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성철스님'을 읽고
도서관을 드나들며 서가에 꼿힌 성철스님에 관한 책을 보았다. 성철스님, 내가 좋아하는 산,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란 지극히 평범한 명언을 남기셨고, 10년동안 절간을 철조망을 치고 살며, 앉아서 잠을 자고, 그를 만나려면 3000배를 해야 함에도 줄을 섰다는 전설같은...
사람들은 자신과 믿음의 영역이 틀리면 금기시하고, 죄악시 여긴다. 불문하고 '소설 성철스님'을 대출 받아 읽었다. 불교에 관한 기본 상식도 없고, 스님에 관한 일화는 예전부터 많이 들어 자칫 이야기 잘못 꺼내면 식상해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내용 부분 부분을 옮겨오다보니 연결이 어색하다.
내가 이즘에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며, 나의 생각을 덧붙이는 것은 결코 종교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나이듬의 내 자신을 돌아보고, 겁외사에 대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겁외사', 성철스님이 열반(涅槃) 하시고 얼마후 그의 고향 옛 생가터에 지어진 사찰이다. 사찰이름은 '세속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와 함께한다'는 뜻을 담았다.
오래전 나는 그곳을 많이 지나쳤고, 부근에서 잠시 쉬었다. 즐겨하던 지리산 등산을 가거나, 동료들과 시외 나들이를 할때면 거쳐가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을 지날때마다 친근감이 느껴졌다. 스님 또래 나의 아버지께서 한해 일찍 태어나셨고, 한해 뒤에 돌아가셨다. 스님의 본관이 합천 이씨여서 처가의 본관과 같아 언젠가 처가에서 스님 이야기를 나눈적도 있었다. 그래서 뭔가 당기는게 있었나 보다.
스님은 1912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 이씨 영남 유림의 종장가문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만석꾼으로 생활엔 부족함이 없었다.
스님은 단성초등학교와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진학을 하지않고, 독학을 하였다고 한다. 후에 일본으로 공부를 하려 떠났으나 이내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장남이라 14세때 세살위의 여자와 결혼을 했고, 딸 둘을 낳았다. 아내가 둘째 딸을 임신하여 아홉달 만삭이 되었을때도 산청군 대원사에 머물러 수행을 하였다는 이야기와 17세때 합천 해인사에 입도(入道)하여 성철이란 법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소설의 내용과 다른 기록이 차이 나는 부분이 있어 여기서 확정하여 말하는건 그런 것 같다.
그는 출가전 독학을 하며 많은 책을 읽었고, 책귀신이란 소리를 들었다. 쌀 한가마니를 주고 도교 유학생에게서 '순수이성비판'을 샀고, 서유기, 삼국지, 행복론, 실천이성비판,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신구약 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을 읽었다.
그런데 소득이 별로 없었다. 어느 책에서도 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근본적인 대답을 시원하게 해주지 않았다. 당시는 일제치하라 망해가는 나라를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인가, 하는 의문에 관한 대답도 없었다. 그러한 그가 불교쪽으로 관심을 쏟게된 것은 어머니가 절간을 드나드셨고, 스님들과의 교류가 많았던 영향이 큰 것 같다.
그가 해인사 백련암에 입산하여 동산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동산스님의 스승은 만공스님, 만공스님의 스승은 경허스님이다.
한번은 스승인 동산스님이 성철스님과 나머지 두 스님에게 보시를 명했다. 성철스님은 부자동네에서 많이 받았고, 두 스님은 가난한 동네라 양이 적었다. 결과를 보신 동산스님은 호통을 치며 보시를 다시 돌려주고 오라고 했다. 밤중에 마을로 내려가니 보시를 한 사람들이 줘도 못먹느냐는 쪼로 투덜거렸다.
동산스님의 말은 이랬다. "항상 그들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린다음 너희들의 마음이란걸 알게하며, 결코 그들 스스로 황송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감사의 눈물일 것 같으나 실상 오늘 자신이 받은 업보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다. 그러므로 결코 그들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 또한 보시자는 보시받는 그들을 부처의 마음으로 대하고, 오로지 곧은 마음으로 보시할 대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게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시주할 수 있다. 그들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면 그것은 바로 보시자가 보답을 바랐다는 증거이며, 대비의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보시가 아니다."
