한국은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와 협조가 없이는 독립을 이룰 수 없는, 또 국제정세의 변천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필경 오고야 말 전쟁에 대비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본다면 한국문제는 극동문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김규식은 한국민족의 운명은 극동지역에 있는 타민족의 운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극동 정세는 어떤 나라를 따로 논할 수가 없고 전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에서의 투쟁에는 소련의 원조가 있어야 할 뿐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혁명대중의 협조가 있어야 하며, 또 한국의 독립에는 소련과 중국의 원조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극동의 각 민족은 때가 오면 협조하겠다는 말만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데 협조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김규식의 정세를 분석하는 안목은 매우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세는 국가의 이익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지고, 약소민족과의 약속은 누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에 따라 헌신짝처럼 내던져짐으로써 약소민의 운명은 아무리 정확한 분석을 할지라도 그 분석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규식은 대회가 끝난 뒤 얼마간 모스크바에 머물다가 다른 일행보다 뒤늦게 이르쿠츠크를 경유하여 1922년 5월 17일에 상해로 돌아왔다. |
상해로 돌아온 김규식은 극동인민대표대회(1922)에 참석하기 전부터 기획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활동을 재개하였다. 극동인민대표대회(1922)에 참석하기에 앞서 김규식은 안창호·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은밀히 계획하고 상해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많은 지지를 받아 1921년 5월 19일 국민대표회의 기성회촉성회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20인의 조직위원 중에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김규식은 이승만과 충돌 후 임시정부는 각 독립운동세력이 통합되어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 촉성회는 박은식·이동휘 등 10명의 위원을 더 선출하여 반임정세력이 집결하고 있는 북경측과 협의하여 국민대표주비위원회로 발전시키고 상해·북경·만주의 인사들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는데, 1921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한국문제와 관련된 국제회의가 워싱턴과 이르쿠츠크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옴에 따라 일단 중지되었다. 1922년 4월 6일 안창호는 대연설회를 개최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취지, 강령을 분명히 하고 대회 소집을 호소한 바 있어 상해에서는 국민대표대회 개최의 분위기가 다시 조성되었다. 김규식은 돌아오자마자 국민대표대회의 재상해(在上海)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안창호는 5월 23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북경·천진 등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계의 여론을 모았으며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리하여 과거의 모든 분규를 종식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통일적으로 전개하고자 1923년 1월 3일 국내외 70여개 단체 대표 16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열띤 분위기 속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비한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나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로 대립하면서 난항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김규식은 윤해·박용만·한형권·신숙·원세훈·도인권 등과 함께 창조파에 가담하였다. 김규식과 창조파 인사들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대신 국민위원회를 설치하여 33명의 국민위원회 위원을 선출하였고, 새로운 정부의 탄생을 선언하였다. 창조파 정부에서 그는 국민위원과 내무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김규식은 북경측과 노령(러시아령)측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부를 조직하고 소비에트 정권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약속에 따라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과 투쟁하고자 창조파에 가담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개조파들은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하였다. 김규식을 비롯한 창조파는 33명의 국민위원회 위원을 선출하고 오창환을 소련에 파견하여 국제공산당이 약속한 혁명방략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 한국에 관하여는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1922)에서처럼 사회혁명보다 먼저 민족혁명을 우선으로 한다는 견지에서 국민대표회의에서 구성한 정부기관을 환영하며 상호간의 의견을 교환하여 큰 차이가 없으면 적극적으로 환영하겠다는 회보를 받게 되었다. 창조파들은 소비에트 정부의 보호와 후원을 받으면서 민족운동의 연륜이 깊으며 더욱이 한인동포가 많이 거주하여 국민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 노령(러시아령)지역을 기반으로 국가정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총본부로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구미제국과의 외교적 방략의 한계가 드러나 더 이상 상해를 중심한 외교적 방법이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자 군사적 기반을 갖고 일제와 직접적인 투쟁을 하는 것만이 조국의 독립을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더욱이 김규식을 비롯한 창조파들은 소련정부가 한국독립의 지원을 약속한 터라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노령(러시아령)지역보다 더 적합한 곳이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1923년 6월 조선공화국을 구성하였다. 김규식을 비롯한 창조파 일행은 1923년 8월 20일 노르웨이 상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8월 30일 노령(러시아령)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노령(러시아령)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김규식을 비롯한 창조파 일행은 신한촌에 여장을 풀었다. 9월 10일경 김규식·신숙·윤해·원세훈 등 5인의 대표는 국제당 동양부장인 파인불크와 한국혁명에 관한 상호 의견을 교환하는 예비교섭을 가졌다. 이후 여러 번의 토론을 거쳐 양측은 서로 의견을 좁혀 대강의 합의점에 도달하였다. 이어서 곧 개최될 정식회담에 대비하여 창조파 인사들은 한국독립당이라는 명칭을 갖고, 한국독립당의 선언, 당강령 그밖에 각 부분의 운동방략을 세밀히 검토하였다. 이 회담에서 창조파와 국제당 측은 합의를 보고, 합의조인 사항은 그 해 12월경에 국제당 본부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원조가 가능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창조파는 또 한번 국제정세와 현실의 변화에 따라 급변하는 국가주의에 의해 좌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인들의 민족운동을 열렬히 지원하던 레닌이 1924년 1월 21일에 사망하는 한편 국제당에서 지도하던 독일에서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국제당은 약소민의 혁명운동에 대한 지원보다는 내부수습이 우선 문제였고 한인들과 협상을 벌려온 파인불크는 중앙본부로 소환되었다. 이제까지의 열성과 분투에도 불구하고 1924년 2월 15일경쯤 국제당 중앙본부에서는 한국혁명에 관해서는 아직 정해진 안이 없으며 후일에 다시 열 것을 통보해 왔다. 거기에다 창조파 인사들 모두 소련 영역에서 나갈 것을 명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희망을 안고 노령(러시아령)까지 와서 어렵게 타협을 보았던 모든 결정이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창조파 인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소만 국경을 넘어 만주와 길림으로 흩어졌다. 김규식은 레닌호에 몸을 싣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새로이 임시정부를 세워 노령(러시아령)의 동포들을 국민적 기간으로 하여 새로운 방략의 독립운동을 수행하고자 했던 그의 희망은 약소민족에게 독립과 원조를 약속하던 유일한 보루였던 국제당에게조차도 외면당한 것이다. 김규식은 소련을 구미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다르다고 신뢰하고 있었고, 그런 믿음이 김규식으로 하여금 워싱턴으로 가지 않고 모스크바로 가게 했으며 또한 창조파에 가담하여 새로이 정부를 구상하도록 하는 힘을 주었는데, 이러한 신뢰마저 한갖 감상주의적인 판단착오가 되었다. 김규식은 새삼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관계의 냉엄함을 깨닫게 되었다. 소비에트와 한인들간의 결속 관계는 일본이 1922년 10월 25일 시베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이후에 깨지게 되었다. 철수 당시 일본총영사는 소련 측에게 무장부대가 한국내로 진출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에 대하여 소련측 혁명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I. P. Uborevich)는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방해하는 일은 가능한 한 피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이어서 1925년 1월 20일, 북경에서 일본의 재중국특명전권대사인 방택겸길(芳澤謙吉)과 소련의 재중국대사인 카라얀(Lev M. Karakhan)이 일·소(일본·러시아)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소련 영토 내에서 일본에 방해되는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는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미 체결된 바 있는 한인독립군과 극동공화국 간에 군사협정을 취소하고 독립군을 무장해제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측에서도 더 이상 한인 독립군들이 소련 영토 내에서 존재하여 활동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주저하지 않고 동의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극동공화국내의 한인독립군들도 무장해제되었고 소련 영토내에서 행하는 한인들의 조국해방을 위한 모든 민족운동은 금지되었다. 그 이후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이 만주침략을 비롯하여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단행하자 소련은 시베리아의 소비에트화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던 한인들을 일본과 내통할 위험이 있다하여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한편, 1937년에 극동지역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리하여 시베리아 개척의 선구자이며 소비에트화의 공로자인 한인들은 그들이 공산당원이든, 혹은 예전의 항일빨치산이든 모두 자신들의 근거지로부터 쫓겨나 허허벌판의 중앙아시아에 내팽개쳐졌다. 이렇게 소련이 국익 추구를 위해 약소민과의 약속을 위반하게 되자, 그동안 스스로 공산주의자로 자처하던 많은 한인들까지 반공주의자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
김규식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24년 4월경이다. 그 동안 그는 옳다고 생각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였으나 결국 실패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한동안 자신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김규식이 상해로 돌아와 의기소침해서 낙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그를 포섭하기 위하여 “만일 이 때에 적당한 수단을 강구한다면 김규식은 한국에서의 일본의 문화적 시설을 옹호하는 자가 될 것은 반드시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학자형의 김규식을 나약한 지식인으로 보고 그를 포섭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김규식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김규식이 연약한 의지를 갖고 일신의 안녕을 추구했다면 아마도 많은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을 택한 데에는 조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의한 한국독립당 조직을 구체화하고자 6월 7일 「한국독립당조직안」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한국의 민족운동은 모름지기 민중을 근저로 한 통일된 혁명적 노선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유력한 혁명적 중추로 유일한 민족적 혁명당의 형체를 조성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들이 소련에서 쫓겨온 창조파 중심의 통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와 같은 혁명당의 구상은 후일 대일전선통일동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이무렵 김규식은 상해 복단대학(復旦大學)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게 되었고, 자신의 모교인 로녹대학으로부터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한인 학생들의 학력을 증진시켜주고 고등교육을 준비시켜주기 위한 과정인 중등교육 과정의 학교인 고등보습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학교는 1924년 9월 15일에 개교하였는데, 김규식은 교장으로서 학원을 운영하는 한편 영어교사로 학생들에게 영문학을 강의하였다. 그의 셰익스피어 강의는 명강의로 유명하였다. 