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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우리가 주기도를 드리게 하소서
Ⅰ
저자가 변명을 겸해 한 말대로 ‘주기도’에 관한 글은 수도 없이 많다. 따라서 이 주제에 관해 글을 쓰려면, 그리고 그 글이 그냥 종이와 먹물을 낭비하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무언가 가치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 가치가 무엇이겠느냐’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인문학적’ 시각이다. 저자는 인문학적 통찰이란 결국 생명의 신비를 바탕에 둔 통찰, 그러니까 결국 신학적 통찰과 진배없다고 판정하지만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자신만의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인문학은 신학의 자장(磁場)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 역사와 인간, 사회와 문화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기원하였다. 신학에서 의식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배후에는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신의 섭리나 은총 혹은 신비로 돌리려는 환원주의에 대한 거절이 있다. 둘째, 저자는 주기도를 해설하여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는 영적 태도’를 기도의 본질로 보고, 그 본질을 샅샅이 살피려 한다. 셋째, 주기도문 연구에서 얻은 기도에 관한 이해를 토대로 본보기가 될만한 기도문을 작성하여 주기도문 연구의 ‘응용’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 세 가지는 ‘가치가 있는’ 작업이다. 흔쾌히 책을 펴들게 한다.
Ⅱ
이 책은 주기도문의 내용에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저자의 핵심적인 논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장인 ‘하나님은 누구신가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주기도문에 나타난 신론을 다루는 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먼저 힘담주어 강조하는 바는 주기도문이 공동의 기도, 곧 ‘우리’의 기도라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차원’과 ‘사적인 차원’을 구분하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기도가 ‘사적인 차원’에만 매달려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우리’의 기도는 ‘생명의 연대’로 나아가는 공동체의 기도일 수밖에 없음을 그는 지적한다. 이어 하나님의 성(性), 하나님의 보호자 아버지 됨, 우리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하늘’, 절대타자로서 하나님 등등 주기도문에서 감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찾아간다. 전체적으로 건강하고 사려 깊은 논의로 누구에게든지 추천하고픈 내용이다. 단 이후로도 책 전체에 걸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저자가 신약학 연구 결과를 보다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이 책은 신약학자의 글이 아니니 저자에게 신약학의 최신 연구를 면밀히 참고할 것을 주문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저자는 신학적 전망을 가지고 주기도문을 얼마든지 해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성서학에 조금 더 물었으면 훨씬 더 풍성해지고 정교해질 수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하늘’에 대한 성서학적 연구는 저자의 설명을 보다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적 주장이 사실 성서적으로는 별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는 것도 참조하셨으면 그 신학적 주장말고 다른 방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표상을 탐구했을 수도 있었다. 또 조금 조심스럽지만 저자가 특정한 부분에 관해서 성서를 ‘오해’하지 않았나 싶은 부분도 있다. 가령 ‘[바울은] 교회에서 여성들이 지도자로 나서지 말라는 말도 했소’(25쪽)는 어느 본문을 근거로 한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바울은 여성지도자들을 교회에 천거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장인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는 이전 장에서 논의한 ‘하나님에 대한 표상’의 도약대 위에서 그 간구의 진의를 우려내려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한국교회의 열광주의와 본회퍼가 말한 ‘원초적인 종교성’에 근거한 ‘경건 생활에 길들’여진 교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이후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하나님’이란 소제목 아래 십계명 중 제삼계명과 이 간구 사이에 있는 긴장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행위’를 뜻한다고 결론 내린다. 이후 ‘거룩은 하나님 경험에서 나온다’를 통해 ‘거룩’이 이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경험임을 설명한 후, 이 신비에 대한 증언이 부재한 한국의 강단이 개탄의 대상이 된다. 그 신비를 잃어버린 신앙은 그저 잡담에 불과한 사교 모임으로 교회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적확한 지적, “잘 들으시오. 사람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 없소.”가 이어진다.(58쪽) 꼭 맞는 말이다. 자신들이, 자신의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과 거룩함을 돌리겠노라는 호언장담은 믿을 게 못된다. 헬라어를 살펴보면서 이 간구를 이렇게 의역할 수 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당신께서 거룩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자는 이 간구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님이 하나님다워지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다른 하나는 ‘그런 세상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 물론 주도권은 하나님께만 있다. 