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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계백은 문화권력을 움켜 쥔 친노유빠세력의 문재인 띄우기다. |
강재현 칼럼리스트, 2011-08-05 오후 10: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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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MBC에서 7월말부터 방영되고 있는 퓨전사극 <계백>에 대한 찬반여론과 우려가 상당히 크다. 그 이유는 백제 멸망의 비극을 계백이라는 한 인물이 모든 것을 다 대변해주고 있기 깨문에 그렇다. 사극 전문배우인 이서진이 <계백>을 연기하고, 의자왕은 명품 연기파 배우인 조재현이 맡아서 극진행을 한다. 제작비 200억원을 들여서 찬란한 백제문화를 꽃피우고 생동감 넘치는 비운의 주인공 계백과 감추어진 위대한 백제를 재조명하겠다는 MBC의 당초 취지하고는 다르게 벌써부터 이 드라마가 특정 정치세력을 띄우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될까봐 심히 우려스럽다.
백제 무인 귀족집안에서 성장한 계백은 <윤충>과 더불어서 백제 최고의 장수가 되었고, 의자왕과 함께 위대한 "남부여-백제의 성왕때부터 나라 이름을 백제에서 남부여로 고쳤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다.
본래 백제는 부여의 후손으로서 고구려의 같은 핏줄의 민족이었으나, 고구려 2대왕이 되는" 유리왕"과의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났고, 소서노는 자신의 친아들인 온조와 비류를 이끌고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백제는 항상 부여의 뿌리를 소중하게 여겼으며, 고구려와 똑같이 <부여>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매우 총명했고 뛰어난 군주였다.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의욕적으로 신라를 공격했고, 백제군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했다. 의자왕은 신라가 당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당항성(지금의 수도권)을 빼았고,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 일대)을 함락시킴으로서 무려 30개성을 한꺼번에 점령했다.
대야성은 신라 수도인 서라벌(경주)을 지키는 아주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경상도지역의 핵심 거점이었는데, 의자왕은 명장 윤충에게 명하여, 김품석이 지키는 대야성을 무너트리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신라 남쪽의 핵심인 대야성이 무너지고, 서쪽의 중심지인 당항성마저 무너지자, 신라는 백제 의자왕 당시에 매우 위급한 상황까지 직면한 것이다.
그런 백제가 왜 갑자기 멸망했을까? 역사의 수수께끼로 충분히 남을 만한 대한민국 고대사의 의문거리다. 신라 김춘추가 자신의 사위인 김품석과 고타소(김춘추의 친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리로 당나라 대군을 끌어들였다는 것은 역사의 팩트가 맞지만, 어떻게 해서 백제가 멸망했는가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와 일연이 서술한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멸망의 정당성을 내세우려는 흔적이 뚜렷하다. 가령 보기를 들면, 백제의 백마강에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거나, 백제 무당의 점괘로 백제는 망할것이다라는 발언으로 의자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 그런 것들이다. 백제 집권층 세력의 내분으로 인하여, 700년 동안 유지된 찬란한 백제역사가 660년에 끝나고 말았다는 논리는 <신라 정통론>과 <친일 반도사관>의 논리에 정확하게 들어 맞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백제가 망한 것은 신라의 5만 군사때문이 아니라,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끌고 온 13만대군의 주력부대에 의해서 백제 사비성이 무너졌고 웅진성(지금의 공주)까지 함락된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작은 나라인 신라가 당나라 외세를 끌어들여 반민족적이고 반자주적으로 동방의 해상왕국이었던 백제를 멸망(서기 660년)시켰던 것이다.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대군을 한반도 남쪽에 불러들인 원흉이 바로 신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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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가 무너지고 해방이후에 대한민국은1948년 남한 단독 선거로 수립되었다. 소장파 의원들과 국민들은 역사 바로세우기의 한고리로 <친일청산>을 내세웠고 그러한 전폭적인 민심을 등에 업고 출발한게 바로 <반민특위>다. "반민특위"에서 가장 먼저 잡고 싶었던 친일파가 노덕술이었고, 노덕술만 잡으면 <반민특위>는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노덕술은 조선 총독부의 앞잡이로서, 대한 독립을 위해 목숨바쳐 투쟁한 애국지사와 독립투사들을 때려잡고 고문하거나 죽인 악질 친일파의 대명사였다. 결국 노덕술은 체포되었고 재판받아 사형에 버금가는 처벌을 받아야했으나, 친일파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자신의 친미독재를 공공히 하려는 이승만정권과 친일 경찰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말미암아 <반민특위>는 끝내 성공치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친일 경찰들이 조직적으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모조리 체포하는 하극상이 일어났다. 이것은 이승만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무장집단인 경찰을 부추켰기 때문이였다.
