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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앵무새 학당☆]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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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학당]
이명 시집 / 문학아카데미 시선 250 / 문학아카데미(2013.030.15)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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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학당
이명
1. 유위有爲
나는 한 번도 앵무새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앵무새가 울음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앵무새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 버드랜드를 찾았다
앵무새를 길들인다는 버드랜드에서
앵무새가 울기를 기다렸다
버드랜드 철창 안에 앵무새들이 모여 있었다
앵무새는 울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앵무새들은 저마다 구슬을 입에 물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인사성 밝은 새 한 마리가 먼저 나섰다
“안녕하세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빛깔이 없는 것이라 했기에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자 구석에 있던 한 놈이
“니 밥 문나?”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그것은 이름하여 소리가 없는 것이라 했다
이제 너희들도 사람 흉내를 내는구나
울음을 가르치지 않는 그곳에서 한참동안 기다려 보았다
내 얼굴에서 어떤 슬픔을 읽어냈는지
눈치 빠르게 한 녀석 재빨리 한 마디 내 뱉는다
“내 너 사랑해!”
2. 무위無爲
커다란 앵무새 한 마리가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입을 반 쯤 벌렸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울음을 울기 위한 동작은 아니었다
가끔 꾸룩꾸룩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를 되삼키는 듯한,
목젖이 출렁이고 있었다
분출하려는 무엇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앵무새 울음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끈질기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앵무새가 느닷없이 한 마디 내뱉는다
“어이, 아재 너 참 못 생겼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므로
그것은 이름하여 형태가 없는 것이라 했던가
또렷하게 순식간에 들려온 그것이 울음인지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나도 홍단풍나무
이명
가마솥에 갓 쪄낸
여린 가을햇살 한 말을
달빛에 푹 삭혀 빚어낸 곡차 한 사발
쭉 들이켠다
산사 바위에 걸터앉아
보장각과 범종루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계곡 물소리에 얹어
쌈을 싸 안주한다
공포불상을 바라보다 취해
절집 마당에 내려앉은 등신불
단숨에 진홍색으로 물든다.
하늘 그물
이명
대웅전 처마가 그물에 걸렸다
그물코 사이로 군데군데 새들의 빈 집이 보인다
제석천의 그물에는
매듭마다 아름답고 맑은 구슬이 달려 있다는데
구슬은 서로를 비추고 있어
한 개의 구슬에 모든 구슬이 다 머물고 있다는데
단청에 거소를 둔 새들은 당분간 노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물이 가뿐하게 지붕을 들어 올릴 수 있기를
새들도 회화나무 그늘에 앉아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염불소리의 의미도 모른 채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무심코 지나쳤던 나는
대웅전 처마가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이 바다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대웅전 한 구석에 반야용선도 보인다
그물이 출렁거리자 물거품이 일듯
지붕 위로 흰 구름이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있다
곧 반야용선이 뜰 모양이다
구름 놀이터
이명
온통 하얀 세상이다
거실에서 두돌배기 아기가
휴지를 찢어서 선풍기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있다
크리넥스의 용도를 알 리 없는 아기는
구름의 양을 늘려 가는데 거리낌이 없다
삶은 놀이일 뿐이라고
휴지가 구름일 거라고
재미에 열중하는 저 무극의 눈빛
하늘말라리 밭에 하늘다람쥐가 둥둥 떠간다
애기수련도 올라간다
아기가 한 움큼의 구름을 먹는다
연화세계를 본다.
달마 낙지
이명
상원사 길가 주막이다
무안 뻘낙지 한 마리 수조에 홀로 있다
바닥에 동자처럼 앉아 있던 뻘낙지
유리벽에 올라 이리저리 다리를 뻗어보고 있다
꽃이 될까 나무가 될까 별이 될까
풍경이 되어볼까
쭉쭉 뻗는 발끝으로
목어의 울음소리 훔쳐 듣기도 하다가
늘씬한 소나무에게 곁눈질을 보내다가
금강경 경소리 산중에 울리자
가장자리에 기대 물구나무를 선다
유리벽에 착 달라붙어
발을 모아 길게 뻗어 올린다
몇 개의 발이 끝에서 사방으로 꺾여 휘어진다
금강소나무 한 그루
그대로 죽은 듯이 고요하다
가장 편한 자세로 뿌리내린 모양이다
여백은 상원사 엷은 하늘빛
아직 수도중이다
신전리 고택
이명
빽빽이 들어선 탱자나무 울타리
손톱만한 잎의 틈새로 햇살이 들어온다
햇살은 길게 늘어져 그늘집을 채운다
긴 장마 끝 빛줄기들에서 포목 냄새가 난다
백목 세목 오색목 아청목을
품목별로 늘어뜨리고 있는 탱자나무
어깨가 출렁이자
그늘집 안마당에
단골손님들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병정개미가 줄지어 들어선다
풍뎅이도 기웃거린다
하루살이도 날아와 순식간에 흩어진다
느린 지렁이는 맨몸이다
오랜만에 몸을 바꿔보겠다고
이것저것 포목 하나씩 몸에 걸쳐보는 그늘집이
오랜만에 환하다
사모곡
이명
빛바랜 사진 속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야생화처럼 아이들이 서 있고
그 속,
유난히 눈에 띄는 무명 지마저고리
채도도 없이 명도만 있는
꽃은 점점 내 가슴 속에서 환하게 피어났다
세월이 흐를수록 명암이 뚜렷해지는
현묘玄妙하고도 현묘한
무채색 꽃 하나
내 가슴에 물들어 있다.
긍구당 산조
이명
더러는 가끔씩
밤늦도록 애내 이름자를 생각해 봅니다
외자 이름에 한 글자씩 덧붙여보는 놀이에 빠져드는 재미,
나는 그 재미를 즐깁니다
내가 물건이라면 명물이고
바다를 건너온 물품이라며 명품이고
박자와 음정은 아랑곳없이 노래를 부르면 명창이 됩니다
작품을 만든다면 명곡이고 명작이 되겠지요
어린 시절 내 노트 이름자 뒤에
하루는 희자를, 어떤 날은 자자를, 또 다른 날에는 숙자를
나 몰래 적어 놓고 희희낙락하던
개구쟁이 친구들을 생각하며 웃어도 봅니다
늘 이부나 삼부쯤 모자라는 삶을 살아오기는 했지만요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있다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요
딱 부러진 명 무엇 하나
그래요 그런 꿈을 꾸었지요
꽉 찬 무엇이 그래도 빈 것보단 낫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이름자같이 살 수만 있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만
빈 곳을 알라 하고
빈 것을 채우며 살라고
채워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아버지는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누님의 수틀
이명
동그란 원 안에 자고나면 모래언덕이 생겨나고
다음날은 야자수가 자라나고
그 다음날엔 낙타가 간다
이윽고 별이 뜨고
별빛 따라
동방박사가 간다
사막여우가 사라진
어느 따뜻한 봄날에
꽃신을 신고
하얀 나비 나풀거리는
햇볕 따사로운 뜰을 지나
자목련 자욱한 그늘이 생겨난다
맑은 호수에 산 그림자 길게 드리우고
자고나면 서녘 하늘가로 줄지어 기러기 날아간다
꿈은 거기에 무지개로 남아 눈부신 날들을 수놓는데
만화경 속보다 무궁무진한 누님의 세상은 끝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나는 숨겨놓은 누님의 수틀부터 찾았다
그 속에서 내 꿈도 자라났다.
