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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자유를 표현하는 속인 또는 초인, 조르바 200618378 최 유리
그리스인 조르바. 어떤 것 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행복한, 쾌락을 추구하는, 현실중심적인, 사람을 증오하지만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감정과 이성을 적절한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인물이다. 작가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사상을 접하고, 앙리 베르그송과 함께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그런 그에게 실제로 초인이라 칭할수 있는 이상적 인간 조르바가 나타난다. 그에게는 조르바는 환희었으며 그를 자신의 글로서 그를 표현해야할 욕망을 느꼈을 것이다.
작가 자신으로 비유될 수 있는 ‘나’는 조르바와 대조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지만 결코 그의 삶의 방식에서 크게 벋어 날 수 는 없어 보인다. 사랑하는 친구를 사지로 보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야성적인 것으로 만들기로 한 그는 항구에서 조르바를 만난다. 조르바는 나의 삶과 존재 전체를 무너뜨리고 나는 조르바의 자유에 압도당한다. 조르바와 함께 하는 동안 나는 조르바의 행동, 생각을 통해 내 삶을 보기 시작한다.
어린시절 한번 읽었던 적이 있는 소설인데, 열등감과 그것을 극복하고 싶은 열망만으로 가득했던 나는 조르바의 모든 거침없는 행동, 말투 모든 것이 너무나 부러웠고 나의 이상으로 삼았었다. 소설속의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이의 전형을 완전 뒤엎는다. 첫째로 그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아 보인다. 사람을 짐승 취급하고 모든 여자를 단순히 화냥년 취급한다. 그는 투덜쟁이일 뿐인가? 그 반대다. 그는 사람을 증오하기에만 그치지 않고 그들과 함께한다. 자신이 정한 생각이나 사상에 젖지 않고 단지 지금, 이 상황을 즐긴다. ‘밥을 먹을 땐 밥이 되고, 갈탄을 캘 땐 갈탄이 되는’ 그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 이드를 확실히 휘어잡은 인간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우리를 제어하는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우리가 그어놓은 선에 의해 압박감을 느낀다. 친절해 보여야한다는 의무감, 상냥하게 대접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우리는 사람사이의 가식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 낸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 진짜 나를 서서히 잊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조르바에게 끌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회는 좀 더 복잡해지고 도저히 단순하고 느긋하게 살 수 없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답답증을 느낀다.
주인공 ‘나’는 어떤가. 그는 조르바와 대조되는 인물로서 자신이 인텔리라는 사실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인 이이다. 조르바에 비해 생각이 너무 많고 소심한 그이다. 이는 곧 우리와 닮아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계속 동정이 갔다. 자신의 한계, 자신이 조르바처럼 야생적이고, 직접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마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지금은 그 가치를 폄하해버린 책을 통해서 자신을 영혼을 가꾸기를 바랐고, 조르바의 생생한 영혼의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에 대해 당당하고 거칠 것 없는 삶도 행복하겠지만 어쩌면 도달할 수 없겠으나, 이상을 바라보며 고통을 안고 가는 삶도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고통이 바로 인간의 삶 자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요즘의 우리는 영혼의 고양을 위한 고통 자체도 포기한 듯하다. 조르바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만이 우리를 지배해고 있다. 원초적인 기쁨과 행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고 우리는 더욱 타인지향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기꺼이 버린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밥을 먹을 땐 밥이 되고, 갈탄을 캘 땐 갈탄이 되는’ 조르바를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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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소크라테스의 변명 200618378 최 유리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 이야기, 소크라테스의 변명.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재판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목숨보다 진리를 추구하며 다수의 배심원들이 무지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과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최고의 진리를, 단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며 산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걸까?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꾀어 그들을 불손한 길로 이끌고 신을 믿지 않게 한다는 죄로 소크라테스는 고소되고,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 재판정에 선다. 자신이 재판정에 서게 된 배경을 설명하게 된 그는, 자신이 미움을 받게 된 원인을 설명한다. 그는 신을 신탁에서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예언을 듣고 난 후, 자신은 아무래도 현명한 자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여 현명하기고 소문난 이들을 찾아간다. 훌륭한 정치가, 학자, 심지어 도기장이에게까지 찾아가서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사람도 나도, 아마 아름다운이나 선한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모르면서도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그와 반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바로 그 조그만 점에서 그 사람보다는 내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명예나 재물에만 마음을 기울일 뿐 사려와 진리, 정신에는 마음을 쓰지 않으면서 자신이 진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은 이들을 그냥 놓아 보내지 않고, 묻고 따지고 시험하여 그가 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 나무라서 그가 진정한 진리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말의 등에가 말을 괴롭히지만 말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가정과 생활을 버리면서 까지 진리를 위해 그토록 고군분투한 그는 죽음 앞에서도 의기양양하다. 소크라테스는 헥토르에게 복수하려는 아킬레스는 헥토르를 죽이면 그 자신이 죽을 것임을 여신인 어머니를 통해 알았지만 비굴하게 살아남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고 역설하며, 자신도 진리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오히려 죽어서 그 옛날의 현인들과 만나 진리에 대해 의논할 생각에 즐거워하기까지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자신을 변론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생생하게 살아올라 마치 고대 그리스의 재판 현장으로 가 직접 그를 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배심원들과 자신을 고소한 멜레토스에게 하는 말은 내게도 비수처럼 다가와 나를 질책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지, 나 자신에 대해 겸손한지, 옳지 못한 일에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진리를 추구하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현대사회에서 진리란 어떤 것인가? 오히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의 덕을 추구하고 정신을 살피는 것보다는 재물과 명예를 최우선으로 삶는 것이 진리인 것 같아 보인다. 우리 모두 그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정신은 더욱 황폐해져만 가고..