KBS에서 이승만을 미화하는 방송을 내보려고하는 까닭도 똑같다. 얼마전 백선엽 다큐를 KBS가 방송하려고 한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무리 역사에서 죽일놈이라고해도 방송과 미디어에서 그럴듯하게 감싸고 미화시키면 정확한 역사를 모르는 대중들을 속이는 것 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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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근현대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민족사적 업적은 동학 농민운동이다. 동학은 최제우(崔濟愚, 1824년~1864년)가 조선 말기에 창시한 것으로서,그는1824년 음력 10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최제우가 경상도일대에서 동학을 알리자 위기감을 느낀 당시의 조선 정부는 최제우를 사형시켰고 그가 순교하자 그 제자들이 전국으로 뻗어나가 동학을 포교했다. 특히 최시형이 동학을 널리 전파하면서 본격적으로 동학운동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동학혁명은 핍박받았던 전라도일대에서 먼저 점화점이 일어난 것은 시대의 숙명이었다. 드넓은 평야의 곡창지대인 호남은 예로부터 탐관오리들이 가장 많이 농민수탈을 하려고 눈독을 들였던 지역이었다.
조선 한양의 세도가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조병갑은 원래 전북 익산지역의 수령으로 발령이 났지만, 익산보다는 전북 고부지역이 훨씬 더 크고, 인구수도 많았기에 곡물과 세금을 수탈할 값어치도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병갑은 다시 중앙 정부 관료에 뇌물을 쓰고 전북 고부지역의 "사또"로 부임해서 엄청난 수탈을 자행했다. 이미 전라도일대는 동학혁명의 기운으로 가득 찼고, 고부지역뿐만이 아니라, 부안과 김제, 전주, 삼례일대까지 동학포교가 성공적으로 끝난 상태였기에 <고부 민란>은 삽시간에 호남의 전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 녹두장군 전봉준이 나타났고, 전봉준을 구심점으로 하는 호남의 동학 농민군은 황토현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호남의 심장부이자 조선건국의 주역인 이성계 본관 <전주이씨> 전주를 점령했다.
전주를 점령한 동학군은 호남을 자치적으로 다스렸고, 인간 평등과 개벽정신으로 동학의 가치를 충청도까지 전파했으며 충청일대도 호남의 동학 농민군과 함께 합세했다. 집강소를 설치해서 원리원칙대로 공정한 행정 운영을 했고, 부패한 조선의 중앙정치를 개혁하자는 상소와 함께 정식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당시에 조선 조정은 동학 농민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 전부를 받아주는 척하면서 동시에 청나라군대를 은밀하게 불러들였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와의 조약 체결의 명분을 걸고 조선에 일본군을 파견함으로서 한반도는 또다시 외세에 침탈당하는 격랑에 휩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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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부의 배신과 외세의 침략에 격분한 동학 농민군은 <자주>와 <외세 배격>과 <부패 일소>,<반봉건>을 내세우면서 다시한번 북진을 감행했고, 이 때는 남로군이 전북 삼례에서 출발했고, 북로군은 충청북도 청산에서 출발했다. 이 두개의 거대한 농민군들이 집결하는 장소는 수도 한양으로 한걸음에 갈수있는 전략적인 거점이었던 충청도의 우금치 고개였다.
