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9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 주간)
[청주]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
청주 교구 감곡 매괴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바룩 5, 1 - 9
† 독서 : 필리 1, 4 - 6. 8 - 11
† 복음 : 루카 3, 1 - 6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현시대의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은 사회
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인권 주일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는
인권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회개와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청하며 정성 들여 미사를 봉헌합시다.
★ 바룩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위로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며 그분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예루살렘을
영광의 빛 속에서 이끌어 주시리라고 말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어서
기뻐한다. 그는 신자들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풍부해져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기를 바란다(제2독서).
★ 요한 세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 받고 요르단 지방을 두루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다. 요한은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였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밀레의 ‘만종’(晩鐘)은 널리 알려진 그림입니다. 저녁에 저 멀리 있는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감자를 캐던 부부가 일손을 멈추고
삼종 기도를 바치는 그림입니다.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저녁은
마음이 바쁜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부부는 그 종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드린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부의 모습 자체는 그리 큰
감동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목소리로 상징되는 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엄숙하고
거룩하게만 보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요르단’이란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내려다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거나 억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거룩해지고, 거룩하게 삶으로써 인간의
품위가 회복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남의 이목을 끌 만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소박하게 살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함이란 바로 평범한 일상의 일들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입장에서 행할 때 드러날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9일 대림 제2주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루카 3,1-6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2주일입니다. 대림 초 두개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만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춰지길 희망하며 기쁨의 성탄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빕니다.
피아노 조율은 언제 해야 합니까? 피아노 조율은 ‘연주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렇게나 산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기 전에
우리의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함부로 헛되이 삽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여정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 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곧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의 양식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분명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보따리를
바꾼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결국 돌이킬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출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장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골이 패인 것은 없는지?
혹 골이 있다면 그 골을 메워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그를 ‘나와 틀리다’ 고 단죄하며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분명,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산과 언덕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었다면 겸손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에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모습으로, 간음한 여인의 처지에로 내려가서 허리를
굽혀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에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는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어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굽은 마음을 곧게 하십시오. 시기와 질투로 보면
증오와 저주를 낳게 되고 영혼이 망가집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인정해 주는 올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거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은 상처만 남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화는 불입니다.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이규경). 잘못된 열심은 영혼에 상처만 남긴다고
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로 화를 키워서는 안되겠습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회심하는 이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매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의 때
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10,22).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기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 않는데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고백하는 것입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피1,10-11) 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나무랄 데 없는 축복의
날 되길 희망하며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로 거듭날 수 있는 한 주간되길 바랍니다.
“한 알코올 중독자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가정을 살리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부인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신앙을 비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아내의 손에 있는 성경을 빼앗아 난로 속에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어디 네 성경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난로 속의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 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딱 들어오는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마태복음 24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있는 말씀에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3,6)는 말씀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아기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의 추구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세상과 땅만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교부
떼르뚤리아노는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죽는
날까지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입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에프엠대로 사는 수도자
12월 9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 루카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에프엠대로 사는 수도자>
수도자라고 해서 다들 ‘에프엠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저 같이
적당, 적당히 사는 날 나리 같은 수도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말
수도자다운 형제들을 봅니다. 본업은 당연히 복음 선포요, 사목활동입니다.
취미는 기도생활입니다. 특기는 공부입니다. 관심사는 오로지 형제들의
영적생활의 향상이나 수도회의 쇄신 등과 같은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화
역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게 잘 살까?’입니다.
지나치다 싶은 정도로 정도(正道)만을 고집하기에 재미가 없습니다.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 수도회가
쇄신되기 위해서는 이런 분들이 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팍팍하기 그지없는’ 삶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재미없는 삶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양한 눈요기 거리,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볼거리들로 가득 찬 도시를 멀리하고 황량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풀 한포기 없는 광야,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쓸쓸하고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습니다. 메뚜기 드셔보셨습니까? 정말
먹을 것이 없는 곤충입니다. 날개 떼어내고, 머리 떼어내고, 다리
떼어내면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맛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메뚜기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식물의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그만큼 영양가가 없는 음식, 풀과도 같은 거친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들꿀 역시, 요즘 말하는 값비싼 석청이 아니라 당시 가장 소박하고도
초라한 음식이었습니다. 메뚜기와 들꿀로 연명했다는 말은 우리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말과 동일했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메뚜기와 들꿀이란 단어들인데,
이 단어들은 단순한 금육이나 검소한 식생활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한 순수하고 지고한 열정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오시는 예수님께로 주파수를 맞췄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평생 추구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세례갱신운동은 군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큰 스승으로 여긴 걸로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당시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즉시 이렇게 증언하며 크게
물러섭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일은 당시 노예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인 가족들을 위해서 하루 수십 번도 더 신발 끈을 묶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신발 끈 조차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니 자신을
노예보다 더 낮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구자로서 가장 적격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지 그리스도에 앞서서 파견된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장 큰 예언자로 불리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조금이라도 덕이 덜 닦인 사람이었더라면, 선구자로서의
삶의 준비가 부족했더라면 백성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올라갈 때 까지 올라갔던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파견된 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야욕이 스며드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파견하신 이유를 상기하면서
겸손의 덕을 청합니다.
