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대단한 중국 인민들
[영웅 안중근] 제 54회 채가구 행 열차 내에서
김 선생과 작별한 뒤 나 혼자 역 앞 여기저기를 쏘다니면서 아픈 마음을 달랬다. 그날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다가 바람까지 세차 몹시 추웠다. 이런 날씨에도 길바닥에 드러누워 동냥하는 거지도 보였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할 수 없나 보다. 역 일대에서도 커피숍은 눈에 띄질 않았다. 전날 김우종 선생의 말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커피를 그리 즐겨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가장 자주 즐겨먹는 것은 '水餃子(수교자)'로 곧 물만두다. 나는 평소 중국 요리 이름을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물만두는 값도 싸고 맛이 좋기 때문이다. 그날도 만두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나와도 겨우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느긋하게 하얼빈 역을 카메라에 실컷 담았다.
그래도 개찰 시간이 두 시간은 더 남았다. 역 대합실을 살피니 마침 2층에 PC방이 있었다. 거기서 인터넷을 연결하여 그동안 밀린 메일을 다 읽고 국내 소식도 알았다. 이상하게도 바깥에 나가면 국내 소식은 그 소식이 그 소식으로, 며칠 건너뛰어도 그만이었다. 일반 대합실 개찰구는 사람들이 엄청 붐벼 짐이 많은 나로써 엄두를 낼 수 없어 일등 대합실을 이용했다.
12 : 50, 일등 대합실 개찰구를 통해 플랫폼을 지나 대기 중인 객차에 올랐다. 1548열차 12차 41호 좌석이었다. 잠시 후 일반 손님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는데 잠깐 새 객차는 만원이고 짐은 선반뿐 아니라 통로에까지 가득 찼다.
그 순간에야 나는 어제 이른 아침에 안중근 의사 의거지 하얼빈 역 플랫폼 촬영한 게 떠오르며 그림자가 진 사진 이미지가 꺼림칙했다. 내가 언제 여기를 다시 촬영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가방을 선반에 둔 채로 노트북 가방에 카메라를 어깨에 멘 채 의거 장소로 냅다 달려 가 서너 컷을 찍은 뒤 헐떡이며 객차로 다시 돌아왔다. 그새 내 자리에 한 호로(胡老, 중국노인)가 앉고서는 비켜 줄 생각도 않고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포기한 채 통로에 서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로 여간 불편치 않았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까지 그랬다. 완행 열차 좌석은 2인석이지만은 으레 3인석이었고, 선반 위나 바닥에서도 누워 가는 이도 있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서울에서 부산까지 밤 열차를 타고 가는데 좌석이 없어 줄곧 서서 갔다. 가는 도중 나중에는 몰려오는 잠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객차 사이 빈 공간에 신문지를 깔고 쪼그려 앉아 꼬박 졸면서 간 적도 있었다.
게다가 그 시절은 무임승차 승객이 많았다. 여객 전무가 차표 검사라도 할 때면 무임승객들이 몰려 다니느라 엄청 소란스러웠다. 나는 채가구로 가는 열차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50년 전 한국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13 : 35,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올드랭 사인이 울리는 가운데 열차는 출발했다. 내가 통로에서 지나가는 승객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아무 말도 없이 차창 밖만 바라보며 서서 가자 한 젊은이가 선뜻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양보했다.
나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취재 수첩에다 "謝(사) 謝(사)"라고 쓰고는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시했다. 내가 그의 신상을 묻자 그는 학생으로 이름이 '이경국(李慶國)'이라고 내 취재 노트에 그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자 객차 언저리 승객들은 이방인 나에게 질문을 마구 쏟았다.
나는 중국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어 김우종 선생의 소개장을 보이자 한 젊은 여성이 그걸 읽고는 눈에서 광채가 나듯이 반기며 필담으로 물었다.
"韓國(한국)? 朝鮮(조선)?"
"韓國(한국)."
"問您多大年紀(문니다대연기)?"
내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자 그는 다시 적었다.
"年齡(연령)?"
"65歲(65세)."
그러자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차내 언저리 승객에게 뭐라고 말하자 승객들이 번갈아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들은 혁명가의 발자취를 답사 하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했다.
중국 인민들의 혁명가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대단함은 내 익히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 인민들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혁명가에게는 최대 존경심을 표할 뿐 아니라, 혁명열사 묘지와 기념탑은 그들 고장의 가장 높은 곳에다 세워 추모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과 나는 필담으로, 또는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네들은 나의 행선지 채가구가 어느 정도 남았다고 손짓이나 필담으로 시간까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베푼 친절이 고마워 취재 노트에다 크게 썼다.
"中國歷史悠久 韓中善隣親善 萬歲(중국역사유구 한중선린친선 만세)!"
그들은 내 취재 노트의 글씨를 돌아보며 "하오 세 세"를 연발했다.
*사진 ;
상- 채가구 행 완행 열차 안
하- 채가구 행 열차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