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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2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삼상6:10~18
<소의 눈물>
오늘 설교 제목이 ‘암소 두 마리!’ 그런데 그냥 암소가 아니라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소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소’하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저는 눈에 쌍꺼풀이 없어서 그런지, 소의 큰 눈! 쌍꺼풀이 뚜렷한 그 눈! “부러워요!”☺
소 눈에 쌍꺼풀 없는 거 봤어요? 쌍꺼풀, 하면, 소의 눈이지요!
그 큰 눈에, 촉촉하게 눈물이 감돌아요! 소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요!
‘왜 이렇게 소는 늘 눈물을 흘릴까?’
물론 눈이 커요, 먼지가 많이 들어갑니다! 찬바람이 세게 불어도 눈물이 나요!
눈물이 적당히 흘러야, 눈알이 제대로 굴러요!
하나님이 그래서 소 눈에 눈물이 많게 하셨어요!
그런데 오늘, ‘소의 일생!’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니다!
‘소에게 기쁜 일이 있을까?’ 소가 웃을 일이 있을까? ‘있어요, 없어요?’ ~ ‘없어요!’
모든 소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평생 일만 하고, 나중에는 ‘쇠고기!’ 맛있는 미역국, 무국, 우리 밥상에 올라와요!
젖소는 평생 젖을 짜내고, 역시 고기, 버릴 게 없어요!
이것이 소의 일평생입니다! 소는 웃을 일이 없어요! 눈물만 있어요!
그래서 소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한국 속담에, ‘소가 웃을 일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세상에 소가 웃을 일은 없다!’
그러나 소에게도 ‘모성 본능’은 있어요! 새끼를 먹이려는 본능! 둘째 가라하면 서운하지요!
새끼를 낳은 어미 소 곁에, 송아지가 없어 봐요! 얼마나 구슬프게 울어요?
오늘 설교 제목이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새끼를 낳고 젖 먹이는 암소 두 마리!
왜 성경에 두 마리 암소 이야기가 나올까? 왜 나오겠어요?
잘 들으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지금부터 3천 년 전,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했어요!
제가 설교할 때, 3천 년 전! 이런 말 하면, 여러분은 얼른, 머리속에 상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오셨으니까, 3천 년 전이면, 예수님 탄생하기 1천 년 전이구나!’
늘 예수님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더 커요! 할렐루야!
지금부터 3천 년,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했어요!
그 전쟁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깁니다!
전쟁에서 이겼다! 얼마나 신납니까?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전국에 전염병, 페스트가 창궐했어요!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페스트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요!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원인이 뭐냐?’
아무래도 전쟁할 때, 이스라엘서 빼앗아 온 저 ‘하나님의 언약궤 때문일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 그렇게 생각이 모아졌어요!
그래서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되돌려 주자!’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낼 것이냐?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실어서 보내자!’ 왜?
전쟁 끝나고 나라 안에 일어난 재앙! 페스트! 이것이 정말, 저 ‘하나님의 언약궤’ 때문이냐?
궁금하잖아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냐?’
이렇게 해 보자! 송아지 낳고 젖 먹이는 암소가 수레를 끌도록 하자!
새끼가 있는 쪽으로 가는지, 이스라엘 쪽으로 가는지, 한번 보자!
삼상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블레셋 사람들이 이렇게 지혜를 냈어요!
암소들이 수레를 끌고 갑니다. 어디로 갔을까요?
(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뜻밖에도 암소 두 마리! 이스라엘 쪽으로 향합니다!
새끼를 뒤에 두고, 벧세메스로 가요! 할렐루야!
수레를 따르던 블레셋의 방백들이 우두커니 바라봅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그분이 진짜 참신이구나!
<하나님의 계시>
어떤 사람들은 그럴 겁니다! ‘에이, 옛날 얘기니까 그렇지!’ 그래요? ~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에요!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세요! ‘내가 살아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 뭐라 해요? ‘계시!’
