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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5월 처음 청도읍성을 탐방한 후 약 6년만에 다시 방문했는데 그 당시 아직 복원되지 않고있던
남문쪽 읍성과 주요유적들이 그동안 복원되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구정설 명절을 지나자마자 맑은 날씨를 택하여 바로 청도로 Go Go!!
*기행장소 : 청도읍성(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54-3)
*탐방코스 : 읍성길을 따라 둘레길처럼 산책하면서 한바퀴 돌았습니다^^
동문지~고마청~연꽃지~형옥~북문루~성내지~청도민속촌~서문루~도주관
~동헌~향교~남쪽성벽~동쪽성벽~석빙고~억만고~동문지
##청도읍성(淸道邑城) : 경상북도 기념물 제45호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합니다.
청도읍성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태를
보여주며, 읍지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1570보(1880m)이고 높이는 5자5촌(1.7m)였다고 하나 일제
시대때 읍성철거정책에 따라 대부분이 헐렸고 성벽바닥과 일부만이 남아 있었으나 그동안의 복원에
의해 대부분의 성곽이 복원되고 남쪽과 서쪽 일부성벽터만 미복원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청도읍성은 고려때부터 있었으며 당시에는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성이었는데 조선 선조23년(1590)에
돌로 고쳐 쌓아 선조25년(1592)에 완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도읍성 복원사업
청도읍성은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동.서.북문이 소실되는 등크게 파손되었으나 이후 소실된 문루를
다시 보수하고 성벽을 축조하여 조선조말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헐렸고 석빙고
가 있는 동문지에서 향교로 이어지는 동측 성벽일부구간(346m)이 남아있어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로 지정되었는데, 조선시대 문헌에 의하면 성벽은 길이 1570보(약 1.9km), 높이 5척5촌(약 1.65m)
였다고 합니다. 청도군은 2005년 "청도읍성 보수(복원)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순차적으로 청도읍성
복원작업을 시행했으며 2006년부터 청도읍성 동문지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을
토대로 10차레의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북문과 서문을 중심으로 성벽을 1.1km 복원하여 청도군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1.동문지(청도읍성 동쪽성벽)
읍성동쪽에 쌓은 총길이 약 340m로, 성벽구간은 2005년 좌표조사에서 성터위에 집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捧日樓),폐문루(廢門樓),치성(雉城) 3곳이 확인되었는데 문헌에서
동문루는 임진왜란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35년(1709)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22년(1798) 옛터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벽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터, 2007년에 동문루옆 치성, 2016~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습니다.
성벽조사에서 기초와 본체(체성+내탁)를 확인했는데, 기초는 정리한 터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넓게 다진 3층이고 기초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으며 본체는 기초위에 약 5m
너비로 성돌을 마주 보게 쌓고 그 사이에 잡석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고 본체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하였습니다.
동문루터는 일제강점기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없어졌음이 확인됐고 폐문루터는
임진왜란 이후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으며 성벽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쌓은 치성은 동문루옆과 성벽 남.북쪽의 모서리에서 각각 확인되었는데, 치성은
성벽과 같은 쌓기방법으로 함께 쌓았습니다.
정비사항은, 2008년 주차장,관광안내소,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고
2009~2010년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 동문루 남쪽의 남은 성벽을 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방법대로 쌓았고 성문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
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습니다.
1)동쪽성벽 발굴조사연혁
2)동쪽성곽과 성벽
3)청도 선정비군(淸道 善政碑群)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여기 선정비군의 비석들은 읍성
외곽 서상리,동천리,남성현 등 주요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비석이 있던 주변도로가 확장되며
발견된 비석들을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 오다 2008년 청도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건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1675~1904년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군수 25기,찰방 3기로 모두 30기입니다.
#비석의 종류
묘비(墓碑),능비(陵碑),신도비(神道碑),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애민비(愛民碑),영세불망비
(永世不忘碑) 외에 성곽이나 빙고(氷庫) 등에 세우는 기적비(記蹟碑) 등이 있습니다.
비석의 형태는 비문을 새기는 비신, 이를 받쳐주는 대좌, 비신을 덮는 개석 또는 가첨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개석없이 비석상부가 둥근 원수, 대좌와 비신 이수 등이 하나의 돌로 된 통비도 있습니다.
대좌가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으면 귀부, 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을 복련이라고 하고 안상문,당초문 등과
문양이 없는 대좌를 지대석 또는 비좌라고도 하며, 개석은 형상에 따라 용이나 이무기모양이 있으면
이수, 연꽃문양이 있으면 하엽, 구름과 꽃잎 해와 달이 있는 것을 관석이라 하고 팔작지붕 개석도 있음.
