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바리새인 비유가 친숙하다는 데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우리 앞에 두 종류의 의를 보여준다.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고 행하는 거짓 의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참된 의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번듯한 성도를 정죄하고 하찮은 죄인을 높이시는 예수님의 기이한 판결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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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의 문제는 이 비유가 너무 친숙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내용과 요점을 알며, 그 바리새인을 만화에 나올 법한 지독한 악당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와 같이 행하려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에 그가 얼마나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는지를 잊고 있다. 그 바리새인의 모습을 오늘날의 현실에 대입해 보면, 그는 마치 교회의 모범적인 장로로서 경건의 표상과도 같은 이였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 그가 맨 처음에 고백한 말은 “하나님이여……감사하나이다”였다(눅 18:11). 이는 그가 유일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며, (이 감사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분의 은혜를 믿는 이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성전 앞에 서서 기도하면서, 자신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이임을 드러냈다. 그는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들(십계명의 제1-4계명—옮긴이)을 지키며 그분만을 경배하는 이였다. 이어서 그는 율법의 둘째 돌판을 논하면서, 자신이 다른 계명들도 어긴 적이 없음을 밝혔다. 그는 도둑질이나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아무에게도 허물을 범한 일이 없는 이였다. 만약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세상이 더 멋진 곳이 되지 않겠는가? 루터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 바리새인이 “실로 아름답고 자랑할 만한 성도”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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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는 자신이 탁월하다고 너무 쉽게 착각한다. 그 바리새인은 확실히 그랬다. 그는 온갖 일에 세세히 관심을 두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만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는데, 이는 우리의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그분의 말씀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히 4:12). 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것을 능가하는” 의(마 5:20, ESV)를 알지 못한 채, 그 일을 그저 외적인 행실의 문제로만 생각했다. 그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외적인 티를 보고 정죄했으나, 정작 자신의 영혼이 썩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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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바리새인은 자기 의존의 화신 같은 존재였다. 그는 실로 부지런하고 철저한 종교인으로서, 인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최상의 사례였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거룩하고 더 나은 인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들, 구속의 필요를 거부하고 제자도의 목표는 스스로 더 탁월한 존재가 되는 데 있다고 여기는 이들을 위한 하나의 모범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 바리새인에 관해, 루터는 이렇게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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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탁월한 성자의 마음속에는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마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몇 가지 행실로 그 속마음을 감추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예배와 감사 기도를 통해, 지극히 높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며 모욕했습니다. 이는 대중 앞에서 이웃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러운 악덕들을 노출하면서도, 자신이 모범적인 성도라도 되는 듯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천국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다른 요구들도 다 들어주셔야만 하는 것처럼 행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