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큐슈여행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만든
구마모토성(熊本城) <1>
2007년 11월 19일 . 날씨 : 맑음
구마모토 성이 있는 히고 지방은 본래 16세기 일본 전국시대 당시에는 규슈지방의 유력영주인 오토모소린(大友宗麟)이 지배하고 있었다. 1587년 전국시대의 걸물 도요토미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한 직후 히고 지방을 삿사나리마사에게 하사한다. 하지만 삿사나리마사가 지배하던 히고는 토착 무사의 거듭된 반란으로 제대로 통치가 되지 않았고 삿사는 영지를 하사 받은지 1년만에 반란이 일어난 책임을 지고 활복한다.

구마모토성의 전경
이듬해인 1588년 주인이 없어진 히고를 히데요시는 반으로 나눠 북반국 25만석은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수여하여 구마모토성을 지배하게 하고 남반국 24만석은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수여하여 우토(宇土)성을 지배하게 한다. 여기에서 석(石)은 일본 전국시대 당시 영주가 통치하는 영지의 생산량을 나타내는 단위로 1석은 한명의 병사가 1년간 먹을 식량을 의미한다. 100만석의 영지를 가진 영주가 25,000~30,000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마모토성 입구에 조성된 시민 휴식공간
이후, 이 두사람은 임진왜란 당시 각각 육군대장이자 1,2군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정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關原)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자 故 히데요시측 서군에 참가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참수 당하고 동군으로 참가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공을 인정받아 고니시의 영지까지 모두 하사 받도 히고 전국 52만석을 지배한다. 히고의 대영주가 된 가토기요마사가 1601년부터 쌓기 시작한 성이 바로 구마모토성이었으며 7년만인 1607년에야 완공 되었다.

주차장에서 구마모토 성으로 들어 가는 길 - 길 양편으로 벚나무가 가득하다
구마모토 성내에 있는 가토기요마사의 초상화에는 호랑이가 있는데 가토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에 육군대장 겸 제2군 대장으로 규슈군 1만명을 이끌고 조선에 출병해 함경도까지 진군해서 임해군과 순화군, 조선의 두 왕자를 사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무장 중에서는 가장 최북단까지 진격한 장수였고 조선에서는 수많은 호랑이를 사냥해서 호랑이 가토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마모토성을 둘러 쌓고 있는 방어용 해자
1611년 가토기요마사가 죽고 그의 아들 가토타다히로(가등忠廣)가 대를 이었지만 1632년 친 히데요시 세력이던 가토 가문은 도꾸가와 막부에 의해 겨우 2대만에 숙청 당하게 된다. 이후 구마모토 성은 호소카와(細川) 가문의 영지가 되어 도꾸가와 막부 239년간 11대에 걸쳐 호소카와의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1877년 메이지유신 당시에는 막부군과 신정부군 사이의 전쟁인 세이난(서남)전쟁의 전장이 되어 주요 건물이 소실 되기도 한다. 1998년부터 구마모토 복원 정비 계획이 시행되었고 올해 2007년에는 구마모토 성의 축성 4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복원 정비작업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구마모토성은 30만평의 대지에 7년에 걸쳐 건립된 거대한 성이다. 구마모토성은 매우 구조적으로 설계가 반영되었는데 적의 병사들이 성벽을 쉽게 기어 오르지 못하도록 성벽의 각도가 지붕의 배치를 절묘하게 하였고 성 위의 수비병이 성아래의 병사들을 손 쉽게 저격할 수 있도록 노가 적절하게 배치 되어 있다.

가토기요마사가 임진왜란 중 참가했던 전투 중 1597년 12월 23일부터 1598년 1월 4일 사이의 겨울에 있었던 울산성 전투인데, 왜란 후반기에 주로 울산에 주둔해 있던 가토기요마사는 울산성을 쌓고 그곳에 주둔하였는데 그해 겨울, 조명연합군 5만명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15,000명의 병사와 함께 농성전을 벌리게 된다.

성안의 물이 떨어져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으며 흙탕물을 마시고 군마를 잡아 먹는 악전고투 속에 간신히 농성에 성공은 하였지만 그 때의 물 부족이 한이 맺혀 구마모토 성을 지으면서 우물을 120군데나 팠다고 한다. 지금은 10여개만 남아 있지만...