오래 전 소크라테스의 변명 장면을 패러디한 만화를 읽은 적이 있다. 주인공 소년이 고대 그리스 시대로 가 소크라테스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만화였는데, 죽기 하루 전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소크라테스를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의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비참한 멸망, 로마, 칸트, 세계대전, 나치, 핵전쟁 등등의 모습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소크라테스는 절망한다. 그가 말한 진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21세기의 어느 한 도시로 온 소크라테스는 회사원들을 정리해고 한 죄책감에 자살을 결심한 회사원을 보게 된다.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로 한 그때, 전화 한 통화에서는 자신이 존경했으나 해고시킨 과장의 전화를 받게 되고 과장의 위로의 말과 함께 소크라테스가 한 명언을 듣고 다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진리는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이 현재에도 살아남아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하려면 꽤나 귀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과오를 완전히 내보이는 것이고 나의 무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부끄러움을 당당히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나와 세상을 이해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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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법칙을 지킨 여인, 안티고네 -200618378 최 유리
나라의 법이 우선인가, 자신의 신념-곧 신의 법칙이 우선인가. [안티고네]는 신의 법칙에 도전한 왕의 비극적인 말로를 보여준다. 안티고네는 혈육관계의 개인적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고, 크레온 왕은 국가의 질서를 세우려는 사회적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과연 누가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오이디푸스의 죽음 이후 왕위가 비자 형제는 서로 1년간씩 바꿔가면서 나라를 다스리기로 했는데 형인 에테오클레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폴뤼네이케스는 이웃나라 아르고스의 딸과 결혼한 후 아르고스 군대를 이끌고 테베이로 쳐들어왔고 형과 동생은 서로를 겨누다가 다 같이 전사하게 된다. 두 형제가 사망하게 되자 외삼촌 크레온이 왕위에 오르고, 에테오클레스를 애국자로 대접해서 후히 장례를 치렀고 폴뤼네이케스는 조국의 역적으로 몰아 시체를 묻지도 못하게 하고 들판에 버려두어 새떼와 개떼의 밥이 되도록 하였으며 매장을 하려는 자는 국법을 어긴 죄로 누구든지 죽이겠노라고 공포한다. 안티고네는 국법을 어기고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려다가 붙잡혀 재판을 받는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혈육을 묻어주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며 하데스신을 내세운다. 안티고네와 결혼할 사이였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아버지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지 말고 노여움을 푸시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산 채로 석굴에 가두는데 그녀가 목매달아 죽자 하이몬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칼로 찔러 죽고 아들의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남편 크레온을 원망하며 죽는다. 그때서야 크레온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후회하게 된다.
안티고네가 죽음을 맞는 상황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상황과 비슷했다. 소크라테스의 "국가가 나에게 철학을 포기하라고 명령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목숨을 구하여 사는 것보다는 훌륭하게 사는 것을 구하였다’라는 명언은 안티고네의 상황을 대변해준다.
책에서는 크레온의 비극으로 결말을 맺는데, 과연 국가의 법은 개인의 양심 다음인 것인가?
개인의 양심만 추구한다면 나라의 법은 곧, 공동체는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가? 인간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인간이 원시시대에서 벗어나 문명사회로 오기까지는 공동체로서의 유대감과 단결이 큰 역할을 하였고, 우리는 지금도 공동체를 벗어나 살 수 없다. 우리는 공동체의 법을 지킬 필요가 있고 또 그 법을 함부로 대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는 개인으로서의 자유가 있다. 그 모든 문명은 모두 그 뿌리를 하나의 개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사상을 마음껏 표현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이다. 그런데, 만약 개인과 공동체가 충돌한다면? 나는 안티고네와 크레온 왕의 비극이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며 또한 두 사람 모두 운명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불쌍한 인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안티고네는 안티고네대로 혈육의 정을 버릴 수 없었으며, 크레온은 자신이 건설하려는 왕국의 질서를 위해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과오는 적절 수준의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체적 대안을 찾는 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유지되어야 하는 공동체나 자유를 누려야만 하는 인간의 특질을 고려하자면 그 방법 외엔 없는 듯 싶다. 개인은 자신의 자유를 맘껏 누리되 공동체에 피해가 없게 하고, 공동체는 질서를 지키되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너무 개인만 내세우다 보면 이기적 개인주의의 사회가 되는 것이고 , 공동체주의만 내세우면 전체주의적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실 명쾌한 해답이 없다는 점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우선권 문제는 어려운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개인이면서 또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합의를 찾는다는 것은 너무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자신등의 비극적 운명에 어쩔 수 없었던 것 처럼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런 불확실성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