이 우금치전투가 동학 농민군의 분수령이었고, 이곳에서 수많은 동학군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현장이기도 하다. 근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은 죽창과 칼을 들고 있던 동학군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고, 녹두장군 전봉준과 농민군은 무참하게 깨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동학 농민군은 무너지고 일본군은 끝까지 뒤를 추격해서 호남일대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이 당시에 아주 충격적이면서 당연한 현상이 두가지가 있는데 호남의 동학 농민군과 합세한 지역이 충청도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동학의 발생지였던 경상도지역이 강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동학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경상도지역이 호남의 동학 농민군과 합세해서 북진을 했더라면 일본군 수천명이 조선에 상륙했다고하지만, 충분히 썩어빠진 조선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개벽사상>을 만들수 있었을 것이다.
서로군을 호남과 충청이 담당하고, 동로군을 경상도와 강원도가 책임져 주어서 양쪽에서 수도 한양으로 진군했다면 틀림없이 썩은 조선의 환부를 도려내고 근대적인 나라를 다시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는 끝까지 호남과 충청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외면했고 도와주질 않았다. 그 덕분에 경상도일대는 일본군으로부터 피의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인구가 많았던 당시의 전라도에서 십만이 넘은 대군을 만들어냈고, 그 동학 농민군이 충청도와 합세해서 우금치까지 파죽지세로 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과 수천명의 일본군과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청나라군대의 근대화된 화력에 밀려서 호남과 충청도의 연합군은 깨지고 말았다.
글쓴이의 고향이 전북 김제시 죽산면 일대이다. 이곳의 지명 이름이 竹山인 것은, 1894년 당시에 동학 농민군들이 죽산에서 대나무를 베어서 죽창을 만들었고, 이곳에서 김제와 부안일대의 농민군들이모였고 호남의 수도였던 전주 감영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내 고향 김제 죽산은 대나무 숲이 많았던 지역이다. 지금은 대나무 숲이 별로 없지만, 구한말이었던 1894년엔 많은 대나무가 있었고 竹山산이 생긴것도, 수많은 동학 농민군의 짚신에 묻은 흙더미가 쌓여서 작은 토산(土山)이 생긴 것이라는 유례가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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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가 바로 고려였다. 그래서 우린 송편을 먹는다|한민족고대사
松씨와 소나무
소나무를 종족의 부호로 삼았던 송족은 그 종족을 거느리는 수령을 가리켜
公이라 하였고 이는 바로 소나무를 상징하는 송자에서 나무 목을 떼어내고 공자
만을 쓴 것인데 환웅천제 때 뇌공이나 숙신씨가 이에 해당한다.
사냥감을 끝까지 추적하여 잡았고 잡으면 반드시 공평하게 분배하여
두령이라 해서 결코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챙기지 않아 公正, 公平이니 하는
말들은 옛 송족의 그러한 의리에서 비롯되었음이 아니겠는가
고려가 한반도에만 있었다고?
그럼 고려(고리,고략,코리,코라)란 이름이 왜 전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서
높은 산과 각종 지방의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올까?
당신은 저기 캄차카 반도부터 저 서쪽 알바니아,불가리아,마케도니아까지
고려란 이름이 존재한 다는 사실을 아는가?
당신은 왜 송편을 먹는가? 송편은 “송나라의 떡(편자)”를 말한다.
당신이 송편을 먹는 이유는 송나라의 정통후손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수도는 왜 송도인가? 고려가 송이고 송이 고려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변호사를 사서 “소송”를 하는가? 당신은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보았는가? 소송이란 송나라의 판관에게 “소(고하는 것)”를 하는 것이다.
신라가 경상도 경주에 있었나? 물론 경상도인들이 주로 신라와 같은 계통인 흉노의 후손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신라(실라)란 지명이 동남아에서 부터 저 서쪽 아랍을 거쳐서 스페인 해안에 까지 나타나는가? 왜 신라와 우리가 “사로센”이라고 배워온 서남아시아의 대 제국은 그 년대가 거의 일치하는가?