이 학원은 후일 임시정부 운영의 공립학교인 삼일중학으로 발전하여 상해의 유일한 한인 중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상해는 최신사조를 받아들여 변혁과 혁명이론을 연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한국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정치적 행동의 자유가 있음으로 해서 많은 한인학생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한인 유학생들은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중국 학생들과 연합하여 반제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상해의 유학생들은 상해유화학생회(上海留華學生會)를 조직하여 학업 외에 강습회·연설회·강연회·웅변대회 등 각종의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김규식은 상해의 유학생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서 영향을 끼쳤고 유학생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현정세와 시사에 관한 연설을 하여 청년들에게 정확한 현실인식을 하도록 계몽하는 한편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교육활동 중에도 김규식은 항상 일제의 감시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특히 상해의 불란서(프랑스)조계 지역을 벗어나 일본의 통치력이 미치는 공동조계 지역에 위치한 복단대학으로 강의를 나갈 때면 김규식은 학교측과 상의하여 중국인으로서 변성명을 하고 강의에 임하였다. 그래서 당시 김규식은 김성(金成)·김중문(金仲文)·김일민(金一民)·왕개석(王介石) 등 여러 가지 성명으로 자신을 위장하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여러 번 일제 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잘 피하여 일경의 끈질긴 추격을 물리치곤 하였다. 그러다가 더 이상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김규식은 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자신의 날카로운 필치를 잠시도 쉬지 않았다. 1925년 영자신문에 영국과 미국을 배척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중국학생연합회에서 발행하는 『연합(Union)』지 1927년 7월 5일자에서 중국에 있는 영국 세력하의 외국 언론들을 통렬히 공격하는 기사를 게재한 바 있었다. 이에 영국·미국·일본이 공동 관장하는 공동조계 당국은 영장을 발급하여 김규식을 체포하고자 했고, 김규식을 과격파로 단정한 불란서(프랑스)조계 당국도 김규식의 체포에 대해 협조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와 불란서(프랑스)조계 당국은 그의 자택을 습격하였지만 이미 정보를 들은 김규식은 상해를 떠나 천진으로 이주하였다. 이후로 김규식의 활동무대는 상해에서 천진으로 옮겨졌다. 김규식은 천진에 있는 북양대학(北洋大學) 교수로서 재직하였고, 대학 구내의 사택에서 지내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의 급진파 독립운동 세력과도 연결을 갖고 있었다. 김규식은 일찍이 중국인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단체를 구성할 필요를 느끼고 여운형·윤기섭·한진교 등의 한인과 중국인들과 함께 1921년 5월에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를 창설한 적이 있었다.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이 들려오자 중한국민호조사의 한·중(한국·중국)인들은 일본에게 1905년「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과 1910년의 「합방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을 취소하고 한국을 절대 독립시킬 것, 그리고 한국에서 정치상·경제상·군사상의 시설 일체를 철거할 것 등을 요구하는 제안과 선언을 공동으로 채택하였다. 김규식은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서 외교 활동 중인 한·중(한국·중국)인들에게 발송한 바 있었다. 이후 중화국민호조사는 1942년 10월 11일에 중경에서 창설된 중한문화협회로 계승되었다. 중화문화협회는 회원이 4백여 명으로, 한·중(한국·중국) 양 민족의 문화교류 사업을 촉진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으나 문화사업을 통해 마침내 혁명을 이룬다는 궁극적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김규식·김구·조소앙·김원봉 등이 참여하였다. 한편 김규식이 주축이 되어 임시정부 각료들은 한·중(한국·중국)인 간에 실제상의 호조와 감정상의 융화를 도모하는 데는 우선 언어와 문자가 잘 통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여 1922년 10월 1일에 상해 유일의 한인학교인 인성학교 안에 야학교인 제일학교를 개설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한인들에게는 중국어와 중국문을, 중국인에게는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쳤고 공통어로 영어를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본격적인 한·중(한국·중국)연합의 어학전문학교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규식은 중국인과 함께 공동으로 합자하여 1923년 9월 17일에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한 바 있다. 이는 김규식이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학교로, 그는 본학원의 교장이자 영어 교수로서 한·중(한국·중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남화학원내의 한인학생들은 자치회를 조직하여 학생 간에 서로 도왔고, 또 학업에 열중하면서 경호대를 조직하여 일본인과 내통하는 밀정을 색출하는 등 활약하였다. 김규식은 기회가 닿는 대로 학생들에게 민족독립의 정선을 일깨워 주는 데에 소홀하지 않았다. 한편 1927년에 김규식은 유자명·이광제·안재환, 그리고 중국인 목광록(睦光錄)·왕조후[王條垕], 인도인 간타싱·비신싱들과 연합하여 동방의 피압박민족들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서 벗어나 완전독립을 쟁취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남경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김규식이 독립운동의 기반이 미약한 한인들은 중국인을 비롯한 피압박민들과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환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해야만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 조직한 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들어오는 데도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침체 돼가는 상황에서 김규식은 독립운동의 무대가 중국영토인 이상 중국인의 협조와 이해 없이는 항일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제와의 투쟁에서 한인과 중국인들의 연합전선이 가장 효과적인 운동전략이라고 판단하였다. 중국인들도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을 통해 민족적인 위기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양측의 공동 연합은 용이하였다. 이 연합회에서 김규식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기관지로 한국어·중국어·영어 3개 국어로 된 『동방민족』을 발간하여 각 국에 발송하였고, 비밀리에 지부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한편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난 후, 독립운동계의 통일운동은 좌절되었으나 이를 극복하고자 민족유일당운동이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전민족적인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계파간에 통합운동이 성취되어 우파는 한국독립당으로, 좌파는 한국독립운동자동맹으로 일단 통합되었다. 일제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왔고, 이어 이듬해 l월에는 상해사변을 일으키자 중국내에서의 반일운동은 최고로 고조되었다. 이때 한인 독립운동계는 이러한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고 이를 기회로 포착하여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고 중국과의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규식이 이미 천진에서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변화에 뛰어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규식은 상해로 와서 한국독립당의 이유필과 협의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통합 알선에 노력하였다. 김규식은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고 중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각지에 있는 한교회(韓僑會)를 연합하여 상해에다 한교연합회를 조직하고 중국 측의 화교연합회와 연합하여 한중연합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교연합회를 새로이 조직하기 보다는 각 지에 있는 기성단체를 통일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이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김규식은 각 단체의 협조와 융화를 호소하여 상해의 한국독립당과 남경의 한국혁명당을 통합케 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만주의 재만한국독립당과 길림의 조선혁명당·한국독립운동자동맹 등 제단체들이 참석하여 1932년 7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준비회를 구성하였고, 11월 10일 남경에서 김규식이 대표자인 한국광복동지회의 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의열단·한국독립당 등 5개 혁명 단체들이 연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 집행위원회는 비서부·조직부·선전부·군사위원회·경제위원회·외교위원회의 각 부회를 설치하였는데, 김규식은 외교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한인의 전선 통일을 일단 완성한 후 김규식은 대일전선통일동맹의 이름으로 중국 측 항일운동과 연합, 제휴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김규식은 중국의 동북의용군후원회와 연락을 갖고 한국의 독립운동계와의 합작을 제의하여 중국 측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하였으며, 그 결과 「한중민중통일동맹」이 구성 되었다. 한중민중통일동맹은 공동투쟁을 전개하는 데 우선적으로 재정을 확보할 필요를 느끼고 이를 위해 미국의 한·중(한국·중국)인 교포들에게 원조를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이 기회를 통해 미국에서 대일투쟁을 위한 선전활동도 전개하고자 계획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집행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중국측 집행위원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상해 중국인변호사협회장, 금융기관장, 광동정부와 남경정부의 전현직 관료들, 전중국선도(善導)협회 인사들, 그리고 교육계·언론계의 중진들이 망라되었다. 한중민중통일동맹은 계획 수행을 위해 김규식을 미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규식은 한중민중통일동맹위원 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동북의용군후원회로부터 5천원의 여비를 받아 1933년 1월 초에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렇게 멀리 미국으로까지 가서 운동자금을 모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한·중(한국·중국)인들의 경제적 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세의 불안정으로 생활이 극도로 불안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징수한다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미주의 교포들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국외의 어느 지역보다 경제적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가 침체되자 재미동포의 독립운동자금 모금도 예전처럼 활발치 못한 실정이었는데 이에 김규식이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중국 측에서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하는 데 동의한 것은 비교적 미국 사정에 정통하며 외교가적인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대일전선통일연맹 규약 및 강령과 조직조례, 그리고 「원동정세」라는 중국과 한국민족들이 탈취당한 영토와 권리와 자유의 회복을 주장하는 각서를 갖고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각서 「원동정세」는 53면의 등사물로 만들어져 중국과 미국에 있는 외국인사들에게 배부되었다. 여기서 김규식은 원동지역의 지리적 관계에 대하여 논하고 일본의 한국침략 역사를 임진왜란(1592)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술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정복하고 그럼으로써 만주에 발붙일 거점을 얻고 나니 이제 중국의 완전한 예속과, 태평양의 정복과, 세계의 지배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아시아 본토 정복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으므로, 중국이 이제 일본의 세계제국 건설을 위한 전쟁목표물이 될 숙명에 놓여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동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일본이 23년 전에는 한국을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을 믿고서 오늘날 만주를 점거하였고, 열하지방(熱河地方)을 점령하려 하면서 게다가 중국전체를 지배하고 끝내는 예속시키려 위협하고 있는 만큼, 한국은 아직도 여전히 원동문제의 열쇠가 되며 어쩌면 이번에는 세계의 대화(大火)의 도화선이 되거나, 흑은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군국주의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인이 됨으로써 절박한 세계적 참극을 예방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어 일본이 대한제국 황제의 재가없이 1905년의 을사5조약(을사늑약, 1905)을 자위적으로 조작하면서 이를 ‘보호조약(을사늑약, 1905)’이라 하여 한국민에게 강제하고 무력으로 예속시키고는 외국인을 상대로 일본이 한국의 ‘자애로운’ 지배자로 자처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총독부치하의 한국의 행정, 교육실태, 토지와 농업·임업·어업·광업·상공업 등에서 일본의 침탈을 열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한민족이 이러한 상태, 즉 궁지에 몰릴 때 그 소수(그러나 강력한 소수)가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와는 정반대임을 주장하는 하나의 새로운 원칙에서 어떤 위안을 얻고자, 기실 거기서도 얼마안가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공산주의적 및 과격한 볼셰비키 경향으로 쏠리게 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민족은 태양 밑의 어느 것이건 일본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나간 22년간 세계의 지식계급(?)은 건물, 상공업의 개선과 발전(일본과 일인들을 위한), 도로와 그 밖의 수송기관, 시·도(市·道)의 건설공사, 항만과 기타 해운의 개선, 요새화와 국방(일본을 위한) 등에 걸친 훌륭한 건설적 성과를 과시하여, 해마다 발행하는 『조선에서의 개혁과 발전』이라는 제목의 예쁘게 장정되고 좋은 말을 늘어놓은 조선총독부 선전용 사탕과자만 공급되어 왔다. 