구마모토성(熊本城) <2>
2007년 11월 19일 . 날씨 : 맑음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둘러 보면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대해서 알아보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년 7월 25일 ~ 1611년 8월 2일)는 우리가 기억하기론 임진왜란의 주역인 왜군의 선봉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외가 쪽으로 6촌이 되며, 다른 6명의 무사들과 더불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나카무라 출생으로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좀더 커 보이기 위해 모자를 애용했다고 한다.

축성술이 뛰어나고 호랑이 사냥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본국으로 패퇴한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어 구마모토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밑으로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난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게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적장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3000석의 영지가 주어지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의 초상화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자 주요 신하로 기용되었으며 이후 규슈 정벌등에서 공을 세웠다. 1587년에는 규슈의 히고(肥後) 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25만 석의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는 한반도 동쪽의 함경도로 진격로를 선택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사로 잡았다. 이후 명나라, 조선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반목과 조선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황이 날이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해지고 남쪽으로 후퇴하여 서생포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593년에는 서생포 왜성을 완성하고 중요거점으로 삼았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1596년 지진이 났을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공이 인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150여척의 일본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도록 명령받았다. 정유재란시에는 주로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였다.

그는 울산에 지구전을 펼칠 수 있는 성을 쌓고 울산 성 전투에서 농성을 벌였으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여 식량과 물 부족으로 병사의 대다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전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말을 잡아 그 피를 마셔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참전한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등 문치파 측과는 계속 대립하여 내분을 빚었다. 1598년이 되자 서생포 왜성이 명나라의 마귀제독에 의해 함락되었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조선에서 패전한 모든 병력을 일본으로 후퇴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인 동군 측에 가담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고 그의 가신으로 나머지 여생을 보내게 된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 하고 돌아오던 중 병이나 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임진왜란후 그는 구마모토 번의 초대 영주가 되었다. 일본 3명성으로 유명한 성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구마모토 성을 1607년 축조하였는데, 울산왜성 전투에서의 일을 교훈 삼아 성 안에 우물을 많이 만들었다. 이 구마모토 성을 중심으로 마을을 정비하고 치산, 치수, 산업 등을 장려하여 현재의 구마모토 시의 기초가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일본 3명성은 가토 기요마사와 도도 다카토라에 의해 축성된 성중에 구마모토 성, 나고야 성, 오사카 성을 말한다. 그리고, 나고야 성 천수대 밑에는 기요마사의 돌이라고 불리는 큰 돌이 있다.

북한의 통일신보는 대표적 경상도 민요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나네의 유래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패퇴하는 왜적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환호한 말에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1>에서도 진주지방에서 가등청정을 몰아내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나네의 수록본이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1600)는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의 무장으로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평양까지 침공하였고 정유재란 때 재침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후퇴하였다. 귀국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다 패해 죽었다.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당시 대표적인 천주교도 영주이며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부른다. 사카이(오사카 부근)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던 집안의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 고니시 류사(小西隆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관을 지냈다. 고니시 류사는 명나라와 무역으로 서양문물을 일찍 접하게 되었으며 독실한 천주교도가 되었다. 그의 차남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1584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혼노지의 변란 이후로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아버지 류사와 함께 세토나이 해의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1588년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 히고노쿠니 우토 성의 영주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그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1만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1진으로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포성을 함락하고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일본군의 선봉장이 되어 대동강까지 진격하였고 6월15일에 평양성을 함락하였다. 1593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원군에게 패하여 평양성을 불지르고 서울로 퇴각하였다. 전쟁이 점차 장기화되고 명나라를 정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조선의 이덕형과 명나라 심유경 등과 강화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명나라와 강화를 위한 교섭에 노력을 계속하였지만 그의 강화교섭 계략이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정복야욕을 더욱 자극하였다.

1596년 강화교섭이 최종 실패로 끝나자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 왔으며 남원성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을 격퇴하고 전주까지 무혈입성하였으며 순천에 왜성을 쌓고 전라도 일대에 주둔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철군명령이 내려지자 노량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이용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1600년 일본의 정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자 이를 저지하려는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과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미쓰나리에 동조하여 싸우다가 패하였다. 고니시는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할복자결을 거부하고 효수당하였다.
-지훈산악회카페 카페지기님의 글입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