향나무 마을
이명
1.
시청 도시정비과 벽에는
18년째 붉은 유성매직으로 빗금쳐진 지도가 걸려 있죠
투명 비닐 장막 뒤로 번지수도 잘 보이지 않는 동네,
산 5번지
흐릿하게 말라버린 글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지워지는 마을
사라져야 할 그 곳에는 풀들이 한창이죠
2.
이슬이 둥글게 몸을 말아 집을 짓는 이곳을
우리는 향나무마을이라 부르죠
3.
마른 숨을 몰아쉬며 올라와 정거하는 181번 마을버스 종점
우주유치원이 튼튼한 밑동처럼 버티고 있고
거기서부터 삼거리가 시작되죠
울타리 없는 그 속에서 해와 달들이 자라나고
그들의 노래 소리가 기분을 좋게 하죠
까무잡잡하던 내 다섯 살이 기억하죠
모과처럼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북적북적 저자가 서요
저자거리를 걸어 들어가며
이름 모를 풀꽃들마다 나는 기웃거리죠
울긋불긋 나지막한 풀꽃들의 가게
내 열 살 친구들의 얼굴이죠
4.
길은 더욱 가늘어지고 그 끝에 우리 집이 있죠
꽃들이 손을 흔들어요
씨앗들이 날아올라요 공중의 집들이 그네를 타요
내 발걸음이 가벼워지죠
무성하고 싱싱한 한 그루 향나무,
그 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요.
별꽃나무
이명
그가 등을 보이고 넘어간 언덕에 떨기나무 한 그루 서 있었다 노을을 받아 노을꽃을 피웠다
시간이 갈수록 나무는 한 잎 한 잎 온통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윽고 마지막 노을이 사그라지자 어둠이 어깨에 손을 걸쳤다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오랜 친구처럼 어둠은 주머니 속에서 한가득 별을 꺼내 뿌려놓기 시작했다 서서히 어둠이 온몸을 파고들고 별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떨기나무가 떨고 있었던 어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둠이 떠날 것이 두려웠던 것임을 별꽃이 수북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알았다
아득히 눈먼 밤, 어둠 속에서 내가 떨고 있는 것이었다.
동백꽃
이명
하염없이 눈은 내리는데
머리에 흰 수건을 둘러쓰고
묵묵하다
아궁이 앞에서
확
달아오른 불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그 얼굴에 어른거리던 불 그림자
목을 길게 빼고
눈도
그 곁에 묵묵히 내려앉는다
솔가지 속불만큼 붉은 그 꽃으로
나는
내 언 몸을 녹였다.
메주꽃
이명
처마 끝에 달아놓은
원추형 메주 정수리에서
까만 솜털 보송보송하더니
볼 때마다 자란다 10cm는 넘겠다
물을 먹고 불을 품어
돌 절구통에서 우르르
공이로 짓이겨지고서야
처마에 오를 수 있었는데
돌에 맞은 정수리 시퍼런 자국에서
멍이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다
물과 불을 지난 바람의 단계에서
새카만 꽃대가 하얗게 변하고 있다
탈속중인가보다
메주꽃이 필 무렵 잘 띄워야 하는데
내 장수리가 뜨겁다
꽃대가 올라오려나 보다.
나는 사막에 산다
이명
리모컨을 누르면 켜지는 사막
오늘은 사하라 사막이다
강물이 넘쳐흘러도 물에 잦을 일이 없는
수림 속에서도 숲의 향기가 나지 않는
그 사각의 틀 속에서
나는 시시각각 사막 바람을 바꾸며
삼중 구조의 복잡한 삶을 즐거워하지
오늘은 생텍쥐페리가 사막여우가 되고
사막여우가 바람이 되어 사막 폭풍을 일으키는
외도라는 어떤 섬 이름 같기도 하고
몽유병 환자 같기도 한
내 마음 속
오ㄹ오아시스 성긴 그늘에도 어떤 관계의 풀들이 자라나고
온종일 그 풀밭에 누워 뒹굴며
마음대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을 것 같은 나의 몰입에
너는 나를 겉돌고 사막을 겉돈다
나는 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나를 겉돈다.
바오밥나무 거품꽃
이명
내가 묵은 적이 있는 남아공 선랜드 농장에는
속을 비우고 있는 6000년 된 바오밥나무가 있다
탕 빈 그 속에 맥주전문점 바슐라르가 있다
종로거리 뒷길, 리틀 남아공에서
길쭉하고 배가 불룩한 맥주잔에 맥주를 따르니
거품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거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잔의 모습이 바오밥나무를 닮았다
미세하게 부풀어 오른 저 하얀 꽃을
누구는 정열이라 하고 누구는 사랑이라 하고
누구는 죽음이라 부르고 또 누구는 초월이라 부르는데
외줄에 걸린 30촉 등불이 부풀어 오른 거품 위에 내려앉아
선랜드 농장 촛불처럼 붉다
1000년 묵은 바오밥나무라야 비로소
속을 비우기 시작한다는데
저 속을 비워 내 속을 채우면 내 속에서도 거품꽃이 피고
거품꽃이 지고나면 내 속도 비워질까
비우다보면 결국 나도 붉어질까 불곷이 됧까
무성한 거품꽃, 하얀 불꽃이 더없이 하얗다.
백남준의 로봇 K-456 앞에서
이명
리모컨을 켜자 그 여자는 가슴에 달린 전등을 번쩍이며
노래하고 춤추고 걸으며
딱닥 끊어지는 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몇 번씩이나 눈을 껌뻑였다
누군가 생각날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모컨을 끄자
그 여자의 속이 텅 빈 사각형 얼굴에서
볼품없이 툭 튀어나온 유방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은빛 철골에서
등뼈와 팔다리에서
머리 위로 날리는 은박지에서
누군가 생각난 듯 생각날 듯했지만
끝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리스의 신전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인가
외계의 어느 별나라인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무덤인가
그 무수한 경계를 헤매다가
불현듯 깨어났다 시계를 보았지만
초침은 정지돼 있었다.
작금의 사랑
이명
1.
주무르면 열이 나는 찜질팩이 고장 났다 물렁물렁한 젤 속, 열을 일으키는 동그란 열판 두 개를 붙여놓고 아무리 똑딱거려보아도 발열되지 않는다 내용연수가 한참 남아 있는데 내 손가락만 화끈거린다 감감 무소식이다
2.
안마의자가 탈이 났다 온몸에 열기를 전해주던 푹신한 의자의 아늑함이 사라졌다 앉으면 들을 주물러주고 있는 둥 없는 둥 고요히 따뜻함이 전해오던 자리, 내부를 열고 전기선에 서부터 열선가지 통로를 점검해 보았다 발열되지 않는 이유,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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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의 말
바다가 생활의 일부였던 때가 있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출렁이고 있는 유년의 바다, 활화산 같은 그 바다에 다시 서고 싶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 그 깊이를 모르겠다 캄캄 어둠의 늪은 헤매며 다닌다
나를 찾아 나선 길
길인 곳에 길은 없었다
길이 아닌 곳에 길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길이 있었고
길은 이미 길이 아니었다
모른다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는 요즈음 그러나 시의 바다에 빠졌다
모른다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는 요즈음 그러나 시의 바다에 푹 빠졌다
시를 쓰는 일이 즐겁다
늦게나마 업 하나 얻은 것에 감사한다
2013년 계사년 입춘
이 명(李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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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詩集 [앵무새 학당]
[ 이명 시인의 시세계 ] -
유위, 무위와 생태환경시적인 자연
강 우 식
1.