꼭 같은 심리적 배경에서 일본의 대정치가들·외교관들·군사지도자들도 다 같이 크게 나팔을 불어, 그들은 만주의 3천만 중국인(그리고 소수의 만주인)의 자연 발생적 의사 표시에 ‘응하는’ ‘하나의 자애로운 행위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동의 항구적(?) 평화와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대만주국을 수립, 승인하였다고 전 세계에 선언하였다. 일본은 1905년 한국에 보호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하고, 드디어 1910년 이를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할 때에도 그것이 ‘당시의 한국 황제와 국민의 뜻이며, 원동의 항구적 평화와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당시의 맹목적이고 관대하고 잊음이 많은 세계를 향하여 꼭 같은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문명세계는 이러한 우롱을 얼마동안이나 참을 것인가?… 김규식은 북미 각처를 순회하며 강연과 연설로써 반일 운동을 전개하였고 한인과 중국인의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김규식은 일본의 식민 착취의 실태를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과 중국 민족들이 탈취 당한 영토와 권리, 자유의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여 조국을 잊어버리고 있는 교포들의 애국심을 자극하였다. 미국을 순회하는 동안 김규식은 위병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규식은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쉬지않고 강연·연설을 하였다. 1933년 4월 5일에 있었던 로스앤젤레스의 부락베스트구루노류우대학에서의 강연에는 약 500여 명의 청중이 모여 김규식의 연설을 경청하였고, 이는 유선방송을 통해 방송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지켜본 친일본 계통의 신문들은 김규식이 ‘제국(일본)’에 대해 악선전을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김규식은 미주지역의 단체들을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하도록 주선하여 재미대한독립당·대한인민총회·재뉴욕대한인교민회·재하와이대한인국민회·재미대한인민국민회총회 등이 이에 가맹하였다. 그리고 수천불의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1933년 8월경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대일전선통일동맹은 협의기관 형식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일전선통일을 위한 조처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 3월 1일 남경에서는 제2차 대표대회를 개최하고 항일전선에서 강력한 결속력과 통제력을 가지는 실질적인 대동단결 조직을 조성하고자 김규식을 비롯한 집행위원들은 여러 차례 토의를 하였다. 본대회에서는 대동단결 조성 방침안을 만들어 이에 기초하여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고 각 혁명단체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의견을 모으고자 4월 22일부로 7개조의 건의서를 각 독립운동 단체에 우송하였다. 그리고 ‘가장 완전한 대동단결체의 조직에 관한 방안·강령·정책 등, 토의를 위하여 대표 수명씩을 파견할 것’이라는 통지와 함께 대동단결체 조직에 관한 방안과 성격을 나타낼 정책의 초안 제출을 요구하는 통고문도 발송하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단체들을 실질적으로 통합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한편 김규식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 이후 흩어진 임시정부가 1933년 3월 항구에서 재조직되었을 때 국무위원으로 당선되었고, 1934년 1월에는 국무위원 겸 외교장으로 당선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국내외 단체와 민중에게 대동단결을 촉구하고 대동단결체의 신조직이 만들어지면 이를 수용한다는 국무원 포고를 발하였다. 김규식은 새로운 당의 창설을 위해 임시정부와 대일전선통일동맹의 이상을 연결하고자 한 것이다. 김규식은 혁명단체 통일회의가 구체화되어 가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사임하고 대동결단체 통합에만 주력하였다. 오랜 시일이 경과하여 1935년 2월 26일에야 중국 내의 단체들의 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6월 20일에 조선혁명당·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재미대한독립당·뉴욕대한인교민단·미주국민회총회·하와이국민회·하와이혁명동지회 등 9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예비회담을 갖고 대동단결을 위해 각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6월 29일 정식회담에서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정하고 이어 당의·당강·정책 등의 제정을 의결하였다. 민족혁명당에는 중앙에 중앙집행위원회가 있고 그 아래 실무기관으로서의 서기부·조직부·군사부·국민부·훈련부·조사부가 있었다. 각 부장은 중앙집행위원 중에서 선임하였는데 김규식은 국민부 부장으로 임명되어 당의 중앙정책을 결정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당을 대표하여 대외관계의 사무를 처리하고 당의 각종 기관을 설치하고 당의 일절 공작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주축 세력인 한국국민당은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인사들이 혁명당에 대거 참여하고 있었고 여전히 임시정부의 해체를 계속 주장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김규식의 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통일전선 구축에는 실패하였으나 임정고수파를 제외하고는 민족운동 세력의 좌우파가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의 통일전선운동의 실패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대동단결체로서 출발한 조선민족혁명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조만간 일어날 것이며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민족해방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 민족이 세워야할 민족국가의 건설방향을 제시하고, 창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김규식은 민족혁명당이 조소앙계열의 이탈로 소란해진 1935년 10월 20일에 개최된 중앙집행위원 6차 회의에서 사고에 의한 사직원을 제출하였는데,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인 것 같다. 그래서 김학규가 김규식의 후임으로 국민부장에 임명되었다. 김규식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사천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면서 외국어 및 외국문학과 과장직을 맡았다. 그러면서 영문학 교재와 영어교과서를 집필하는 등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40년에 사천대학에서 출판된 『엘리자베드시대의 연극 입문(Introduction to Elizabethan Dramma)』은 김규식의 저서로, 동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김규식은 민족혁명당 국민부장을 사임하였으나 여전히 중앙집행위원이자 당원으로서 남아있었다. 이후 민족혁명당은 각 정파간에 내분이 일어나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지 3개월 만에 조소앙의 한국독립당계가 탈퇴하였으며 1937년 4월에 이청천계가 남경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의 민족운동 전선을 통일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자, 1937년 11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동맹·재건한국독립당·대한인독립단 등 좌익계 단체를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기본 강령을 정하였다. 1940년 말부터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원들 상당수가 항일격전지인 태항산으로 가기 위해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중국 국민당 영향하의 민족혁명당에서 중국공산당의 영향아래로 간 것이다. 한편 민족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은 1940년 가을 경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여 임시정부 중심으로 결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도 1941년 11월에 제6차 전당대표대회를 중경에서 개최, 임정참여를 선언하였다. 따라서 산하 부대인 조선의용대는 4월 30일에 있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광복군 편입을 결의함으로써 7월에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광복군과 연합하였다. 광복군은 중국의 최전선에서 전지공작에 투입되었고, 영국군과 협력하여 인도·버어마(미얀마)전선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미국전략정보처(O.S.S)와 합동하여 낙하산 투하 훈련을 받으며 국내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준비하였다. 1942년 1월 10일 사천에서 중경으로 온 김규식은 임시정부에 들어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전선을 통일할 것을 선언하였고 10월의 제34차 임시의정원부터 민족혁명당의 좌익계열 인사들도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때까지 임시정부와 오랫동안 결렬하고 있었던 김규식도 10월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고, 동시에 선전부장으로 피임됨으로써 다시 임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임정에 합류하였으나 김규식은 미주지역에서 여전히 민족혁명당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3년 김규식은 한중민중통일동맹의 대표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하였으며 그의 주선으로 재미한인사회의 제단체가 한·중(한국·중국) 연합으로 반일항전의 원조를 약속받았고 또한 대일전선통일동맹에 가담케 한 바 있음은 앞에서 서술하였다. 김규식의 방문 후 미주지역에서는 중국후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다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발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재미한인사회에서는 그 산하 군대조직인 조선의용대를 후원하기 위하여 중국후원회를 조선의용대후원회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대후원회는 뉴욕·로스앤젤레스·시카고 등지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그러다가 민족전선연맹이 임시의정원에 참가하여 임시정부로 통합하자 1942년 6월 30일에 조선의용대 후원회는 민족혁명당 미주지부로 개편되었다. 1943년 8월 5일에 김규식은 중국 중경의 국제방송국을 통해 미주에 있는 민족혁명당 지부 당원들에게 「재미동포에게 보내는 소식」을 방송하였다. 방송을 통해 김규식은 1943년 7월 26일에 김구·조소앙·이청천·김원봉, 그리고 임시정부 및 한독당(한국독립당)·민혁당(민족혁명당) 요인들과 함께 장개석 총통과 만나 다음과 같이 독립운동의 계획안을 제안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은 태평양전쟁(1941)에서의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앞으로 독립운동계의 민족전선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43년 2월 제7차 전당대표대회를 열었다. 김규식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김원봉은 총서기에 재임하였다. 전당대표대회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은 우리 민족의 자유 독립을 쟁취하는 동시에 중국의 대일항전과 세계의 반파시스트전쟁의 승리를 조속히 이루기 위하여 주석 김규식과 총서기 김원봉을 중심으로 더욱 더 단결하고 임시정부를 확대 강화하여 가장 유력한 혁명정권의 기구가 되도록 할 것을 다짐하였다. 한편 통합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제 36회 임시회의에서 통일전선 내각이 수립되었는데 김구는 한독당(한국독립당)의 주석으로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고 김규식은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서 부주석으로 피임되었다.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중경에 머문 김규식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지 못할 정도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6천리를 장정하여 1945년 1월 31일 중경의 임시정부를 찾아와 광복군에 참여한 김준엽과 장준하는 후일 회고에서 함께 병석에 있는 김규식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무슨 병환이십니까?”하고 물으니 “나에게 무슨 병이 있는가 묻지를 말고, 무슨 병이 없는가 하고 물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김규식은 1944년에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과 1945년에 『실용영문(Practical English)』이란 책을 출판하는 등 천성적이며 부지런한 학구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편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화북지방으로 이동한 좌파계열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고 활약하다가 이를 해소하고 1942년 7월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은 전민족적인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하여 자주 접촉을 시도하였고 1944년 12월에는 국내에 건국 동맹과 연락하여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하여 서로간의 노선을 절충하며 건국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민족 대단결의 통일체를 결성하여 일제와 투쟁하려던 움직임이 이루어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조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