백제가 한반도 남서부에 있었나? 그럼 왜 백제란 지명은 온 대륙과 심지어는 현재의 이란지역에 있었다는 페르시아와 비류백제의 역사에서 너무나 많은 일치점이 보이는가? 왜 이란의 고대 지배층은 전부 현재의 이란인들과는 다른 몽골리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일본의 에도막부란 무엇인가? 에도는 “강호”..즉 강과 호수를 말한다. 일본의 어디에 강과 호수가 밀집된 곳이 있는가? 막부란 무엇인가? 천막부서…즉 천막을 치고 정사를 보는 곳이다. 천막을 보고 업무를 보는곳은 야전사령관 뿐이다. 왜냐하면 적이 침입해 오면 곧바로 뛰쳐 나가고 전장에선 자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에도막부는 일본열도에 있지 않았다. 현재 대륙의 남부에 있었는지..혹은
인도동부의 뱅골만에 있었는지 알수없다. 단지 현재 일본열도는 아니라는 것이지.
쪽바리는 왜 쪽바리인가? 쪽발이기 때문이지? 왜 쪽발? 게다짝 때문이지? 나무로 만들어서 시원한…비가 많이올때 신기좋은.. 일본열도는 겨울에 춥고 눈이 많이 온다. 그런 곳에서 게다짝이 기후에 알맞은 신발인가? 게다짝의 비밀만 알아도 당신은 왜족들의 고향이 어디인지..그들의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고? 그럼 왜 선조는 북천을 하지않고 서천을 했는가? 현재 서울에서 서천을 하면 인천앞바다에 빠져죽는다. 왜 선조는 명진(명나라로 후진)을 하지 않고 몽진(몽골쪽으로 후진)했을까? 당시 동북삼성이 명나라였다면 명진을 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이순신때문에 전라도가 침략당하지 않았다고? 부산에서 현재 한반도 전라도까지 일본이 기병을 동원했다면 하루면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이순신군은 해군이다. 바다에서나 왜군을 이길 수 있는 군대였다. 그런데 왜군이 하루면 도달할 반도의 전라도를 바다에 있는 이순신때문에 침략을 못했다고? 이순신은 양자강,메콩강,그리고 동북아 전역의 해안에서 싸웠을 것이다. 양자강 밑바닥을 파면 거북선과 판옥선과 왜선이 마구 나올것이다.
거란족이 오랑캐인가? 그럼 왜 당신은 매일같이 거란(계단)을 오르내리나? 거란이 오랑캐라면 왜 당신은 거란(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가? 당신은 거란의 자손이다. 그런데 당신의 할아버지가 오랑캐라고?
연연족이 오랑캐인가? 그럼 왜 당신은 ‘연줄이 닿아야 한다” “연분이 닿아야 한다” ”인연이 닿아야 한다” “연대가 맞아야 한다”라고 말하는가?
왜냐구? 왜냐하면 당신은 연연족(유연족)의 후손이고 그 유연족이 바로 고구려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고 고구려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현 동북삼성이 만주인가? 그럼 왜 동북삼성엔 만주족이 없고 그나마 만주족이라는 소수의 사람들은 신강성에 사는가?
만주란 무엇인가? 중앙을 말하며 꽉찬 대평원을 말한다. 그곳이 어디인가? 유라시아의 중앙이 어디인가? 바로 중앙아시아가 만주다.
이성계가 한반도 함경도 출신인가? 이성계는 격구(polo)경기를 미칠정도로 좋아했다. 격구(polo)경기를 할 수 있는곳은 많은 말을 기르는 곳이어야 하고 넓은 격구장을 가진 곳이어야 한다. 이성계뿐 아니라 조선의 귀족층이 가장 즐기는 운동이 바로 격구였다. 그런데 그런 지배층의 운동을 왜 한반도에선 즐기지 않나?
왜 조선은 말을 수십만마리를 길렀는데…한반도에는 말을 키우는 사람이 극히 드문가? 또한 한반도라는 산악지형에서 말을 수십만 마리씩 기르고 일년에 말을 만필이상 수출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되는가? 현재 격구(polo)를 가장 즐기는 집단은 영국의 귀족층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국의 전통 운동이 아니다. 영국이 티벳과 신강지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천산남로에 위치한 “호탄”에서 배워서 간것이 polo다. 그들은 왜 조선의 황제와 귀족들이 즐기던 격구를 배워가서 그들의 왕족과 귀족들이 즐기는 놀이로 정착시켰을까?