우리는 그 주도적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순종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간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고”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사역의 의미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차근차근 진행된다. 저자가 늘 강조하는 바, 그저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공부가 늘 필요하기 마련이다. 예수 사역의 의의와 당신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아주 요약적으로 잘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은 믿음 외에 아무것도 없었소. …… 종교적 경건과 도덕적 품위를 내세우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그냥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마뜩잖은 거요”(68쪽) 같은 문장들이 있는데, 이것은 나를 의아하게 했다. 이런 식의 해석은 종교개혁적인 시각이지 예수의 가르침의 본뜻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후에 로마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저자가 종교개혁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나아가 “하나님 나라 윤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최대한 축소시키는 삶의 자세요.”(70쪽) 등의 문장이 있다. 그 발언의 근본 취지는 잘 알겠으나,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터무니없는 행태에서 더욱 가치 있다는 것도 잘 알겠으나 루터의 신학이 예수와 하나님 나라 이해에서 다소 어긋나게 반복되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사회주의 운동이나 나아가 해방 신학 및 민중 신학의 ‘실패’가 ‘하나님 나라를 사회구조로만 보았기 때문’(22쪽)라는 저자의 진단을 생각나게 하였다. 독일의 신학교에서 한국의 (교회 현장 말고) 사회 현장으로 조금 더 귀국하셔야겠다고 죄송스러운 말씀을 드린다. 루터와 뮌처의 양자택일 상황이 주어진다면 루터를 택하겠다는 저자의 의견에는 존중을 표하지만(102쪽), 만약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회구조로만 보는’ 뮌처/해방신학/민중신학/그리스도교 사회주의”라는 판단에서 그리된 것이라면 그것은 독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이다. 십자가에 관한 설명에서도 ‘생존해 있는 개신교 조직신학자 중에서 가장 높은 권위자로 인정받는 학자’(107쪽)로 소개된 그러나 ‘백인 예수’를 믿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드는 판넨베르크보다는 안병무나 서남동의 통찰이 적어도 좁은 내 소견으로는 더욱 나아 보인다.
세 번째 간구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다. 이 장은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대비시키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삶의 조건을 바꾸려는 잘못된 기도를 밝혀낸다.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가 ‘아버지의 뜻’을 따른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저자는 기도의 본뜻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그러나 저자나 독자들 모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이 장이 기여하는 바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소?’라는 저자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대답은 매우 간략하게 제시된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없소.”(105쪽) 그렇다면 어떻게? 마치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등만을 보여주듯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이 지나간 자취를 ‘신학 공부’를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감히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모두 맡은 양 고집 피우지 말라는 권고가 이어진다.
Ⅲ
네 번째 간구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하나님과 관련된 간구에서 우리의 필요를 위한 간구로 옮겨진다는 점에서 이전의 간구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저자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저변에 놓인 절박함을 언급한 후 오늘날과 같이 풍족한 시대에도 ‘우리’의 기도로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러 측면에서 독자들을 설득한다. 오병이어 기적, 만나 사건, 성만찬 등이 저자의 신학적 해설로써 등장한다.
다섯 번째 간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는 죄를 ‘자기집중’으로 규정하고 그 간구의 의미를 살핀다. 원죄와 자범죄에 대한 다소 상투적인 설명과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판넨베르크 등의 이론에 관한 간략한 소개 후에 저자는 ‘피조성의 부정’(138쪽)을 죄의 본질로 지목한다. 이것은 결국 일종의 나르시시즘의 변용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통상적인 해석을 꼬치꼬치 따질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나는 식욕, 성욕, 사회적 성취욕 등을 거명한 후 “이런 본능 자체를 기독교는 죄의 본질로 여기오”(139쪽)라는 저자의 의견에는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러한 기본적인 욕구가 ‘피조성의 부정’일리도 없고(도리어 피조성의 긍정일 수는 있어도), 내가 배우기로는 적어도 식욕이나 성욕 자체가 성서에서 정죄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가서를 보라. 들여다볼수록 거기에 녹아 있는 에로티시즘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 구약학자는 아가서 주석을 써놓고 자신이 죽은 이후에야 출판해 달라고 했다고 할 정도이다. 아가서가 정경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사야가 새 포도주와 기름진 고기로 이상향을 그리고 있는 장면도 떠올려보자. 기왕이면 먹보요 술꾼인 예수도. 