이토록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의 삶,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랜 기간 광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의 강도
높은 피정과 자기 쇄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다스렸습니다.
고독과 침묵 속의 광야 생활에 충실했기에 세례자 요한은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잘 나가던 세례자 요한을 사람들이 그냥 두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저녁 한번 사겠다, 차 한대
빼드리겠다’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은 메뚜기와 들
꿀로 연명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며 ‘저런 저런’ 하면서 음식보따리를
싸들고 따라다녔겠지요.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욱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더욱 더 청빈한 삶, 더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 평생 예수님의 선구자로서의 삶, 구도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공인 연극에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정말로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새벽님들께 죄송한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제가 내일부터 14일까지
오일 동안 새벽 묵상 글을 쓸 수가 없답니다. 제 동창신부가 가
있는 미얀마를 다녀옵니다. 동창신부와의 만남 그리고 여러 가지
알아볼 것이 있어서 떠납니다. 아무쪼록 좋은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15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입니다.
몇 년 전, 네덜란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공항
화장실에서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남자 소변기
안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웬 파리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진짜 파리가 아니라 실제 파리 크기와 같은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저의 정확한 조준(?)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님들은 아시겠지만 남자 화장실에 가면 ‘남자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은 아닙니다.’, ‘소변을 흘리지 마세요.’ 등의
문구를 보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닥에 소변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네덜란드 공항에서는 이처럼 변기에
파리 그림을 붙인 결과 주변에 흘린 소변의 양을 80%나 줄일 수
있었답니다. 왜냐하면 변기 안에 그려진 파리를 소변으로 맞추려고
변기 앞으로 바싹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사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디어 하나가 이렇게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생각 하나가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문화를 그리고 사회 전체를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나의 생각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을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소중한 가치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에 쉽게 포기하고
좌절 속에 빠집니다.
사실 나의 참된 가치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양발이
짝짝이라서 마라토너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던 이봉주
선수를 아십니까? 그는 다른 발 크기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발 크기요?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마라톤을 포기하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할 수 없다는 이유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은 소중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음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대해
전해줍니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면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지요. 그가 이렇게 큰일에 대해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준비하는 사명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가 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맞이하고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는 사명이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비록 그 옛날처럼 광야에 나가 세례를 받으라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기쁜 소식을 나의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벌써 2개의 대림초에 불이 켜졌습니다. 4개의 대림초에
불이 다 켜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이렇게 성탄을
맞이하는구나.’라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공이란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자신이 그
일을 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것이다(마야 안젤루).
어떤 마음이 중요한 지를 가르쳐주신 김민식 시인.
‘작은 움직임’(김민식)
내게는 아주 힘든 시절이 있었다.
나를 내 안에 가두어 버린 그 시절.
그때는 그저 사는 게 조금씩 죽어가는 나를 바라보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내 안에 작은 움직임이 생겼다.
스무 살이면 죽을 거라는 그 말은 그저 거짓이었다.
그 거짓을 깨닫는 순간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시를 쓴 김민식 시인은 스물여덟이라는 짧은 생을 뒤로 하고,
2010년 1월 1일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시인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1살 때, 온 몸의 근육이 차츰 마비되다 결국 심장근육 마저
마비가 되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근 디스트로피’라는
일종의 근육 마비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9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는 의사들이
기적이라고 했을 만큼 기대수명에서 8년을 더 살아냈다고 합니다.
