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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진흥원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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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근대 전환기 서산 문도의 현실 인식과 실천
박경환 *
차례 1. 내외 모순의 격변의 시대
2. 서산 김흥락의 사상적 연원과 특징
3. 「보인계첩」을 통해 본 서산 김흥락의 문도들
4. 서산 김흥락 문도들의 현실인식과 대응
5. 맺음말
요약
서산 김흥락과 그 제자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로서 역사에서 유례없는 변화와 격동의 시대였다. 사
상사에서의 근대로의 전이는 곧 지배적 가치관과 세계관이었던 전
통 유학의 다양한 분화로 나타난다. 서산 김흥락과 그의 문도들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전통 유학의 가치와 그 위에 세워진 체제
를 수호하는 한편, 유학의 혁신을 통해 변화된 시대의 요구에 부응
* 朴璟煥, 한국국학진흥원
158 ∙ 국학연구 Vol.31
하려고 했다.
서산 김흥락 학문의 핵심은 ‘경敬’의 사상인데, 이는 그로 하여금
조선사회의 문제에 대응함에 있어서 내면적 수양을 강화하는 한편
의병기의와 같은 결연한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서산 김흥락의 제
자 명부인 「보인계첩」에 오른 705명의 문인들은 스승에게서 계승
한 것은 경敬에 의거해 배움을 추구하고 배움은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따라서 김흥락 사후 그의 뜻을 이
어받은 제자들은 유학의 가치를 수호하고 내부의 모순과 일본의 침
습에 의해 흔들리는 체제의 수호를 위한 실천에 나서게 된다. 그것
은 일차적으로 위정척사에 의거한 항일 의병활동으로 나타났는데,
김흥락 문인들의 항일 투쟁은 당시 다른 지역의 어느 학파들보다
두드러진다.
김흥락 문인들은 1910년의 경술국치로 국권이 상실되고 사회적
모순은 깊어가는데 반해 기존의 유학을 통한 현실 모순의 타개가
난망해짐에 따라 다양한 선택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특히, 이시기
부터 그들은 이단인 서양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일방적 배척의 태
도에서 벗어나 교육, 제도는 물론이고 새로운 사조 등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해 자강을 도모하는 한편 현실 대응에서 한계를 드러낸
유학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러한 모색의 근저에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사고가 놓여있다.
서산 문도들의 현실 인식과 대응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주도적인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실용성의 강조와 주체성의 강화가 그것이
다. 실용성의 강조는 서구의 기술과 무력이라는 현실적 힘에 대응할
수 있는 객관적 역량 강화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되었다. 전통적 개념
인 기器로 포괄되는 물질적 역량의 강화라는 실용성의 추구를 통한
자강自强의 길이다. 주제성의 강화는 ‘경敬’의 강조와 유학의 종교신앙
화로 나타난다. 이는 서구의 기술과 무력이라는 압도적인 힘을 넘어
서는 것은 심을 중심으로 하는 주관적 능동성의 강화를 통해서 가능
다고 본 것이다. 이는 정신 역량의 극대화를 통한 자강自强의 추구였
다.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59
주제어
: 김흥락, 유학, 퇴계학, 경敬, 보인계첩, 위정척사, 의병, 동도서기,
이상룡, 송기식, 유교 종교화
1. 내외 모순의 격변의 시대
서산 김흥락과 그 제자들이 활동했던 시대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
는 시간이자 역사에서 유례없는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중국의 경우 아
편전쟁(1840년) 전후 한국의 경우는 개항(1876) 전후에서 시작되는 동아
시아의 근대전환기는 서구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유학이념과 조공체제에
기반 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붕괴되고 제국주의적 침탈에 따른 내외적
모순이 점증하는 가운데, 봉건封建과 근대近代, 동東과 서西의 경계가 무
너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내외의 격변은 당시 유학적 지식인들에게 가히
“오늘날 세상의 변화는 춘추시대에 없었던 정도가 아니라 진한秦漢이래 원
명元明 시기를 통틀어서도 있은 적이 없었던 큰 변화”324)라는 탄식을 자아
내기에 족한 것이었다.
조선의 경우, 개항을 전후한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축적
되어 온 사회적 동요가 1811년의 홍경래의 난을 기점으로 1862년의 진주
민란, 1882년의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전개되며 깊어지고 있었고, 밖으로
는 일제를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조선사회는 미증유의 혼란과
위기의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1866년 병인양요 때까지도 조선 정부는 외
세배척의 결의를 새긴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웠다. 이러한 위기
324) 張之洞, <序>, 勸學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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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속에서도 당시의 정치세력은 민심을 도외시한 척족의 세도정치에 골
몰하고 있었다. 그러나 1876년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외세에 굴복한 조선
은 마침내 통상을 허용하였고, 이후 서구 열강들과 잇달아 통상조약을 맺
음으로써 개화기로 전환하게 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사회 내부는
서구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쇄국과 개화의 기로에서 방황하게 된다.325)
서산 김흥락과 그의 문도들은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점증하는 내외의 모
순이 촉발한 사건을 목격하면서 고古와 금今, 동東과 西의 경계에 서서 유
학적 가치와 그에 기반한 체제와 사회의 출로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상응하
는 실천에 나서게 된다.326) 서산 김흥락(1827~1899)이 1894년 올린 영해
부사 사직소에는 당시 그가 목도한 혼란한 현실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국운이 어려움에 처해 근본이 흔들리니 권위는 실추되고 백 가지 법도
가 해이해졌습니다. 토색질하는 자가 벼슬자리에 앉으니 탐욕과 도적질이
풍조가 되었습니다. 병기는 소모되고 재용은 고갈되어, 백성이 원망하며 귀
신이 노여워합니다. 섬나라 오랑캐를 불러들이고 안으로 불화하여 도성과
궁궐에 바짝 근접케 하였습니다. 관청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거제車制와 복
제服制를 혁파하니, 토비土匪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괴이한 말이 온 나라에
가득합니다.327)
19세기 후반 조선사회의 봉건시대에서 근대로의 전이는 준비된 과정이
325) 박경환, 「동아시아 유학의 근현대 굴절양상」, 국학연구 4, 2004.
326) 서산과 문도들은 1860년 동학의 창도, 1862년 임술농민봉기, 1866년 병인양
요, 1871년 신미양요, 1876년 개항,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
학농민전쟁, 1895년 을미사변, 1897년 대한제국 성립,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6
년 통감부설치, 1910년 경술국치, 1919년 3.1운동 등 숨 가쁘게 역사적 사건이 이어
지는 격변의 시기를 지나게 된다.
327) 西山集 권2, <疏‧辭寧海府使䟽>, “今國運艱否, 根本杌隉, 威權失御, 百
度解弛. 掊克在位, 貪饕成風. 兵耗財竭, 民怨神怒. 馴致島夷內訌, 近城闕. 變亂
官紀, 易制車服, 土匪四起, 異言滿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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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서구 혹은 서구를 한 발 앞서 배운 일본에 의한 제국주의적 침탈로
인한 내외적 모순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 전이 양상도 급박
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사에서의 근대로의 전이는 곧 지배적
가치관과 세계관이었던 전통유학의 다양한 분화로 나타난다. 이를 구체
적으로 살펴보면 변화하는 현실에 맞선 유학의 비타협적 묵수, 현실 타개
를 위한 유학 내부의 새로운 모색에 따른 절충, 유학에 대한 내재적 부정
과 외재적 극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비타협적 묵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으로 나타났고, 절충은 동도서
기론東道西器論에 기초한 유교의 종교화를 포함하는 유교혁신의 움직임
으로 나타났으며, 유학 부정은 변법 개화파들의 유학으로부터의 이탈과
동학의 대두로 귀결되어갔다. 이러한 양상은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던 중
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328) 양국에서 이와 같이 유사한 사상적 모색이
전개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양국이 직면한 내외적 상황이 대동소이했던 데
그 원인이 있겠지만 같은 고민을 지녔던 양국 지식인들의 긴밀한 접촉과
교류도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었다. 특히, 이 시기 중국 사상가들의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영향은 컸다.329)
서산 김흥락과 그의 문도들은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그들이 계승한 퇴
계학의 학문을 통해 시대의 문제에 대응하게 된다. 그의 문도들은 다른
328) 이러한 사상적 지형은 중국에서도 대동소이하게 나타난다. 즉, 유학적 가치의
절대성을 믿었던 보수 완고파에 호남 長沙의 王先謙과 그의 문인이자 양계초 비판
에 앞장섰던 蘇輿 그리고 倭仁 등이 있었고, 中體西用論에 입각해 서학의 수용을
통한 자강과 유학의 유연한 현실대응을 강조했던 洋務派의 曾國藩, 張之洞 등이 있
었으며, 유학의 내재적 부정의 길을 걸어간 康有爲, 譚嗣同 등의 변법파變法派가
있는가 하면 외재적 부정의 길을 모색한 太平天國의 洪秀全이 있었다.