나는 저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달라는’ 간구를 저자 식으로 정의하면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저러한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저자의 신학적 해석에 설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자의 신학적 고담준론은 주기도문이 탄생한 구체적인 현장에 가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아가 빚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을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만약 저자가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의 사회 경제적 정황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접하고, ‘빚’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그 때의 사회 경제적 구조와 그와 관련된 현상들을 더 많이 알았다면 저자가 그간 펼쳐온 글의 이력을 보건대 결코 추상적인 신학적 담화의 수준에서 이 간구를 해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섯 번째 간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이다. 다섯 번째 간구에 대한 저자의 해설에 나의 평가가 다소 야박했다는 것은 알지만 죄송하게도 여섯 번째 간구에서도 동일한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비판할 사항이 아니다. 구상은 추상을 통해 그 의미가 명료해지고 해명 받을 자리를 얻는다. 신학적 성찰 역시 매우 중요하다. 세세한 사항에 매달려 큰 이야기의 틀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내 관견(管見)으로는 성서 본문에 대한 주석적 작업이 선행된 이후에야 주기도문 해설이 더욱 튼튼해지고, 저자가 추구하는 인문학적 통찰에 대한 이야기 폭도 더 정확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그런 면에 저자에게 이 책의 개정판에서는 주석적 작업에 더욱 신경을 써 주십사 부탁한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에서 저자는 시험의 주체,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시험, 깨어 있음’, ‘기도는 호흡이다’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남한 교회 기독교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시험 및 기도와 관련된 잘못된 행태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옳은 말들이며, 다 동감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굳이 주기도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가 아니고서도 들을 수 있는 교훈들이다.
일곱 번째 간구 ‘악에서 구하소서’는 신정론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신정론에 관한 하인리히 오트의 다섯 가지 대답을 소개하고 거기에 평을 하는 것이 이 간구 해설의 주요 내용이다. 아쉬운 것은 ‘악’이 ‘악한 자’로도 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저자가 구체적인 주기도문 상황에 들어가기보다는 보다 일반적인 신학적 성찰에 매진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삶의 너저분한 이야기를 대단한 듯 풀어놓는 것보다 더욱 좋을 때가 있다. 여덟 번째 간구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이다. ‘나라’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점, ‘권세’ 역시 아버지의 소유라는 점이 강조된 후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에 관해 ‘바르멘 신학 선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저자의 입장이 드러난다. 이후 ‘생명의 신비, 영광’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바로 영광’이라는 명제를 제시한 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궁극적으로 생명 사건과 연관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시간, 영원’에서는 영원에 대한 일상적인 오해를 교정된 후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설득력 있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구분으로 영원의 의미가 설명된다.(사실 그리스 어에서 그 두 단어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에 속한다) ‘진실로 진실로, 아멘’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아멘’만 아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며,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글을 인용하며 책을 마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어쩌면 주기도문을 이해한 사람이라야 충분히 공감하고 드릴 수 있는 ‘교회력에 따른 공동 기도문’이 보물처럼 나와 있다. 당장 내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사용하고 싶었다.
Ⅳ
내용의 요약과 사소한 비판은 위에서 한 바와 같다. 이제는 전체를 평해야 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남한 개신교가 맞고 있는 기도와 관련된 위기 상황에서 개혁주의적 신학 전통, 보다 구체적으로는 독일어권 개신교 신학 전통에 선 저자가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우리가 ‘기도’라는 이름으로 발화하는 행위가 ‘기도’인지, ‘기도라는 이름의 자기 욕심의 외침’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에 어떻게 어긋나고 있는지 저자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기도를 해설함으로써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저자의 신학적 해석은 난삽하지도 않고 피상적이지도 않다. 그간 저자가 읽고, 우려내고, 적용해 온 신학적 독서력과 성찰력의 크기와 깊이가 잘 드러나 있다. 바르트, 본회퍼, 하인리히 오트, 판넨베르크, 몰트만 등의 신학이 저자에게 차분히 녹아내린 것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단 저자가 어떤 부분을 두고 ‘인문학적 통찰’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문장도 저자의 논지만큼이나 깔끔하고도 담백하여 독자들은 윽박지르거나 적절히 얼버무리는 선에서 논의를 끝맺지도 않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주기도문의 의미를 알고 싶은 분들에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추천한다.
<김학철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겸임교수를 지냈다. 『손으로 읽는 신약성서』, 『복음서의 교회정치학』,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등등 다수의 저·역서와 사회정치학적 시각에서 마태복음서를 연구한 논문들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