바로 위의 시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온 몸의 근육들이
하나 둘씩 굳어가면서도, 보이지 않는 가치인 ‘사랑, 희망, 기쁨’
등을 이야기하면서 기적과 같은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김민식 시인을 보면서 모든 일은 분명히 마음에서 시작함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삶을 이루겠다면 첫 번째 이 마음먹기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그리고 온갖
갈등과 고통 시련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풀어 보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에서 문제 해결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김민식 시인이 보여주었던 마음먹기. 우리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의 광야를 넓혀주시어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오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유년사화(루카 2,41-52)를 전前 문맥으로 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은 예수님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구원역사의 중심이 되는 한편, 세계사 안에서도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2,1-2; 사도 26,26 참조)
루카는 이 시대의 시작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 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라고 장엄하고도 상세히 선언합니다.(루카 3,1-2ㄱ) 로마 정치가와
유다 종교가들을 연관시켜 명시하는 이 선언은 예수님 시대에 선포된
구원의 복음이 유다인들의 영역을 넘어서 이방인들의 영역까지도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는 구원의 보편주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습니다.”(2ㄴ절) 일찍이 즈카르야 부부는 아기를
가질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많은 노부부였으며, 본디 엘리사벳은
석녀였습니다.(1,7.18)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노부부한테 잉태된
아기는 태중에서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소명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사명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1,12-17.76-77 ; 말라 3,23 참조)
그런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기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루카 1,80)
이스라엘 사람한테 광야는 생활의 근거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구원역사 안에서도 익숙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유혹을
당하기도 했지만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지냈던 시간들을
하느님과의 약혼 시절로 표현했습니다.(호세 2,16-17) 이처럼 광야는
죄의 유혹과 하느님의 체험이라는 이중적 구조 안에서 정화의 장소요
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입니다.(9,10) 광야의 조건은 고독과 극기를
불러오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하고 신뢰하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런 광야생활에서 하느님으로만 채워진 요한한테 ‘하느님 말씀’이
내린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은 요한의 첫 번째 활동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루카 3,3) ‘선포’, ‘선포하다’라는 것은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보낸 사람의 이름으로 중요한 내용을 공포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재림을 외쳤으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공포했습니다.
‘죄의 행위’로 인해 하느님과 등진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서는
방향전환이 ‘회개’라면, ‘세례’는 사람이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런 요한의 활동을 루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라고 합니다.(4ㄱ절) 마태오와 마르코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이미 예견되고 약속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반면, 루카는 구약의 사건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선포하는 세례자 요한은 우리 영혼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4ㄴ절) 그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마음과 마음의 골이 깊은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교만과 욕심으로 하늘을 찌르는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미움과 시기로 이리저리 비뚤어지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허세로 지친 영혼의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하고 외칩니다.(4-5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
곧 ‘예수님’을 보게 되리라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며(6절)
우리네 마음에 주님이 오시도록 모든 장애물을 없애고, 넓고 곧은
길을 내라고 촉구합니다.
묵상 (Meditatio)
세례자 요한, 그분은 저한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
합니다.(3ㄴ절) 회개가 저한테 의미하는 것은 눈을 들어 하느님께 가는
길을 멀리 보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한테 묶일 때 펼쳐진 손은 내 유익을
위해서, 열린 마음에는 타협이, 내어놓은 시간에는 편애가 따랐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그런 저 자신을 거슬러 오직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서보라는 도전과 결단의 요청입니다. 주님 목소리에 제 마음의
내비게이션을 맞추고 주님을 맞이하고자 합니다. 굽고 거친 언덕과
산을 넘다가 비록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해도 제 삶이 주님의 길과
맞닿아 있는 한, 그 길의 끝은 주님 대전이라고 믿으며 오늘도 주님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기도 (Oratio)
오늘 너희가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편 95,7ㄷ-8ㄱ)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
◈ [기타] 동참합시다.
2012년 다해 12월9일 대림 제2주일(루카 복음 3장 1~6절)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요즘 눈이 참 많이 왔는데요. 성당 눈은 누가 치워야 할까요?
신자분들이 각자의 집 앞을 치우는 것처럼, 살고 있는 제가 치워야겠죠.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너무 많아서 부담이 됩니다. 또 신자들
생각도 납니다. ‘공동체인데 전화라도 해서 성당은 어떤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와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도와 달라~’ 고 문자를 넣어 봐도
될 텐데, 신자들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나쁜 마음이 듭니다.
‘아무도 안 오면 삐질 테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눈을 치우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운동도 못 했는데, 운동
하는 샘 치지 뭐..’ 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작업을 해 나갑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금방 할 수 있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습니다.