많은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정부로서의 명맥을 이어가던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1941)이 일어나자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선에서 중국·영국·미국 등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작전을 개시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광복군은 국내로 전격해 들어가 일제와 전면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훈련하던 중 예상보다 일찍 전쟁이 종결되었다. 미국이 8월 4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기량을 상실하고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빼앗겼던 조국 땅에서 일본과 격전을 벌려 일본군을 몰아내려 했던 투지와 열망이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고 만 것이다.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해 들어와 8월 12일 청진에 상륙하였다. 당시 미군은 일본의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사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한반도가 소련에 의해 점령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구실로 한 38도선 분계를 소련에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소련 측이 받아들임으로써 38도선이 확정되었고 조국의 해방은 국토의 분단으로 나타났다. 국내의 민중들은 임시정부에 대하여 소문으로만 듣고 있었으나 임시정부를 독립의지의 구심점으로 그리고 조국해방의 주체로서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어 임시정부의 귀국 소식을 듣자, 열광적으로 환영할 준비를 하였다. 정부 요인들도 30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의 귀환을 큰 설레임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부주석인 김규식도 1913년 조국을 떠난 후 32년 만에 돌아가 밟을 조국땅의 모습과 조국의 내음을 그리며 새로운 조국 건설의 대희망을 안고 귀국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남에서 권력을 장악한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포함한 일체의 정치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제1, 2진으로 나누어 국내로 들어왔는데, 미군정이 보낸 중형수송기편으로 중경을 출발하여 국내로 들어왔다. 김규식은 1945년 11월 23일 하오 4시에 김구·이시영·엄항섭·유동열·김상덕·선우진·민영완·장준하·윤경빈·김진동·안미생·유진동 등과 함께 1진으로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미군정은 개인자격이라는 단서를 붙여 국내 귀환을 허락하였으나 국내의 동포들은 대대적인 환영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을 감격적으로 맞이하였다. 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 국내는 식민치하에서 억눌렸던 정치적 열정이 곳곳에서 분출되어 혼란한 형국이었다. 국내의 정치세력으로는 식민치하에서 조직적인 연대성을 지켜왔던 건국동맹이 있었다. 이것은 1944년 8월 10일에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사회주의,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 세력을 망라하여 조직한 것으로, 건국 준비를 조직적으로 전개하여 왔으며 해방직후에는 건국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동 위원회는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건국준비위원회의 좌파와 급진세력들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정부 수립을 결정하였다. 인민위원으로는 김규식을 비롯하여 이승만·김구·김성수·이용설·김병로·신익희·안재홍·조만식 등의 우익계 인물들과 좌익계 인물들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9월 14일에는 중앙위원회에서 인민공화국 선언과 강령, 시정방침이 결정되었는데, 선언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 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 반동적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사회의 실현을 기한다.”고 표명하였다. 그리고 정부내각부서의 명단이 발표되었는데, 주석에는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내무부장에 김구, 그리고 김규식은 외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이에 한민당(한국민주당)은 성명을 통해 여운형 등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은 친일파들로 조직되었다고 공격하고 인민공화국의 불법화와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중경 임시정부를 추대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일체의 한국인에 의한 자주적인 건국운동을 인정하지 않았고, 38도선 이남의 한국땅에는 미군정이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다른 정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미군정청내의 한인 관리를 주로 한민당(한국민주당) 계열로 충원하여 경찰 부서 등 주요 행정부서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규식은 환국한지 이튿날인 11월 25일,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에 그에게 지식과 신앙을 심어 주고 키워준 새문안교회를 방문하고 일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15분 정도로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하였다. 그러나 너무 절정에 올랐다간 떨어져서 부상을 당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영국 빅토리아여왕은 1837년부터 1897년까지, 즉 60년까지 즉위하였는데, 여왕의 등극 60년 기념 경축식이 굉장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세계 각 국의 대표들이 와서 자기 나라에서 제일 귀한 예물들을 증정하고 성대한 잔치가 일주일간 계속되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에 경축하는 기사가 통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을 통해서 잠잠하다가 마지막에 기사가 났는데, ‘오직 하느님이 허락하셔야만’ 하는 한 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건설에는 ‘하느님이 허락하셔야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 대업을 성취하려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힘을 의지하여야만 될 것이올시다. 김주석(金主席 : 김구) 아니라 김(김구)주석의 할아버지의 힘이라도 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여러분과 우리가 단단히 손을 잡아서 한 손으로는 하느님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내 민중을 붙잡고 굳세게 나가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자기를 정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랍(그리스)에 유명한 철학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대왕이 들어왔을 때 이 철학자는 세계를 정복한 왕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세계를 정복 했으나 아직도 큰 적이 남아 있으니 인제 당신은 곧 자신을 정복하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 우리 조선 사람은 과거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남에게 정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김(김구)주석이 김(김구)주석 자신을 정복해야 할 것이며, 이승만 박사는 이승만 자신을 정복해야 할 것입니다. 김규식은 김규식 자신을 정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각자를 정복하는 날 비로소 미군은 ‘굿바이’ 인사하고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도 ‘더 스비다니아’ 하고 물러갈 것입니다. 카이로회담(1943)에 ‘적당한 시기에 조선의 독립을 준다’고 한 ‘적당한 시기’란 우리가 늦출 수도 있는 것이고 빠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손에 달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만 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내일이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못 보내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사람 전체의 책임인 것입니다. |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각계의 지도자들과 만나 정부건설을 위한 당면책을 모색하고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는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여서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회담(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을 진행하였는데, 거기서 한국문제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2. 조선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책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남조선미합중국 점령군과 북조선소연방 점령군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 제안 작성에 있어 공동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들이 작성한 제안은 공동위원회 대표들의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영·소·중(미국·영국·러시아·중국) 각국 정부에 그 참고에 공하기 위하여 제출하여야 한다. 3. 조선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발전과 독립국가의 수립을 원조 협력할 방안을 작성함에는 또한 조선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서 공동위원회가 수행한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4년 기한으로 4개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영·소·중(미국·영국·러시아·중국) 제국 정부가 공동 참작할 수 있도록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남·북조선에 관련된 긴급한 제문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한 남조선 미합중국관구와 북조선 소련관구의 행정·경제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소(미국·러시아) 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김규식은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냉철히 읽고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장래를 분석해 보았다. 김규식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가 주목한 것은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가 제1항에서 제시한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김규식은 독립운동 당시 좌·우합작의 경험을 살려 좌·우익의 극한 투쟁을 피하면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김규식은 강대국의 결정을 일단 수용하여 강대국이 인정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내세워 강대국과 협상토록 하는 구도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신탁통치 문제도 수립된 임시 정부에서 그 실시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수용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김규식의 의견은 결코 찬탁이라 할 수 없으나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수용하는 것은 바로 찬탁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김규식은 강대국의 결정을 무조건 반탁으로 몰게 되면 우리 민족이 힘에 의하여 분열되고 말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모스크바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주요점이 축소, 인식되어 신탁통치안은 ‘소련의 음모’라고 공격하면서 이승만을 중심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반탁운동을 더욱 맹렬히 전개하고 모스크바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를 수용하는 자들을 민족반역자로 매도하였다. 사실 신탁통치는 미국에 의해 제안된 정책이다. 미국무성은 일본인들의 정보에 입각하여 한국의 기존 세력 대부분이 좌익, 친소적이라고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를 독자적으로 점령하여 소비에트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미국은 재정 및 군사면에서 따로 투자하지 않고도 한반도에서의 소련의 독점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신탁통치안을 제안한 것이다. 한편 김구를 중심한 임정의 비상정치회의는 임정의 법통을 주장하며 역시 반탁운동을 주장하였다. 김구 등 임정파는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이렇게 반탁 주장의 논리는 달랐으나 반탁이라는 입장을 같이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는 비상국민회의로 통합하였다. 1946년 2월 1일에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민족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이승만 중심의 우익편향적인 분위기 때문에 김규식은 탈퇴하였다. 김규식은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는 여운형 측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준비위원회와 비상국민위원회가 동시에 해소, 통합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규식은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이 결코 우리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 할 수 없으나 한국이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의 하나라고 판단하였다. 이 결정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보다는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규식은 미국과 소련의 타협을 유도하여 통일임시정부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자신의 정치적 판단과 식견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하여 여론으로 조성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아마도 김구의 임시정부 세력이 반탁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수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면 우리 현대사도 지금과는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국인 대부분이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냉철하게 조국의 장래를 점치기보다는 해방된 조국의 완전 독립을 무조건 달성하려는 의욕이 앞서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이승만과 한민당(한국민주당) 중심의 반탁운동이었던 것이다. |