하나님은 3천 년 전에 이렇게 계시하셨어요! ~ 오늘날은 어떻게 계시합니까?
우리 주변에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하느냐?’ 한 번 돌아보세요!
여러분은 어느 때, 무엇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알게 됩니까?
저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 ~ ‘그것은 교회다!’
전주에 교회가 참 많습니다. 70만 가량이 살고 있는 도시에, 교회가 9백 개가 넘어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너무 많아!’ 불평 비슷하게 말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많은 교회를 세우시겠어요!
‘교회가 너무 많아!’ 불평하라고 많이 세우신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 땅에 교회가 왜 세워집니까? 십자가가 왜 서요?
교회가 많은 것! 불평할 일입니까? 한 집 건너 교회 있다고 살아가는데 불편해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교회를 많이 세우신 것은, “사람들아 보아라!”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고,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 할렐루야!
이렇게 수많은 교회와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계시’예요!
3천 년 전, 젖먹이는 암소 두 마리가,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걸 보고, 하나님을 깨닫는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 할렐루야!
이걸 보고, 하나님 살아계신 것 모르는 사람들! ‘어찌 천국 가기를 바라겠습니까?’
3천 년 전, 블레셋의 암소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드러내고 있어요!
말 못하고, 평생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 맺히는 암소! ‘하나님이 살아 역사한다!’ 드러냈어요!
아마 창세 이래로 모든 소들! 그중에서 가장 복된 소 아니겠습니까?
간혹 이렇게 가축들이 귀하게 쓰여지는 일이 있어요!
<함흥차사의 말>
우리나라 사자 성어 중에 ‘함흥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 이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일찍이 왕위를 맏아들 정종에게 물려줍니다!
그런데 정종이 약해요! 동생 방원이에게 왕위를 뺏겼습니다.
이 걸 보고 화가 난 아버지, 이성계가 함흥으로 칩거했습니다.
함흥에서 도대체 한양으로 올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에게 심부름꾼을 보냅니다. 그 심부름꾼을 ‘차사’ 그러지요?
함흥으로 태조 이성계를 모시러 가는 심부름꾼, 이 특사를 ‘함흥차사’ 그렇게 불렀어요!
그런데, 이성계가 자기를 모시러 오는 ‘함흥차사!’ 오는 족족 죽여요! 안 가겠다는 거지요!
그래서 ‘함흥차사’ 하면, ‘길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 이렇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자가기 ‘함흥차사’로 차출될까봐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차출되었다.’ 하면 죽은 목숨예요! 그러나 아들 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그대로 둘 수는 없어요!
가서 죽더라도, 계속 차사를 보냅니다.
이때 ‘박 순’이라는 사람이 함흥차사로 선발되었어요!
왕명입니다. 어길 수 없어요. 죽든 살든 가야 합니다.
출발하기 전, 박 순은 지혜를 짜 냈어요! 무턱대고 갔다가는 죽잖아요!
함흥차사 박순! 어떤 꾀를 냈느냐?
말을 타고 가야 하는데, 새끼 낳은 암말을 구했어요! 그 말을 타고 갑니다.
옆에서 쫄랑쫄랑 귀여운 망아지가 어미를 따라가요. 그림이 참 흐뭇합니다. 그렇지요?
함흥에 당도했습니다.
이성계가 머물고 있는 숙소 가까운 곳에 어미 말을 매어두고, 새끼는 저 멀리 떼어놓았어요!
어미 말과, 새끼 말이 밤새, 서로를 향해 웁니다. 얼마나 안타깝게 울겠어요!
그 소리를 이성계가 ‘들어요, 못 들어요?’ 듣지요!
박 순이란 함흥차사가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이성계를 만나요!
이성계가 박순에게 묻습니다.
“저게 왠 울음소리냐?” “젖 떨어진 새끼를 그리워하는 어미 말의 울음인 듯 하옵니다!”