2.고마청(雇馬廳)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로, 조선 숙종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는데 청도관련 고문헌에 고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창고조이며 이후 1895년 "청도군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하여 이러한 문헌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했습니다.
1)고마청
2)말 조형물
3.연꽃지(蓮花池) : 읍성 북문밖에 위치
매년 7~8월 화사한 연꽃(수련)이 피면 이곳 연꽃지 주변이 동화같이 예쁜 풍경을 자랑하게 되어
가족단위나 연인끼리 산책하면서 마음 힐링하기 좋은 장소이며 바로 옆에는 작약꽃밭이 있어서
5월에 방문하면 흐드러진 붉은 꽃밭을 감상할수 있습니다.
4.형옥(刑獄) : 읍성 북문밖에 위치
형벌을 집행하고 죄인을 구금하던 곳으로 조선 세종때 전국적으로 정비됐는데 형옥의 표준설계도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으며 청도읍성 형옥의 위치 및 형태는 청도군 최초 사찬읍지인 "오산지(1673)"
를 비롯하여 "여지도서(1760)","청도군지(1834)"등 각종 청도관련 문헌 및 고지도에 기록되어 있고
문헌기록인 '재성외서북우'로 보아 현재 북쪽성벽과 서쪽성벽 모서리부분의 성밖이 형옥지로 추정
되었고 이를 근거로 발굴하여 관계전문가의 고증하에 2013년 복원하였는데, 형옥의 구조는 원형의
담장안에 남녀를 구분한 옥사 1동,관리사 1동,출입시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5.북문루(北門樓) : 공북루(拱北樓)라고도 함
북쪽성벽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을 따라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470m입니다.
1)북문루 전경과 성벽안쪽인 반원형의 옹성 풍경
2)북문루에서 바라본 동편쪽 성곽과 서편쪽 성곽 풍경
3)북문루에서 바라본 동편쪽 성벽과 서편쪽 성벽 풍경(동편쪽 성벽보다 서편쪽 성벽의 지형이 낮음)
6.성내지(城內池) : 성내제(城內堤)라고도 함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두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못으로, 못의 기능은
전쟁시 화재대비 방호수, 경작 농수, 성내 배수를 위한 시설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발굴을 통해 제방의 규모를 확인한 바 현존하는 우리나라 읍성중 그 예가 많지 않을뿐더러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게 못으로 남아있던 성내지는 청도읍성의 조경과 관람환경 개선을 위해
한국식 전통정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1)성내지에 조성된 정자인 청심정(淸心亭)
2)성내지 풍경
7.청도읍성 민속촌
1)민속촌 먹을거리 메뉴판
2)방문객들의 식사장소인 한옥모습
3)전통악기체험장
8.서문루(西門樓) : 무회루(撫懷樓)라고도 함
1)서문루 전경
2)서쪽성곽과 성벽 풍경
3)서쪽성벽 조성연혁
읍성의 서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m구간으로 2005년 지표조사에서 마을이 들어서고
밭을 만들고 남은 성벽과 함께 서문루가 확인되었고 서문루 남쪽으로는 임진왜란이후 새로 보수한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퍼음 쌓은 성벽과 쌓기법을 비교해 볼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성벽주위로
땅을 사서 2014~2015년 서문루와 주변 성벽을 발굴 조사했는데, 문헌에 서문루는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현종10년(1669) 무회루로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사에서 확인된
성벽은 기초와 본체(체성+내탁)로 기초는 잡석과 흙을 섞어 넓게 다져 쌓았고 기초위의 본체는
처음 쌓은 것과 후대에 쌓은 것이 함께 확인된 바, 처음 쌓은 성벽의 본체는 동쪽성벽과 같은 쌓기
방법으로 했으나 후대에 새로 쌓은 것은 흙으로만 채워 성돌의 크기나 쌓기법, 쌓은 방향이 처음
쌓은 것과 후대에 쌓은 것이 서로 다름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읍성의 정문인 서문루 주위로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집이 들어서고 길을 내면서 문루터는 없어졌음
이 확인되었고 성문의 통로옆에 다듬은 돌로 성벽처럼 쌓아 만든 축대가 일부 남아있었으며 서문루
앞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반원형으로 돌출시켜 만든 옹성이 전체크기의 1/5 가량 남아
있었으며 옹성의 쌓기법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과 서문루를 새로 수리할때 만든 것으로
밝혀졌고 2017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과 고증을 거쳐 서문루,옹성,성벽을 새로 쌓았으며
탐방객을 위해 성밖에는 주차장, 성안에는 옛 장터위치에 휴게.편의시설을 설치했습니다.
9.도주관(道州館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도주는 청도의 옛이름으로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인데,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과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어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동헌과 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
하는 곳이었는데, 도주관은 조선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38년(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주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으며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였습니다.