이 호탄이 바로 우리가 조작역사에서 배운 고려의 “강화도”이다. 당신이 천산남로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호탄을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서양세력과 공산당이 고려의 남경 강화도의 흔적을 거의 지웠지만, 그래도 당신이 고려의 후손 이라면 본능적으로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그 호탄에는 호탄강이라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한반도의 강화도가 무신정권이 몽골군을 피하기 위해 피신한 곳인가? 강화도는 강옆에 위치한 수도다. 그런데 누군가가 ‘도”자를 수도의 “도”가 아닌 “섬”도자로 글자를 바꿔놨다. 몽골군은 전 유럽을 초토화 시켰다.
당신은 볼가강을 건너가 보았나? 당신은 드네프르강이나 다뉴브강을 건너가 보았나? 그 강들은 강너비만 수킬로에서 수십킬로에 이르는 바다처럼 넓은 강이다. 몽골군이 남송을 쳐서 붕괴시켰고 그 남송이 양자강 남부에 있었다면 양자강을 건넜어야 한다. 양자강은 강너비가 바다처럼 넓다. 10킬로미터가 넘는곳이 허다하다.
인천의 강화도는 육지에서 섬까지 폭이 얼마인가? 수십킬로미터의 강을 건너서 유럽과 남송을 멸망시킨게 몽골군이라면, 그까짓 1킬로미터도 안되는 인천의 강화도,,그것도 고려군을 시켜서 건너가면 그만인 강화도를 못건너 가서 40년이 넘도록 강화도의 무신정권을 항복시키지 못했다고? 하하하..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신라의 혜초는 서역에 갔다온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다. 그런데 그 신라의 혜초는 그 왕오천축국전을 한반도 경주가 아닌 돈황의 막고굴에 보관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세뇌교육 역사책은 그 돈황은 당나라였다고 한다.
그 왕오천축국전을 서양인들이 와서 훔쳐서 프랑스로 훔쳐갔다. 아마도 프랑스 국적을 보유했던 유대인으로 기억나는데.. 그들은 돈황와 신강의 불교유적을 약탈하고 유럽으로 가져가는 것도 모자라서 나머지를 폐허화 시켰다. 왜 그랬을까?
신라의 수도는 경주다. 한반도 경북에 경주가 있다고? 그곳이 “불국”이라고? 불국사는 무엇인가? 불국의 절이 불국사다. 신라는 불교국가였고…불교사찰이 수도없이 많았다.
돈황에 가면 당신은 신라를 볼수 있다. 신강성의 돈황이 바로 신라의 경주다.
그곳에 막고굴에 가면 500개의 불교유적을 안치한 석굴이 있는데 10개만 보여준다. 나머지는 아직도 조작중이겠지…가짜를 만들어 넣든가, 아니면 영원히 안보여 주던가… 진짜를 보여주면 신라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지…그럼 세뇌당한 한국인들이 깨어나니까 안보여 주는 것이지..
조선이 당파싸움만 하다 망한 나라라고? 그런데 어떻게 500년이나 유지되나? 조선이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이명박이 같은 자들이었다면 과연 50년이라도 국가를 유지할 수 있을까? 50년은 커녕 30년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섭라(태국)은 주기적으로 조선에 조공했다. 현재 태국은 한국에 조공하나? 서역은 조선에 조공했다. 현재 아랍국가들은 한국에 조공하나? 캄포챠(캄보디아)는 조선에 조공했다… 현재 캄보디아는 조선에 조공하나?
조선이 명나라에 조공했다구? 조공이란 조선의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이 조공이다. 명나라에 바쳤다면 명공이 되야지 왜 조공인가? 중국이 명나라였다구? 중국이 명이고 명은 조선과 다르다는 증거가 뭔가?
명이란 무엇인가? 밝음이고 황제이고 조정을 말한다. 명이 조선이고 고려다. 그런데 명은 조선과 다르고 고려와 다르다고? 조선황제가 있는곳이 대명전이다. 왜 조선 왕은 건방지게 “명”자를 넣어서 ”대명전”에서 기거했을까? 그건 조선황제가 있는곳이 ‘명”이기 때문이다.