좌익은 찬탁, 우익은 반탁이라는 충돌사태가 심각해지는 가운데 김규식은 1946년 2월 18일에 해방 전 그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통일전선운동 전개의 기반으로 삼았던 민족혁명당을 탈퇴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탈퇴성명이 필요했던 것은 그가 어느 단체나 사상에 얽매임이 없이 순수하게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한다는 입장을 재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3월 20일부터는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 제2항인 정당, 사회단체와의 협의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의 준비를 제1단계로 하고, 제3항인 임시정부 참여하에 4국 신탁통치안 작성을 2단계로 하여 차례로 실천해 나가되, 1단계를 위해 세 분과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4월 18일의 공동성명에서는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 제2항의 협의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 조항을 포함한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을 수락한다는 내용의 선언서에 서명하여야 한다고 표명하였다. 김규식은 이것이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조건이라면 이를 수락해야만 한다고 느끼고 그 날로 방송을 통하여 이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계는 지나친 반공노선으로 소련군정을 자극하였고, 미군정도 이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민주적 정당, 사회단체에 대한 정의와 그 자격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미군정이 친미적인 보수파 정당과 사회단체를 가능한 한 협의대상으로 삼고자 한데 반하여 소련 측은 모스크바(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에 반대한 단체나 개인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였다. 미국 측으로는 소련측 주장대로 반탁을 주장한 반공친미적인 인사를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면 한국에 수립될 임시정부의 성격은 당연히 친소정권이 될 것이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수석대표 아놀드(Archibald V. Arnold)는 1946년 4월 27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결정을 수락한다는 선언문에 서명을 한다고 하여 그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신탁을 찬성한다든가 신탁 지지의 언질을 준다는 표시는 없는 것이며 선언문에 선언치 않고서는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될 수 없다.”라고 하여 선언서 제출이 찬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님을 보장하였다. 아놀드의 성명이 있던 날 민주주의민족전선·공산당·인민당·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 좌익계 32개 단체가 공동위원회에 선언서를 제출하였고, 5월 1일에는 비상국민회의·한민당(한국민주당)·한독당(한국독립당) 등 우익계 20여 개 단체도 선언서를 제출하였다. 이때에는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 지지가 반드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탁치를 할 것인가의 여부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 정부가 연합국과 협의하여 결정할 것이라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 측은 반탁운동을 전개한 단체나 개인은 공동위원회(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으로 초청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어 1946년 5월 6일 무기휴회를 결정하고 소련대표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다.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겨우 좌·우익이 일치하여 나가고자 하는 방향에 쇄기를 박았다. 이에 5월 12일 우익측 정당, 단체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곳곳에서 반소반공 시위를 전개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김규식은 대회장에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2~3주간 더 기다려 소련이 조선 문제 해결에 성의가 있어 속회된다면 그 결과를 기다리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 손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 이 정부는 대구에서 있든지 제주도에 있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연설하였다. 소련과의 협조관계를 유지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한반도의 적화를 막으려 했던 미국으로서는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남북분단과 민족분열을 감수하고서라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주장하였다. 한편 김구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고, 반탁을 내세우며 통일정부를 내세우는 다분히 이상적인 주장을 하였다. 이에 반해 김규식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자국의 우위를 다지려 경쟁하는 한편 자국의 군정에 유리하도록 정책을 실시하는 상황에서 친미·반소의 극우와 친소·반미의 극좌의 편향적 노선을 배제하고 민족내부의 자주적인 좌우합작의 기반을 조성하고자 중도파의 세력을 규합하였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려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촉구하였다. 이것은 민족내부의 극한 노선을 방치하여 결국 미소의 공동보조체제를 깨뜨리고 급기야 민족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것을 막아보고자 한 현실적이면서 합리적인 견해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소(미국·러시아)간의 대결과 경쟁이라는 외적 한계와 좌·우세력간의 신탁·반탁 논쟁을 통한 권력 투쟁이라는 내적 한계로 말미암아 통일임시정부 수립운동은 점차 어렵게만 되어갔다. 김규식은 고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맞이한 첫 부활절에 성결교회 교단에서 발간한 잡지인 『활천(活泉)』(1946.6 重刊 2號)에서 오랜 해외생활 끝에 돌아온 조국에서의 부활절 감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무엇을 구할까. 곧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구하자. 그리하여 이 땅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자. 만일 우리가 이 나라 건설을 위하여 충성하다가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리라. 밀 한 알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매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예수는 부활하셨다. 조선의 교회들아, 예수의 부활이 헛되지 않게 하라. |
좌 우 합작은 처음에 여운형에 의하여 제의되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민족의 자주적인 노력으로서 난국을 극복하고자 김규식과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그와의 만남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모두 즉시 독립을 원하기는 했으나 국제적 흐름과 강대국의 역학관계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공동위원회의 합의하에 좌·우가 합작한 통일정부가 반드시 수립되어야 한다는 절실한 현실의식을 갖고 있었다. 여운형은 중도 좌파의 대표요, 김규식은 중도 우파의 대표로서 그들은 민족주의의 중도세력을 결집하였다. 이들의 정치이념은 해방 전의 독립운동계의 좌·우 모두가 취한 민주사회주의였다. 김규식은 1930년대 독립운동계 좌·우익의 극한 대립을 해소하고 통일된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던 연합전선 운동의 경험에서, 그리고 완전 독립을 위한 실천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다. 노선에 따른 민족의 분단과 미·소(미국·러시아)의 점령으로 인한 불안전한 민족독립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민족 내부의 정치적 단결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친일파들이 모든 미군정의 행정 요직을 장악하고 민족운동을 탄압하자 민중의 증오심은 미군정을 향하여 쏟아졌다. 이에 미군정은 극우세력을 멀리하고 그 대신 좌·우 양파의 온건 세력을 대상으로 한 합작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의 극우세력을 미소공동위원회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려 한 소련과 계속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첨예화된 좌·우익의 대립을 완화시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한 목적, 한편 극좌세력의 영향력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미군정 측에서는 버치(Leonard Bertsch) 중위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를 설복하여 좌·우합작을 공식적으로 지지토록 한 후 회의를 알선하여 1946년 5월 25일부터 좌우합작회의는 시작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좌·우합작에 나설 중심인물로 김규식을 지목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군정 중심의 좌·우익 합작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이를 사양하였다. 그런데 미군정측은 이승만을 통해 좌·우합작이 미국무성의 정책임을 들어 집요하게 권유하였다. 이에 김규식은 이승만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지만 당시의 정세로 보아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본인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김규식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좌·우합작이 독립을 위한 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해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하였다고 한다. 좌우합작회의에는 김규식과 여운형·황진남·원세훈, 그리고 버치와 아펜젤러(Appenzeller)가 모여 시작하였는데, 우익의 거두인 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좌익의 거두인 박헌영 등은 회의에서 제외되었다. 원세훈은 첫인사에서 버치에게 “나는 당신에게 부끄럽소. 우리의 일을 우리가 못하고 외국인의 알선으로 이같이 함은 대단히 미안하오”라고 하였다. 합작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는 별도로 이승만은 1946년 6월 2일부터 남한 각지를 순회하여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처음으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이리·개성·서울 등지에서 단독정부 수립과 공산당에 대한 투쟁의 방향을 밝혔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의 본래 구상은 미국무성으로부터 논의된 것이다. 1945년 말경 미국무성의 일반 관리와 미군정의 하지·랭던(William Landon) 등이 모여서 한반도 문제를 검토할 때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면 사실상 남한에서는 좌익세력이 오히려 우익을 제압할 수 있다는 분석에 도달하였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남한단정(단독정부)론이 거론되었고, 이러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은 외신의 보도에 의해 1946년 4월 6일 국내에 전달되었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단정(단독정부)론을 내세우자 미군정은 6월 11일에 러치(Archer Lerch) 군정 장관의 명의로 정식으로 담화문을 발표하여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미군정은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검토하였지만 소련과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세력들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승만의 이러한 공개적인 주장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무성의 심중을 헤아리고 자신의 입지와 한반도 정세를 결합하여 철저한 반공노선에 입각한 정치 안정을 주장하고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여 단정(단독정부)수립운동체를 단일화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12월 17일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미국무성과 직접적인 교섭을 가졌다. 그는 미국무성의 일부 관료들과 위원들을 상대로 미정부의 대한정책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정책으로 나가도록 역설하였다. 이승만의 이러한 활동은 그 뒤 미·소(미국·소력)간의 냉전체제가 자리잡으면서 미국 측에게 남한단독정부 수립정책 추진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박헌영의 극좌세력은 경찰 당국에 체포령이 내려져 지하에 잠입하였으나 여전히 친소반미의 남로당 좌익세력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좌우합작위원회는 극우·극좌 세력이 모두 배제된 중도 우파와 좌파의 합작인 셈이어서 엄밀히 말해 좌·우합작이 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익 간에 내재해 있는 모든 이해와 감정을 초월한 대표적 기관을 설치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다시 속개시키고 완전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7월 10일에 좌·우 양측의 정식 대표가 결정되었는데, 김규식은 우측의 주석이 되었고 좌측의 주석으로는 여운형이 맡았다. 6월 18일 좌우합작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일치를 보았다. 2. 토지문제에 대하여 첫째 국유·국영, 둘째 경자유전(耕者有田), 셋째 유조건 몰수(생활에 필요한 자작농 토지는 제외), 체감매상을 당하는 자의 생계 고려, 넷째 대지주의 재생방지 등으로서 원칙을 삼은 것인 즉 세목에 이르러서는 장래에 실시할 때에 적절하게 작량(酌量)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가기지(市街基地) 대건물에 대해서도 우리의 주장하는 정신은 매일반이다. 