아무리 생각해도 2011년 이명의 <불교 신문>신춘문예 당선작이자 첫시집의 제목이기도 한「분청도 본가입납」은 백석의「여우난 곬족」과 비견될만한 경상도 어투로 채워진 그의 대표작이다. 이 시로 일약 시단에 득명한 그는 같은 해 10월에 시집을 엮어낸다. 나는 이명의 시집을 받고서 60가까운 나이에 등단한 이 시인이 서문에 밝힌 “길게 한 획을 내리긋고 싶다/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扈)의 가슴”을 읽을 수 있었다. 이명은 그만큼 아궁이에 불길이 빨려들어 가듯 시에 목마른 시인이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첫 시집도 등단하자마자 낸 것이 아닌가 여겼는데 다시 달수로는 겨우 1년이 지나서 두 번째 시집을 펴낸다. 모르긴 해도 우리 시단에서 연이어 이렇게 시집을 펴내는 시인은 이명 시인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놀라운 일이다.
이명의 두 번째 시집『앵무새 학당』은『분천동 본가입납』보다 좀 더 심도 깊은 시집이다. 편집상으로는『분천동 본가입납』이 제4부로 나뉜 거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집도 제1부 <앵무새 학당> 제2부 <긍구당 산조> 제3부 <향나무 마을> 제4부 <바오밥나무 거품꽃>으로 되어 있어 별 차이가 없어 보이나 내용면에서 훨씬 깊이가 있다.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시집, 이 점 또한 이명의 특이한 점이다. 많은 시인들이 한 권의 시집 속에 자신의 시세계가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은 시를 담고 다시 이와 똑같은 시집을 내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해 온 나로서는 철학적 명제이기도 한 ‘유위’ ‘무위’ ‘무위이불무위’ 를 중심으로 시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찾고자 하는 자세는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이런 명제는 첫 번째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의 제2부 장자에게 길을 묻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어서 일관되게 흐르는 이 시인이 가진 시적역량을 나로서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명 시인이 미진하거나 모자란 부분들 아니면 살면서 중요한 것들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답습하고 가려는 이러한 자세야말로 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는 오늘의 그를 만들어온 삶의 자세라고 여긴다. 아마 자유인으로 시를 쓰려는 그의 마음 바닥에는 독진천호의 장인으로서의 정신이 깃들어 있으리라.
2.
지금은 가위 한국시의 르네상스라 할 만하다. 시인들도 많아졌고 시도 무척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다. 50년대 시인들은 한국분단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국한문혼용의 서구의 난해시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면 60년대는 순 한글세대이므로 한글 시, 모국어로 쓰는 우리시 찾기에 심혈을 기울였고 70, 80년대는 민중시 운동 등으로 부패한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는 격렬한 구호 같은 민중시가 그 주된 물결을 이루던 시기였다. 시인의 목소리나 시가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비교적 단순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근일에는 시가 매우 다양해졌다. 아마 이것은 우리들 생활 속에 텔레비전에서부터 시작한 전자문화가 컴퓨터로 휴대폰으로 다시 MP5 등의 다양한 문화기기가 끼친 영향도 적지 않으리라. 세계는 빨라지고 빠른 만큼 정보를 습득하고 생활화하는 폭도 넓어졌다. 시인들도 글로벌시대에 맞는 경험을 하게 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최근에 시집을 읽다보면 그것을 실감한다. 얼마나 모두들 해외여행을 가는지 대다수의 시집에는 한두 편씩 세계 각국을 여행한 시가 들어가 있다. 어떤 시집은 전문적인 시집이라 해야 하나 세계 여행 시로만 채워진 작품도 있다. 이런 시집을 읽으며 내가 가본 여행지의 경험과 비교하면서 미처 가봤지만 모르고 지나친 타자의 경험을 습득하는 맛도 가졌다. 뿐만 아니다. 시집 속에서 이제껏 몰랐던 상식들을 많이 배운다. 예전의 시집에서는 전혀 못 느꼈던 일들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들어온 한 젊은 시인의 시집에도 ‘세라펠라다’ ‘써스케니아’ ‘호모나이트쿠스’ ‘자이브’ 같은 시 제목들을 얼핏 보면서 이들 시집 속에 얼마나 내가 모르는 말과 상식들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명의 이번 시집도 마찬가지다. 시 제목에서도「무문관」「목테」「니모키 트레일에 내리는 비」「바벰바족의 율법」「블랙스완」등도 그것이 지명이건 수목의 이름이건 아니면 전문용어이건 모르는 것이 많다. 나는 이러 현상을 시집이 단순히 교양으로서의 역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지표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고 본다. 즉 우리가 생활인으로서 뒤떨어지지 않고 당대를 살아가는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이번 시집의 제1부 <앵무새 학당>부터 보자. <앵무새 학당>에 실린 시편들은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이다. 시인이 가진 종교적인 관심과 더불어 자연관이 녹아 있다. 특히 제1부에는 불교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시편들이 주를 이룬다.
가마솥에 갓 쪄낸
여린 가을햇살 한 말을
달빛에 푹 삭혀 빚어낸 곡차 한 사발
쭉 들이켠다
산사 바위에 걸터앉아
보장각과 범종루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
계곡 물소리에 얹어
쌈을 싸 안주한다
공포불상을 바라보다 취해
절집 마당에 내려앉은 등신불
단숨에 진홍색으로 물든다
-「나도 홍단풍나무」전문
이 시는 불교적 색채는 있지만 불교 시는 아니다. 자연과 시적화자인 나와 불교가 교묘하게 잘 어우러진 시다. 그러면서도 시적화자가 중시인 시다. 시적화자는 가을 어느 날 심산유곡에 자리 잡은 사찰엘 왔나 보다. 시간상으로는 적어도 1박2일이다. 화자는 사찰에서 1박하면서 가을햇살과 달빛을 삭힌 곡차 한 사발을 들이켜며 계곡 물소리를 얹어 쌈을 싸 안주한다. 여기서 곡차 한 사발이나 안주는 실제의 것이 아니다. 화자가 느끼는 자연이다. 화자의 물아일치의 자연관을 표출한 것이다.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있는 화자는 그 속에 자리 잡은 사찰의 경내를 구경한다. 그러면서 “공포불상을 바라보다 취해/절집 마당에 내려앉은 등신불”을 보게 된다. 그 등신불이란 무엇인가. 김동리의 단편소설에 “옛날 만적이란 스님이 소신공양으로 성불한 몸에 금을 씌운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온갖 고뇌와 번민, 슬픔 등을 다 안고 있는 사람을 닮은 불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 속에는 놀랍게도 “절집 마당에 내려앉은 등신불”을 보게 된다. 그것은 가을의 자연 속에 불타고 있는 단풍나무다. 곱게 단풍들은 나무 한 그루가 등신불이다. 이 시의 절정이 이 부분인 것을 읽으신 분들은 쉽게 깨닫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자, 자연(단풍나무), 등신불(불교)이 합일되는 과정이다. 화자가 이 장소를 찾은 목적이 자연을 구경하러 온 것인지 사찰을 보고 예불하러 왔는지는 분명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처음에는 햇살과 달빛과 바람소리와 물소리에 취했다 하더라도 그 취한 상태가 도달한 꼭짓점이 등신불에 가고 그 등신불까지 간 합일점이 바로 시적화자에게 와 하나로 혼융되어 버린 점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제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도 홍단풍나무’란 수종이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등신불도 ‘나도 홍단풍나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등신불이 나도 홍단풍나무가 되는 화자의 시점을 자연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화자의 시점이 가을햇살(하강), 바람(평면), 등신불(하강)이 되는 사실이다. 단지 공포불상에 취하는 대목은 상승기류를 타나 그것마저도 등신불에 의해 하강이미지가 되고 만다. 이 점은 눈을 내리 깔은 상태, 겸손함을 드러내는 의미이고 또 등신불이 높은 곳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곁에 내려와 함께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일차적으로는 시적화자에게는 자연이란 없어서는 아니 될 보약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연이 등신불로 되는 과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시적화자의 전인적인 성정과 관계가 있다. 일컬으면 경치 좋은 풍경에서 느끼는 자연에 대한 것들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단풍나무 하나가 등신불이 되는 과정이란 아무나 느끼는 것이 아니다. 시인만이 깨닫는다. 자연과 종교와 나와 합일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만이 알게 된다.
