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 문암정 신초 배롱나무
-작은 지명에 담긴 역사의 무게
임진왜란 의병장 신초(1568~1637)의 본관은 영산, 자는 우수이고 호는 문암이다. 현감 신희수의 아들이고 동생은 신갑이다. 선조 16년인 1583년 함경도 회령에서 여진족 추장 니탕개가 난을 일으켰다. 이때 신초 아우인 열세 살 신갑이 모병에 지원하였다. 이를 알고 형은 동생을 나무란 뒤, 대신 출전하였다. 그 뒤 1591년, 이 의좋은 두 형제는 신묘년의 별시 무과에 나란히 급제하여 형 신초는 부산 가덕도의 천성만호, 아우 신갑은 훈련원 별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터졌다. 부산진에 도착한 왜군은 4월 13일 동래성을 함락하고 4월 17일 김해성으로 몰려왔다. 신초는 천성진을 나와 제포(진해)만호 이숙과 그의 생질, 또 자신의 아우인 신갑의 처 오빠이고 훗날의 김해의병장 박진영과 함께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1,000여 명 왜군에 맞서 김해부사 서예원, 초계군수 이유겸과 함께 사흘간 4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이유겸이 달아나자 서예원도 성을 버렸고,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송빈과 이대형, 김득기, 류식 의병 등 1,000여 명 백성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4월 20일 성이 함락되자 신초는 말을 달려 포위망을 뚫은 뒤 물이 불어난 낙동강 멸포나루를 어렵사리 건너 영산 집에 이르렀다. 다음 날 이숙, 박진영과 의령 세간리의 곽재우를 찾아가 참담한 패배로 끝난 김해성 전투를 알렸다. 4월 22일 날이 밝자 곽재우는 마을 앞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노비 10여 명과 의병을 창의했다. 이 무렵 경상감사 김수가 창녕 영산현까지 왔으나, 왜군의 기세에 합천 초계로 후퇴했다. 이때 영산현감 강효윤, 창녕현감 이철용, 달성 현풍현감 유덕신과 군사들이 모두 떠나버려 세 고을이 텅 비었다. 이에 신초는 아우 신갑, 창녕의 생원 신방즙과 함께 집안 일가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았다. 신방로와 신유경을 조방장, 아우 신갑은 별장, 신순의는 부사과 등 직책을 맡겼다. 그렇게 곽재우의 사위 신응, 진사 배대유, 배대륜, 송경조, 한강, 정구의, 부곡의병장 이석경과 그의 아우 이후경 등과 함께 영산의병군을 창의했다. 이때 신초는 자신은 김해성의 패장이라며 신방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4월 30일, 왕 선조는 한양을 버렸고, 이 무렵 영산, 창녕, 현풍 등의 세 고을에는 왜 제9군 하시바 히데카스가 이끄는 1만여 명 병력이 있었다. 왜병은 약탈, 살인, 방화에 보물을 찾는다며 무덤을 파헤쳤다. 하지만 영산의병군은 병장기 부족에 전술 능력이 부족한지라, 왜군과 섣불리 맞서지 못하고 길곡, 성담산성, 고곡산성 등으로 옮겨 다니며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무렵 공호겸이란 자가 왜에 항복, 스스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영산현청에서 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6월 하순 창녕의 우강 성담산성 전투 뒤 곽재우가 신초에게 공호겸을 ‘잡아 죽이고 싶으나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신초는 ‘한병의 술, 한 사람의 장사로 족하다.’며 공호겸을 찾아갔다. ‘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공부한 친구’라며 영산현 계성리의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아우 신갑과 함께 공호겸을 붙잡아 마을 앞 고개에서 처형하였다. 이 고개가 ‘공(孔)가 적을 죽인 고개’ 공적(孔敵)에서 ‘공지기 고개’가 되었다. 또 공호겸이 살던 집이 있던 영산면 신제리의 못은 역적의 집에 판 못이어서 ‘새못’이 되었다. 또 부곡면 부곡리 ‘가적지의 공호겸 첩이 살던 집도 역시 파헤쳐 못을 만들었는데, 적에게 붙은 도적이어서 ‘가적지(加賊池, 가잿골)’가 되었다. 작은 지명이지만 담겨 있는 역사의 무게가 무거운 연유이다.
이 신초가 훗날 향리에 정자를 짓고 배롱나무를 심었다. 그 신초의 정자 문암정을 찾아 4백 년 넘게 붉은꽃을 피워온 배롱나무와 문암정 아래를 흐르는 옥천계곡의 옥천수 맑은 물을 보니 평화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경남 창녕 문암정 신초 배롱나무 – 호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