건물의 정청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집이고 동헌과 서헌은 정면 6칸,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폭에 비해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줌.
1)도주관 전경
2)청도척화비(淸道斥和碑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조선 고종3년(1866) 병인양요와 동왕8년(1871) 신미양요를 겪은 후 서양인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백성들에게 경고하고자 대원군의 명령으로 세운 척화비로, 당시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중요한 도로변에 세웠던 척화비중 하나를 도주관앞으로 옮겨놓은 것인데, 비신의 높이는 155cm,
폭은 45cm, 두께는 25cm인 작은 비석으로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고
쓰여 있는데 교육적인 측면에서 한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자료중 하나임.
10.청도동헌(淸道東軒) :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동헌은 조선시대 고을수령이 행정실무를 보던 곳으로 수령이 지내는 관사의 동쪽에 있어 동헌이라
불렀으며, 상량문에 따르면 청도동헌 건물은 조선 영조13년(1737)에 지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동헌만
화양초등학교 운동장에 남아 교실로 사용하다가 1955년 지금위치로 옮겨 지었으며 2000년대에
사진,구술 등 고증자료를 통해 앞면 7칸,옆면 2칸,뒤에 1칸이 달린 T자형 건물로 복원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동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청도동헌은 조선시대 관아건축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상량문(上樑文) : 집의 신축이나 개축내력,까닭,공역한 날짜와 시간 등을 적은 글)
11.청도향교(淸道鄕校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교길 36)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
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지은 지방교육기관으로 과거시험을 위해 시나
문장을 짓는 법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가르쳤고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이름난 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청도향교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조선 선조원년(1568)에
군수 이의경이 고평리에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 여러차례 자리를 옮겨 지었다가 영조10년(1734)에
군수 정흠선이 현재의 자리인 교촌리에 지었는데, 건물구성은 대성전, 동.서무, 내삼문 등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명륜당, 동.서재, 사락루 등 학문을 가르치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학후묘로 건물을 배치하는 다른 지역의 향교와 달리 제사공간과 학문공간을 좌우로
배치하는 좌묘우학의 구성을보여줍니다.
1)사주문(四柱門) : 향교로 들어가는 정문
2)유림문화회관
3)사락루(思樂樓) :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문
4)지인재(智仁齋)
5)삼문(三門) :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6)대성전(大成殿) : 공자와 중국,우리나라 유현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
7)동무(東廡)와 서무(西廡)
8)명륜당(明倫堂) :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
9)동재(東齋)와 서재(西齋) : 학생들의 기숙사
12.남쪽성벽과 성곽
13.동쪽성벽과 성곽(향교방향)
14.장승군(長丞群)
15.석빙고(石氷庫) : 보물
겨울에 인근의 하천에서 가져온 얼음을 봄,여름까지 사용할수 있게 보관하던 창고로 조선 숙종39년
(1718) 만들어졌는데 동서로 긴 직사각형구조로 되어 있으며 서쪽에 문이 있고 지면에서 1.9m깊이에
얼음을 보관하는 빙실이 있는데 길이 14.85m,너비 4.76m,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4.22m입니다.
게단을 이용해 석빙고안으로 들어갈수 있으며 원래 석빙고의 천장을 덮었던 부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아 밖에서도 석빙고안이 들여다 보이며 천장을 지지했던 아치형 구조물,바닥,벽면은 아직
까지 남아있고 바닥은 동쪽으로 5도정도 기울어졌으며 바닥가운데 배수로를 만들어 물이 석빙고밖
개울로 빠지도록 했습니다. 석빙고입구에는 비석이 있는데, 박상고(1654~1718) 등이 석빙고를
만들었다는 내용과 숙종39년(1713) 2월11일에 공사를 시작해 5월5일에 마치고 5월6일에 석빙고를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석빙고를 짓는데 5,451명이 하루씩 동원되었고 정철 1,438근과
회 384석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도석빙고는 현재 남아있는 전국의 석빙고 6기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고 조성연대,책임자,조성물자
등을 정확하게 알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16.억만고(億萬庫)
청도읍성관련 고문헌에 억만고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청도최초의 사찬읍지인 "오산지(1673)"
이며 관아에 붙어있는 곡물창고인 사창(司倉)의위치가 성안 동쪽 옛 억만고의 자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억만고 또한 사창처럼 관아의 부속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구전에 의하면 이 일대를
"창마당"이라 부르는데 화양읍내시장이 제일 번성하던 시절 곡물장터가 열렸던 곳이며 곡물보관창고가
있어서 창마당이라 하였다 합니다.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옛 문헌기록을 근거로 2013년 관아창고를 복원하여 억만고라 명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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