「수목원 두꺼비」에서 두꺼비가 “물방울을 안고 있는 모습이/남방계 부처님 같다”라든지 「형상, 미완성 알파와 오메가」에서 “미황사 부도전, 며칠 동안 눈이 내리자 모두들 사람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나 「하늘 그물」에서 “대웅전 처마가 그물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서야/이곳이 바다라는 것을 알았다/그러고 보니 대웅전 한 구석에 반야용선도 보인다”나 기타 「개심사 오르는 길」「구름 놀이터」「달마 낙지」「길 위에 길」에서도 자연 또는 일상과 합일된 불교적인 색채를 볼 수 있다. 이들 시속에서 이명 시인이 표출하고자 하는 소리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있다. 화자 시점이나 시속의 표현들이 인간을 닮거나 인간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 시에 나타난 시적화자의 모습이 자연과 합일된 것이라면 도가적인 시에는 시적 화자가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설악산 저항령 계곡 절벽/깎아지른 바위 틈 사이//유유히 걸어가는 산양 한 마리/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다//바람에 날리는 턱수염/뒤로 젖혀진 뿔/그 모습이/유건을 쓰고 흘러가는/한 조각 구름 같다/돌아보는 눈빛이 하늘을 닮아 있다//몇 발자국 따라가 보지만/길은 보이지 않는다//길인 곳에 길은 없었다/길이 아닌 곳에 길이 있었다//이미 그는 사라지고/보이지 않는 곳에 길이 있었다
-「함곡관 산양」전문
이 시에 나타난 화자는 숨겨진 화자다. 구체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산양도 시적화자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 속에 나타나는 그도 “이미 사라지고 ” 없다. 그러면 이 시의 중심은 무엇인가. 제목 대로 산dic으로 하고 싶지만 산양은 아니다. 산양은 아니지만 대신 상지을 띤다. 대치상징이다. 노자 대신이 되기도 하고 시적 화자이기도 하다.
산양은 어떤 짐승인가. 멸종위기의 동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설악산, 대관령, 태백산맥의 기암절벽의 험준한 곳에서 산다고 한다. 천연기념물로 몸이 바위 색과 비슷하여 움직임이 없으면 눈에 잘 띠지도 않는다. 나는 이 산양이 늙어 죽을 때가 되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높디높은 절벽 끝에 올라가 극한의 굶주림 끝에 스스로 뛰어내려 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편안한 곳을 선택하여 삶을 사는데 비해 험준한 곳을 선택한 것이라든지 죽음의 선택 등이 상당히 예사 짐승과 다른 결기를 띠고 있다. 시에서도 “바람에 휘날리는 턱수염/뒤로 젖혀진 뿔”이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모습은/유건을 쓰고 흘러가는/한 조각 구름 같다”라는 대목에서는 이명 시인의 선대의 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농암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이명 스스로의 삶의 지향성을 상징으로서의 산양이라 해도 좋다. 시 제목도 마찬가지다. 제목이란 보통 시의 전체를 간결하게 한 마디로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제목과 내요이 처음부터 헷갈린다. 함곡관은 알다시피 중국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한 사람만 막아서도 만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천연적인 요새인 까닭이다. 아니 그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노자가 이곳에서 『도덕경』을 쓰고 동에서 서로 사라진 까닭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무로 돌아갔다고 한다. 즉 시원적인 무, 시작하기 이전의 무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명이 설악산을 배경으로 산양을 내세우고 노자를 노래하기 위해서 “몇 발자국 따라가 보지만/길은 보이지 않는다”는 도가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함곡관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고 저항령과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이다. 저항령이나 함곡관이나 험준하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곳에서 시인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길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길이란 무엇인가. “길인 곳에 길은 없었다/길이 아닌 곳에 길이 있었다//이미 그는 사라지고/보이지 않는 곳에 길이 있었다” 그렇다. 길을 말해 주던 노자는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길을 찾는 인간들은 오늘도 길을 찾아 헤맨다. 길이 아닌 곳에 길을 뚫으려고 하고 길이었던 곳을 지우고 다른 곳에 길을 내려고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길이 보일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길을 찾으려 아무리 애쓰나 보이지 않는다.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는 길, 길이란 무엇인가. 길이 있으므로 인간은 그 길을 따라가는 운명적인 존재는 아닌가. 아니 길은 늘 있는데 내가 그 길에 없다면 그 길은 길인가 아닌가. 아니 길은 늘 있는데 내가 그 길에 없다면 그 길은 길인가 아닌가. 길은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고 절대적이기도 하다. 나는「함곡관 산양」에서 길은 읽는 이의 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리라 본다. 이명 시인도 이런 복선을 깔고 이 시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앞의 시가 화자의 드러남이 있다면 뒤의「함곡관 산양」은 화자보다는 길에 더 중심이 실린 시다. 한쪽은 불교의 등신불로 나타났다면 다른 편은 길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도 않는 도의 미묘함을 읊고 있다. 그런 이명 시인이 나의 존재성과 삶의 지향성을 묻는 작품이 「앵무새 학당」이다.「앵무새 학당」은 이 시집의 핵심이 되는 작품이다. 이명 시인의 시적능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앵무새를 통하여 유위, 무위를 읊고 있다. 이런 소재, 철학적인 담론이 깃든 것을 시로 만들기는 쉽지도 않고 별로 내키는 일도 아니어서 나로서는 매우 꺼려하는 부분인데 이명 시인은 놀랍게도 시로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앵무새 학당」에 나오는 유위나 무위란 실제로 그 개념 정리부터가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바탕은 같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유위와 불교에서 그리고 도교에서 말하는 용어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우리들을 세계-내-존재로 봤지만 인간은 어쩌면 앵무새 같은 존재라고 나는 이명 시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선대에 해놓은 일들을 끊임없이 익히고 배우며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나인 것이 과연 무엇이 있는가. 끊임없이 답습하고 앵무새처럼 모방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모두가 앵무새 학당 식구들이 아닌가. 그렇게 살면서도 삶의 기준은 있어 어떤 사람은 유위로 살고 다른 사람은 무위로 살며 때로는 무위이무불위로 살기도 한다. 유위의 세계부터 보자. 유위란 무엇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사성 밝은 새 한 마리가 먼저 나섰다
“안녕하세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름하여 빛깔이 없는 것이라 했기에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자 구석에 있던 한 놈이
“니 밥 문나?”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그것은 이름하여 소리가 없는 것이라 했다
이제 너희들도 사람 흉내를 내는구나
울음을 가르치지 않는 그곳에서 한참동안 기다려 보았다
내 얼굴에서 어떤 슬픔을 읽어냈는지
눈치 빠르게 한 녀석 재빨리 한 마디 내뱉는다
“내 너 사랑해!”