중국이란 황제가 사는 곳이며 제국이 중심지역이다. 이것이 어떻게 남방계 빨갱이들이 장악한 현재의 중공대륙이 되는가?
조선왕조 실록이 진짜 조선이 대대로 적은 역사책인가? 그럼 그 원본은 어디에 있나? 쪽바리 왕궁 지하에 있다구? 대한민국엔 조선왕조 실록 사본밖에 없다구? 하하하 그것도 철제로된 철제문을 7번이나 거쳐야 볼 수 있을까 말까 하다구?
뭐가 무서워서 원본도 아닌 사본을 철제 대문으로 몇겹으로 가두어 놓았나? 조선왕조실록이 일제가 36년에 걸쳐서 만든 짜집기 역사조작서라면??
나머지는 아래카페 에 가서 보실 것..
http://cafe.daum.net/chosunsa
머지않아 저 카페는 닫힐 가능성이 크다. 닫히기 전에 빨리가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죽기전에 역사조작의 세뇌에서 깨어나 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죽을때까지 주입식 세뇌교육의 학교세뇌와 졸업하면 평생 계속되는 언론이라는 찌라시 세뇌에 날마다 세뇌당하는 지도 모르고 세뇌된채 앵무새처럼 그 가짜 역사들을 되뇌이다 가느니….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죽는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늑대의 무리들이 호랑이들을 습격해서 어미호랑이와 아비 호랑이를 죽이고 호랑이 새끼를 고양이굴에 데려다 놓고 고양이젖을 먹여서 키운후에 너는 고양이의 자식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고양이의 옷을 입힌후에 호랑이는 오랑캐 새끼들이고 그 호랑이들이 네 고양이 조상들을 침략했서 죽였다고 가르쳤다. 그러자 그 고양이 옷을 입고 자신을 고양이라고 여기게된 호랑이 새끼는 밖에 나가서 다른 동물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추운 북쪽에 사는 호랑이라는 오랑캐 새끼들이 우리 고양이할아버지 조상들을 수도없이 침략한 야만족 새끼들이지…하지만 우리 여우들은 끈질기게 호랑이 오랑캐 새끼들로부터 이 고양이 굴을 지켜왔지…” http://cafe.daum.net/sisa-1/k4VW/5
| 연합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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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소개] 시로 읽는 여성독립운동가 20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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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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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 옥중의 아들아 /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칼이든 총이든 당당히 받아라 이 어미 밤새 / 네 수의 지으며 / 결코 울지 않았다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 비굴치 말고 / 당당히 /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위 시는 지난 3ㆍ1절에 친일문학인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을 펴내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이윤옥 시인이 최근 펴낸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도서출판 얼레빗)에 실린 “목숨이 경각인 아들 안중근에게”라는 시 일부이다. ≪서간도에 들꽃 피다≫는 정부로부터 훈포장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202명 가운데 20명을 골라 가슴 찡한 시로 그들의 삶을 그려 내고, 조국 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하며 살아온 모습을 소개한 책이다.
위 시를 읽으며 가슴이 메어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도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 역시 그런 마음으로 사형수 아들의 수의를 지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로 우리의 맘을 울컥하게 한 시인은 다시 조마리아 애국지사를 담담히 설명해 내려간다.
“아들의 죽음을 앞둔 어미의 심정이 어찌 흔들리지 않았으랴! 그러나 조마리아 여사는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안중근은 그런 어머니의 꺾이지 않는 정신을 배웠던 것이다. 평소 백범 김구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와 우애 좋게 지내던 조마리아 여사는 곽 여사가 김구에게 엄하게 대했던데 견주어 아들 안중근에게 자애로운 어머니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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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어머니가 자식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는 매우 단호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윤옥 시인은 시집 머리말에서 대학생들에게 여성독립운동가를 아는 대로 써보라고 했더니 유관순 말고는 거의 백지로 냈더라고 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 시인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온 국민에게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수많은 자료를 찾아 이 시집을 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시인은 빛도 이름도 없이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하면서 묵묵히 조국광복에 몸바친 여성들이 어디 202명뿐이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남성에 견주어 널리 알려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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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의를 짓는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시집에서) ⓒ 이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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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서 시인은 춘천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임신부의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쓴 남자현, 안동의 독립운동가 3대를 지키고 그 자신 만세운동으로 잡혀가 두 눈을 잃었던 김락 애국지사를 비롯한 스무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시와 삶의 여정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윤옥 시인은 이 시집을 내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중국땅 상해를 시작으로 27년간의 피난지였던 광주, 유주, 창사, 충칭 등은 물론이고 부산, 나주, 안동, 춘천, 대전 등지의 생가나 무덤을 직접 발로 뛰었으며 부평, 수원 등에 살아 계시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가 나눈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놓았다.
