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왜 눈썹이 하얗게 셀까
어린 시절, 설 전날 그러니까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퍼붓는 졸음을 물리치려고 애를 썬 적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습속이 거의 사라졌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한두 번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눈썹이 세지 않기 위하여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킨다 하여, 이날 밤을 일러 수세(守歲), 제석(除夕), 제야(除夜), 제일(除日), 경신수야(庚申守夜), 별세(別歲), 불밝히기, 해지킴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고려 원종 6년인 1265년 4월 경신일에 태자가 밤새워 연회를 베풀고 술 마시며 자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이 우리 문헌에 나타난 가장 오랜 경신수야의 기록이다.
당시 고려의 일반적 풍습이 경신일이 올 때마다 반드시 술 마시며 밤을 지새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고려의 상하층을 막론하고 수경신하는 습속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궁중에서도 축제적인 경신수야의 행사가 계속 행해져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사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그 규모와 내용은 더욱 확대되어 국왕까지도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태조·태종은 물론, 세종·세조도 이를 행하였으며 성종도 때때로 이런 의식을 행하였다.
『성종실록』에는 경신수야의 연회 규모가 커지면서 유신(儒臣)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러한 습속은 점차 민간에까지 널리 퍼졌다.
『동국세시기』에 “섣달그믐날 밤 인가에서는 방, 마루, 다락, 곳간, 문간, 뒷간에 모두 등잔을 켜놓는다. 흰 사기 접시 하나에다 실을 여러 겹 꼬아 심지를 만들고 기름을 부어 외양간, 변소까지 불을 켜놓아서 마치 대낮 같다. 그리고 밤새도록 자지 않는데 이를 수세라 한다.”라고 적혀 있다.
또 권용정(權用正)의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섣달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라고 하는데, 아이들 중에는 이 말을 그대로 믿어서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십이월령(十二月令)의 “앞뒷집 타병성(打甁聲 떡 치는 소리)은 예도 나고 제도 나네, 새 등잔 세발 심지, 장등(張燈)하여 새울 적에, 윗방 봉당(封堂) 부엌까지, 곳곳이 명랑하다, 초롱불 오락가락, 묵은세배 하는구나.”라는 묘사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소당(嘯堂) 김형수(金逈洙)의 ‘소당풍속시(嘯堂風俗詩)’에는
나이 더한 늙은이는 술로써 위안 삼고 翁感齒添醉爲慰
눈썹 셀까 어린 아이 밤새도록 잠 못 자네 兒愁眉皓眠未成
라는 구절이 있다.
이날 밤에는 가족끼리 모두 모여서 새벽닭이 울 때까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잠을 자지 않았다. 밤새도록 화롯가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를 하거나 윷놀이를 하면서 졸음을 쫓으려 애썼으며, 남자들은 망년주(忘年酒)를 마시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섣달 그믐날 저녁을 일찍 먹으면 농사일을 일찍 마친다고 하여 서둘러 먹으며, 부스럼이 없어진다고 하여 무를 먹기도 하였다. 부녀자들은 밤을 새며 한자리에 모여 실을 길게 나이대로 매듭을 지어 불을 붙여서, 조금 타면 초년 고생, 중간쯤 타면 중년 고생,
다 타면 만사형통이라고 믿었다. 아이들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면 흰 밀가루나 쌀가루를 개어서 눈썹에 발라두고, 이튿날 아침 깨어났을 때 눈썹이 세었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날 밤에는 방이나 마루, 부엌 그리고 다락, 뒷간, 외양간에도 불을 밝게 밝히고 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러한 풍습은 지금도 더러 남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습속은 언제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이것은 한말로 말해 도교(道敎) 장생법의 하나인 경신수세(庚申守歲)에서 유래한 것이다. 60일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간지(干支)인 경신일(庚申日)이 되면, 사람 몸에 기생하던 삼시충(三尸蟲)이 사람이 잠든 사이에 몸을 빠져나와서, 옥황상제에게 지난 60일 동안에 그 사람이 지은 죄(罪)를 고해바쳐 수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에,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삼시충이 옥황상제께 고해바치지 못하도록 잘 지키려는 신앙의 한 형태에서 온 것이다.
잠을 자지 않고 삼시충을 지키려는 것을 도교에서는 경신수야 또는 수경신(守庚申), 수삼시(守三尸)라고 했는데,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지 말라는 습속은 바로 이에 관련된 것이다.
도교의 사제를 도사라고 한다. 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정이 있는데, 그것이 곧 7 경신수야라는 절차다. 그것은 경신일에 몸속에 들어 있는 삼시충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잠을 자지 않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즉 60일 만에 돌아오는 경신일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이어 7차례 밤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삼시충은 앞에서 말한 대로, 경신일 밤에 잠을 자면 몸 안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 그날까지 행한 죄업을 옥황상제에게 고하여 수명을 감소시키는데, 죄가 가벼우면 3일을, 무거운 경우에는 300일을 감소시킨다고 한다.