329) 당시 조선의 만은 유학자들은 전통 유학의 가치를 지키면서 서구의 문물과 제
도를 수용해 자강을 도모하려 했던 공통적 문제의식 아래 직간접적으로 중국학자, 특
히 변법파의 대표적 인물인 康有爲, 梁啓超 등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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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여타 학파들이 그러하듯, 전통적 유학의 가치와 체제를 수호하는 한
편 변화된 시대에 부응해 유학의 혁신과 실천을 통해 시대의 요구에 부응
하려고 했다.
2. 서산 김흥락의 사상적 연원과 특징
성리학에서 인성론과 그에 근거한 수양론 및 이상사회론의 토대가 되는
것이 존재론으로서의 리기론理氣論이다. 리理와 기氣의 관계에 대한 주자
학적 이해의 기본적 특은 ‘불상잡不相雜’과 ‘불상리不相離’이다. 리理는
현상의 차원에서 볼 때 모든 사물과 현상의 존재의 원리와 당체로서 함께
있다는 점에서 ‘불상리’로 표현되며, 그러한 현상적 차원의 원인과 근거를
소급해 들어가 보면 기氣가 있기 이전에 그 원리인 리理가 있다는 점에서
‘불상잡’으로 표현된다.
특히 현상적 차원의 심성론과 수양론의 차원으로 오게 되면 양자의 관계
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흔히 혼륜渾淪과 분개分開로 표현된다. 사단칠정
논의로 드러난 리기관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혼륜적 관점은 현실적으로
리기는 둘로 나눌 수 없음을 강조하고, 분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원적
으로 리는 리이고 기는 기로 나눌 수 있음을 강조한다. 분개가 ‘불상잡’과
마찬가지로 기에 대한 리의 가치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인 반면, 혼륜은
리의 가치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리가 존재하는 현실적 조건(즉 리는 기와
함께 존재한다는)을 수긍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리기관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불상잡’과 ‘분개’의 측면을 강조하
는 주리론主理論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그에 근거한 발현에 근거한 자아의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63
완성과 그러한 자아의 외재적 실현인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의리와 이익,
공公과 사私, 군자와 소인, 정正과 사邪, 정통과 이단 등 현실의 대립적 가
치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선명한 실천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반면에 ‘불
상리’와 ‘혼륜’의 측면을 강조해 리가 기와 함께 있다는 현실적 존재조건
을 상대적으로 중시하는 주기론主氣論의 경우 현실의 모순에 대해 상대적
으로 유연하고 타협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주기론의 율곡학파와
달리 주리론의 퇴계학파에서는 본성의 순선함과 그에 기초한 유학적 가치
와 규범에 대한 절대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현실의 모순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판적 태도와 비타협적 실천의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리기론이 심성론 특히, 조선중후기 논변의 중심에 선 사
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퇴계 이황의 이해에서는 절충되는 경향으로 나타
난다. 퇴계 이황이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해 최종적으로 수정한
사칠四七 관계에 대한 규정은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그것을 따른 것이
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리가 그것에 올라 탄 것이다”는 명제이다. 이는
리와 기의 독자적 작용성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수승隨乘’의 논리를 통해
리와 기가 각기 능동적 작용성을 지니고 가치론적으로 구분되면서도 상호
따르고 올라타는 의존적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330) 물론 이황은 여기서
혼륜을 통해 리기가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음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여기
서도 리의 가치적 우월성에 관한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수승隨
乘’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기는 어디까지는 리를 따르고 리가 타는
것이라는 점에서 리의 주재성과 주도성 그리고 우월성은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퇴계 이황이 사칠론에서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해 분개分開와 혼륜渾淪의
330) 退溪集 권41, <雜著‧天命圖說後敍附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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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측면을 모두 수용한 것은 “리의 절대성을 내세운 도덕의 지나친 중시가
초래하는 비현실성과 기의 작용성만을 앞세운 인욕의 중시로 야기되는 도
덕의 경시풍조를 동시에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331) 또한 이는 현실의 조
건과 상황을 고려하는 바탕 위에서 도적적 주체의 능동적 실천성을 요구하
는 사유의 표현이기도 한다. 퇴계 이황의 외유내강의 성품이나332), 출처出
處에 있어서 지나치게 염결한 태도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
중에서 벼슬에 나아가 이상을 실현하기도 하고 그것이 벽에 부딪치면 다시
은거해 내면의 자아의 수양에 몰두하는 태도는 그러한 입장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대 율곡 이이나 남명 조식의 양단적 출처관과 대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서산학단의 이론과 실천은 이러한 퇴계학파의 사상적 특징을 계승한 정
재 류치명의 사상에서 출발한다. 정재 류치명은 종증조부인 동암 류장원
을 통해 퇴계학을 가학으로 계승하는 한편, 손재 남한조에게 배움으로써
외증조부인 대산 이상정의 학통을 전수받아 퇴계학의 적전嫡傳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류치명은 리理의 작용성을 인정하고, 리기理氣의 상하주종 관계에 대한
정의, 사단칠정설 등에서 퇴계학파의 설을 계승한다. 우선 그는 본연지성
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이 혼륜의 상태에 있음을 들어 리기가 성性
에서 하나임을 강조하면서, 정情에 있어서는 사단과 칠정이 각기 리발과
기발로 나누어지는 분개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333) 그런데 류치명은
331) 설석규, 「정재학파의 위청척사론의 대두와 성격」, 국학연구4, 한국국학진흥원,
2004, 92쪽.
332) 鄭惟一은 퇴계의 성품에 대해 “너그럽되 절제가 있었고, 조화가 있되 휩쓸리지
않으며 암하지만 사납지 않았다”고 설명했다(鄭惟一, 文峯集 권4, 「雜著‧退溪先生
言行通述」).
333) 定齋集권18, <雜著〮讀書瑣>, “性中只有箇仁義禮智, 而更無喜怒哀樂之名, 則性之一而不二, 可知也. 情則旣有四端, 又有七情, 則情之所發不一, 可知也.此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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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의 분개에 관한 주장이 극단적 분대分對로 이해되는 것을 경계하여,
분개를 척발剔拔과 구분해 불가분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334) 즉 리기를
분개로 이해하는 것은 혼륜의 상태에 있는 리를 드러내려는 것임을 말한
것이며, 이는 천리이자 인仁이라는 본성으로 부여된 리의 존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 기에 의한 사욕의 가림작용을 제거해 인仁의 본성을 회복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향후 현실 대응에서 나타나는 위정척사의 태도는 “극단적
인 이분법적 분대론에 입각한 사邪의 물리적 소멸을 지향하는 것으로 설
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가치분별의 안목을 전제로 정正의 보호
를 위한 내부적 자강”335)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유
는 리기의 분대를 전제로 한 수승론에 토대를 두고 현실인식에 있어 확고
한 정사正邪의 분별을 전제하면서도 현실적 적용에는 시대적 상황변화의
조건을 고려하는 탄력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이는 퇴계 이황의 사칠론과
대산 이상정 학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재 류치명은
극단적 이분법적 정사正邪의 분별과 배타적 부정보다는 시대적 상황에 대
한 탄력적 다양한 대응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이는 그의 제자 서산
김흥락과 그의 문도들이 유교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토대로 당시의 현실
에 대한 대응에서 여타 학파보다 다양한 선택으로 나아가게 하는 요인이
기도 했다.
김흥락은 19세이던 1845년 4월 류치명에게 집지執贄했다. 그때까지
性一而情二, 亦可見也.”
334) 위의 책 권4, <書‧答李忠立>, “剔拔與分開, 相似而實不同. 剔拔說者, 就理
氣相成之中, 而挑出其理之謂也. 分開說者, 就四七互發之處, 而劈作兩片之謂也. 以理發氣發, 而遂以爲二性, 以剔拔而遂以爲分開, 轉輾成就, 依微執定, 無乃非義
理之正.”