중국 유주(柳州)에서 14살 어린 나이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입대하여 활약한 오희옥 지사(현 86살)는 아직 정정한 편이며 옥사한 이육사 애국지사의 주검을 거둔 이병희 지사(현 95살)는 요양원에서 조용히 삶을 마무리 하고 계신다고 이 시인은 살아있는 애국지사들의 근황을 전했다.
“꽃반지 끼고 가야금 줄에 논다 해도 말할 이 없는/노래하는 꽃 스무 살 순이 아씨/ 읍내에 불꽃처럼 번진 만세의 물결/눈 감지 아니하고 앞장선 여인이여/춤추고 술 따르던 동료 기생 불러 모아/ 떨치고 일어난 기백/ 썩지 않은 돌 비석에 줄줄이 /이름 석 자 새겨주는 이 없어도 /수원 기생 서른세 명/ 만고에 자랑스러운 만세운동 앞장섰네”
위 시는 책 속에 있는 <수원의 꽃 33인의 논개 ‘김향화’>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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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원에 계신 이병희 애국지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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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지 잘라 조선독립원을 쓰는 남자현 여사의 굳은 의지 ⓒ 이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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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66돌을 맞는 8·15 광복절을 앞둔 우리에게 ≪서간도에 들꽃 피다≫는 나라사랑의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감동적인 시집이다. 시집 속에는 사진과 함께 백범 김구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의 그림을 비롯하여 여러 장의 인물 삽화가 들어 있는데 이 그림들은 모두 한국화가 이무성 화백의 솜씨이다. 이 화백은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인기 있는 작가다.
며칠 전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울릉도를 방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상황을 보면서 과거 우리 겨레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데에 대한 반성 없는 무례한 행동에 불쾌감을 토로하는 국민이 많다. 이러한 때에 여성의 몸으로 일본 제국주의 만행에 항거하며 온몸으로 독립을 쟁취하던 독립지사들의 삶을 그린 이윤옥 시인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는 흐트러진 우리 마음을 다잡는 작은 불씨가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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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들의 목숨 건 ‘나라사랑’ 이야기를 대중화하자 [대담] ≪서간도에 들꽃 피다≫ 지은이 이윤옥 시인
- 지난 3·1절에는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을 펴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번엔 ≪서간도에 들꽃 피다≫이다. 시집치고는 아주 독특한 데 이렇게 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불나방처럼 부와 명예를 위해 일제에 아부했던 사람들을 다룬 시집이 ≪사쿠라 불나방≫이라면 이번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는 살을 에는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분 가운데서 특히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3·1절과 8·15는 우리 겨레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지난번에는 일제에 빌붙어 겨레의 가슴을 멍들게 한 사람들을 다뤘으니 이번에는 항일애국지사를 다뤄야 균형이 맞는다는 생각에서 이분들의 이야기를 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 여성독립운동가는 현재 생존해 계시는 분이 몇 안 되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그분들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 책을 내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극복했나? “어떤 인물에 대한 시를 쓰려면 풍부한 자료가 필수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 수십 년을 조국을 떠나 살신성인으로 항일독립운동한 사람들의 자료가 겨우 서너 줄밖에 없는 분들도 많았다. 부족한 자료는 애국지사의 고향마을이나 후손들의 이야기로 보충했다.
