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진성
제주도 기념물 제29호
제주에는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고 왜선이 자주 정박하여 민가에 피해가 많았으므로 ‘牧’과 ‘縣’에서 관장할 수 있는 진성을 9곳에 구축하였다.
동쪽으로 화북, 조천, 별방, 수산진성
남쪽으로 서귀, 모슬진성
서쪽으로 애월, 명월, 차귀진성이다.
한림읍 동명리와 명월리 하동 사이에 위치한 명월진성은 비양도에 출몰하고 정박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1510년 장림목사께서 목성을 둘렀다. ‘탐라지’에 의하면 동,서,남문 3개의 문이 있었고 그 3개의 문 위에는 각기 1칸이 초루가 있었으며, 성안에는 물(조물)이 있어 가뭄에도 걱정이 없었다. 조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그 한줄기는 지금도 흐르고 있는데 이를 개영(개명)물이라고 한다. 이 개영물 주변 마을 어린이 들은 이곳에서 헤엄을 쳐보지 안한 아이가 없었을 것이다. 필자도 이 물에서 기본적인 개헤엄을 치면서 물과 친숙해졌던 생각이 난다.
현재 과거의 성이 일부(대략 100m) 남아 잇는데 남문에서 대림방향으로 300m 지점 4거리 왼편으로 좁은 골목이 있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보면 바로 보인다. 명월성은 일제치하에서 한림항 , 방파제 구축 공사를 하면서 전부 사용하였다. 제주목성도 산지항 건설을 하면서 바다를 매립하여 사라지게 된 것이다.
1592년 이경록 목사가 나무로 쌓은 성을 고쳐 돌로 구축하였다.
둘레 : 3,050척(1척 30cm)
높이 : 9척
명월진의 군대
만호 : 1명
치종 : 4명
수졸군 : 82명
정성군 : 330명
유직군 : 99명
진리 : 22명
서기 : 30명
총 : 568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2봉수와 7연대를 관할하는데,
봉수 : 도내봉수, 만조봉수
연대 : 귀덕, 우지, 죽도, 마두, 배령, 대포, 두모연대
성벽이 요소에 방어하기 쉽게 치성을 쌓았으며, 성안에는 여러 가지 시설물이 있었다.
성안 시설물
진사 : 3칸
객사 : 3칸
공소 : 2칸
공수 : 2칸
무기고 : 4칸
도청 : 4칸
진고 : 4칸
사령방 : 2칸
청대청 : 3칸
중화청 : 2칸
진졸청 : 3칸착고 : 각 2칸
만호
조선후기 무관직종으로 종 4품 벼슬로 명월진성을 거친 만호는 112명으로 나온다. 현재 남문을 복원하였지만 옛 정취는 없어도 그나마 재현하여 유지보수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며 성 안쪽으로 만호비가 5기 세워 있다. 처음에는 다른 진성과 같이 조방장을 두었다가
1764년 어사 이수봉이 영조대왕께 아뢰어 조방장을 만호로 승격시킨다.
명월진의 서별창 속 내용
곡식 : 3,300여 석
흑각궁, 향각궁, 교자궁, 장전, 환도, 천자총 등 무기가 보관되었으며,
1781년(종조 5) 어사 박천형 찬에 의하면
이 지역은 비옥한 농토와 해산물이 풍부하여 인심이 넉넉하고 9진 중 으뜸이라고 하였다.
이경록과 이순신
절해고도 제주에는 조선조 목사가 286명이 재직하였다.
원악도이기 때문에 왜구가 종종 출몰하기에 문과보다는 무관 목사들이 많이 재직하였으며 목사가 무관일 때는 판관은 문관으로 대치하기도 하여 행정을 원활히 한다.
이경록(1543~1599)
이순신(1545~1598)
둘은 모두 서른살이 넘긴 나이에 무관에 급제하였고, 함경도 국경지역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1687년(순조 20) 이경록은 종 3품인 경흥부사로 3단계를 넘어 부임한다.
후일 이경록은 경흥부를 포함한 함경도 북방 방위의 총책임자인 종2품 병마절도사가 된다.
어디에도 적은 있다. 이일목사가 이경록 하는 일과 이순신 하는 일이 못마땅하여 위험할 때마다 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한다. 그러다 조선군인이 왜구들에게 여럿 죽자 그 책임을 두 장수에게 전갈하며 회피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두 장수는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이 때 이순신은 부친상을 당해 3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진급이 이경록 보다 늦어진 것이다.
1591년 2월
이경록은 나주목사, 성윤문은 갑산부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명한다. 전라도 좌군을 총 지휘하는 수군절도사인 전라 좌수사의 직책은 정 3품 당상관직이다. 이경록이 나주부사로 재직 시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왕이 피난 하는 상황에서 김천일 장군과 함께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린다. 이러할 즈음 조정에서는 기병 500명을 뽑아 제주에 원병으로 보냈다.
1592년 2월
이경록은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599년 초반까지 재직하다 돌아가셨다.(최장수 목사)
이경록 목사는 부임하자 제주성 밖에 도랑을 파고 성 위에 制勝亭(제승정)을 짓는 등 군사시설을 정비하고 명월성을 석성으로 구축, 바다를 건너오는 왜군들과 싸울 준비로 병력들을 훈련시킨다.
허나 선조실록에는
제주목사 이경록이 치계하기를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힘을 합쳐 토벌하고자 조정의 허명을 청합니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온전한 것은 왜적이 침임이 없었기 때문이고, 만약 섬에 왜적이 침입 했다면 섬 사람으로만은 방어가 어려웠다 하니 임금은 그대로 따랐다. 이경록은 임란 중에 부친상을 당하지만 제주를 떠나지 못하고 성산에 성을 쌓던 중 병으로 1599년 초 제주에서 돌아가신다.
광해군 일기에
이경록 목사 이전과 이후에 부정과 비리로 많은 관료들이 파직되었다.
이계 판관은 이경록 목사의 죽음에 조의는커녕 술판을 벌여 도민을 침해, 학대하였다.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성윤문 목사가 이계선 판관 후임에는 이정생 판관이 도임했는데 기생 한명을 두고 싸우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고, 이정생 판관 후임에는 안극효는 술에 취해 망명된 행동을 하게 되고 법을 거긴 차 가족을 데려다 살면서 온갖 민폐를 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