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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4 장
어둠의 저편 (3)
(출4:2-4)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이게 이스라엘을 훈육하여 인도해 낼 지팡이이다. 야곱이 죽을 때까지 평생 짚고 다니던 하나님이라는 지팡이)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른 지팡이가 되었다. / ‘잡다’ = [‘하자크’ = 묶다, 정복하다, 그래서 치유하다] -> 뱀의 꼬리를 묶고 정복하여 뱀의 머리로 치유하다. / 모세에게 그 치유하는 지팡이를 갖고 가라 하시는 것이다. / 모세가 갔더니 그 뱀이, 그 지팡이가 애굽 술사들의 뱀(지팡이)을 먹어버렸다. 그것으로 진리를 알면 뱀이 나쁜 것인가? -> 어떤 이들에게는 그 예수의 오심이 무시무시한 살육의 뱀으로, 심판의 뱀으로 오시는 것이다.
그런데 메리 크리스마스가 웬 말? 자기가 도륙되는 현장인데 온 세상이 잔치를 벌인다. / 우리는 왜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안 모이느냐고 한다. 아 그래. 삼삼오오 모여서 노셔. 왜 교회의 행사로 그런 걸 해? 교회가 크리스마스와 무슨 상관이 있어? // 원래 콘스탄틴 대제가 ‘우리도 예수를 기념할 날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수백 년 동안 태양신의 축일로 지켜오던 날이 며칠이지? 12월 25일! 아, 그래! 그날을 성탄절로 해!’ 그래서 성탄절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온 세상이 그날에 그 난리 잔치를 벌여? 크리스마스 트리에 동그란 장식 달아 놓은 것이 태양신의 상징이다. / 태양신의 축일에 참 빛은 잊어버리고 모형으로 준 태양을 기념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다. 교회는 그걸 빌미 삼아 또 한몫 챙기고. / 동료 목사들하고 만나면 늘 성탄절 이슈로 부딪힌다. ‘하나님의 탄생과 부활이 너희들 돈 거두라고 우리에게 준 거야?’ 기념하는 날 많이 만들어서 돈 많이 걷으면 좋겠지? 우린 안 그래. / 그래서 우리는 대목은 다 놓치고 맨날 적자다.
크리스마스 날은 그렇게 해서 정해졌는데 기독교의 표식은 또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것도 역시 콘스탄틴 대제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것으로 만들자고 해서 태양신의 표식인 ‘♀’을 따서 만들었다. 이것은 신상(十) 위에 태양(○)을 올려놓은 것이다. / 거기에서 나치 문양도 나오고 불교의 만(卍)자도 나오고 앵커(♂) 같은 모양도 나왔다. /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그 시대의 신상들은 항상 태양 표식(☥)을 달아 놓았고 그게 십자가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머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애굽의 신, 라(Rha)의 신화와 똑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희들이 가장 잘 아는 것으로 복음을 설명해 줄게!’하고 그 신화에 비겨서 구원이 뭔지, 진리가 뭔지를 설명하신 것이다. / 애굽의 태양신 ‘라(Rha)’는 애굽인들에게도 인식이 불가능한 신이었다. 그걸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멤피스의 ‘소’이다.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와서 신을 만들라 했을 때, 그들이 430년 동안 본 게 그것밖에 없었기에, 소를 만든 것은 당연하다.