친일부역한 사람들은 사진도 많지만 항일애국자들은 변변한 사진 한 장 없는 게 현실이다. 무명지 잘라 혈서 쓴 남자현 애국지사가 그렇고 춘천의 의병대장 윤희순 애국지사는 물론이고 안동의 김락 애국지사,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 역시 사진 한 장 전하는 게 없다. 그나마도 어렵사리 수소문해서 구한 사진은 해상도가 낮아 쓸 수 없어 돌아가신 분의 무덤이나 고향집 사진으로 대체 한 것이 아쉬웠다.”
- 책을 쓰려고 어디까지 답사를 하고 누구를 만났었나?
“이번 시집을 쓰려고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활약했던 중국땅을 찾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부터 시작하여 항쩌우, 쟈싱, 창사, 광주, 유주, 뀌양, 치쟝, 충칭 등을 돌아보면서 당시 임시정부의 어려운 안살림을 맡았던 정정화 여사를 떠올렸으며 남목청 사건으로 부상을 당한 백범 김구선생이 입원했던 상아병원을 둘러볼 때는 지극한 간호를 맡았던 연미당 애국지사를 떠올렸다. 또한, 유주를 찾았을 때는 열네 살 독립군 소녀 오희옥 애국지사의 다부진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곡기를 끊고 24일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한 이만도 애국지사 집안의 며느리이자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사위를 일본군의 총칼 앞에 앞세우고 자신도 만세운동으로 고문을 당해 두 눈을 잃으면서도 독립의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안동의 김락 애국지사 유적지와 무덤도 찾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 의병장 윤희순 애국지사의 숨결을 느끼고자 춘천 관천리 마을을 돌아보고 홍천강이 내려다보이는 무덤을 찾은 것을 비롯하여 부산, 나주, 인천, 수원, 부평 등을 돌아다녔다. 또한, 대전과 서울의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분들을 찾아뵈었으며 생존자이신 수원의 오희옥 애국지사와 부평에 계시는 이병희 애국지사는 직접 만나 손을 잡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효정 애국지사의 아드님이신 박진수 화백은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날 어머니 사진이 실린 시집을 가슴에 품고 한걸음에 달려온 뭉클한 사연도 있었다.”
- 이번에 시를 쓴 20명의 여성독립운동가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 까닭은?
“모두 하나같이 존경스러운 인물이라 누굴 꼭 짚을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을 든다면 수원의 기생 출신으로 3·1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잡혀 모진 고문을 겪은 김향화의 삶이다. 노천명이나 모윤숙처럼 많이 배우고 잘난 여자들이 일제에 빌붙어 천황폐하 만세의 시를 짓고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장에서 핏대를 세울 때 스무 살 김향화는 일제의 부당한 침략과 억압에 온몸을 던져 저항한 인물이다.”
▲ 기생의 몸으로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 이동근 | | - 책을 쓰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올해 95살인 이병희 애국지사를 찾아가 실핏줄이 드러난 가냘픈 손을 꼭 쥐자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선열들을 잊지 말고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 고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집을 만들어 다시 찾아뵙겠다고 하니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시던 모습을 보면서 요양원에서 생삶 마무리하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작은 위안을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 이 책의 펴냄과 관련하여 앞으로 계획이나 하고 싶은 말은?
“정부로부터 훈포상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202명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는 20명밖에 다룰 수 없었다. 이 시집에서 다루지 못한 분들도 모두 시로 그려내고 싶다. 그러려면 많은 분이 관심을 갖고 도와주어야 가능하다. 혼자 힘으로는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얼마 전 간도특설대 출신인 백선엽을 영웅시하는 기념물이 분단의 현장 파주시 임진각에 세워져 많은 분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식민 역사’를 겪은 우리가 중심을 잃고 제 겨레에게 무자비한 총부리를 겨눈 사람을 영웅시 한다면 민족의 원흉 이완용이 영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지금 거꾸로 가는 역사의 이상기류에 의식 있는 국민이 적국 대응해야 할 것이다.
여성의 몸으로 이름도 빛도 없이 묵묵히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친 분들의 삶은 그래서 이 어두운 시대에 횃불과 같은 것이다. 이분들의 ‘나라사랑’ 이야기는 하루속히 새로 밝혀야 하고 대중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한 권의 시집이 ‘그때는 누구나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불식시키고 훌륭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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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7/30 [12:16]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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