335) 설석규, 앞의 논문, 107쪽.
166 ∙ 국학연구 Vol.31
그의 학문 수학 이력을 보면 5살에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고 7살에 제종숙
인 유계酉溪 김진룡金鎭龍(1787~1868)에게서 수학했으며, 7살엔 소학
을 배웠고 13살에는 자형 세산洗山 류지호柳止鎬(1825~190)에게 수학
하고 16살에는 논어를 읽었다. 17살 들던 초하룻날에는 가묘에 배알
후 종일 정좌해 옛 성현의 격언을 초록하여 제훈집설요람諸訓集說要覽
을 만들고, 따로 정자‧주자‧퇴계 세 사람의 경敬에 관한 언급한 조목을 초
록해 신을 살피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람은
뜻을 세우는 것에서 귀하다고 할 수 있는데 뜻이 굳지 않으면 반드시 게을
러진다. 이미 선을 향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마음으로 하여금 풀려 해이하
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음의 방일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경敬
을 강조하고, 시를 지어 “성현의 천 마디 말에 경敬자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주자의 확실한 표적 오직 조행에 있구나(聖賢千言莫敬要, 紫陽
端的有惟操).”라고 했으며, 자경문自警文에서는 “경敬은 한 마음의 주재이
니 진실로 경에 거할 수 있어서 이로써 함양한다면 모든 일에 기강紀綱이
있을 것이며 밝은 천명이 빛날 것이다”고 한 점이다.336) 이는 그가 평생
학문과 실천의 중심에 두었던 경敬에 관한 생각이 이미 이 시기에 구체화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해 11월과 12월에는 각각 중용과 시전詩傳을 읽었다. 18살 초
하룻날 「경재잠敬齋箴」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두 그림을 벽 위에 그
려두고 자성과 검속에 경敬을 주로 할 것을 다짐했고,337) 겨울에는 대학
336) 西山集 附錄, <行狀>.
337) 양도는 퇴계의 ‘성학십도’에 제9도와 제10도로 들어있는 것으로, 그 요지는 主一無適의 敬으로 마음상태를 유지해 일상의 動靜간 언제든 자신을 검속함으로써
나태해진 마음에 사욕이 스며듦을 막는 마음 다짐과 몸 가눔 공부의 요체이다. 서산의
경에 대한 관심은 그가 집지한 이후 21세에 정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한 물음에서도
그대로 지속됨을 볼 수 있다.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67
과 대산집을 읽었다. 이처럼 그는 정주와 퇴계로 이어지는 경 중시의
수양공부를 익히고 이를 대산 이상정의 언급을 통해 확인하는 계기를 마
련함으로써, 경 중시의 학문과 실천이라는 주된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
고 김흥락은 이러한 이해의 토대 위에서 이듬해 아우 김승락金承洛과 함
께 정재 류치명에게 나아가 집지함으로써 퇴계 이래 면면히 이어져 대산
이상정-정재 류치명으로 내려온 학맥의 전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다.338)
류치명의 문하에 들어 간 이후 계속된 그의 학문이력을 연보 및 문집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그의 학문의 성숙과정을 살펴보자. 김흥락
이 28살이 되던 1854년은 그 자신의 학문방법론을 천명한 시기로서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은 그해 3월에 지은 ‘입학오도入學五圖’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입학오도’는 입지立志‧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과 총
도總圖 등 5가지 그림과 주자어류朱子語類 중의 해당 항목과 관련된
주자의 설명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그는 학문의 출발인 입지立志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의義를 추구하는 위기爲己와 이利를 추구하는 위인爲人 사이에서 결단해
위기爲己를 택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지금 또 의義와 이利를 분별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남이 알
아주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을 위하려 하는가, 이것이 바로 생사
의 갈림길이다. 사람의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 한 번의 걸음, 한 번 달림
속에 각각 의義가 되고 이利가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의義이면 저것은 이
利인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다만 발을 굳건히 디뎌 나아가기만 해야지 달
리 잴 것이 없다.339)
338) 앞의 책 附錄, <年譜>.
339) 朱子語類 권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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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의 공부는 돈과 명예 혹은 세상 사람들의 좋은 평판 등 이익을 추구
하는 것이고, 위기의 공부는 자신의 내면에 부여된 선한 본성이라는 인격
완성의 계기를 확인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이다. 성리학
은 곧 사람의 마땅한 도리를 추구하는 도학道學이며 그것은 위기지학爲己
之學임을 표방한다. 그는 「논어차의論語箚疑」의 ‘군자유장君子儒章’장에
관한 풀이에서도 “사욕 때문에 공공을 저버리고 자기의 편의를 따르는 것
이 이利이고 이치를 따르고 사욕을 잊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의義
이다. 의리에 뜻을 두면 크고 멀리 가며, 이익에 뜻을 두면 작고 가까워진
다”며340) 의義와 이利에 대한 분별을 전제로 의리를 따를 것을 말하고
있다.
일단 의를 택했으면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자신에게 본성으로 주어진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익의
유혹이나 불의와의 타협을 강요하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관철해
나아가야 함을 역시 주자의 말을 인용하며 강조했는데, 그 과감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이 바로 입지立志의 견고함이다.
반드시 용맹하고 과감하게 결단하고, 해야 할 일을 바로 하고, 안배하지
말고, 기다리지 말고, 남을 의지하지 말고, 서적이나 언어에 의지하지 말
고 단지 자기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341)
거경도居敬圖에서 그는 공부에 있어서 차지하는 경의 중요성을 강조해
“함양涵養‧치지致知‧역행力行 세 가지는 본래 선후先後가 있을 수 없지만,
340) 西山集 권13, <雜著‧論語箚疑>.
341) 앞의 책 권120.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69
(실제 공부에서는) 선후가 없을 수도 없으니 반드시 함양을 먼저 해야 한
다”거나 “여러분은 참으로 모두 학문에 뜻을 두고 있지만 지경持敬 공부
가 매우 부족하다. 만약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학문에 나가는
근본으로 삼겠는가?”라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知를 확충하는 토대
인 경敬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경을 주희와 장식의 말을 인
용해 동정動靜과 내외內外에 걸쳐서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항상 깨어있는
상태(惺惺)로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342) 이를 통해 그의 학문의
요체가 경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학문하는 데에는 효성과 공경을
주된 근본으로 하고 거경居敬을 중요한 표식으로 삼았다”는 향산 이만도의
묘갈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궁리도窮理圖에서는 사사물물事事物物에는 리가 체현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사물 상에 나아가(格物) 이치를 이해해야 함을 말했다. 그른 궁
리란 다른 것이 아니라 “신하의 충성은 신하가 본래 마땅히 충성을 해야
함이고, 자식의 효도는 자식이 본래 마땅히 효도를 함”과 같이 일상의 관
계 속에서 당연한 이치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그러한 이치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이치의 표리와 본말에 대해 철저하고 남김없이 이해해
이치와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그가
이처럼 이치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어떤 것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은 견고한 실천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도리를 참으로 알아내고자 하면 반드시 표리表裏와 수말首末을 완전히 꿰
뚫어 미진한 점이 없이 참으로 이와 같음을 알아서 결단코 옮기거나 바
꾸지 않아야 되며, 단지 한 점이나 반 점만 보고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
다. […중략] 선善의 경우 참으로 이것이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결단코 반
342) 앞의 책 권13, <雜著‧入學五圖>.
