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보내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보낼 사람에게 보내자는 얘기입니다. 성탄절카드보내기가 이미 교인들끼리의 인사치레가 되어버려서, 원래의 성탄의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도구로 이해되지 않게 된 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아예 성탄절기 자체를 부인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적극적인 대안없이 비판하고 부인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게 보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회당제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역하실 때에 회당을 이용하셨고, 그것은 바울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탄절기가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복음이 증거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카드를 담임목사에게는 보내지 맙시다(정말 저에게는 보내지 마십시오. 답장까지 하려면 너무 힘듭니다. 답장이 없다고 사랑이 없는 목사라고 욕하지 마십시오). 장로님께도 보내지 맙시다. 권사님들, 집사님들께도 보내지 맙시다. 보내실려면, 교회밖에 사람들에게 보냅시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소외된 사람들에게 보냅시다. 최근에 나온 사람들, 교회의 사찰일을 보는 분(그런 사람이 있다면)들에게 보냅시다. 길가의 구걸하는 이들에게 지폐 한 두 장 넣어서 성탄카드를 전달해 봅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따스한 미소와 함께 전달하는 그 카드에 예수님의 사랑이 담기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정말로 카드는 보내지 맙시다. 이미 성탄절이 상업화되어서, 성탄절은 백화점에서부터 오기 시작한 지가 오랩니다. 그러니, 절대 카드를 보내지 맙시다. 상업주의에 편승하지 말잔 얘기입니다. 이 일로 이익을 남기는 이들에겐 죄송한 얘기이지만, 경건으로 자기 이익을 삼는 자들이 많아지는 것이 말세의 한 징조라고 사도 바울은 얘기했습니다. 카드를 보낼려면, 직접 카드를 제작해서 보냅시다. 없는 솜씨로 카드를 그려 볼려고 하는 그 마음 속에 이미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그림솜씨가 없다면, 오히려 조그만 엽서에 사랑의 관심을 담은 몇 자의 글귀가 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겉의 장식은 화려하고, 예술적이겠지만, 그 안엔 복제된 인사말들이 담겨있는 그런 카드를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카드를 보내시려고 하십니까? 구체적으로 할 말은 그리 없고, 그러면서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이번 성탄절카드를 주고받지 맙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인사카드는 연하장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전자메일카드로도 성탄절카드 보내지 맙시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카드들 때문에 메일박스가 꽉 차버려서 정작 받아야 할 메일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안보내는 것 보다 못합니다. 제발 제발 전자메일카드 사양합니다. 저도 안보낼 것입니다.
무슨 파격적인 얘기를 하면서 눈에 띄이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왜 “생명”의 부활절에 “죽은” 달걀을 받아야 하는 지, 오래 전부터 고민했었습니다. 왜 상업화되어 버린 성탄절기 앞에 교회는 무력해야만 하는 지 고민해 왔었습니다. 야웨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이지만, 그 이름 뒤에는 “맘몬”의 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 지 그 무력함을 분석해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단하고 거창하게 이 글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소박하게, 한 가지를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지 맙시다. 아니, 꼭 보내야 할 사람, 꼭 복음을 들어야 할 바로 그 사람에게 우리의 카드를 보냅니다. 지금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아니, 복음이란 말은 수없이 들어도, 사랑으로 그 복음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이 세대에, 우리의 카드가, 우리의 돈이, 진정 그 사랑을 담아내는 이번 성탄절기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손성은)
첫댓글 감사합니다.^^
가슴에 깊이 와 닿은 글을 읽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받자 마자 버리는 인쇄된 카드 너무 낭비입니다. 차라리 손으로 쓴 따뜻한 한 줄 글이 담긴 엽서가 그립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에게 카드를 보냅시다. 옳소!!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