-「앵무새 학당-1. 유위」부분
나는 오래전에 노장철학의 권위자인 귀소 송항룡에게 무위의 개념을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무위자연에서 자연이란 무위가 아니라 자연조차 만들어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하긴 만들어지지 않는 사물이나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무위란 내가 그저 쉽게 유위의 반대되는 세계라고 생각해온 것이 그릇된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무위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유위는 인공적이고 작위적이다. 이 시에서 앵무새는 ‘길들어진’ 유위의 작위성을 띤다. 앵무새의 소리는 사람의 말소리를 흉내 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일 수가 있다. 그런데 듣는 우리가 보다 사람의 목소리로 듣기 위해 작위로 앵무새를 훈련시킨다. 그것이 앵무새의 운명이다. 어쨌든 유위와 무위의 의미는 때에 따라서는 복잡 미묘해질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단순 의미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 시의 시적화자는 이제까지 앵무새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우는 앵무새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버드랜드에 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앵무새는 말만하는 새인가. 아니다. 앵무새는 울음 우는 새이다. 울음이 소리가 되고 말이 되는 새일 것이다. 앵무새 소리가 울음이 되고 말이 되고 노래가 되는 새일 것이다. 그런데 시적화자는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버드랜드에 갔다.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 소리를 흉내를 내어 말하는 것만 들어와서다. 왜 일까. 시적화자는 앵무새가 새로서의 본연의 모습은 울음 우는 새임을 보고 싶어서다. 울음이란 무엇인가. 소리를 바탕으로 한 소통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울음을 통하여 카타르시스적인 자기 정화를 하게 되고 때로는 울음은 자극제여서 하나의 울음이 전염되어서 타자들의 집단적인 울음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어쨌든 시적화자가 버드랜드에 간 목적은 앵무새 울음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앵무새에게 듣게 된 것은 전과 다를 바 없는 인사와 끼니에 대한 물음과 사랑해 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무엇인가. 조작된 말이지만 인간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즉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중요한 항목에 대한 유위인 것이다. 유위적인 앵무새를 통하여 유위적인 말을 들은 것이다. 공자의 유위사상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이 유위를 지키면 선이고 깨뜨리면 악이라 간주한다면 앵무새의 안녕하세요의 인사나 니 밥 문나의 끼니 걱정이나 사랑해의 말소리들은 왜 시적화자에게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므로/이름하여 빛깔이 없는 것”이 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그것은 이름하여 소리가 없는 것”으로서의 빛과 소리가 없는 무의 상태로 다가 왔을까. 나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화자의 이 상태는 앵무새 울음을 들으려고 했지만 들을 수 없는 슬픔이라고 이해한다. 유위라는 것도 아무나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본다. 사물을 보고 깨닫는 것이 유위라면 이 시에서 이명 시인이 의도한 것은 진정한 유위란 아무나 깨닫고 얻고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로 읽혀진다.「앵무새 학당」속의 무위를 보자.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앵무새 울음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끈질기게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앵무새가 느닷없이 한 마디 내뱉는다
“어이, 아재 너 참 못 생겼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므로
그것은 이름하여 형태가 없는 것이라 했던가
또렷하게 순식간에 들려온 그것이 울음인지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앵무새 학당-2. 무위」부분
무위란 나로서는 순수하기 때문에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의 상태이기 때문에 무능하다고 여길 때도 종종 있었다. 무위 부분도 시의 진행이 유위와 다를 바 없다. 이 시의 앵무새도 작위적인 앵무새다. “무언가를 되삼키는 듯한/목젖이 출렁이고 있었다/분출하려고 무엇을 억누르고 있었다”에서 보이듯이 억누르고 있는 작위성적인 새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화자는 앵무새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그 울음소리를 식별 못하는것은 앵무새는 울어도 그 울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말소리는 듣는다. “어이, 아재 너 참 못 생겼다”라는 말소리는 듣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들은 소리가 아니다. 귀가 없기 때문이다. 소리에는 원래 형태가 없다. 그러므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무형의 것이다. 여기까지는 앞의 유위의 전개와 유사하다. 그런데 유위와 무위는 무엇이 다른가. 나는 이 방면의 철학자가 아니므로 분명하게 정리할 능력이 솔직히 없다. 하지만 내 느낌으로는 근본적으로 공자가 말하는 유위와 노자가 설파한 무위는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것이라고 보고 싶다. 가령 내가 이 시를 읽으며 고민했던 것은 유위에서의 없음과 무위에서의 없음이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함곡관 산양」시편의 해설에서 노자의 사라짐을 무라 보고 시원적인 무 즉 시작하기 이전의 무라 했는데 이와 비유하여 형태 없는 무는 어떤가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이명 시인은 명쾌한 답을 시에서 주고 있다. “또렷하게 순식간에 들려온 그것이 울음인지/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 무위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놓아주는 상태가 아닌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무위라면 이 시의 시안은 바로 마지막 구절이 되리라.
아기를 등에 없은 코알라가 잠만 자고 있는 것이/유칼리 나무는 안타까웠다//세상 풍경이 아름답다고/여러 갈래 선택할 길도 많다고/넓은 세상으로 나가길 원했지만//코알라는 유칼리나무 줄기를 붙잡고/잠만 자고 있었다//그 잠이 워낙 깊어서/양팔을 벌려 그늘을 만들고 산들바람을 들였다//잠자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하는 것은 없지만 하지 않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꿈속에서도 길이 있을 것이라고//유칼리나무는/자세를 고치고 몸을 바꿔 집이 되고 있었다
-「무위이무불위」전문
이명의 시는 불교보다 노자의『도덕경』에 가까워 보인다. 나로서는「앵무새 학당」보다「무위이불무위」가 더 이해하기가 좋다. 코알라와 유칼리나무의 상호상조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코알라도 유칼리나무도 움직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서로가 같은 처지다. 코알라는 움직임이 없는 나무에 일생을 살려고 온 처지고 유칼리나무는 생래부터 움직임이 없으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어떤 답답함인 줄 아는 처지다. 알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삶을 영위하지 말라고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유칼리나무는 코알라에게 바란다. 하지만 코알라는 “하는 것은 없지만 하지 않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노자 식 잠을 잔다. 하는 것은 없지만 하지 않는 것도 없다는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의 핵심사상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보면 『도덕경』중에서도 무위이무불위가 여럿인데 그중에 다음의 것이 적합하지 않을까 여긴다. “도는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천지가 길고 또한 오래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늘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은 자신을 뒤에 머물게 함으로 앞서고, 떠나 있으므로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함으로 자신을 이룰 수 있다”는『도덕경』의 이 부분은 코알라와 비슷하다. “세상 풍경이 아름답다고/여러 갈래 선택할 길도 많다고/넓은 세상으로 나가길 원했지만//코알라는 유칼리나무 줄기를 붙잡고/잠만 자고 있었다”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모든 욕심에서 떠나 잊은듯이 잠만 자는 코알라의 무위이무불위의 세계다. 그러므로 유칼리나무도 코알라의 무위이무불위의 삶을 이해하고 “자세를 고치고 몸을 바꿔 집이 되고 있었다.” 자연법칙에 따라 사는 삶이 코알라와 유칼리나무를 통해 마치 이솝우화 같은 이야기를 이명 시인은 시로 담고 있다.
