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25
복음학교 / 마가복음 12장 28-37절(하늘나라에 가까이 있는 서기관)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대답에 놀란 사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 대답에 놀라서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이 서기관이 질문한 것은 책잡으려고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움에 놀란 나머지 으뜸 되는 계명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어서 질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 서기관은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고 했습니다.(마22:35) 또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반면 누가는 이 사건을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로 소개합니다. 누가는 이 서기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소개했습니다.(눅16:25-37) 마가복음에서 이 구절이 결론적인 부분에 나오는 것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말씀이 적대자들과의 일련의 논쟁에 있어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예수님은 바로 이 계명의 정신에 서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의 요구와 윤리의 요구 사이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토라(율법)를 위대하고 영화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윤리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있으나 윤리가 없으면 껍질만 두꺼워지고 영혼은 텅텅 비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은 율법과 윤리를 구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싶어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두 가지로 주어졌습니다. 첫째는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쉐마의 첫 부분입니다. 쉐마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매일 암송하는 내용으로 대답하신 것은, 그들이 암송은 하지만 그 뜻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신명기 6장 5절과 마가복음 12장 30절의 칠십인역(LXX)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목숨을 다하고 ο ψυχη)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ο ψυχη)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12:30) “마음을(ο καρδίας) 다하여 그리고 목숨을(ο ψυχη) 다하여” 까지는 신명기와 마가복음의 내용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힘을(신명기 ο δυναμεως, 마가복음에는 ίσύος를 사용함) 다하여” 라는 단어 앞에 마가는 “뜻을 다하여”(ο διανοι ά)란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라마 윌리엄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신약성서의 인용에 있어서 “뜻”이 포함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뜻과 정신에 함께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강조하면서 사랑의 다른 면들 위에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전인적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쉐마의 첫 구절을 인용하셨는데(예수는 쉐마의 정신에 서 있다. 예수는 쉐마 정신을 상기시키심으로, 신앙은 규범을 지키는 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사실을 강조하셨다) 이 부분도 사실은 십계명의 1계명에서 4계명까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즉 그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대답은 십계명의 5-10계명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살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대답이 모두 “사랑하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요, 이들을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내용이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이 대답은 새로운 게 아니다. 바로 십계명의 정신입니다. 십계명의 정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ξοαι)의 정신입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정신이 쉐마의 정신이고, 곧 쉐마의 정신이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같이”(ώ)는 “......과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처럼”(as if or as though)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와 똑같이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나를 사랑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내 몸을 아낀다면 네 이웃의 몸도 아껴야 하고, 내 몸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웃에게도 그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같이는 하나님과 똑같이 온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온전해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답을 들은 서기관은 예수님의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고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당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목숨과 뜻을 다하여”를 “지혜를 다하여”로 바꾸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멀지 않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아주 가깝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이 서기관의 말을 들으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진정한 금식에 대한 말씀이 생각납니다.(사58:1-9) 이사야가 전한 금식에 대한 말씀은, 사실은 하나님의 중심을 보여 주신 말씀이며, 그 정신으로 살아오신 분이 예수 자신입니다. 이 서기관은 다른 서기관이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중심을 명확하게 안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예수 사역이 서기관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점입니다. 이 서기관은 성전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신학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당시 행해지고 있는 희생제사보다 그 중심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존경했고(28,32절) 예수님은 그를 높게 평가했습니다.(34절) 모처럼 예수(복음)와 서기관(율법)이 하나님의 사랑의 중심선에서 함께 만났습니다. 당시 유대에는 훌륭한 두 율법학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힐렐(Hillel)이고, 또 한 사람은 샴마이(Shammai)입니다. 힐렐이 랍비 전승을 이룬 사람이라면 샴마이는 랍비적 유대주의를 세운 사람입니다. 특별히 힐렐은 뛰어난 율법 해석자였는데, 랍비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기록된 율법을 하늘로부터 받은 대리자라면 힐렐은 그 율법에 가장 적절한 해석을 함으로써 율법(토라)을 완성시킨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 이방인이 유대주의를 조롱하기로 결심을 하고 샴마이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나에게 유대주의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면 내가 개종을 하겠습니다.” 샴마이는 가지고 있던 짧은 막대기로 그를 옆으로 밀어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힐렐에게 갔습니다. 그는 샴마이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대 힐렐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싫은 것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사실 이 말은 레위기 19장 18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뒤집어 한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한 주석이니, 가라. 그리고 그것을 배우라.” 그 사람은 힐렐에게서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개종을 했고, 연구를 거듭하여 지혜로운 유대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샴마이의 엄함이 나의 영혼을 거의 잃어버리게 했을 즈음, 힐렐의 친절함이 나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서기관 중에 힐렐을 따르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 서기관은 힐렐을 닮고자 하는 제자였던 것같이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후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기관 중에서 예수께 나아와서 배우고 대화를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처음입니다. 예수님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쉐마를 존중하고 율법을 사랑하며, 그것을 준수하려고 하셨습니다. 단지 기본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에만 치우쳐 살아가는 율법주의자 또는 형식주의자들을 공격하셨을 뿐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일반 시민들의 생각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지혜를 “관습적 지혜”(conventional wisdom)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지혜는 타성에 젖고 관습적이고 관례적인 지혜를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려는 지혜였습니다. 이런 관습적인 종교에 젖어 서기관이 마침내 예수님의 정신에 동의를 해준 것은 예수님의 사역 중심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마침내는 인정했다는 데 마가는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세 가지 논쟁은 예수님의 일생을 정리해 주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하는 논쟁에서 하나님과의 정치 문제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반 로마적이라거나 정치적 이유로 십자가를 지시는 게 아님을 분명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부활 논쟁에서 부활은 확실히 있다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성경적으로 증명해 주심으로 앞으로 일어날 자신의 부활을 예고해 주셨고, 세 번째 질문을 통하여서는 예수 사역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마가의 내러티브는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후부터 마지막 교훈과 고난으로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