170 ∙ 국학연구 Vol.31
드시 선을 하고, 악의 경우 참으로 이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결단코
반드시 악을 하지 않는다. 성현의 말씀은 반드시 참으로 완전하게 꿰뚫어
보아서 성현의 가슴 속에서 한 자 씩 꿰뚫고 가듯이 해야 하며, 혹 가볍
든 혹 무겁든 옳기거나 바꿀 수 없어야 비로소 이치를 꿰뚫어 보아 마음
이 이치와 하나가 된다.343)
그는 39세이던 1865년 황재영黃在英에게 답한 편지에서 학문방법으로
격물궁리만을 언급하고 거경居敬을 언급하지 않은 데 대해 완곡하게 비판
하면서 양자의 병행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즉, 하늘에서 근원한 이치가
마음에 체현되고 일용의 사물 간에 드러나 있음을 말하면서, 거경은 공경
봉지恭敬奉持를 통해 마음의 이치를 보존하는 것이고 궁리는 학문사변學
問思辨을 통해 사물에 체현된 이치를 남김없이 파악하는 것으로 마치 수
레의 두 바퀴와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344)
역행도力行圖에서는 “세속의 학문이 성현의 학문과 같지 않은 것은 어
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성현은 바로 참되게 공부한다. ‘마음을 바르게 한
다’(正心)고 말했으면 바로 마음을 바르게 하려하고, ‘뜻을 성실하게 한
다’(誠意)고 말했으면 뜻을 성실하게 하려 한다. 몸을 닦고(修身)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齊家)이 모두 빈 말이 아니다. 요즘 배우는 이들은
정심正心을 말할 경우 다만 정심이란 말을 가지고 한 식경 읊조리기만 하
고, 성의誠意를 말할 경우 또 성의란 말을 가지고 한 식경 읊조리기만 한
343) 앞의 책 권117.
344) 西山集 권6 <書‧答黃應頀>, “道之原, 出於天, 而其體具於心, 而見於日用
事物之間. 語其大則洋洋乎峻極于天, 語其小則優優乎三千三百. 居敬者, 所以恭
敬奉持而存其大者也. 竆理者, 所以學問思辨而盡其小者也. 天理本自如此, 聖人
之敎, 亦因而品節之耳. 吾人生乎數千載之下, 不學則已, 學則豈舍此而他求哉. 且念此事, 兩下工夫, 不可偏廢, 誠如車輪鳥翼, 而所患人氣質不齊, 各以所便者
爲學.”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71
다. 수신修身을 말했으면 또 성현이 수없이 수신했던 것을 가지고 읊조릴
뿐이다”345)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며 참된 학문이란 말과 행위의 일치임
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
에 이른다.
흥락興洛이 주자어류의 「훈문인訓門人」 여러 편을 본 적이 있는데, 사
람에게 학문하는 방도를 가리킴이 진실로 한 가지 단초가 아니었다. 그러
나 큰 항목을 뽑는다면 입지立志‧거경居敬‧궁리竆理‧역행力行 네 가지일 뿐
이다. 반드시 입지한 뒤에야 마음에 표준으로 삼을 것이 있어서 나갈 방
향이 바르게 될 것이다. 거경은 뜻을 유지하여 궁리를 하는 근본이 된다.
궁리는 선을 밝혀 덕에 나가는 바탕이 된다. 역행은 자신을 돌아보고 밝
힌 이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중략] 진실로 이 네 가지의 순서에 따라
실제로 힘을 쓴다면 참으로 이미 문로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또 반드
시 논어‧맹자‧중용‧대학과 아래로 낙민洛閩의 책에 이르기까지 더
욱 부류를 미루어 확충하면, 아마 규모가 자세히 갖추어지고 지행知行이
모두 완전해져서 도에 나가는 데 가까울 것이다.346)
이상의 언급을 통해 그가 ‘입지立志‧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을 주
자 학문방법의 요체로 받아들이고 사서四書와 정주의 저술에 그러한 공부
를 미루어 적용하는 것을 자신의 학문방법으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의 학문 역정은 이 시기 확립천명한 방법론을 근간으로 해 깊이와
넓이를 더해 가는 과정이었다.347) 이를 주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해
345) 朱子語類 권8.
346) 앞의 책 권13, <雜著‧入學五圖>.
347) 제자 권상익은 행장에서 ‘입학오도’에 관해 “실로 선생이 일생 동안 공부한 요
령이었다”고 평가했고, 송준필은 壙誌에서 “致知와 力行을 아울러 지켜야 할 공부로
삼았다. 이른바 敬이라는 것은 끝까지 드러나고 은미하게 관통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때나 어느 것에나 있으므로 거기에 힘을 쓰지 않아도 마침내 이로써 덕
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세워지며 공이 온전해지고 사업이 커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
172 ∙ 국학연구 Vol.31
보면 다음과 같다.
1855년 29세에는 스승인 류치명이 호남의 지도로 유배감에 따라 스승
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 김건수金健壽‧이돈우李敦禹‧류치엄柳致儼‧권연하權
璉夏 등의 동료들과 봉정사에서 강회를 열어 근사록을 공부했고 사서와
심경‧근사록 및 주자朱子와 퇴계退溪 저서의 내용을 채록해 독서첨록
讀書籤錄을 편찬했다. 1857년 31세에는 스승인 류치명과 대학혹문에
대해 토론하면서 심心은 리기理氣의 합合이어서 허정虛靜하기도 하고 위
태롭고 움직이는 것이기도 하여 잡으면 간직되고 놓치면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므로 경敬으로써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면 비로소 일신과 만 가지 변화
의 주재가 되게 할 수 있음을 말했다.
32세인 1858년에는 스승과의 ‘구인求仁’의 방법에 관한 문답을 통해
“경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용서로써 남에게 미치면 사욕이 용납될 곳이 없
어서 마음의 덕이 온전해진다.348)는 주자의 말을 인용해 인의 실천에 있어
서도 경敬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40세인 1866년에는 「정자격치
설도程子格致說圖」‧「주자격치설도朱子格致說圖」 그리고 「경재잠집설도敬
齋箴集說圖」를 완성했는데, 이로써 28세에 천명한 입지立志에서 출발해 역
행力行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거경과 궁리의 두 방법에 관한 공부방법론을
온전히 갖추게 되었다. 45세인 1871년에는 스승의 문집을 교정했고, 47
세이던 1873년에는 서원훼철 이후 학문하는 기풍이 쇠퇴해가는 상황을 안
타까워하던 이돈우李敦禹, 권연하權璉夏 두 사람의 요청으로 성곡재사에
서 열린 강회에서 소학을 강했다. 1876년 50세 되던 해에는 임천서원臨
川書院에서 대학을 강했고, 봉정사에서 근사록을 강했는데, 권상익은
,
리 大山선생이 陶山의 적전을 계승하고 定齋선생이 선생께 전해준 것이다”고 평했
다.
348) 論語 <顔淵>편에 대한 ‘仲弓問仁’ 장에 대한 주자의 주석(“敬以持己, 恕以
及物, 則私意無所容而心德全矣.”).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73
행장에서 “이로부터 강석講席이나 독약讀約 등의 일이 있을 때 선생이 가지
않으면 행할 수 없었다”고 했으니, 그의 학문적 명성과 지역 내 유림에서의
영향력이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 1879년 53세에는 이돈우의 요청으로
고산서원 강회에서 대산집을 강했고 이듬해 겨울에는 봉정사에서 제자
들과 근사록을 강했다.
63세인 1889년에는 류도원柳道源(1721~1791)이 편찬한 퇴계선생문
집고증을 교정했고, 이듬해에는 학암고택鶴巖古宅에서 중용을 강했
고, 65세인 1891년에는 호계서원에서 「옥산강의玉山講義」를 강했으며,
67세인 1893년에는 스승인 류치명의 행장을 완성했다. 69세이던 1895
년 명성왕후 시해의 변고가 있어 의병 창의를 주도해 활동했지만 의병을
파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물러났으며, 72세이던 1898년에는 퇴계서
절요 간행을 의논하는 고산서원 모임에 참여했다.
이상의 연보를 통해 간략히 살펴본 대로, 김흥락 학문의 중심에 있는 것
은 ‘경敬’이다. 제자인 권상익은 스승의 행장에서 “성현의 격언을 초록하고
정자‧주자‧퇴계 세 선생이 경敬에 대해 하신 말씀을 추가하여 항상 눈으로
보며 마음으로 반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시를 지었다. ‘성현의 천 마디 말
씀’ 요점은 모두 경敬이니 자양紫陽의 옳은 목표 남긴 절조 있구나(聖賢千
言莫敬要, 紫陽端的有遺調).”고 했고, 또 “경敬은 한 마음의 주재이니 진
실로 경敬에 거할 수 있어서 이로써 함양한다면 모든 일에 기강紀綱이 있
을 것이며 밝은 천명이 빛날 것이다”고 했다.349) 이만도 역시 묘갈명에서
“선생은 영준하고 순수한 자질이 빼어났으며 간곡하고 독실한 뜻을 유지
하였다. 학문하는 데에는 효성과 공경을 주된 근본으로 하고 거경居敬을
중요한 표식으로 삼았다”고 했다.350)
349) 西山集 부록 권2, <行狀>.