여기서 시주(施主)는 불교에서 신도들이 스님이나 절에 쌀, 돈 등의 재물을 베풀어 후원하는 행위이고, 보시(布施)는 자비심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물건이나 마음, 가르침 등을 베푸는 불교 용어를 말함인데, 동산스님의 말씀이 참 어렵다.
성철스님 스스로 수도의 여덟가지 계율은, 1. 희생(모든 것), 2. 절속(속가와 절연), 3. 고독, 4. 천대(괄시), 5. 하심(자신을 낮춤), 6. 전념, 7. 노력, 8. 고행(일일부작 일일불식)이다.
그리고 스님이 수행하시며 제자들에게 내린 다섯가지 계율(오계)는 다음과 같다.
> 네시간 이상 자지마라.
> 벙어리가 되어라. 잡담하지 마라.
> 문맹이 되어라. 문자를 보지마라.
> 포식하거나 간식하지 마라.
> 매일 적당한 노동을 하라.
그리고 스님은 부유한 사람이 티를 내는걸 매우 싫어 하셨다. 기도차 온 여자의 밍크코트를 벗겨 불에 던져 경찰서를 가야했고, 또 다른 여자의 비싼 목걸이를 비둘기의 목에 걸어 날려버리셨다. 스님의 행동과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며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클로즈업 된다.
"내가 입멸(入滅)한 후에 어리석은 사람들이 나를 기리기 위해 담벼락이나 돌, 천에 나를 그리거나 돌이나 철 혹은 나무나 흙으로 나의 형상을 만들어 경배한다면 지옥에 떨어지리라. 부디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나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너희들을 가르치러 온 사람일 뿐이다."
스님이 생각하는 윤회의 근본원칙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업에 이끌리는 것이다.
나는 종교를 대할때마다 사람들이 지향하는 숭배의 대상과 구원의 대상을 구분하지 않는지 그게 궁금했다. 아이돌이나 특정 인물에 도취되어 자아를 잊어버리는 경우와 같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스님은 문경 봉암사에서 동료 향곡스님과 함께 무쟁삼매수행에 들었다. 불교정화운동인 것이다.
스님들이 재(齋)를 주도하지 않고, 장삼도 붉은색에서 소박한 괴색으로 바꾸었다. 지팡이 대신 육환장을 들고 삿갓을 쓰게했다. 아침에 조죽을 먹고 점심을 먹지 않는다. 저녁은 불식하거나 약식으로 조금 먹는다. 왕족들이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나무 발우를 금하고 와발우를 사용토록 했다. 그만큼 보시로 내놓은 시주물을 아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지켜야할 공주규약을 만들었다. 일상에 필요한 물건은 스스로 해결토록 했다. 매일 두시간 이상 일을 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외엔 잠을 금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퇴출한다.
엄격한 봉암사 결사의 규칙에 사찰을 떠나는 스님도 있었다. 그러다 6.25전쟁의 발발로 결사는 이어지지 못했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이르자 스님은 통영 안정사 근처 천체굴에 초가를 짓고, 수행에 전념했다.
스님은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통영 천제굴과 팔공산 성진암에서 암자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절문 밖을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철저한 은둔수행인 동구불출(洞口不出)을 하셨다.
해인사 백련암에 머무실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얼굴 뵙기를 청했다. 스님은 자신을 만나려면 3천배를 하라고 하셨다. 자신을 높이려 는게 아니라, 부처님을 먼저 알라는 생각에서였다.
한때 박정희 대통령의 장모가 스님을 찾아 왔다가 노구에 3천배가 힘들어 되돌아 갔고, 후일 박대통령의 만남 요청도 거절했으며, 국정자문을 제의 했으나 끝내 거절하셨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이 의사를 묻지않고 국정자문위원으로 임명했으나 받아 들이지 않으셨다.