첫 시집『분천동 본가입납』이 장자에게 길을 묻는 시집이라면 이번 시집은 노자에게 길을 얻고 배우는 것이라 하겠다.
3.
노자는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하였다. 자연 중에서도 노자의 중심사상은 물이었다. 지극히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깃든다. 그러기에 도에 가깝다(8장).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을 부린다. 형태가 없는 것이 틈이 없는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43장). 세상에서 가장 물이 유연하지만 그 공력이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그를 이겨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한 이치를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78장). 『도덕경』에는 물에 대한 것들이 곳곳에 나와 있다. 나는 노자의 물의 사상 중‘상선약수’를 최상의 것으로 삼으면서도 물을 이기고 지는 관계로 보는 것은 늘 마음에 거슬리는 대목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의 시에 나타난 자연은 공자에 가깝다.『논어』에 나오는 ‘요산요수’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 한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知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가 그것이다. 『분천동 본가입납』에는 동적인 바다를 소재로 한 물의 시가 많은 것과 달리 이번 시집에는 흙을 기반으로 한 시가 많다. 이렇게 이명의 시는 요산에 가깝다. 산을 좋아한다 하여 단순히 산의 풍치나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어떤 글쓰기에서 ‘요산요수’를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요수는 동적인 것으로 서양에 가깝고 요산을 정적인 것으로 동양에 가깝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즈음은 세월이 달라져서 반드시 합당한 비유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바탕은 아직도 변한 것이 아니다. 이명 시의 제2부 <긍구당 산조>부터 <향나무마을>까지에 나타난 것들은 자연을 근간으로 하여 흙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는 일상성이 짙게 드러난 시편들이다. 제4부의 <바오밥나무 거품꽃>은 시집의 전체적인 흐름과는 다소 다른 나를 중심으로 한 모던한 일상성이 자연과 혼융된 것들이다. 그런 면에서 노자는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했지만 나는 시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시에 나타난 박두진의 동적인 움직임인 「해」라든지 조지훈의「승무」에 보이는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미학인 ‘승무’라든지 소월 시에 나타난 특히 음영시론에 입각한 자연 정서라든지 서정주의 토착정서 등등 헤아리려면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지만 어쨌든 시는 자연이라는 대상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시 속의 자연은 그대로의 자연이 아지다. 제2의 창조된 자연이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창에 붙은 눈송이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은 이내 녹아 점점 부풀어 올랐다 반짝 빛나는 영롱한 눈빛, 순간 무지개가 보였다//…중략…//그 먼 세상을 알려 주려고 구름 사이를 빠져나와 이곳까지 찾아온 그의 마지막 눈빛은 아름다웠다 황홀한 밤이었다
-「학이편 제1장을 읽는 밤」부분
시인에게 자연은 가장 위대한 교과서다. 『논어』의 학이편은 배움에 입문하면서 가지는 마음가짐이다.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익혀야 함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명 시인은 무엇을 배우는가. 자연을 배우고 있다. 아니 자연을 익히고 있다. 이 시에서 우리가 유심히 읽어야 할 것은 마주쳤다, 녹았다, 부풀어 올랐다, 보았다, 알려 주었다, 빠져 나왔다 등의 동사형의 변화 과정이다. 느닷없이 내리는 한 송이 눈이 눈 자체로 고정된 채 있는 것이 아니라 화자에 의해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요 시인이어서 할 수 있는 노래다. 눈의 변용을 보자. 눈이 내려 화자에게 왔다. 그것을 마주쳤다라고 한다. 아주 정면으로 부닥뜨려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눈과 화자와의 대결이 아니면 동일성이다. 그런데 이 눈은 어떻게 되는가. 눈이 눈으로 되지 않고 녹는다. 사물이 녹는다는 것은 본래의 모습에서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변함은 보통 사물의 본질을 의미할 때 아니면 다른 한 대상에게 가 혼융되거나 스밀 때의 현상이다. 그리고 그 눈송이는 부풀어 오른다. 사물이 부풀어 오르는 것은 팽창감을 뜻한다. 익음(성숙함)이나 희망의 암시다. 다음에는 액체화된 눈은 빛이 된다. 그 눈빛은 다시 한 번 화자의 눈에는 무지개로 나타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굳이 랭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인인 가져야 할 사물을 인지하는 능력의 제일통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명 시인은 우주공간 속의 크고 작은 것들이 창조되어진 제2의 자연을 만들고 있다.
