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난 달 암호화폐의 발행및 유통, 투자 기능은 인정하되 지불 결제 기능은 금지한 '디지털금융자산법(DFA)'을 통과시켰다. 이어 3일부터 '전자 지갑'의 익명 서비스를 금지했다. 암호화폐의 불법 사용을 막고, 유통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의 DFA법안은 지난 3일 푸틴 대통령의 최종 서명을 거쳐 내년 1월 1일 시행에 들어간다. 이 법안은 암호화폐의 발행및 유통 등 모든 관련 활동을 감독하는 전권을 중앙은행에게 부여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자국인이 구입가능한 암호화폐를 결정하고, 발행업체와 거래소에 대해 활동 중지 등 제한조치를 내릴 수도 있다.
또 1년간 시행을 보류해온 '온라인 월렛의 익명 서비스 금지 법안'이 3일부터 전격 발효됐다. 흔히 '전자지갑'이라고 불리는 '온라인 월렛'은 페이팔(paypal.coml)로 대표되는 온라인 결제시스템을 말한다.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달리 '전자 지갑'이 활성화되어 있다. 얀덱스 머니, 키위 전자지갑, 웹머니, 페이팔, 스트렐카 등 '온라인 월렛' 서비스 인구가 약 1,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매년 20억건 이상, 금액으로는 1조7천억 루블(약 29조원) 이상이 '전자 지갑'을 통해 거래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자지갑 이용자는 익명으로 거래를 트고, 현금을 예치한 후 자금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익명 서비스 금지'로 실명화하든지, 은행계좌와 연동시켜야 한다.
이같은 조치는 '전자 지갑'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측면이 크지만, DFA 법안의 미흡한 제도적 장치를 보완하는 성격도 강하다. DFA 법안에 따라 러시아 중앙은행이 암호화폐의 유통 과정을 감독하고, 불법 유통을 막을 수 있는 권한과 수단은 갖게 됐지만, 현금이 '전자 지갑'을 거쳐 암호화폐로 바뀐 뒤 다시 현금으로 되돌아오는 '불법 자금의 세탁'을 막을 방법은 없다. 현실적으로 유일한 방법이 '전자 지갑'의 현금 유통을 투명화하는 것, 즉 익명 사용을 막는 것이다.
실제로 '온라인 월렛' 이용자 중 일부가 현금 다발을 '전자 지갑'에 넣은 뒤 암호화폐 구매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암호화폐 구입 자금이 정상적인 자금인지, 또 이 암호화폐가 언제 '합법적인 자금'으로 바뀌어 시중에 풀릴 지 아무도 모른다.
가뜩이나 암호화폐의 최대 부작용이 테러자금의 조달이나 마약 밀매 등의 결제루트로 사용된다는 것인데, 러시아가 '전자 지갑'의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아예 범죄단체에 길을 터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그같은 인식은 DFA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된 뒤 보여준 러시아 중앙은행측의 태도에도 나타났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세르게이 슈베초프 부총재는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암호화폐 구매를 투자로 보지 않는다"며 "다단계 금융이나 룰렛 게임에 가까워 국가가 국민에게 암호화폐를 구매하도록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는 불법자금의 세탁에 이용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가 암호화폐의 법제화를 서두르는 것은 최근 몇달동안 러시아에 불어온 '비트코인 열풍'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비트코인 열병'을 러시아도 겪고 있다는 뜻이다. 푸틴 대통령마저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말 자신이 주재한 신종 코로나(COVID 19) 방역 대책회의에서 "코로나바이러스의 재확산으로 '전국민 휴무및 자가 격리'와 같은 강력한 제한 조치가 또다시 도입되면 안된다"며 '자가 격리' 중에 비트코인 거래가 폭증했다는 사실을 부작용 중의 하나로 거론했다. 집안에 갇혀 수입이 줄어든 사람들이 비트코인 투자에 나서면서 '투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암호화폐 최대 거래소인 '바이낸스'의 러시아 등록 및 활동자 수는 3~5월 크게 늘어났다. 4월 중 등록자 수는 2019년 12월에 비해 두 배나 많았다. 활동량도 격리된 사람들이 자주 자신의 계좌에 접촉하면서 급증했다.
가상자산 정보 사이트 '코인댄스'에 따르면 로컬비트코인(Localbitcoins) 거래소에서 지난 5월 거래된 물량의 20%를 러시아가 차지했다.
비트코인이 지난 2일 최고가를 기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구글 측의 집계에 따르면 7월 19일부터 31일까지 러시아권에서 이뤄진 비트코인 구매 요청은 거의 75%나 증가했다. 이 기간에 비트코인은 9,100 달러에서 1만1,000달러로 급등했다. 급기야는 러시아 시장에서 지난 2일 작년 8월 이후 처음으로 1만2,000달러에 이르렀다.
현지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 2차 파동이 시작되면 암호화폐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은 또다시 폭발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집에서 컴퓨터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유력한 방안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트코인의 최고가 경신이 '러시아의 열풍'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비트코인의 가치는 달러와 위안화 환율과도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비트코인 열풍을 과소평가하기엔 '신종 코로나 시대'의 러시아 투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