해 지기 전에 하기 힘들 거 같습니다. 걱정이 되기 시작하지만 이런저런
생각하면 작업을 계속 할 수 없을 거 같아 생각 없이 몸을 움직입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형제님 한 분이 올라오셨습니다. 한 분이
더 오시니까 일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해질녘에 작업이 끝났는데,
끝내면서 ‘형제님 안 오셨으면 못 끝낼 뻔했다..’ 는 생각이 들면서
다행이고, 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다른 형제님이 뒤쪽 길을 치워놓고 내려가신
흔적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전 오후에 또 눈이 왔는데, 저는 마음속으로 ‘내일 또 눈이
온다니까 오늘은 치우지 말자.. 어차피 공소 미사여서 성당에 올라올
사람도 없으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후에 눈 치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가보니 형제님 한 분이 눈을 치우고 계십니다. 저희 본당은
길이 긴데 거의 다 하고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금) 눈이 또 많이 왔습니다. 종일 흐리고 수시로 눈이
와서 그 날은 치울 생각을 안 했습니다. ‘토요일에나 신자들 불러서
같이 해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누군가
눈을 치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몇 분의 형제님에게도 문자를
보내어서 같이 눈을 치웠습니다. 이번에는 트랙터까지 동원되어서
쌓여있는 눈들도 가볍게 치울 수 있었습니다.
삼일간의 긴 작업(?)이었는데요. 그 작업을 하면서 ‘공동체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할 수 있다는 걸 체험하는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서는 힘들지만 여럿이 함께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말씀이 이렇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까 중국에서 서울 면적 두 배 만한 크기의 땅을
정리 한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산들을 깎아서 옮긴다고 하는데요.
그 비용이 3조원이나 든다고 합니다. 엄청나죠?
그런데 그 비슷한 일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메우고,
곧게 하고, 평탄하게 만들라고 하시는데요. 그 일들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함께 하지 않으면 이루어내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지금 성가대가 미사 전에 모여서 성가 연습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연습에 나오지 않거나 한참 늦게 나온다면
어떨까요?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또 본당에
작업이 있고 봉사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힘들어서 아무도 모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또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서지 않고 뒷짐만 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어떤 준비도 어려울 겁니다.
적극적인 참여와 고생이 있어야 주님의 오심을 준비할 수 있고, 또
나 혼자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모습들을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한
거 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주저하지 말고 함께 합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구역미사를 하고 밥을 먹는데 연세가 많으신 한 자매님이
어린 손자들이 할아버지를 굉장히 따른다면서 이런이야기를 하신다.
“얘들이 할아버지 오면 할아버지 또 언제와.. 하고 물어본다.
그래서 내일 또 올까.. 하면, 아이들이 매일 매일 오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네들 생각은 그래도 네 엄마 생각은 그렇지
않을걸...’”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생명의 신비(루카 3, 1-6)
2012년 다해 12월9일 대림 제2주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생명의 신비(루카 3, 1-6)
세상 만물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끊임없이 돌보시며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사람에게 하느님 창조 사업을 이어가게 하시고, 돌보게 하신 하느님,
저희들이 진정으로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여주소서.
세상에는 매일 수십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난으로 굶주려
죽어가고, 전쟁과 폭력과 사고로 죽어가고, 낙태로 인해서 매일
수십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낙태는 아무런 저항도 피신도 할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인간에게 그 생명의 권리를 빼앗는 살인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의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기보다 귀찮아하고, 불필요하다 하며,
경제적인 이유나 안락한 삶에 대한 이유로 낙태를 시켜버립니다.
주님!
부모가 자녀를 죽이는 이런 세대에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죄들은 가정의 분열과 사회의 분열로 이어져서,
수많은 가정이 해체되거나 해체의 위험 중에 놓이고,
갈수록 폭력이 심각해지는 사회로 변하여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
서로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절제할 수 있는
은총도 내려주소서. 사랑은 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어찌
참된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에는 놀랍게도 생명을 창조하는 힘이 있어서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생명을 잉태하게 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와 같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절제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소서. 그리하여 응급피임약이나 인공수정 또한 낙태를
유발시키는 것임을 깨닫게 하여주소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랑을 매매하는 일들이 사라지게 하여주소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려운 환경이나 쉽게 돈을 벌기 위하여
매매춘을 감행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욕정과 쾌락을
성취하기 위해 금전으로 성을 사고팔고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어찌 사랑의 하느님께서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사랑의 주님!
성탄을 준비하며 저희 안에 참된 사랑이 자리하게 하여주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참된 회개를 하고, 참된 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주님께서 저희 안에서 사랑과 평화와 기쁨으로 탄생함을 느끼고
깨닫게 하여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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