모량리 취산 북쪽 기슭
철쭉나무는 한 권의 책이다
철쭉가지 여기저기 모여 있는 햇살
햇살 사이 꽃봉오리는 따옴표다
햇살 한 묶음을 꺼내본다
… 중략 …
석종소리 은은하게 울리자
햇살 줄줄이 책을 빠져나와 따옴표 위로 오른다
오늘은 효심이었다
-「모량리 햇살에는 문장 부호가 있다」부분
손순매아, 즉 손순이 아이를 묻는 고사를 시로 한 것이다. 『삼국유사』소재의, 유교보다는 불교에 가까운 작품이다. 하지만 마지막 구절에서 ‘효심’이었다는 대목에 오면 ‘효심’이 시대를 떠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주 불교라고 하기에는 개운치 않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삼강오륜이 인륜의 근본 덕목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특히『오륜행실도』같은 책은 왕명으로 만들어져 전국에 퍼졌으며 그 여파로 요즈음도 흔히 볼 수 있는 열녀문도 각 고을마다 앞다퉈 세워졌다. 작품으로도「오륜가」라 하여 주세붕, 박인로, 김상용 등의 시조와 가사가 있다. 이 시에서 자연은 한 권의 책이다. 구체적으로는 철쭉나무가 책이다. 왜 책인가. 꽃봉오리가 따옴표가 되고 햇살 한 묶음을 꺼내 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자연은 그저 우리가 꽃 피면 즐기고 꽃 지면 슬퍼하는 단순한 완상이 아니라 효심이 있다고 말한다. 자연은 효심을 배울 수 있어 책이다. 공자는 학이편 6절에서 배운다는 것을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들을 공경하고 말과 행동을 삼가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그렇게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글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공자가 말하는 『논어』속에 배움의 모든 것들이 이미 다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공자는 요산요수의 자연관을 펼친 것이리라. 이명 시인의 이번 시집 제2부와 제3부에는 그런 유교적인 자연관이 압도적으로 많이 차지한다. 이것은 이명 시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활하면서 농암 이현보 후손으로서의 성장과정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특히 제2부 <긍구당 산조>에는 관혼상제의 하나인 죽음에 대한 것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 것도 유교 가문으로서의 생활화되어 온 세상사와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
의성김씨에게 시집 온/경주이씨의 가묘假墓가 헐리고 있다/곁에 있는 의성김공의 가묘가 작별을 고하고 있다//…중략…//신장염에 혈액암에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김공이/자신의 가묘에 등을 기댄 채/옆에 쌓여가는 흙더미의 높이와/깊어가는 광의 넓이를 가늠해보고 있다/방금 포크레인이 퍼 올린/따끈따끈한 흙을 한 움큼 쥐고 만져 보고 있다/주먹 속의 흙이 부드럽게 흘러내린다//그렇게 단단하게 문을 잠그고 있던 야무진 짝이/저리도 부드러워지다니/마사토 흙이 자리를 내주느라 공손해졌다/들어서는 안주인의 발걸음이 가볍다
-「처사 의성김공의 가묘」부분
이 시는 집안일로 추정되는 가묘 현장을 시로 만든 것이다. 가묘제도는 요즈음도 흔히 볼 수 있다. 엔간히 사는 집이면 생전에 자기가 묻힐 묘 자리까지 봐두고 산다. 나는 산사람이 미리부터 자기가 죽어서 묻힐 자리까지 정해 두고 사는 것이 젊은 날에는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대를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되었지 죽어서도 편안히 살겠다는 것은 인간의 지나친 욕심이라 여겨져 싫었다. 선인들은 그것이 편했던 모양이다. 생과 사를 다르게 보지 않은 선인들은 이승에 집 한 칸 장만하듯 이 저승에 살 집을 만들어 놓았다고 걱정거리를 덜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가묘가 훼손되지 않았는지 극진히 살피기도 한다. 경주이씨가 세상을 하직하고 남편인 의성김씨가 가묘로 장만해둔 부부 가묘 한 쪽이 파헤쳐지는 장면이다. 남편인 김 공은 병약한 몸인데도 부인이 들어갈 광 넓이를 가늠해보고 방금 파헤쳐진 따끈따끈한 흙을 만져 본다. 흙을 만진다는 것은 친밀함이요 자기가 들어갈 집에 대한 애정이다. 김 공은 흙의 따뜻함에서 경주이씨의 체온을 감촉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들어가 살 집이 추울까봐 걱정되었을 것이다. 저승의 집이나 이승의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은 대지로 남성은 씨앗으로 생각해왔다. “들어서는 안주인의 발걸음이 가볍다”는 것은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의 한 생애를 마친 가벼움이다. 자연과의 합일되는 동일성이다. 그리하여 대지는 비옥해지고 인간은 한 줌의 흙으로서 완성된다. 생자필멸의 우리들 인간으로서는 죽음에 대한 문제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산자는 살아 있는 동안 망자를 기린다. 이명의 시에 나타난 진달래 능선에서 “풍로를 돌리면 살아나던 불씨처럼/그때마다 어머니의 삶이 살아났다”의 「능선에서」,「화장터가 있는 갈마산에서 숙모를 화장하며 그 영혼처럼 “방금/단아한 나방 한 마리/사뿐히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라고 읊은「갈마산 나방」,“채도도 없이 명도만 있는/꽃은 점점 내 가슴속에서 환하게 피어났다”로 묘사된 「사모곡」의 어머니, 불천위(不遷位)가 된 농암을 읊은「금서대를 보며 생각한다」 외 그밖에도「긍구당 고유」「연암의 고추장 단지」「난중일기 기축년 유월」「백가쟁명 나무」등이 다 죽음과 관계된 시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유교와 관련성이 깊은 작품들이다.
나는 한때 상여가 나갈 때 저승길을 잘 가라고 비단 천에 시를 써서 장대에 매달고 나가는 만사들이 장례 후 다 소각되지 않고 남았으면 세계에 유례없는 훌륭한 우리 고전문학의 하나로 만사문학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 한 적이 있다. 물론 대다수의 만사가 상투적인 시더라도 그 중에는 창작되어진 좋은 시도 있었다. 대체로 유교에서의 문학은 공리성이 강하다.『시경』의 시 삼백수 일언이폐지왈 사무사(思無邪)도 시의 순수성으로 보기보다 공리성이 강하다고 믿는다. 조선 사람이므로 즐겨 조선시를 짓겠다는 다산 정약용도 “임금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인 풍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또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라 했다. 하물며 다산이 이럴 때야 다른 분들은 말하여 무엇하랴. 가까이 조선시대에는 시회(詩會) 같은 것도 있었지만 대다수 선비계급들이 학문과 시를 같이 하였었다. 많은 문집들을 보면 시가 없는 문집들이 없을 정도로 시를 짓는 것은 필수였지만 나는 그 문집들에 실린 시에 대한 논의가 거의 단편적인 것으로 끝나 있는 것이 우리 시를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유교문화권에 살고 있으면서도 유교적인 문학원리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시를 보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요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시가 있는 것은 공리성 속에서도 자연과 친밀하려는, 자연과 하나 되려는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래서 생태환경시가 한동안 성행할 때 대기오염이나 폐수문제 등 고발성이 강한 시만이 내세울 게 아니라 생명존중의 시도 살펴야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명 시인의 시도 자연과의 동일성 속에 하나가 되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서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추사가 한 말 중에 “일생다득추기(一生多得秋氣) 매사약존화의(每事略存畵意)”라는 말이 있다. 믿기질 않겠지만 추사도 예술가의 조건으로 화의보다 추기를 강조했다. 이와 같은 영향도 조선시대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나 이기론(理氣論)의 영향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 퇴계가 정지운이 지은『천명도』중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를 “사단은 이가 움직인 결과이고 칠정은 기가 움직인 결과다”로 고친 것을 고봉 기대승이 반론함으로써 벌어진 7년 논쟁으로 이(理)가 먼저냐 기(氣)가 먼저냐로 유림 전체가 설왕설래했듯이 아무래도 문학의 흐름도 공리적이요 온건한 쪽이 대세였다. 이명 시도 공리는 아니더라도 온건하다. 점잖다. 정이더라도 추기가 있다. 추기는 무조건 정에 파묻히지 않는 자제력이라 할까 그런 절도다. 그러면서도 옛 정취가 묻어난다. <긍구당 산조>의 시편들은 시인의 살았던 고향과 주거 공간 및 가족사에 대한 추억들로 엮어져 있다. 그중에서「신전리 고택」을 든 것은 이 시가 생태환경시의 요소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말하는 신전리 옛집은 탱자나무 울타리로 되어 있는 집이었나 보다.