밤새 우는 그 울음 소리가 이성계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래, 방원이가 밉지만, 내 아들 아니냐? 가자! 한양에 가겠다!’
<블레셋 암말의 온전한 헌신>
함흥차사가 타고 간 새끼 딸린 암말!
아버지 이성계, 아들 이방원! 부자간을 화목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는 어때요?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신다!’ 이걸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암소 두 마리의 모성 본능을 잠시 멈추게 하셨어요!
새끼 울음소리가 들려도, 반대 방향, 벧세메스로 가라! 12절 다시 봅니다.
(12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두 마리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는 데, 어떻게 갑니까? ~ ‘울었다!’
울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왜 안 울겠습니까? 새끼를 떼어놓고 가는 걸음입니다.
새끼 있는 곳을 바라보면서 울었을 겁니다! 그런데 발걸음은 어디로 가요? ~ 벧세메스로!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암소가 가면서 ‘울었다!’ 이 말을 빼먹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수레를 끌고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를 향해서 똑바로 가는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마치 우리의 인생길이 이렇지 않습니까?
새끼를 떼어놓고, 얼마나 가슴이 메어져요? 눈물이 안 나올 수 없지요!
웁니다! 그렇지만 걸음걸이는 똑바르게 가요!
어린 시절 우리가 보았던 쟁기질 하는 소도 그렇지요!
간혹 배가 고픈지, 고개를 휘저으면서, 한바탕 울어요!
그러나 주인이, ‘이랴, 이랴!’ 고삐를 잡아채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밭고랑을 반듯하게!
어릴 때 그런 소를 봤어요! ‘소가 참 고마운 가축이구나!’
그랬는데, 어른이 되었어요! 이제 소처럼, 소와 같이,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
울기는 울지만, 중심을 잃지는 않았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아프면 울지요, 그러나 울 때 울더라도, 중심을 잃지는 말아라!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이스라엘 벧세메스에 도착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어떻게 했어요?
(14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암소들을 어떻게 해요? ~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번제는, 제단에 올려놓고 완전히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 번제!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를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렸다!
보통 소들은 사람들에게 고기를 바치지요!
그런데 블레셋 암소 두 마리! 하나님께 드려졌어요!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쓰임 받고,
또,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의 희생제물이 되었어요!
우리 인생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살 때, 때로 울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렇게 이 땅에서 삶을 마치면,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드려지는 제물! 우리가 제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인생이 이것입니다!
<맺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금 벧세메스를 향하는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그 모습이 ‘우리의 인생과 같다!’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있어요!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
이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한 장면과 매우 흡사합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직접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잖아요?
거기서, 지고 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모습! 그 장면이에요!
블레셋 암소 두 마리가 지금 그 모습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수레! 끌고 갑니다.
구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숱한 인물들이 예수님을 예표해요! 예수님을 미리 보여줘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 짐승이지만,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하물며, 짐승도 하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예표 하는데, 사람 된, 우리는 뭐냐?
블레셋의 암소만 못해서야 되겠느냐?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지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가신 그 길!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이 어디냐?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끝이냐? 아니다! 무덤이 끝이냐? 아니다! 그럼 어디냐?
영광된 부활이 있다! 부활한 몸으로 들어가는 천국! 거기예요! 거기가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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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벧세메스를 향하는 암소 두 마리! 새끼 떼어 놓고 '울며 갑니다!' 울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향합니다. 블레셋의 암소! 마치 우리의 인생길 같습니다. 때로 울지만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하는 길이 곧 우리의 인생길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 길은 주님이 십자가 짊어지고 가신 '비아 돌로로사' 그 길입니다. 그러고보니 세 길이 하나입니다. 블레셋의 암소 두 마리가 가는 길, 우리의 인생길, 예수님이 가신 길!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그리고 목적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계신 그곳 천국, 주님은 부활하여 승귀하심으로 가셨고, 우리는 주님 따라 갈 거고요! 벧세메스의 암소는 번제물 향기로 도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