1981년 조계종 종정이 되시고도 바깥 세상을 거부하고 계속 백련사 머무셨다. 7대 종정 취임사는 다음과 같으며, 그 유명한 말씀 '산은 산이요'가 여기서 나온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러다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 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스님은 여름에는 삼베옷 한벌, 겨울에는 광목으로된 옷한벌과 바리때 하나가 가진 것 전부였다. 주식은 솔잎과 콩이었다. 여든 나이에도 손수 옷을 기워 입으셨다.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이기에 좋은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고 하셨다. 스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돈, 명예, 권력, 지식을 자랑하지 못했다.
한뼘도 안되는 휴지로 두번을 나누어 쓰시는 바람에 손에 코가 묻기 일수였고, 해우소에서도 손에 변을 묻히는게 다반사였다. 그리고 개울가로 내려가 손을 씻고 올라왔다.
시자(侍者)가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말하자, "운동도 하고 좋지 뭘 그라노. 그라니께 네놈이 돼지 새끼처럼 살만 뒤룩뒤룩 찌는거다" 라고 하셨단다.
모두가 성철스님의 바람대로 산다면 지구온난화의 이상기후도 겪지 않을 것 같다.
성철스님이 앉아서 주무신 수행 방식은 장좌불와(長坐不臥)라고 하며, 장좌불와란 밤에도 자리에 눕지 않고 평생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서만 잠을 자는 치열한 수행법이다.
인간의 깊은 수면욕과 번뇌를 다스리고, 깨달음을 향한 초심을 지키기 위한 극기 훈련으로, 성철스님은 오랜 기간(수십 년) 눕지 않고 이 엄격한 수행을 실천하여 한국 불교의 상징적인 큰스님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도 편안히 누우지 않고 앉은 자세(좌탈)로 입적하셨다. 잠자리에 예민한 나는 감히 스님의 그 수면방법이 항상 부러웠다.
스님의 가르침과 정신은,
> 진리는 멀리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으므로, 밖에서 찾지 말고 참된 본래 면프(마음자리)를 보라고 강조했다.
> 자기를 바로 보는 사람은 타인을 진정으로 위할 수 있으며, 불전에 공양하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가르쳤다.
> 부처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교만함을 버리고 3,000번 절을 하는 '삼천배' 수행을 통해 나를 낮추도록 이끌었다.
> 시간은 자기 생명과도 같다"며 헛되이 보내지 말고 치열하게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가족들의 일생도 순탄하지 않았다. 스님이 출가한 후 큰딸은 열네살에 갑작스레 죽었고, 둘째딸은 대학을 졸업한 후 비구니가 되어 아버지의 제자 인홍스님에게서 머리를 깍았고, 남편과 딸을 찾아 다니던 스님의 세속 부인도 50대 중반에 결국엔 딸이 있던 석남사로 들어가 비구니로 수행하다 몇년 후 생을 마감했다고 하였다.
그러한 내용의 소설 마지막 부분, 성철스님의 말씀과 작가의 글은 이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너무 오래 살았다. 나 이제 갈란다."
"더 살 이유가 없다. 내 할일은 다했다."
'가야산 호랑이는 고향 묵곡리에서 태어나 20대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평생을 수행에 몸 바치다 1993년 11월 4일 82세로 본래대로 돌아갔다.
1993년 11월 10일 다비장에 때늦은 낙엽들이 쏟아졌다. 성철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던 가야산 소나무는 다비장으로 옮겨진 그의 붉은 관이 되었다.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 환한 빛이 피어 올랐다. 드물게 보이는 발광이었다. 다비는 서른 시간이 넘게 걸렸고, 백여 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가 나왔다.
1998년 11월 12일, 백여 과의 사리를 수습해 해인사 운양대 사리탑에 봉안했다.'
추석을 앞두고 거칠어지는 세파속 자원이 고갈되는 현실에서 절약하고, 겸허(謙虛)하며, 모두가 건강하고, 보다 나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