여하간 장래에 입법기관이 성립된 뒤 우리의 노력으로써 그 기관이 위에 말한 여러 가지 원칙을 심의 결의하고 법을 제정한 뒤에야 비로소 구속력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에는 우리 좌우합작위원회의 공동의견이 될 것 뿐이니 미리 기우를 가지지 말고 먼저 냉정히 연구함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면 양해하기 그렇게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다시 말할 것은 토지안에 있어서 우측의 일소부분(一小部分)에서 반대하나 이는 오해다. ‘몰수’는 적산 및 재산을 말함이요, ‘유조건 몰수’는 구왕궁·사원·기타 공공사업기관에 소유된 토지의 매매를 제한하여 그 기관 관리자의 불찰로 자본가에게 매도치 못하게 할 것이니, 어떤 경우에도 국가가 그 토지를 소유하고 다른 경우에는 납세 대신 또는 유사한 수입으로 이를 대신 불하할 필요도 있다. ‘체감매상’은 지주의 생활을 보장할 것 외에 대지주의 토지를 현가에 비율적으로 체감하여 정할 것인 바, 소지주는 그 할인이 비교적 적을 것이다. ‘무상분여’는 농민에게 소유권은 있으나 매매와 상속에서는 국가에서 관리하여 대지주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자는 말이다. 그러나 일체를 입법기관에서 정할 것이니 지금 이 문제로 반대는 착오이다. ‘국가 부담이 과도케 된다’는 염려는 실제 통계 숫자를 가지고 따질 문제요, 이러한 부담에 대한 방법이 없는 국가는 건설의 목표가 아니다. 3. 7원칙 중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입법기관에의 참여를 불허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행정기구에 있어서도 반역분자를 포용하는 것을 절대로 불허할 것이나 건국사업에 공헌이 있는 자는 이에 한하여 채용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인정한다. 김규식은 1946년 10월 18일 좌우합작운동으로 한창 분주할 때 미국 『시카고 선(Chicago Sun)』지의 기자 마크 게인(Mark Gain)과의 인터뷰에서 주요산업체의 국유관리와 농지개혁 및 사회보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견해는 1930년대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을 때와 같이 사회민주주의 국가건설의 의사를 초지일관 유지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그는 우익과 좌익을 동시에 공격하고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둘로 갈라놓아 한국에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우익은 쓸데없는 언쟁을 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좌익은 파업에 전념함으로써 10월말에 있을 입법의원선거에서 전국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급진 좌파들이 좌·우합작 5원칙을 계속 고집하자, 여운형은 민족전선에서 탈퇴하였고 당수직도 내놓았다. 그러던 중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그리고 신민당 3당이 박헌영의 주도로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으로 뭉치고,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후부터는 더욱 맹렬히 좌우합작위원회를 반대하였다. 이에 맞서 여운형은 인민당의 소수파와 신민당의 반박헌영파와 합세하여 10월 16일에 사회노동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극좌세력들은 철도총파업을 계기로 노선을 바꾸어 폭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민중들이 가담하여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각 처에서의 연이은 폭동과 항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여운형은 테러를 당하여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김규식을 중심한 중도세력들도 광범위한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지 못한 채 편파적인 극좌·우파의 선전과 선동에 함몰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때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던 좌우합작위원회는 절박한 시대적 상황을 통감하면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정국의 혼란은 1946년 10월 1일의 대구 폭동 사건(대구 10·1항쟁, 1946)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김규식은 소요 사태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미군정에 한·미(한국·미국)공동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3일부터 미군정청의 군정장관 러치와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A. E. Brown) 소장, 그리고 좌우합작위원회의 대표들이 덕수궁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미(한국·미국) 대표들은 위원회를 설치하여 충분한 조사와 타당한 해결책을 강구하기로 결정하였다. 토의결과 지적된 것은 경찰 간부 중에 일제 고등경찰로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악질분자들이 많이 등용돼 이자들의 행패가 경찰에 대한 민중의 원한을 사고 있다는 점, 또한 미군정에 있는 한국인 관리 중에 일제에 충성을 다한 친일분자가 많다는 점, 미군정에 있는 통역들의 행패가 심해 일종의 필요악의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과 그리고 식량정책의 불합리와 귀속재산 처리의 부정 등 군정 전반에 걸쳐서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이러한 부조리가 결국 공산당이 민중을 선동하는 자료가 되어 금번 10·1 항쟁사건(대구 10·1항쟁, 1946)의 중요한 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김규식과 김구, 그리고 미군정의 브라운 소장은 1946년 10월 26일 한마공동회담 개최에 대한 한미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살벌과 파괴와 방화 등은 가장 큰 죄악이요 민족의 대불행이다.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연기되고 전국적으로 농민폭동, 노동자파업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미군정은 소요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충분한 조사와 아울러 미군정 전반에 대한 조사를 좌우합작위원회에 의뢰하였다. 미군정은 좌익 측으로부터 점령군이라는 비판을 받고, 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소련군 점령하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인민이 참정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미군정은 이를 의식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군정장관인 러치(Archer Lerch)는 조선 인민이 요구하는 법령을 조선인민의 손으로 제정하는 입법기관의 창설을 하지 사령관에게 건의하였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을 때,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의 대표인 김규식에게 과도입법의원 설립에 관한 자문을 해왔다. 여기서 김규식은 입법의원을 세워 민주적 개혁을 실시하고 동시에 한국인이 군정에 참여하여 점차 민정으로 이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과도입법의원 창설은 임시 조선민주정부의 수립을 기하며 정치적·경제적 및 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초안을 작성한다는 목적을 제시하고, 1946년 8월 24일 군정법령 118호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입법의원 창설에 대해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재판이다.”·“통일정부를 지연시키는 길이다.”·“미군정 연장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이다.”·“민주의원의 법통을 무시하는 일이다.”라는 등 비난이 드높자 미군정 측은 “이는 행정권 이양의 한 단계이며 인민이 정부운영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발전의 한 표현이지 남한 단정(단독정부)수립이나 또는 아무런 다른 목적이 없다.”고 발표하여 여론을 진정시켰다. 1946년 10월 21일부터 31일에 걸쳐 민선의원 45명이 간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추천한 인물 45명이 관선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좌익측 인사들이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으로 체포 중이거나 지하로 잠입하였으므로 좌우합작위원회는 엄밀히 말하여 좌·우의 광범위한 기반을 얻지 못하였으며 민족적 염원과는 상관없이 좌익은 완전 이탈되었다. 민선의원 선거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파견한 선거관리위원회가 감시 및 관리를 하였는데, 동위원회는 이 선거에서 선거부정 사실과 친일파들이 민선의원에 선출되었음을 지적하였고, 특히 서울과 강원지역 입법의원 선거에 부정이 있었음을 적발하였다. 민선의원 선거는 일제 때 도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에 따라 다액납세자와 지주들만이 선거권을 갖게 하는 등 비민주적으로 진행되었고, 당시 18세 이상이 투표권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가장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선동의 혐의로 감옥에 보내졌다. 일찍이 좌익계에서는 전면적으로 선거를 거부한 데다 선거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투표율은 매우 저조하였다. 민선의원에는 한민당(한국민주당)과 이승만계열의 극우인물들이 당선되었고, 좌우합작위원회가 추천한 관선의원 중에서 선정된 여운형·조완구·장건상·엄항섭 등은 취임 거부의사를 표명하였다. 아무튼 많은 진통을 겪고 과도입법의원이 성립되기는 하였으나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비민주적 선거라는 비판을 받는 등 출발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김규식은 마크 게인(Mark Gain)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선거는 사기(詐欺)이며 모든 좌익지도자들이 감옥에 있는 한 공정한 선거란 있을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입법의원 선거가 완전히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실시되었고 서울·강원도·대구·부산 등지에서 당선된 의원 가운데 친일파가 많이 끼여 있으며 두 달 전에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 공평한 선거를 치르기 위하여 만반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러치 군정장관에게 권고하였으나 무시되었다고 격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의 분노와는 달리 미군정은 친일파 문제가 민족문제로서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설혹 민족 감정을 헤아리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미군정으로서는 그것이 그들의 정책에 반할 때에는 군사정책에 입각한 미국의 국익과 편의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민족 간에 극우·극좌의 대립을 첨예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세력은 좌·우측 모두의 공격을 받으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였고 입법의원 선거에 임하였다. 김규식도 미군정이 입법의원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을까 회의하면서 처음에는 입법의원 선거에 불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김규식에게 민정이양을 굳게 약속하고 선거에 출마하도록 설득하였다. 김규식은 당시 정세로서는 최선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입법의원 구성에 참여하였고 미군정의 약속을 믿어보고자 했다. 이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6년 12월 11일 열린 입법의원 예비회의에 53명이 참석하였는데, 김규식은 49명의 동의를 얻어 입법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튿날 개원식에서 김규식은 다음과 같은 취임사로써 민족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였다 . 그런데 좌우합작위원회 출신의 관선의원과 한민당(한국민주당) 출신의 민선의원들은 사사건건 대립하는 형국을 보여주었다. 1947년 5월초 김규식·여운형 등은 조병옥·장택상의 해임을 요구하였고, 거듭 미군정청내의 한국인 관리들의 비리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5월 12일 입법의원에서는 친일파·민족반역자 등에 대한 처단은 민족적 명제라고 언명하고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특별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줄 것을 의원들에게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7월 20일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입법의원을 통과했지만 미군정과 한민당(한국민주당)의 반대로 공포되지 않았다. 특히 오랫동안 「입법의원 선거법안」을 놓고 민선의원과 관선의원은 격렬한 대립을 보였다. 민선의원은 선거권자와 피선거권자의 연령을 각각 25세 이상, 30세 이상으로 하자는 안을 내었고 관선의원 측은 각각 20세 이상, 25세 이상으로 하자는 안을 내었다. 민선 측에서는 오랜 일제지배 밑에서 정치에 참여치 못했기 때문에 무경험하고 무의식한 청년층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이 위험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선 측의 주장에 대해 관선의원 측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과도적 중요한 시기에 있어서는 청년층이 주도적 역할을 해왔으며 또한 일제의 몽매 정치 밑에서 대부분이 무지몽매한 가운데에서나마 비교적 20대의 청년들의 지적 수준이 가장 높다고 볼 때 앞뒤가 모순되는 법안은 대국적으로 유감스러운 결정이라고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표결 결과 민선의원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의장인 김규식은 “백만 청년을 제외하려고 하는 비민주적 처사는 언어도단이다. 다음 세대에 누를 끼칠, 이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으므로 의장과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라는 내용의 사표를 제출하였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민선의원측은 23세 이상과 25세 이상의 절충안을 내어 이것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김규식도 사의 표명을 철회하였다. 입법의원은 본래 설치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이를 지켜보는 김규식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극우·극좌 진영의 모두에게 공격 대상이 되어 김규식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보가 계속 전달되고 있었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김규식은 자택에서 나와 여러 곳을 전전하며 지내야 했다. 