350) 위의 책, 같은 권, <墓碣銘>.
174 ∙ 국학연구 Vol.31
김흥락은 경이란 일상의 동정간에 관철되어야 하는 공부임을 강조했다.
즉, 경은 내면의 수양에 있어서는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마
음이 방일하여 외물을 좇아 나아가는 것을 막고 부지불식간에 외물에 의해
사욕이 마음을 가리우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는 내면의 각성상태를 유지
함으로써 이후 일상의 행위에 있어서 외적 사태에 대한 올바른 대응을 가
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즉, 일상의 행위와 실천에 있어서 상황에 대해 늘
깨어있는 태도로 외부 사물과 사태의 정사正邪‧진가眞假‧의리義利 여부를
판단하고 마땅한 대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김흥락의 이러한 ‘경敬’ 사상은 당시 그가 목도한 조선사회의 문제에 대
한 대응과 관련해 내면적 수양검속과 더불어 밖을 향한 실천으로 나타
나기 마련이다. 당시 그가 목도한 조선사회의 현실은 국운이 어려움에 처
해 근본이 흔들리고 법도가 해이해지고, 관리들은 토색질에 여념이 없어
백성의 원망은 높아가고,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의 외환에 직면해 있었
다.351) 이러한 현실에 대해 그는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서구문물을 욕망을
부추기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배척했으며, 일본의 침략에 의해 초래
된 국가와 사회의 위기에 직면해서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의義를
실천하는 행동에 나서게 된다.
이단의 학문이 유학을 어지럽힘을 부끄러워하여 【당시에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와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을 나누어주어 가르치는 것
을 의논하였다】 고을의 유생들을 봉정사鳳停寺에 불러 모아서 가르치며
“지금 다른 나라의 삿된 가르침이 우리의 참된 가르침을 침범하여 능멸
하니 더욱이나 마땅히 내면의 수양과 실질적인 공부에 힘을 기울여야 합
니다. 여러분들은 각자 노력하고 노력하여 제 구구한 바람에 부응하여
주십시오”라고 하고서 근사록 「위학爲學」을 한 번 통독하고 각 장마다
351) 위의 책 권2, <疏‧辭寧海府使䟽>.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75
추론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환하게 깨우쳐 의심이 없도록 하였으니, 부자
께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공부가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았
다.352)
걱정하던 대로 1895년 을미년 8월에 일본에 의한 명성왕후 시해에 이은
단발령이 내려오자, 김흥락은 병중에도 불구하고 의병기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얼마후 군사를 파하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옴에 따라
문을 닫고 침잠해 다시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과 내면의 수양에 전념
하게 된다. 이후 1899년 10월 병이 위중해진 김흥락은 나라의 문호를 보
존하고 지켜가는 방법을 묻는 제자들에게 주역 기제괘旣濟掛 육사六四의
효사爻辭를 인용하여 “물이 새는 곳에 걸레를 두어 종일을 경계하는 것은
뱃사람이 걸레로 새는 배를 막는다는 것으로 주역周易에 나온다. 이것을
예비하고 근심을 막는 도로 삼아야 한다”고 함으로써 나라의 문호를 개방
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353) 그의 생각은 영해부사 사직소의 다음
과 같은 방책의 제시에 잘 나타나 있다.
전하께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경계하고, 널리 구제하는 도리를 잘 생
각하십시오. 권위와 기강을 바로 잡고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아, 인재를 모
으고 선발하여 어진 이에게 직책을 맡기고 재주가 능한 자에게 벼슬을 주십
시오.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여 백성의 숨은 고통을 구휼하고, 유학
을 높이고 도를 존중하여 방향을 바로 잡으십시오.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
을 줄이며, 마음을 수양하고 바깥의 욕망을 막아 진원眞元을 점차 회복하고
외물의 사특함을 스스로 떨어내십시오. 전하께서는 또한 자주 경연經筵에 나
아가야 마땅합니다. 유학儒學하는 신하를 맞아들여 근원을 단정하고 맑게
하는 데 더욱 뜻을 두신다면, 오늘의 일이 오히려 가망이 있을 것입니
352) 西山先生言行總錄, <西山先生敍述>.
353) 앞의 책 부록 권1, <年譜>.
176 ∙ 국학연구 Vol.31
다.354)
“마음을 수양하고 바깥의 욕망을 막아 진원眞元을 점차 회복하고 외물
의 사특함을 스스로 떨어내… 근원을 단정하고 맑게 하는 데 더욱 뜻을
두신다면, 오늘의 일이 오히려 가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김흥락을 포함
해 당시 위정척사의 입장에 선 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내수외양內
修外攘의 대응책이었다. 그리고 이는 수많은 그의 문도들이 그를 따라 위
정척사의 입장에 서서 일제에 대한 의병투쟁에 나서게 하는 배경이 되기
도 했다.
3. 「보인계첩」을 통해 본 서산 김흥락의 문도들
김흥락에게 배운 제자들의 명단은 보인계첩輔仁稧帖에 전해온다. 신
미년(1931년) 에 기록한 것으로 서산에게 집지한 제자들을 ‘성명/ 자字와
생년/ 본관과 거주지’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명록이 ‘보인계첩’으로
명명된 것은 스승의 뜻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355) 보인계첩에 기재된
문인은 총 705명인데, 이를 토대로 제자들의 개략적인 현황을 살펴보자.
우선, 제자들의 본관별 분포를 살펴보면 본관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354) 위의 책 권2, <疏‧辭寧海府使䟽>.
355) 서산은 일찍이 “오륜 가운데 朋友有信이 있는 것은 오행 가운데 土가 있는 것
과 같다. 오륜이 유지되는 까닭은 스승으로 삼을 만한 훌륭한 벗이 있기 때문이다”라
고 하면서, 세상이 쇠퇴하여 붕우간의 도가 사라지고 ‘輔仁’의 의리가 없어짐으로써
인륜이 민멸되어가는 것을 한탄했다. 평소 제자들이 모임을 결성할 뜻을 거듭 피력
했지만 만류하다 부득이 허락하고 ‘輔仁契’라고 명명하게 했다고 한다(西山先生言
行總錄‧西山先生敍述).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77
2명을 제외한 703명의 인물들은 총 110개 성씨로 분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의성김씨가 133인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안동권씨로 70인,
진성이씨가 51인, 전주류씨가 37인 순으로 나타난다. 그 외 고성이씨‧반
남박씨‧인동장씨‧영양남씨‧예안(선성)김씨‧안동장씨‧안동김씨‧무안박씨‧야
성손씨‧달성서씨‧전주최씨‧순흥안씨‧광산김씨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
며, 한양조씨‧영천이씨‧청주정씨‧원주변씨 등에도 적지 않은 수의 문인들
이 분포되어 있다.356) 보인계첩에 오른 성씨 중 풍산류씨 인물로는 류
도연柳道淵(1856~1926)이 유일한데, 대산실기 간행으로 최고조에 이르
렀던 서애계와 학봉계 양 문호 간 갈등이 초래한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이
다.357)
성씨별 분포에서 보는 것처럼 김흥락의 문도들은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북부 지역 문중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이들이 속한 성씨에는 이
지역 향촌사회와 유림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명문들이 망라되어 있
다. 그 가운데서도 의성김씨‧안동권씨‧진성이씨‧전주류씨 등이 다수를 차지
는 것은 일족의 성원으로서 가학을 계승하고자 했던 의성김씨는 말할 것도
없고, 여타 성씨의 경우도 세거지가 김흥락이 거주한 금계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혼맥과 학맥을 통해 당시까지 세의를 이어오던 문중들이었기 때문
이다.
이들의 거주지별 분포를 보면 거주지가 명기되지 않은 85명을 제외한
620명 가운데, 안동을 포함한 경북북부 지역이 558명으로 79.1%를 차지
356) 윤동원, 「보인계첩을 통해 본 서산 김흥락 문인들의 경향」, 디지털도서관 64,
2011, 78쪽.
357) 서산 김흥락은 이러한 갈등 중에서도 병파의 수장인 하회의 柳道性
(1823~1906)과 교유하며 1882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양파의 유생들을 모아 향음주
례를 열고 병파에서 김흥락을 병산서원 원장으로 추대하는 등 화해의 시도도 있었지
만, 양측의 화해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보인계첩의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병호간 갈등의 엄연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78 ∙ 국학연구 Vol.31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안동의 금계‧도촌‧망천‧명동‧박곡‧법흥‧송파‧
수곡‧운곡‧월곡‧임하‧주촌‧지례‧천전‧풍산‧하계 등에 거주한 문인이 많았다.
