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초
윤미옥(2019.12.제주)
꽃이 피었다. 하나하나 잎을 활짝 열고 있다. 고깔처럼 오보록 모여 있는 꽃잎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눈을 맞춘다. 가을 즈음 처음으로 반듯한 초록 잎들 사이에서 새 부리 같은 꽃봉오리가 돋아났을 때는 금방이라도 ‘팡’하고 터질 줄 알았다. 하지만 겨우 내내 그대로였다. 마치 추위를 견디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땅이 풀리고 새로운 기운이 대지에 퍼져나가자 꽃은 연둣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점점 하얀색을 띠어갔다. 봄이 시작되던 3월에 드디어 만병초가 꽃을 피웠다. 봉오리 속에 품고 있던 에너지가 초록 기운과 함께 꽃망울을 터트렸다. 한동안 꽃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꽃과 함께 한 사람의 얼굴이 가슴속으로 차고 들어온다.
만병초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십삼 년 전, 남편이 입원해 있던 국립암센터 정원에서였다. 기운이 없어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던 그와 산책하던 중 만난 꽃이다. 만병초란 푯말이 우리를 멈추게 했다. 꽃을 유난스레 좋아해서 그 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알고 보니 독이 있지만 여러 가지 병을 고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키워보고 싶은 생각에 틈나는 대로 화원으로 달려가 만병초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우지는 못했다. 그때는 흔하지 않은 화초인 데다 가격까지 만만찮아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만병초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후에는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건강검진에서 간경화와 간암 판정을 받았다. 간경화 때문에 복수가 차 있는 상태여서 고주파 치료도 할 수 없었다. 간 이식 수술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형제가 돈돈한 우애를 내세우며 서로 이식을 해 주겠다 했지만,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우리 식구는 가능했다. 하지만 환자가 이식을 거부했고 그때부터 본인의 회복을 위한 병 치료에 매달리게 되었다.
간에 좋다는 굼벵이탕과 토룡탕을 구하려고 한여름 먼 거리에 있는 지인의 집을 찾았다. 약효가 있다는 말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오려고 욕심을 부리며 한 자루를 어깨에 멨다. 집에 와서 보니 어깨에 검푸른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오직 남편을 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덕분에 복수는 조금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환자는 갑자기 단식원엘 가겠다고 한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단식원에서 관장하고 먹은 게 없어서였는지 복수가 더 빠진 것으로 보였다. 봄이라 세상은 꽃 천지였지만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도 몰랐다. 그는 열흘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이 지나자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쓰러졌다. 119 구급차에 싣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검사를 위해 배에 주삿바늘을 꽂는 순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인의 도움으로 급히 암센터로 옮겼다. 그런데 이송자의 부주의로 수액 병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병은 바닥에 부딪히면서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수술실로 급히 들어갔고 우리는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결국 입원했다. 일곱 개의 수액을 맞아야 했기에 복수는 점점 더 차기 시작했다. 결국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뺐다. 배에 바늘이 꽂혀 있을 때는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봄부터 남편은 병원을 들락거렸다. 집에서 최고의 간호를 해주던 딸의 졸업 작품 패션쇼도 참석하지 못했다. 추석을 지나고 열흘이 지나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담당 의사가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어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게는 더 이상 의학의 힘으로는 힘드니 신에게 의지해보라는 말로 들렸다.
환자를 병상에 두고 병원 앞 성당 철야 기도회에 참석했다. 기도회 봉사자들의 안수를 받을 때는 내가 아닌 그의 몸이 되었다. 그 순간은 기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희망에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회가 끝나고 종종걸음으로 병실로 돌아와 환자의 얼굴을 마주하면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입원해 있지 않을 때는 기도하는 곳을 찾아다녔다. 몸은 점점 야위어 가고 복수는 더 차올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사이비종교에라도 절박하게 매달리고 싶었다.
그즈음 담당 의사가 갑작스레 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의사가 바뀌면서 혼란이 찾아왔다. 음식 섭취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기도로 음식물이 넘어갈까 봐 금식이 이어졌다. 무척 걷고 싶어 했으나 기운이 없어 수액만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진통제를 맞고 깨어나지 못한 채 가족의 품을 떠났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평소에 좋아하던 과일이라도 먹게 해 줄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살아있을 때 교우들의 간절한 기도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영혼을 위한 기도를 많이 했으니 아름답고 평안한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사람은 떠나고 계절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느 날 오빠 집에 갔다가 기억 속의 꽃을 만났다. 만병초였다. 오빠가 운영하던 화원에 그 꽃이 있었다. 당장 꽃을 입양했다. 그러나 꽃이 잘 피지 않았다. 까다로운 식물이었다. 원산지가 고산지대이며 너무 더워도 잘 자라지 않고, 영하의 날씨에는 얼어 죽기도 한다는 식물이었다.
만병초를 보고 있으면 남편 생각이 난다. 그때 병원 산책길에서 함께 바라보던 꽃이었기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그러던 것이 6개월 만에 꽃을 피운 것이다. 그것도 봄을 알리는 3월에 활짝 몸을 열어주었다.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할 때부터 꽃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릴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마치 환자의 쾌유를 기다리는 가족들과 같은 심정이었다.
‘만병초야, 너는 내 아픈 마음을 알고 있겠지. 하루빨리 함박웃음으로 반겨줘. 너를 보는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의 병이 완치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야기를 알아듣고 화답이라도 하듯 꽃을 피워낸 만병초가 대견하다.
십삼 년 전, 만병초의 효능을 진작 알았더라면 잎 차라도 끓여주었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꽃이 오랜 시간의 인내 속에서 힘들게 개화하듯이, 아픈 사람들의 건강이 회복되고 저세상으로 떠난 남편도 소생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스쳐 간다. 가만히 만병초 꽃잎을 바라본다. 가을에 떠난 선한 그의 얼굴이 꽃잎에 겹겹이 쌓여간다.
첫댓글 윤미옥 선생님.
늦었지만 2019년 12월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만병초를 보니 그리움이 겹겹이 쌓이는 꽃이군요.
늘 건강하십시오. 좋은글 많이 발표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