더욱이 김규식을 실망시킨 것은 과도입법 의원이 국회의 성격을 띠고 민주주의적 대의기구로서 출발하였는데도 여기서 제정한 법령은 미군정장관의 인준을 받은 경우에 한해서만 효력을 발생하였고, 무엇보다도 입법의원 안이 단정(단독정부)세력과 비단정(단독정부)세력의 대결장이 되어버린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미·소(미국·러시아) 양측의 교섭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5월 21일 서울 덕수궁에서 휴회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재개되었다. 김규식은 미소공동위원회 측에 “미·소(미국·러시아) 양대국간에 사소한 고집과 논란이 있더라도 그것을 배제하고 급속한 기한 내에 우리로 하여금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전력 매진하도록 해 줄 것”과 “우리는 좌우남북이 일치단결하여 천재일우의 호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만 겨레가 한가지로 결심하고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미소공동위(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노력하고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위원회 등의 중도파 세력 김규식·여운형·안재홍·홍명희·정구영 등 1백 여 명은 1947년 6월 15일 「시국대책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종교단체와 노동단체 등 사회의 각계각층이 망라된 것이었다. 그들은 범국민세력을 조성하여 본격적인 국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한편 우익진영은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는 문제를 놓고 내부에서 의견이 분열되었다. 일부 정당에서는 사이비 단체를 만들어 미소공동위원회 협의 대상에 등장시키기도 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좌익의 여운형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여운형은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위험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서울을 떠날 채비를 하였으나 미처 서울을 떠나기 전 7월 19일에 우익청년 한지근에게 피습당하여 사망하였다. 정권획득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류들과는 달리, 순수한 열정과 애국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김규식과는 오랫동안 공동보조를 맞추어 왔던 합작위원회 좌측 주석이며 근로인민당 당수인 여운형이 암살된 것이다. 여운형의 사망은 김규식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와 같은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던 김규식을 중심한 중도세력들은 시종 민족의 자주노선을 지향하여 미소공동위원회 대책협의회·민주주의독립전선·시국대책협의회·좌우합작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1947년 10월 1일에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민족자주연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김규식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제1·2차 준비회의를 거쳐 12월 20일에 15개 정당과 25개 사회단체, 개인 등이 참여하여 천도교강당에서 드디어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김규식은 “금일의 조선내에는 독점자본주의사회도 무산계급 독재사회도 건립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극우·극좌의 편협한 노선 모두를 배제하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미·소(미국·러시아) 양국이 자국의 이익에 따른 정책만을 고집하여 타협점을 찾지 못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에 맡기려 하였다. 김규식은 국제연합의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통일정부 수립은 한민족의 자주적인 운동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소(미국·러시아) 양국 사이에서 대립하고 있는 정치세력이 민족적인 차원에서 단결하여 뒤엉킨 민족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남북의 지도자가 회담을 가져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희망을 걸었다. 한반도에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중도파 세력들이 고심하고 있을 때, 국제정세는 이들 중도통일세력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947년 3월 10일 모스크바 4국 외상회의에서 미국무차관보 존 힐드링(John H. Hildring)은 “조선은 아시아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다. 조선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과의 사이에 행한 교섭은 절망상태인 즉 미국은 그 점령지역 안에서 독자적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발언하여 더 이상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의존하지 않고 한반도문제에 대해 새로운 정책을 검토하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한편 미대통령 트루먼은 공산침략에 직면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하여 군사 및 경제원조를 할 것이라고 밝히고 “미국은 전체주의의 직접 및 간접 침략으로부터 자유 국가나 제도를 수호할 것”이라는 트루먼독트린(1947)을 발표하였다. 이후 세계의 정세는 미·소(미국·러시아) 공존체제에서 냉전체제로 점차 변화되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의가 결렬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스크바삼상회(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에 의한 한반도문제 해결을 포기하고 소련과의 대화를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고서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
모스크바삼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1945)의 결정을 가지고 찬·반의 양편에 섰던 김규식과 김구는 단독정부 반대운동에서 하나로 일치하게 되었다.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은 한반도에서 외세를 배격하는 것으로, 단독선거를 치러 남·북한에 각각 별개의 정부가 들어선다면 이는 결국 남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소(미국·러시아) 양국에 예속되는 길이라고 두 지도자는 생각하였다. 그들은 미소공동위원회, 유엔 등 외세에 의해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고 있음을 통탄하고 주체적인 통일의 길을 찾기 위해서 남북협상을 구상하게 되었다. 김규식과 김구가 남북협상을 모색한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거나 혹은, 정치협상을 벌여 어떤 타협점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절대독립을 위한 투쟁, 혹은 독립운동의 연장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임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족의 분열을 막고 민족이 생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김구는 “공산주의자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자를 불문하고 외각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도덕을 가진 조선민족이지 이색민족이 아니므로, 이러한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여 동족과 친히 좌석을 같이하여 여하한 외부의 음모와 모략이라도 이것을 분쇄하고 우리의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아니되겠다.”고 하였다. 김구는 2월 10일에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고 호소하였다. 김규식은 3월 11일 김구·조소앙·조완구·조성환 등 임시정부 동지들과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그리고 유교 대표인 김창숙과 함께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7인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소련이나 미국의 정책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면서, 남북이 분단됨으로써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미국·러시아)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라고 예견하고, 이제 우리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며 남한단독정부 수립 선거에는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통일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것도 민족 앞에 맹세하였다. 기다리던 북한 측의 회답은 3월 15일에 평양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여기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남조선노동당)·한독당(한국독립당)·민주독립당 등 17개 정당·사회단체를 단체대표단연석회담에 초청하고 김규식과 김구 앞으로는 서한을 보내왔다. 이는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를 반대하며 4월 초에 연석회의를 소집할 것을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김규식과 김구는 1948년 4월 3일에 이승만과 한민당(한국민주당) 계열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단독정부 반대운동의 중심체로서 한독당(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을 기간으로 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이데올로기보다 민족문제를 중시하는 세력들이 다시 연합한 것이다. 필동 호국역경원에서 열린 결성식에서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북한 측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기가 쉽다. 이러한 때에는 우리 강토를 차라리 황해 바다에 집어넣는 것이 좋다. 그러니 이번 회담의 희망은 매우 박약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모든 희생을 잘 알고 각오하고 가는 것이다. 북쪽에서는 소련이 피흘리지 않고 우리 강토를 소연방에 넣으려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한단정(단독정부)은 이 위태한 한국의 남북을 영원히 분할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한편 미·소(미국·러시아) 양군 즉시 철퇴라는 원칙을 반대할 자 있겠느냐? 그렇지만 그 뒤가 무서우니 우리는 우선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이 철퇴에 관하여 협정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남북회담이 실패된 후 누가 다시 미국이나 소련을 믿을 것인가? 그러니 우리의 길은 지금 막다른 골목이다. 우리가 흥하는 것도 우리가 흥하게 할 것이고, 우리가 망하는 것도 우리가 망하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5월 6일 기자회견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번 회의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일치하였고, 북조선 당국자들도 단독정부를 절대로 수립하지 않겠다는 확언을 받았다고 밝히고,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새로운 발전이며 우리에게 커다란 서광을 주는 것이라고 밝히었다. 이처럼 김규식과 김구는 해방되어 돌아온 조국이 결코 해방된 것이 아니라 일본 대신 미국과 소련에 재점령되었음을 통감하고 미·소(미국·러시아) 양 군을 한반도에서 철퇴시켜 한국민의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우고자하는 의지를 남북협상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의 투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김규식은 떠나기 전 북한 측을 불신임하던 자세를 고쳐 신임하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김규식은 북한 역시 소련의 조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바는 아니나 미군정하의 남한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친일파문제, 토지문제에서 민족적인 모순을 어느 정도 청산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의 민족적인 감정은 어느 정도 북한 측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이러한 신뢰의 바탕을 갖고 협상에 임한다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남북협상에서 합의한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수문제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자 북한은 김두봉이 소련점령군 사령관에게, 남한에서는 여운형 등이 미점령군 사령관에게 협의안을 전달하였다. 미사령관 하지는 이에 대해 “유엔의 결의안에는 전조선에 걸쳐 총선거를 실시한 후 한국국민정부가 수립되면 가급적 속히 양군이 철퇴할 것이 규정되어 있다.” 하여 정부수립 후의 철군안을 고집하였고, 소사령관 코로트코프는 “소련정부는 조선으로부터 미군대가 동시에 철퇴한다면 조선에서 소련군대는 즉시 철퇴할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하여 양군 동시철수안을 주장하였다. 북한은 일단 북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유보하였으나 남한은 남북협상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5월 10일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에 남북협상의 주도세력인 한독당(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은 통일정부가 아닌 그 어떤 정부에 의 참여도 거부하여 선거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선거를 방해하고 반대하는 소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5·10선거(5·10 총선거, 1948)는 실시되었다. 948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198명이 선출되었는데, 당선된 다수가 한민당(한국민주당)과 독립촉성계열의 인물들이었다. 5·10선거(5·10 총선거, 1948)가 실시된 이틀 후 12일에 북한 측은 전기의 공급을 중단한다는 통보를 하고 14일에 전기를 단전해 버렸다. 그리고 해주에서 다시 제2차 남북협상을 열 것을 제의해 왔다. 이에 김규식과 김구는 북에 머물고 있는 홍명희를 서울로 오게 해서 남북회담에 앞서 미리 의논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열고 남한의 국회를 불법적 조직체로 규탄하고 북한만의 선거에 의해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외국군대의 동시 철수와 제2차 남북회담을 제의하였다. 