그 밖의 지역으로는 봉화 거촌‧유곡‧춘양‧해저, 서산 해평, 양양 주곡, 영해
원구, 예천 저곡, 의성 사촌 등에 거주한 문인들도 다수를 차지한다.358)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퇴계학맥의 영향권인 경북과 경남을 제외하고 강원‧
경기‧충청‧호남 등지 출신의 문도들도 20명에 이른다는 점이다.359) 이들
제자들은 대부분 김흥락이 만년에 이르러 그의 학문의 명성이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문하에 집지한 인물들로서, 김흥락의
당시 유림에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그 밖에 비록 보인계첩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가서 서산학맥이
타 지역으로의 퍼져나간 사례도 있다. 전남 장성 출신으로 호남을 대표하는
한학자였던 변시연邊時淵(1922~2006)과 충북 옥천 출신으로 한학계의
태두이자 교육자였던 임창순任昌淳(1914~1999)이 그들이다. 두 사람은
10대 때에 충북 보은의 서당인 관선정觀善亭에 들어가 봉화 출신의 겸산兼
山 홍치유洪致裕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360) 그가 바로 김흥락의 행장
을 지은 문인 권상익의 제자이므로, 변시연 임창순 두 사람도 역시 서산으로
358) 윤동원, 앞의 논문, 77쪽.
359) 강원도에서는 거진‧영월‧원주‧횡성에 걸쳐 7명의 문인이 배출되었고, 경기도에서
는 맹곡‧여주‧연천‧이천 등에 걸쳐 5명이 문인이 배출되었다. 충청도에서는 천안‧단양‧옥
천‧충주에 걸쳐 5명의 문인이 배출되었다. 호남지역에서는 장흥에서 남평문씨 집안의 文圭泰‧文守鎬‧文洪琪 3인이 집지했는데, 모두 장흥군 양촌리 같은 마을 출신이다.
이는 학봉 김성일이 나주목사 재직 시 대곡서원(경현서원)을 건립하고 배향되었기에
학봉이 끼친 여서와 관련이 있는 것일 수 있겠는데, 사실 여부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
요하다.
360) 관선정은 보은 선씨 집안의 宣政薰이 1926년에 설립한 서당으로 인재를 선발
해 기숙시키며 학문을 가르쳤던 곳인데, 경북 봉화의 유학자 홍치유를 초빙해 한학을
가르치게 했다. 홍치유는 1895년(고종32) 명성왕후 피살후 이강년이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고 한일합방 후 보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과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兼山集이 전하고 있다.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79
학맥이 닿아있다.
김흥락의 문인들 가운데는 그의 학문을 계승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침잠
해 학문연찬과 강학에 힘을 쏟아 문집을 남긴 인물도 많고, 과거에 올라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조용
히 앉아 학문에 침잠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특히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왕후 시해와 이어서 내려진 단발령은 국가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이르
고 유교에 기반한 전통문화와 가치를 크게 동요시키는 사건으로 인식되어
한가하게 독서와 성리설의 탐구에 전념할 수 없게 하였다. 그들이 스승에게
배운 바는 학문은 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행을 위한 것이고, 일상의 동정
動靜 간에 늘 깨어있는 의식과 마음상태인 경敬에 의거해 배움을 추구하고
배움은 반드시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러한 가르침에 훈도된 문인들이 목도한 당시의 현실은 스승이 말대로
‘죽고 사는 갈림길’인 의義와 리利 사이에서 의연히 의義를 따르는 실천을
요구했고, 그것은 그의 문도들이 대거 의병투쟁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
다. 특히 그들의 스승인 김흥락은 당시 안동지역의 학통과 혈통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문중의 인물은 물론이고 제자들의 참여는 두드러
졌다. 김흥락 문도들의 실천은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초기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선 의병 활동과 이후 3.1만세 운동, 교육계몽 운동, 파리장서, 망
명 독립투쟁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361)
다음의 <표 1>에서와 같이 문도들의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는 3.1운동과
파리장서를 통한 국제사회에 대한 독립청원 등에 참가함으로써 그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내 보였다. 안동 3.1운동에서 첫 시위가 3월 13일에 있은 이
361) 한편, 1910년 나라를 잃게 되자 국외로 독립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망명하고,
만주로 망명한 인물 가운데 김대락이나 김동삼이 핵심인데, 김흥락의 직계 문도인 김
대락의 망명 상황은 그의 일기인 白下日記를 통해 생생히 전해진다. 서산이 안동
독립운동의 대부라면, 석주 이상룡은 남만주 독립운동의 대부가 되었다.
180 ∙ 국학연구 Vol.31
상동의 단독 시위였고, 18일과 23일에 있은 본격적인 시위의 한 축이 송천
의 송기식에 의해 주도되었다. 3.1운동과 함께 유림들의 움직임도 본격화되
었는데, 성주의 김창숙金昌淑과 더불어 파리장서를 이끌어낸 인물이 김흥락
의 제자 이중업이다. 문도로서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로는 무실의 류연박
과 내앞의 김병식, 순흥의 김동진, 봉화 유곡의 권상원, 성주의 이덕후, 영양
의 이돈호, 안동 법흥의 이종기 등이 있다.
보인계첩에 오른 문인들 가운데 항일 구국의 실천에 나서 이러한 운동
에 참여한 인물은 모두 52명이고, 그 가운데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포상 받은 인물은 43명으로 다음과 같다.362)
362) 이는 이후 문집, 실기, 관련 일기자료 등을 대상으로 한 진전된 연구에 따라 늘
어날 가능성이 많다. 다만, 여기서 제시한 자료는 연구자가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를 검토해 파악한 현재까지의 현황이다.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81
성 명 훈 격 공적 내용 비고
이승희(李承熙) 건국훈장 대통령장(1977) 파리장서
김익모(金翊模) 건국포장(1996) 파리장서 金瀁謨
김호락(金浩洛) 애국장(95) 류시연 의진
김회락(金繪洛) 건국훈장 애국장(2001) 1896 안동의진
김윤모(金潤模) 건국포장(2008) 을미의병, 권세연 의진
이상희(李象羲) 건국훈장 독립장(1962) 임시정부 국무령 李相龍
류연박(柳淵博) 건국포장(1995) 삼일운동 파리장서
김진의(金鎭懿) 건국포장(2004) 1896 안동의진
권제녕(權濟寧) 건국포장(2002) 1896 안동의진
안효제(安孝濟) 건국훈장 애족장(1990) 만주 항일운동
이규홍(李圭洪) 건국포장(1995) 이강년 의진 참여‧군자금모집
김대락(金大洛) 건국훈장 애족장(1990) 대한협회 안동지회‧신흥강습소
이긍연(李兢淵) 건국포장(2002) 을미의병
김병식(金秉植) 건국훈장 애국장(1995) 협동학교‧파리장서
류창식(柳昌植) 건국포장(1995) 을미의병
이중업(李中業) 건국훈장 애족장(1990) 을미의병‧파리장서
김좌동(金佐東) 건국훈장 애족장(1993) 파리장서‧군자금모집 金世東
노상직(盧相稷) 건국포장(2003) 파리장서
이준구(李浚久) 건국훈장 애국장(1990) 을미의병
안효준(安孝俊) 건국훈장 애국장(1991) 광복군
김동진(金東鎭) 건국훈장 애국장(1993) 독립의군부‧파리장서‧군자금모집
안재덕(安在德) 건국포장(1997) 이강년 의진
이덕후(李德厚) 건국포장(1995) 파리장서
이용호(李用鎬) 건국훈장 애족장(1990) 만세운동
박우종(朴禹鍾) 건국훈장 애족장(1990) 경학사‧군자금모집 朴慶鍾
김상종(金象鍾) 건국훈장 애족장(1990) 을미의병
김영모(金泳模) 건국훈장 애족장(1995) 이강년의진‧파리장서‧군자금모집
권상익(權相翊) 건국훈장 애족장(1990) 파리장서
이용희(李龍羲) 건국훈장 애족장(1990) 만세운동 李相東
이봉희(李鳳羲) 건국훈장 독립장(1990) 신흥무관학교
송준필(宋浚弼) 건국훈장 애족장(1990) 파리장서
김창근(金昌根) 대통령표창(1992) 2차유림단사건
김종식(金宗植)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협동학교〮‧신흥학교‧〮통의부‧〮정의부 金東三
권상원(權相元) 건국포장(1995)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서
김상직(金相直) 대통령표창(1992) 만세시위 金尙直
이돈호(李暾浩) 건국포장(1995) 파리장서
이운호(李運鎬) 건국포장(2003) 권세연 의진 참여
김연환(金璉煥) 건국훈장 애족장(1990)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김용환(金龍煥) 건국훈장 애족장(1995) 이강년 의진‧군자금 조달
김수욱(金壽旭) 건국포장(1995) 병신창의
송기식(宋基植) 건국훈장 애족장(1990) 삼일만세운동
조홍기(趙鴻基) 건국훈장 애국장(1990) 전기의병‧경학사‧신흥학교 趙萬基
이능학(李能學) 건국포장(1995) 파리장서
<표 1> 서산 김흥락 문도의 항일활동 포상 현황
182 ∙ 국학연구 Vol.31
그 외 포상에 들지 못했지만 구국 및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참여한 문도로
는 서산의 조카인 김응식金應植‧정필화鄭弼和〮‧김운락金雲洛‧〮김장환金璋煥‧〮
김진수崔炳埰〮‧김홍락金鴻洛‧류연갑柳淵甲〮‧안승국安承國‧〮안찬중安燦重363) 등
이 있다.