이런 삼시충(三尸蟲)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에 불교와 접목되어 수경신(守庚申) 때 원각경(圓覺經)을 독송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도 고려 원종(元宗) 때에는 신분의 위아래를 막론하고 이런 습속이 널리 퍼졌으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성행했었다.
삼시충(三尸蟲)은 삼팽(三彭)이라고도 하는데, 상시, 중시, 하시로 나눈다. 그 가운데 상시(上尸)는 검다고 하며 그 이름을 팽거(彭?)라 하고, 중시(中尸)는 푸르다고 하며 그 이름을 팽질(彭質)이라 하고, 하시(下尸)는 하얗다고 하며 그 이름은 팽교(彭矯)라 하였다.
이 충(蟲)들은 사람의 몸에서 더불어 살면서, 능히 삼업(三業)과 더불어 사람이 속히 죽기를 바라며, 그믐과 초하루 아침에 사람의 죄와 과오를 살펴 상제(上帝)에게 지은 죄를 보고하러 가기 위해, 잠든 사이에 빠져나가므로 이를 막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 것이었다.
『동의보감』에도는 삼시충에 대헤 “첫째는 상충(上蟲)으로 뇌 속에 살고, 둘째는 중충(中蟲)으로 명당(明堂)에 살고, 셋째는 하충(下蟲)으로 뱃속에 산다. 각각을 팽거(彭?), 팽질(彭質), 팽교(彭矯)라고 한다. 이것들은, 사람이 도를 닦는 것을 싫어하고 마음이 타락하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시는 이마 가운데의 상단전(上丹田)에 있는데, 머리를 번잡하게 하고 욕심을 많게 하며, 중시는 염통 위 3촌 3푼에 있는 중단전에 있으면서 음식을 탐하고 원기부족과 건망증에 걸리게 하고, 하시는 배꼽 밑 3촌 7푼에 있는 하단전에 자리하여 색욕에 빠지게 한다고 한다.평시에는 삼시가 모두 비장(脾臟)에 살고 있다고도 한다.
이를 퇴치하기 위해 수경신(守庚申)을 하거나, 아니면 손바닥에 태상축(太上祝)을 쓰고 앉아서 고치(叩齒 이를 두드려서 소리를 냄)를 일곱 차례 하고, 이마를 치면서 팽거(彭?)를 소리 내어 부른 다음에 고치를 일곱 차례 하고, 염통 부위를 어루만지며 소리 내어 팽질(彭質)을 부르고, 그 다음에 고치를 일곱 차례 하고 허리를 잡고 소리 내어 팽교(彭矯)를 부르는 것을 행하여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를 기원하였다.
경신일(庚申日) 밤을 자지 않고 새움으로써 삼시충(三尸蟲)이 상제(上帝)에게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서 생겨난 이런 풍습은, 연거푸 3번을 수경신(守庚申)하면 삼시충(三尸蟲)이 약해지기 시작하며, 7번 수경신(守庚申)하면 삼시충(三尸蟲)이 영영 없어져 정신이 안정되고 오장(五臟)이 편해져 장생(長生)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의 몸 안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해로운 일을 하는 삼시충(三尸蟲)을 제거 또는 약화시켜야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도교의 신앙에서 출발한 이런 풍습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 함께 모여 밤을 지새우며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간혹 볼 수 있다. 이날 밤에 사람이 거처하는 집안 곳곳에 촛불을 켜놓고 밤을 지새운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삼시충이 아닌, 부엌을 관장하는 조왕신(?王神)이나 집을 관장하는 성주신이, 하늘에 올라가 천신(天神)에게 그 집안에서 일 년 동안 일어났던 일을 낱낱이 보고한다는 것으로 변형되어 있기도 하다. 경남지방에서는 불을 켜는 장소에 따라 조왕불, 성주불, 용왕불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액막이라 하여 이날 켜 둔 촛불을 훔쳐가는 습속이 전하는데, 훔쳐가다가 들켜 욕을 먹으면 더욱 좋다고 하며, 이것을 명도적(溟賊)이라 불렀다.
수경신의 유풍으로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히는 이 수세의 풍습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잠을 잘 일이 아니라, 묵은해를 되돌아보고 새해 설계를 하라는 숨겨진 교훈이 깃들인 풍속이라 하겠다. 조상들이 행했던 이런 풍속의 의미를 새롭게 살려 매일 매일을 수세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매우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첫댓글 어릴적 눈섭이 셀까 두러워 밤을 지새운 기억 떠올리며 세속의 유래를 잘 읽었습니다
류 위원님 수고 많았습니다
귀하신 지부장님 걸음 참으로 반갑습니다. 늘 건안하십시오.
예전에 추운 겨울저녁 부모님들로부터 듣고 어쩌나하고 걱정하던 아련한 추억이 새롭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늘 찾아 주셔서 고운 말씀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