빽빽이 들어선 탱자나무 울타리
손톱만한 잎의 틈새로 햇살이 들어온다
햇살은 길게 늘어져 그늘집을 채운다
긴 장마 끝 빗줄기들에서 포목냄새가 난다
백목 세목 오색목 아청목을
품목별로 늘어뜨리고 있는 탱자나무
어깨가 출렁이자
그늘집 안마당에
단골손님들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병정개미가 줄지어 들어선다
풍뎅이도 기웃거린다 하루살이도 날아와 순식간에 흩어진다
느린 지렁이는 맨몸이다
오랜만에 몸을 바꿔보겠다고
이것저것 포목 하나씩을 걸쳐보는 그늘집이
오랜만에 환하다
-「신전리 고택」전문
‘신전리 고택’은 말 그대로 오래된 집이다. 순수 자연의 집이다. 나는 예전부터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들어선 우리의 초가집들이 어쩜 저리도 자연스럽게 산을 닮은 형세일까 감탄에 감탄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자연공간이 우리와 하나라고 해서 너무 대수롭잖게 보면 안 된다. 우리는 자연을 너무 쉽고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자연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까이 하면서도 늘 경외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자연에는 아무도 거역 못할 순리와 나름의 규범이 있다고 본다. ‘신전리 고택’도 마찬가지다. 이 집은 외곽이 탱자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져 있다. 탱자나무는 알다시티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는 나무다. 이것을 울타리를 하면 외부에서 쉽사리 들어올 수가 없다. 자기만의 자연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밀한 탱자나무 틈새로 햇살이 파고든다. 햇살은 만물을 성장하게 하고 생명을 주는 근원이다. ‘신전리 고택’에 햇살이 살이 있음으로서 이곳에 사는 생물들이 생동하게 된다. 인간으로 상징되는 “백목 세목 오색목 아청목”들이 출렁거리고 곁들어 단골손님인 ‘병정개미’ ‘풍뎅이’ ‘하루살이’ ‘지렁이’ 들까지도 함께한다. 인간, 자연,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이 같이 뒤섞여 생을 영위하고 있음을 본다. 작지만 그것은 자연의 하모니다. 나는 이 시에서 자연이 편안히 숨 쉬는 소리를 듣는다. 갈등이나 인위적인 것이 없다. 그런 면에서 이명은 자연을 아는 시인이다. 시「나는 사막에 산다」에서 리모컨을 켜면 나타나는 사막에서 “내 마음 속/오아시스 성긴 그늘에도 어떤 관계의 풀들이 자라나고/온종일 그 풀밭에 누워 뒹굴며 마음대로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을 것 같은 나의 몰입에//너는 나를 겉돌고 사막을 겉돈다/나는 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나를 겉돈다”고 하여 인위적인 자연에서는 나름대로 얼마든지 오아시스도 만들고 낙원을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가상이기 때문에 진정한 자연과 합일될 수는 없고 겉돌게 됨을 노래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생활 폐수다 수은 중독이다 황사다 하는 각종 고발성이 강한 시들은 진단성이 강한 시들이라면 생명 존중의 시, 천지인이 합일되는 시들은 치유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생태환경시란 오늘에만 있어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면면히 이어온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시 속에는 공자의 어진 인의 사상도 깃들어 있음을 아무도 부인 못하리라. 가령 나는 이명 시인의 「누님의 수틀」같은 옛정취가 묻어나는 작품에서 선대의 우리 조상들의 아니 우리 아녀자들의 아름다운 삶을 엿본다.
동그란 원 안에 자고 나면 모래언덕이 생겨나고
다음날은 야자수가 자라나고
그 다음날엔 낙타가 간다
동그란 원은 원환상징을 띤다. 원환상징이란 존재는 둥글다는 것으로서 칼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는 “인생은 아마 둥글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원은 우주다. 모든 사물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장한다. 아니 그 속에서 창조되기도 한다. 「누님의 수틀」속처럼 없던 사막도 생기고 그 사막 위로 낙타가 가기도 한다. 조용하면서도 수틀 하나로 모든 소망을 다담고 이루고자 했던 삶, 그것이 자연과 함께 살아온 우리 아녀자들의 삶이 아닌가. 이명 시에 나타난 자연에는 이런 조화속의 혼유되어진 생태환경시적인 면들이 보인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며 간다/구름이 느릿느릿 그 사이를 지나간다”는 자연동화 같은 이야기가 담긴「푸니쿨리 푸니쿨라」, “귀를 잡고 따라나선 실타래 매듭이/이제 막 참선을 끝낸/산중의 북소리 하나 끌고 나와 흐른다”는 인간과 자연의 연관성과 종교까지도 같이 이어가는「골무 시나위」, 인간, 고니와의 동일성을 보인「목테」, 개와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을 띤「니모키 트레일에 내리는 비」등이 다 이명 시에 나타난 생태환경시적인 요소다.
이상으로 이명의 시에 대한 고찰을 마친다. 우리 시를 살펴는 데 있어서 한결같이 서구의 이론을 가져다 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어 가능하면 좀처럼 우리 시에서 시도되지 않은 동양적인 사상에 맞춰 글을 시도해 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여의하게 써지진 않았다. 하지만 이명 시를 살피는 동안 그의 시에서 생태환경시적인 생명존중의 따뜻한 면을 띠고 있음을 발견한 것은 큰 기쁨이었다. 시인이란 무엇보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과 교감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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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시와 삶에 녹아든 철학적 명제
생명존중의 생태환경시
아무리 생각해도 2011년 이명의 <불교 신문>신춘문예 당선작이자 첫시집의 제목이기도 한「분청도 본가입납」은 백석의「여우난 곬족」과 비견될만한 경상도 어투로 채워진 그의 대표작이다. 이 시로 일약 시단에 득명한 그는 같은 해 10월에 시집을 엮어낸다. 나는 이명의 시집을 받고서 60가까운 나이에 등단한 이 시인이 서문에 밝힌 “길게 한 획을 내리긋고 싶다/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扈)의 가슴”을 읽을 수 있었다. 이명은 그만큼 아궁이에 불길이 빨려들어 가듯 시에 목마른 시인이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첫 시집도 등단하자마자 낸 것이 아닌가 여겼는데 다시 달수로는 겨우 1년이 지나서 두 번째 시집을 펴낸다. 이명의 두 번째 시집『앵무새 학당』은『분천동 본가입납』보다 좀 더 심도 깊은 시집이다. 편집상으로는『분천동 본가입납』이 제4부로 나뉜 거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시집도 제1부 <앵무새 학당> 제2부 <긍구당 산조> 제3부 <향나무 마을> 제4부 <바오밥나무 거품꽃>으로 되어 있어 별 차이가 없어 보이나 내용면에서 훨씬 깊이가 있다.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시집, 이 점 또한 이명의 특이한 점이다. 많은 시인들이 한 권의 시집 속에 자신의 시세계가 무엇인지도 분명치 않은 시를 담고 다시 이와 똑같은 시집을 내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해 온 나로서는 철학적 명제이기도 한 ‘유위’ ‘무위’ ‘무위이불무위’ 를 중심으로 시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찾고자 하는 자세는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이런 명제는 첫 번째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의 제2부 장자에게 길을 묻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어서 일관되게 흐르는 이 시인이 가진 시적역량을 나로서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명 시인이 미진하거나 모자란 부분들 아니면 살면서 중요한 것들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답습하고 가려는 이러한 자세야말로 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는 오늘의 그를 만들어온 삶의 자세라고 여긴다. 아마 자유인으로 시를 쓰려는 그의 마음 바닥에는 독진천호의 장인으로서의 정신이 깃들어 있으리라.
― 강우식(시인, 전 성균관대 시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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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명 ∥
∙ 경북 안동 출생
∙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앵무새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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