4. 서산 김흥락 문도들의 현실인식과 대응
1) 위정척사에 의거한 현실인식과 대응
19세기 조선의 개항을 통한 서구문명의 유입과 일본에 의한 침략에 대
응해서 나타난 최초 대응의 주류는 위정척사운동이었다. 위정척사운동은
안으로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밖으로 서구문명이나 일본의 침탈을 배
척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위정척사란 도통道統을 중시한 유학에서 유
학적 진리를 기준으로 정正과 사邪를 나누어 정학正學을 옹위하고 사학邪
學을 배척하려는 이념을 말한다. 이 시기 위정척사운동은 조선시대의 화
이론적 세계관이 일본 등의 외부 침략에 직면해 나타난 현실 대응이었
다.364)
363) 김응식 : 김승락의 아들이자 김흥락의 조카로 1896년 안동 전기의병에 참여,
정필화 : 1896년 안동 을미의진에 권제녕과 함께 의병장 권세연의 서기로 종사(권제
녕, 義中日記), 김운락 : 의성김씨 김진경의 아들로 안동 금계에 살았는데 충의사에
참여, 김장환 : 의성김씨로 1908년 3월 15일 재경 영남인사들이 창립한 嶠南敎育會
의 교육구국 운동에 참여, 김진수 : 봉화 비진에 살았는데 충의사, 교남교육회 등의 활
동에 참여, 김홍락 : 의성김씨 권진억의 아들로 1895년 안동의진에 참여, 류연갑 : 전
주류씨로 협동학교를 통한 교육구국 활동에 참여, 안승국 : 순흥안씨로 안동시 가구리
에 살았는데, 광복회에 군자금을 지원, 안창중 : 순흥안씨로 안동 가구리에 살았는데,
교남교육회, 동양학교를 통해 교육구국활동에 참여.
364) 중국에서 화이론은 중국이라는 지리적 기준과 한족이라는 종족, 유교라는 문화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83
김흥락 사후 그의 뜻을 받들어 함께 한 제자들은 의병활동을 통해 조선
사회가 직면한 위기 상황에서 유학의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고 일본에 의
해 흔들리는 체제의 수호를 위한 실천에 나서게 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위정척사 사고에 근거한 유학적 실천이고 현실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흥락 문인들의 항일투쟁은 당시 다른 지역의 어느 학파들보다 두드러
진다. 비록 그의 항일투쟁은 짧은 기간에 그쳤지만, 그가 보여준 실천은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속한 의성김씨 그리고 혼반으로 연결된 안동지역
의 명문가에서 차지하는 종손으로서의 중심적 지위, 정재학파의 적통으로
서 당시 유림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으로 인해 문중과 문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유림에 끼친 영향 때문이었다. 우선, 그의 일족인 의성김씨 출신
중에서는 호계통문의 발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윤모金潤模, 1차 의진의
김응식金應植, 안동 2차의진 참여자로는 의병대장 김회락金繪洛, 김도화 의
진의 척후장으로 활동한 김진의金鎭懿‧김호락金浩洛‧김용환金龍煥 등이 대
표적 인물이다. 1910년 이후 만주로 망명한 문중출신 인사로는 김종식金宗
植(김동삼)‧김연환金璉煥이 대표적이다.365) 한편 파리장서를 통한 독립청
원 서명에 참여한 인물로는 김익모金翊模, 내앞의 김병식金秉植 등이 있다.
서산 김흥락이 작고한 뒤 독립운동은 그의 문중 후예들만이 아니라 제
자들의 몫으로 넘어갔다. 중기의병으로 다시 불붙은 문도들의 투쟁은 계
몽운동, 만주망명과 독립군기지 건설 등으로 나타나 김흥락의 뜻을 이어
적 기준이 포괄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조선의 유학자들도 그러한
기준으로 중화와 이적을 구분했지만, 18세기 이후 ‘명에 의한 중화 회복’이 현실적으
로 불가능함을 인식하면서부터 조선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화 문화를 계승했다
는 이른바 ‘소중화’론을 강조하게 되는데, 19세기 서구와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 논리
로 ‘문화적 화이관’을 내세우게 된다.
365) 김종식은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통합체인 통의부에 참여하고 정의부의 참모장을
맡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했고, 김연환은 1912년 망명후 무장투쟁에 필요한 폭탄
제조와 국내외 공급, 임시정부 자금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184 ∙ 국학연구 Vol.31
가게 된다. 전기의병으로는 류창근‧류연박‧김상종 등이 있고,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통한 계몽운동에는 김병식‧김종식‧김대락‧이상룡 등
이 참여해 교육과 계몽활동을 통해 근대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데 기여했
는데, 이후 이들은 대부분 만주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계속해 갔다. 한편
다수의 김흥락 문인들은 국내에서도 3.1운동과 파리장서 독립청원에 참
여했는데, 송기식과 이상동이 만세운동의 핵심인물로 참여했고, 이중업‧
류연박‧권상원‧송준필 등은 파리장서 서명에 참여했고, 이승희는 만주와 연
해주에서 한흥동 건설에 참여했다.366)
서산의 문인들의 그러한 현실대응은 안동지역과 국내외 다른 지역에서
의 활동으로 대별된다. 초기 의병활동에서 계몽운동을 거쳐 3.1운동에
집중되고, 1910년 국권상실 이후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의
독립운동으로 지어진다. 그 가운데 근대 전환기인 김흥락의 말년 그리고
사후 그의 제자들이 참여해 실천한 1차적 대응인 위정척사 운동은 유학
적 정통론에 입각해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이단異端’과 ‘사邪’로 규정해
배척하고 유학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대응이었다. 그렇게 볼 때 당시의 위
정척사는 주자학 일존주의一尊主義의 전통 속에서 주자와 퇴계의 도통 계
승을 자부했던 이들이 지녔던 정통과 이단에 대한 준엄한 가치분별 의식
이 유학 중심의 동아시아 가치와 일본으로 대표되던 서구가치가 충돌하던
당시 상황에서 드러난 결과이다.
「보인계첩」을 통해서 살펴본 독립운동에 헌신한 52명의 문도들은 물론
이고 학문 탐구와 강학에 충실했던 문도들 모두 그 실천의 방법은 달랐지
만 유학의 도와 그에 근거한 체제를 온전히 지키고자 했던 것은 동일했
366) 이상의 김흥락 문도들의 항일투쟁에 관한 내용은 김희곤의 논문 「서산 김흥
락의 의병항쟁」(한국근대사연구 15, 한국근대사학회)의 27~34쪽의 내용을 재인
용한 것임.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85
다. 즉, 그것이 스승의 말씀을 포함한 선현의 가르침에 대한 탐구와 강학
을 통한 유교적 가치의 수호라는 소극적 방법이든, 현실의 모순에 대응해
의병활동을 후원하거나 직접 참여하는 적극적 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옳은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배척하려는 대응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
다.
