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올리는 일정이 늦어 졌네요...
일정데로 내일 광주 의재미술관에서 11시에 뵙겠습니다
오늘 저녁까지 힘닿는데로 정리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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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회화 흐름
조선 후기(약 1700-1850)은 새로운 경향의 회화를 발전시킨 시대이다.
조선 초기의 회화가 송∙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했던 데 반하여 후기의 회화는 명∙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경향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이룬 조선 후기의 시대적 특성에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실학적 경향으로 우리 주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한국의 산천을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한국인의 생활상을 그리는 풍속화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회화의 조류로는
1. 조선 중기 이래 유행했던 절파계 화풍의 쇠퇴와 남종화 본격적 유행
2.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 진경산수의 대두
3. 풍속화의 풍미
4. 서양화법의 부분적 수용
5. 민화의 유행
등을 들 수 있다.
남종화법은 조선 중기부터 전래되어 있었던 것이나,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조선 후기 부터다
특히 미법산수, 원말시대가, 오파, 동기창, 사왕오운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수용에는 진작이 방작뿐아니라 화보가 큰 역할을 하였다. 보래 남종화는 문인화가들의 사의적 여기화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조선후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널리 유행하였으며 대표적인 화가들로 윤두서, 정선, 강세황, 이인상을 들수 있다.
윤두서는 절파 화풍을 계승하는 보수적인 경항 속에서 소극적으로 남종화풍을 수용하여 새로운 화풍의 태동을 암시하였으며, 겸재 정선능 남종화풍을 더욱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진경산수의 발전을 꾀한다.
정선의 제자였던 심사정 또한 남종화를 위주로 하면서 중년 이후에는 북종화법인 부벽준을 수용하여 절충화풍을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명산승경을 그려낸 진경산수화가 풍미하였다. 실경을 그리는 전통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확립되었지만, 북종화풍으로 그려졌던 이전과는 달리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한국적으로 발전시킨 점이 차이라 하겠다.
진경산수화를 창출한 화가는 바로 겸재 정선으로 그는 주로 금강사 내외경을 많이 그렸다. 금강산을 부감법으로 그려낸 <금강전도>(1734년도제작, 호암미술관 소장)는 피마준의 토산과 수직준의 암산을 대비시켜 다양한 형태를 능숙하게 묘사하였으며, 말년작 <인왕제색도>(1751년작, 호암미술관소장)에서는 더욱 완성된 진경산수화풍을 보여준다. 정선의 화풍은 강희언, 김윤겸, 최북, 김홍도 등 수많은 화가들에게 추종되었다. 특히 강희언은 <인왕산도>(1751년도작, 호암미술관 소장)에서 정선의 화법을 소화하고 서양화법을 가미함으로써 파격적인 진경산수화를 창출하였고, 이외에도 최북의 <표훈사도>(연도미상, 개인소장), 김홍도의 <총석정도>(1795년작, 개인소장)등이 있다. 그러나 진경산수화는 조선말기에 가면 남종화의 지배적 유행으로 인해 쇠퇴하게 된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주요 경향인 풍속화는 18세기 초 윤두서, 조영석, 강희언 등의 일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기 시작하여 김홍도, 신윤복에 가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단원 김홍도는 모든 분야에 뛰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화풍을 풍속화에서 창출하였다. 그는 주로 서민 생활의 단면을 소재로 삼아 능란한 구도와 해학적 분위기로 그림에 담아냄으로서 회화적 역량을 물론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한 자료도 활용되고 있다. 김득신 또한 풍속화에서 단원의 화풍을 잇고 있으며 단원과 쌍벽을 이룬 혜원 신윤복은 단원과 달리 남녀간의 애정 또는 춘의를 즐겨 그렸으며 한량과 기녀들이 소재로 등장한다. 신윤복의 산수표현은 김홍도의 영향이 보이지만 <미인도>(년도미상, 간송미술관소장)와 같은 인물들은 아주 독창적이며, 세련된 색채 또한 두드러진다. 이렇게 발전했던 풍속화도 조선말기에 가면 쇠락한다.
조선후기에는 일부 진보적인 화가들에 의해 음영법이나 원근법 같은 서양화법이 수용되었다. 서양화법의 전래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이미 17세기에는 북경을 통해 부분적으로 나마 아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의 실학적인 경향과 관련하여서도 서양문물의 수용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편 이 시대에는 서민 대중의 회화인 민화가 확산되었다. 그 중에는 화원들에 의해 일월도, 십장생도와 같은 비교적 수준 높은 민화가 제작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도화서 훈련을 받지 않은 화가들이 서민을 위해 그린 것들이다. 이 때문에 민화은 서미의 생활상, 생각, 미의식 등을 반여하게 되었으며, 실용적인 성격 때문에 화첩 보다는 병풍에 많이 그려졌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민화가 유행한 사실은 당시 예술의 댕주화 현상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에는 몇 가지 새로운 경향들이 대두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한국적인 회화가 수준 높게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무르익어 19세기 전반까지 계속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위축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