그 신화의 시나리오는 이러하다. // 태양신 ‘라’를 대적하는 땅의 신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게 땅속에 사는 ‘큰 뱀’이었다. 그래서 태양신 ‘라’가 그를 대적하는 (대적자=사단) 사단을 죽이려고 양으로 내려온다. / 그 양을 그 ‘큰 뱀’에게 인도하여 내려가는 양의 대변자가 뱀이다. 그 뱀이 내려가서 그 ‘큰 뱀’을 세 토막으로 베어서 죽이고 땅에 평화가 온다. // 그 시나리오의 맥락을 따라 예수님이 양으로 오신 것이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게 그 신화이니 내가 그 진리, 그 평화, 그 안식을 그걸로 설명해 주겠다.’ 하고 양, 뱀 이런 것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적으로서의 ‘용’이나 ‘뱀’은 진리로 이해되지 못한 율법으로서의 성전, 예수, 성경, 세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걸 바다라고도 하고, 어둠, 깊음, 저녁, 밤, 죄라고도 한다. /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서 ‘진리의 영으로 당신의 택한 백성들 안에 들어가라’ 하신다. ‘씨를 심고 죽어라. 들어가라.’ 하시는 것이다. / ‘아래 것’들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심으로 그들을 그 아래 뱀의 자리, 바다의 용의 자리, 무저갱 속의 그 짐승의 자리에서 건져내 주시는 게 구원이다.
그렇게 해서 눈이 떠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에 비로소 진리로서의 [성경, 성전, 예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사단, 바다, 어두움, 죄, 악, 선, 밤 이런 것과 무관하게 하늘의 존재로 살 수 있다. 그걸 ‘용서(容恕)’라고 한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바울> 그걸 아는 이들에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느냐? 우리를 대적하게 하려고 주시는 것들이 있겠느냐? 다 선물이야. 심지어 (조심스럽지만) 네 죄도 선물이야! 그것 없이, 선악과 없이 어떻게 생명나무를 알아?
내가 한 십 년간 단계를 밟아 오면서 성경 강해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가서 ‘사실은 선악과가, 죄가 우리에게 선물이다.’ 하고 전하면 큰일 난다. / 여러분은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계에 왔을 때 그 진리를 설명해야 한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을까? 여러분이 그 설명을 들을 만한 준비가 빨리 되어야 그걸 설명해 줄 텐데 ….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 /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아, 그렇구나! 어둠의 저편에는 그 진리, 그 빛이 있구나!’하고 말하면 그들이 우리를 뭐라고 할까? 우리의 주인은 바알세불이고, 우리도 사단이라고 할 것이다.
(마10:25-26)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상전=master. 그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껍데기만 보는 자들은 너희들을 바알세불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 껍데기가 벗겨질 날이 온다.’ /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빛으로 말하고,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성전 위의 것으로 얘기해! 그러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 감추인 것이 드러나게 된다!’ / 숨은 것은 반드시 그 내용으로 알려지게 되어 있다. / 껍데기로만 보는 율법주의자들은 그 내용들이 환하게 드러날 때 사단의 무리가 된다. 대적자의 무리가 된다. 그러면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들이 어디에 있나? 모두 다 예배당 안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성소에서부터 심판한다 하셨다. /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들이 왜 절에 가 있어? 교회에 와 있지. 그리스도가 왜 절에 가 있어? 거기는 석가모니가 있지. 앤타이 크라이스트(Anti-Christ), 거짓 선지자, 거짓말하는 마귀의 자손들 그들은 다 여기 예배당 안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성소에서부터 심판한다.’ 하셨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아래의 것으로 말씀해 놓으신 것(주님의 말씀)을 빛으로 말해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고민 좀 해봐야 한다. / 사실 그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 관심이 없다. 목숨에는 관심이 많은데 진짜 참 생명에는 관심이 없다. / 어두운 것을 가지고 빛을, 광명을 이야기해 주는 자들을 ‘별’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성전을, 세상을 어둠이라고 하셨다. 똑같은 성전인데 그게 뭔지를 알면 그걸 ‘빛’이라고 한다. / 그러면 그 사람은 어두움을 보고 ‘이게 빛이네!’라고 알게 된다. / 어두움 안에, 이 육신 안에 사는데, ‘내’가 뭔지를 알았다. 그러면 내가 빛이다. 그래서 ‘네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을 비추어라’ 하시는 것이다. / 대단한 무엇을 보았고, 여기에 대단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을 비추는 자들을 [광명, 별, ‘코카’]라고 한다.