남북회담 제의의 목적이 북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동의를 얻고자 하는 데 있음을 안 양 김씨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김규식과 김구는 7월 19일자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의 인민공화국의 선포와 국기의 제정에 대해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일반”이라고 규정하고 인민공화국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어떻게든지 통일정부를 수렁하고 미·소(미국·러시아) 양군의 철퇴를 실행하고자 했던 김규식과 김구의 노력은 남한의 5·10선거(5·10 총선거, 1948)로 인해 협상의 발판을 잃어버렸고 북한에서의 또 하나의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에서 7월 20일에 압도적 다수로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통일국가 수립운동은 계속되어 다음 날인 7월 21일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을 집결하고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기하여 민족 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한다는 등의 강령으로 한독당(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근민당(근로인민당)·근로대중당·민주한독당·신진당·청우당·보국당·민중동맹 등이 참가하여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였다. 이 촉진회(통일독립촉진회)의 회장에는 김구가, 김규식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김규식은 동회에서 파견하는 파리 유엔총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한의 이승만·김일성 모두의 단독정권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다시 토론할 때 어떤 한인이든지 자유의사로 말하라면 반쪽 조국 위에 세워진 정부를 자기의 통일정부라고 부르지 아니하며 그 정부가 자기들의 행복을 줄 것이라고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라며, 통일독립촉진회의의 대표가 유엔총회에 참가하여 발언할 수 있게 할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유엔에 보냈다. 당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는 정부만이 유엔 한국위원단을 상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김규식과 김구는 유엔한국위원단을 상대로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을 다시 시작하고자 운동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열기는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됨으로써 냉각되었다. 민족의 양심들은 한 두 사람씩 총탄에 희생되는 상황에서 김규식이 홀로 민족자주연맹을 이끌어 가기에는 이미 힘이 분산되고 소진되어 버렸다. 1950년 5월 30일에 제2차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 김규식의 주변 인물들은 김규식에게 정계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이제 분단이 기정사실이 된 현실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정치적 신념을 펼쳐 볼 것을 권유한 것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그 어떤 단독정부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혹자는 김규식이 선거에 참여하고 그를 중심한 중도 세력들이 힘을 집중했더라면 남한의 정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규식이 자신의 신념을 꺾고 단독정부에 참여하기에는 그의 민족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은 분단국가의 성립으로 실패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우리 민족운동의 큰 줄기로서 명맥이 이어져 지속되고 있다. 이제 이 운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반드시 이룩해야 할 민족적인 과업인 것이다. |
전후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소련은 힘의 대결을 택하여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여기에 민족의 분단과 국토의 분열을 막아보고자 기울였던 민중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정치세력들은 민족이라는 전체의 이익과 발전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권력확대에 치중하여 남북한의 분단은 고정되었다. 오랜 동안 식민치하에 있으면서 열망해 왔던 민족의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정은 남북한이 모두 뜨거웠다. 그러나 남북한은 서로가 민족의 정통성을 획득하고자 이러한 민족적 열망과는 달리 경쟁하는 가운데, 이승만은 북진론을, 김일성은 민주기지론을 주장하면서 서로가 무력통일을 공언하였다. 끝내는 남북한이 정면으로 대결하였고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은 한편의 시나리오처럼 터지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6·25전쟁, 한국전쟁, 1950)이 발발한 것이다. 김규식은 남북회담이 결렬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일체의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있던 중 6·25의 변(6·25전쟁, 한국전쟁, 1950)을 당하였다. 인민군에 의하여 서울이 점령당하였을 때 김규식과 그의 가족들은 민규식이 제공한 삼청동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들이 이 집을 공관으로 사용하겠다고 요구해 와 잠시 계동으로 이사하였다가 어느 독지가의 호의로 원서동에 있는 한 한옥으로 다시 이사하였다. 1950년 9월 17일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서울 시청에서 무슨 회합이 있으니 모두 집합하라는 통지를 보내자 이튿날 김규식과 최동오·송호동·김진우·권태양·송남헌·신상봉 등 측근들이 모여 심의한 결과, 그 회합이 요인들은 납치하고자 하는 회합임을 예견하고 피신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피난을 가기 전인 오전 11시경에 이승엽이 주재하는 “평화옹호대회에 참석하시도록 모시러 왔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비서 신봉승과 함께 집을 나섰다.[1980년 중반에 남한으로 망명해 온 전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부국장, 정무원 부부장을 지낸 신경완(申敬完) 씨는 북한 노동당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납북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가는 일에 동행하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한 바 있다. 그의 기록과 증언이 공개되면서 김규식을 비롯한 납북인사들의 최후가 알려졌다. 따라서 김규식의 납북당시 상황과 사망하기까지의 사실은 신경완 씨의 증언과 기록을 토대로 발간된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태호저, 1991, 다섯수레)에 의거하여 기술하였다.] 일행은 유동열의 장례를 치른 후 희천역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전천으로 가서 한나절을 보내고 다시 화물열차를 타고 강계를 향해 떠나 10월 19일 이른 새벽에야 도착하였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인솔자인 김관섭을 따라 강계 시내로 들어왔다. 강계는 피난민들과 전선에서 부상당한 이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행은 기진이 다 쇠잔해졌고 특히 김규식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돼 위독상태였다. 조소앙 등은 관계자들을 만나 김규식을 병원에 입원시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무시되었다. 며칠동얀 강계의 한 일본식 사택에서 보내고 10월 23일 밤에 다시 강계역을 떠나 압록강가 최북단의 만포선 종착역에 도착하여 여기에서 다시 산악지대로 훨씬 들어간 작은 산골 마을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한참을 묵다가 만포시 방면 별오동(別午洞) 부근의 산골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앞서 납북된 인사들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김규식을 비롯해 조소앙·안재홍·오하영·윤기섭·송호성·엄항섭·최동오·정광호·장연송·장덕로·이강우·원세훈·명제세·김약수·신석빈·박철규·김효석·김용무 등 40여 명이었다. 그간 동지들의 끈질긴 입원 요구 끝에 김규식은 11월 하순경에 만포 근처의 군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병원에 입원했으나 그의 병세는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김규식은 납북이전부터 심장병·위장병·불면증 등으로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는 등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는데 무리하게 진행된 북행과 천식의 악화로 거의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여 그의 심신은 더 이상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였다. 12월 초 병세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동지들은 김규식이 입원한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김규식은 기침 때문에 밥은커녕 미음조차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하여 앙상하게 뼈를 드러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문병간 동지들은 좁은 방안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병이 빨리 나아 돌아오라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와야만 했다. 김규식 곁에는 권태양과 김용관이 남아 그를 돌보았다. 그는 때때로 기력이 회복되면 권태양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라의 통일도 못해 놓고 이렇게 눕게 되었으니…”라 말을 몇 번씩 번복하였다. 그는 또 “내 나이 70이지만 나라를 통일시켜 놓고 기뻐하는 남북 겨레들의 얼굴을 보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으련만” 하면서 비감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한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던 생각을 권태양에게 유언처럼 들려주었다. 김규식은 혼수상태 속에서도 ‘조국’·‘통일’이라는 두 마디 말을 자주 되뇌었다 한다. 12월 10일 김규식은 오랜만에 안정을 찾은 듯 싶었다. 간병하고 있던 권태영과 김용관도 안심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려 간 사이 초저녁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김규식은 유언을 하려는 듯 권태양과 김용관을 찾다가 밤중에 말없이 잠드는 듯 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운동 했던 김규식이 말년에 가족들과 헤어진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은 너무도 비극적이다. 그러나 김규식은 숨을 거두면서 이상과 신념에 따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몸 바쳐온 자신의 일생을 만족하게 회상하였을 것이다. 김규식은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12월 12일 만포진 부근 야산에 묻히었다. 북한당국은 1970년대 말 김규식의 묘를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능으로 이장하였다. |
일제는 1921년 김규식에 대한 보고에서 ‘친러·친미·친중, 그리고 부분적 폭동을 주장한다.’라고 분석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김규식에 관한 인물 평가는 달리 해석하면 어떤 강대국에도 치우치지 않는 행동가인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실례라고 하겠다. 광복 이후에도 김규식은 극한으로 대립된 친미반소, 친소반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에서 오로지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우선으로 한 민족주의를 지향하였다. 즉 그는 민족자강의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한 자주적 한국인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현실을 파악하는 뛰어난 판단력과 분석력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어떠한 주의·노선보다 민족의 통합과 통일이 우선한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선상에서는 사상과 노선을 초월하여 민족의 화합과 대동단결을 추구하여 좌·우합작을 주도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통일조국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분단된 남북의 협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주변에 얽힌 국제적 이해와 민족내부의 노선간의 갈등으로 김규식의 이상과 능력은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다. 김규식의 활동은 언제나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그리고 결국 최선의 길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점에 고뇌가 따랐다 그러나 한번 선택된 길을 실천할 때의 김규식의 정열과 노력은 언제나 진중하였다. 김규식의 생애를 통해 보여준 그의 희망과 좌절은 우리 민족운동의 배경과 성격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독립운동사와 해방정국의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자신의 이해와 기반을 중시하는 부르주아적 성향에서 벗어나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이 서면 민족적 입장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시대의 양심이었던 그의 고민은 우리 민족에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당면한 현실 문제로 다가온 민족 통일의 시대에서 김규식이 지향했던 목표는 합리적 민주주의의 길이 되어야 할 통일 조국을 전망하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규식의 정신은 냉전주의적 반공체제 아래서 그 존재가 잊혀져왔다. 편향적 이데올로기는 김규식이 좌·우합작을 전개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한 주체세력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기피하는 괴현상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규식의 독립투쟁과 조국통일을 위한 공적은 1989년 8월 15일에 와서야 건국공로훈장 중장에 추서되면서 비로소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
1881. 2.28(1세) 경남 동래(東萊)에서 출생
자료정리. 민족회의 상임공동대표 강석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