(단12:1-3)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미가엘=전쟁하는 하나님.)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책=생명책, 성경. / 그게 ‘내 이야기’가 되면 그게 나에 대해서 녹명된 것이니까 구원받는다. 그런데 그게 예수의 이야기이면 그건 내 책이 아니니 내 심판의 책이 된다. 그것은 책들이 된다. 성경 66권.) 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아담 = ‘사람’ / 개역성경은 아담을 그냥 땅, 흙으로 번역해서 그런데 우리가 아담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진리가 된 자’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우리를 ‘말씀’이라고 한다. ‘너희는 말씀이다.’ // 아담은 ‘아다마’에서 유래한다. / 하나님이 구별한 진리를 소리로 내는데 이 소리에서 진리가 된 자들이 나온다. / ‘아다마’는 ‘아파르’로 만드셨다. [아파르’=‘티끌, 먼지, 모래’] / 이 [‘아다마’, 땅, 흙]에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데 중간에 ‘아파르, 티끌’로 만들어 낸다. // [‘티끌, 아파르’] = ‘아래 것, 성전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 = 율법. / 아래 것 : 성전, 입, 말 / ‘땅’에서 아담을 만들어 내려고 율법을 주셨다. 율법 = 티끌, 먼지, 모래. / 예수님: ‘너희들이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안 받아들이면 그냥 먼지로 떨어버려. (그들은 율법이니까) / 그들은 ‘아파르’야! 사람으로 못 갔어!’라는 얘기이다.
이 율법(모래)에다가 집을(성전)을 지으면 무너진다. 여기에 집을 지으면 안 된다.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진짜 성전이다. / ‘내가 바로 이 티끌, 먼지였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물을 받아 이 티끌, 먼지에 물을 대주면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사람‘이 된다. (티끌, 먼지)에 물을 대어주지 않으면 죽는다. / 하나님이 ‘내가 너희들에게 비를 모래같이 내릴 거야’ 하신다. 그러면 죽는다. 율법으로 내려오면 죽는다. / 땅에서 먼지를, 티끌을 모아 주물럭주물럭해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땅, 흙, 티끌, 먼지, 모래, 율법] 안에서도 복음을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 먼지, 모래, ‘아파르’에 머물면 죽는다. 여러분은 별인가? 아니면 별인 척하는 가짜 30촉짜리 전구인가? / 그렇게 복음을 발견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 여건, 스펙 등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왜 남의 눈에 비친 ‘나’, 남이 평가해 주는 그 ‘나’로 슬퍼하고 기뻐하나? 남들이 나를 좀 거시기하게 보면 어때? 적어도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여러 해 공부했으니 이제 조금씩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왜 교회에서 복수를 하고, 왜 당회에서 싸움박질이 일어나? ‘왜 네가 나를 물로 보냐?’ 이거다. 남이 나를 물로 봐주는 것만도 다행이다.
내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떠한 존재로 비추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 안에 그 진리, 그 생명이 있으면, 그 복음, 그 말씀이 있으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아들은 [호 코스모스, 온 세상]보다, 천하보다 귀하다’ 하신다. 그 밖의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다 태워버릴 것이니까. / 소품들이 하는 이야기에 절망하고 슬퍼하지 말라. 그들은 땔감들이다. 나중에 우리를 후끈후끈하게, 천국을 따뜻하게 해줄 땔감들. 그들의 시선이나 평가가 중요하지 않다. / 왜 나의 과거가 부끄럽고 창피하고, 더럽고, 추하고, 비루하고, 감추고 싶은 것이 되어야 하나? 그것으로 내가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그게 하나님의 [‘크라조마이, 선물’]이다. / 무엇 때문에 미래의 일을 걱정해? 사후가 준비되어 있다는데 뭣 하러 노후를 걱정해? 사후가 불안하니까, 불확실하니까 노후라도 어떻게 해보려는 거지.
과거와 미래에 묶이면 현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늘 불행할 수밖에 없다. / ‘그게 되면 나는 행복할 거야! 그것만 이루어지면 난 행복할 거야!’ -> 그것은 지금 나는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이루어지면 또다시 이룰 새로운 미래가 나타난다. 그래서 만족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평생을 불안에 덜덜 떨다가, 조바심 내다가, 록펠러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죽는 것이다. / 속으로 ‘아따 그 사람, 그거 누리면서 잘 살다 가면 되지!’ 하겠지만 그렇게 한 일주일만 놀아보라. 그게 정말 재미있는지. / ‘아, 그래도 한 번 놀아나 봤으면 좋겠다.’ 속으로 그러겠지. 그러나 그것도 곧 고통으로 변한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맞는 말...)
하나님 말씀, 진리에 의하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현재에 만족할 수 없다. 여러분이 걱정하는 미래가 여러분의 뜻대로 이루어져도 여러분은 행복하지 않다. 잠깐! 잠깐! ‘행복을 맛 보았지...’ 이렇게 너스레를 떨 수 있는 그 시간, 그 찰나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이루어야 할 더 낳은 삶, 새로운 삶이 나타난다. 시선이 또다시 그리로 옮겨지면 또 불안에 빠진다. 뭣 하러 그렇게 사는가? 그런 삶은 단 한 순간도 안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다른 평안, 평강을 주셨다. 여러분은 현재에서 그걸 누려야 한다. 지금을, 현재를 사셔라. 과거가 어땠으면 어떻고, 미래가 어떻게 다가올 것이면 그게 왜 걱정인가? 지금 현재를 그냥 행복하게 한 발, 한 발 잘 살면 된다.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사건들을 묵시와 진리 속에서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어둠의 저편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의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시간과 사건에 무관하게 사는 진짜 하늘의 사람들이 된다. 사건에 묶여버리면 여러분은 땅의 사람이다. 그걸 지옥이라고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이 정도의 수준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이 정도의 학벌과 이 정도의 교양, 이 정도의 외모, 이런 것이 되면 나는 비로소 행복할 거야? 그게 진짜 그렇게 되나 보라. 천만의 말씀이다! 그때까지 늘 불행하게 불안하게 살게 된다. / 지금 나에게 주신 그 사람이 나의 선을 이루는데 가장 적합한 친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다. 현재의 그 자리에서 그를 사랑하면 된다! 그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자이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건 말건 ‘너희들이 데리고 살 것 아니면 참견하지 마!’ / 우리는 남의 시선에 비추어지는 나의 스펙을 내가 걱정하고 있다. 왜? 사실은 그게 ‘나’이기 때문이다. 사악한 인간들이다. 다른 사람 찾아봐야 다 그게 그것이다. 인간이 어디 가나? 현재! 그 현재를 살아가셔라. 가장 가까운 여러분의 벗, 그 친구, 그가 여러분의 반쪽이다. 지금 그 사람으로 행복을 누리고, 앞으로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그 사람은 기대하지 말라.
어둠의 저편, 가난 너머의 그 풍요를 보아야 한다. 질병 너머의 그 치유를 보아야 한다. 고난 너머의 그 천국을 보아야 한다. 거기에 자유가 있고 거기에 안식이 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정말 축복이요 선물인가? 아니면 무서운 뱀의 출현인가? 제발 알고들 흥분하자. 왜 남의 생일에 남들이 논다고 자기들이 들떠서 술 먹고 그래?
다음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을, 율법을, 세상을 바알세불로 이해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요한계시록과 창세기를 넘나들며 결론지을 것이다.
<기도>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하시는데 무엇이 나를 대적하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이 나를 대적하라고 주신 것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다 선(善)의 재료입니다. 그 주신 것들을 온 맘 다해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