여기서는 서산 김흥락의 문도들 중에서 석주 이상룡과 해창 송기식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들이 전통적 주자학자에서 출발해 시대의 요구에 부응
해 의병활동과 3.1운동을 포함한 항일투쟁에 나서고, 국권상실 이후 다시
해외 무장투쟁과 유학의 혁신 등을 통해 현실에 대응한 양상과 그러한 실
천의 배경이 된 스승 김흥락의 사상적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김흥락 문도들의 현실대응을 석주 이상룡의 경우를 통해서 살펴
보기로 하자. 이상룡은 의병활동이 실패로 끝나는 1907년까지는 대체로
그의 스승에게 물려받은 대로 유학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토대로 한 현실
인식과 대응을 나타낸다. 그는 일찍이 1886년 과거에 실패한 후 학문에만
전념할 것을 결심하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는데, 이때 그가 관심을 기울
였던 주제는 입지‧치지‧거경‧궁리‧역행 등 성리학적 수양과 실천의 문제였
다. 이는 그의 스승인 김흥락이 제시한 학문방법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다.
이상룡은 그러한 공부 과정을 거치면서 당시 시대적 혼란상의 원인을
예학의 쇠퇴라고 진단하고, 친족들과 함께 향음주례를 실천하고 예학에
관한 글들 쓰는 등 전형적인 주자학자이자 퇴계학파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가 1884년과 1900년 복제服制 개혁을 반대하고 서원의 재건을
촉구하는 상소에 참여하고, 1890년부터 190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 향
약을 실천하는 것도 그러한 유학적 가치에 입각해 현실을 구체하려는 시
도들이었다. 또한 그가 을미사변으로 촉발된 1895년의 의병운동과 1905
186 ∙ 국학연구 Vol.31
년 의병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1907년에는 가야산 의병기지 건
설에 참여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현실인식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복제개
혁에 대한 반대와 서원의 재건을 통한 유교적 가치의 교육에 대한 주장이
소극적 위정척사이라면, 의병운동의 참여는 위정척사의 적극적 실천이었
다.
서산 김흥락의 의병활동 참여를 이은 문도들의 의병활동과 3.1만세 운
동, 파리장서 참여 등으로 나타난 위정척사의 철학적 기반을 살펴봄으로
써 사상과 실천의 상관관계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우선, 실천으로서의
위정척사는 대체적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사상적 지반으로 하고 있다. 앞
서 언급했듯 이들은 리기理氣 관계의 정의에 있어서 ‘불상리不相離’보다
는 ‘불상잡不相雜’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며, 그러한 불상잡不相雜으로서의
리理에 대해 그 자체에 운동성과 작위성을 지니는 능동적 원리로 이해된
다. 리理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핵심적 의도는 기氣에 대한 리理의 우위성
은 물론이고 사邪로부터 지켜야 할 리理에 절대성과 초월성 부여하는 동
시에 능동적인 작위성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위정척사론자들은 리기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통해 리와 기를 각
기 형이상과 형이하, ‘지선지중至善至中과 편의과불법偏倚過不及’, ‘주主
와 종從’, ‘상上과 하下’의 가치 차별적 관계로 분속시킴으로써 사회적 질
서로서의 상하의 구분이나 정통正統과 이단異端, 진리와 거짓을 엄격히
구분하는 존재론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론에 근거
한 가치관이 당시의 국제정세에 투영되면 피아彼我, 즉 이단인 양이洋夷
와 정통인 조선(中華)의 대립이라는 이원적 구도의 이해로 나타나게 된다.
위정척사론자들은 서기西器에 대해 그것을 기기음교奇技淫巧로 규정하
고 반대하는데, 여기에는 도덕적 원리(義)라는 정신적 가치와 이익(利)이
라는 물질적 가치에 대한 유학 고유의 관점이 개재되어 있다. 흔히 ‘의리지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87
변義利之辨’으로 불리는 이러한 입장은 이익과 욕망의 부정적 경향성을 강
조한 맹자이래로 유학의 도덕실천에서 근본 전제이다.367)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리지변은 성리학에 이르면 금욕주의적 경향으로
까지 진전된다. 즉, 내면적 덕성의 배양을 중시하는 성리학에서는 욕망 추
구의 대상이 되는 외물外物은 수양의 주체에게 도덕적 갈등 상황을 촉발
하고 때로는 악에 이르게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368) 이러한 사
유는 위정척사파들의 서기西器에 대한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 위정척사론자들은 서구문물과 학문을 도입해 자강
을 도모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진정한 자
강의 길은 부정적 욕망을 촉발하는 물질적 이익의 추구가 아니라 유학적
가치를 높이고 그에 의거해 내면의 덕을 닦아 도덕적 역량을 최대화 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군주가 모범이 되어 도덕적 각성과
수양을 행하고 모든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結人心)이다. 앞
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문제에 대해 김흥락이 “마음을 수양하고 바
깥의 욕망을 막아 진원眞元을 점차 회복하고 외물의 사특함을 스스로 떨
어내십시오. […중략] 유학儒學하는 신하를 맞아들여 근원을 단정하고 맑
게 하는 데 더욱 뜻을 두신다면, 오늘의 일이 오히려 가망이 있을 것입니
다”369) 고 한 것은 그것이다. 이는 유학적 가치에 의거한 군주를 포함한
모든 사회성원들의 내면적 덕성의 함양을 일체 문제 해결의 일차적 출발
점으로 삼는 유학적 도덕중심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367) 박경환, 「동아시아 유학의 근현대 굴절양상」, 국학연구 4, 2004.
368) 성리학은 理氣論的 사유에 의거해 道(혹은 理)와 구체적 사물(器)에 대해 차
별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道心과 人心, 天理와 人欲, 道와 物, 理와 氣, 道와 器 등
의 구분이 그것이다.
369) 西山集 권2, 「疏‧辭寧海府使䟽」.
188 ∙ 국학연구 Vol.31
앞서 살펴본 바, 위정척사론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사상적 요
소들, 예를 들면 리기 ‘불상잡相雜’의 논리를 통해 선과 악 사이에 뚜렷한
가치차별을 확보하고 도덕적 실천의 주체인 심心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측
면들은 이러한 그들의 현실대응책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덕성의 함양을 위해서도 부정적인 욕망을 촉발시켜 마음을
흐리게 하는 ‘기기음교奇技淫巧’의 서기西器와 서학을 금하는 것은 필수
적인 조치이다.370)
2) 동도서기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
김흥락 문인들의 항일운동은 의병활동에서 계몽운동을 거쳐 3.1운동에
집중되고, 이후 1930년대까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으로 이
어진다. 문도들의 의병활동은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에 이은 1910년의
경술국치로 국운이 결정적으로 기울고 그에 반해 유학에 의한 현실의 모
순의 타개가 난망해짐에 따라 다양한 선택으로 갈라지게 된다. 즉, 1910년
국권의 상실과 더불어 문도들은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포함한 다양한 현
실대응에 나서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협동학교를 운영하던 김대
락과 김동삼 그리고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주도한 이상룡, 성주의 이승희
등이 각기 만주 등지로 옮겨가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또한 국
내에 남은 문인들은 3‧1운동과 파리장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일본에 항거했
다. 송기식과 이상동은 3‧1운동에 참여했고, 이중업‧유연박‧권상원‧송준필
370) 위정척사파의 이러한 인식은 중국에서 ‘완고파’의 道器에 대한 인식 및 방
책의 제시와 일치한다. 예를 들어 倭仁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道는 禮義를 숭상
하는 데 있지 권모를 숭상하는 데 있지 않다. 근본적인 것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
의 마음에 달려 있지 기술에 달려 있지 않다며 西器의 수용에 반대한다(倭仁, 「
大學士倭仁折」).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89
등은 파리장서에 참여했으며 이승희는 한흥동 건설에 참여했다.
이제 이들은 유학적 가치에 대한 수호와 이단인 서양의 문물과 제도에
대한 배척의 배타적 태도에서 벗어나 교육, 제도는 물론이고 새로운 사조
등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해 현실에 한계를 드러낸 유학의 부족한 면을
보완하고 독립을 위한 자강의 역량을 키우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러한
모색의 근저에는 동양의 가치 즉 유학(東道)을 지키되 서양의 문물(西器)
수용을 통해 이를 보완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사고가 놓여있다.
유학 내부, 그 중에서도 김흥락의 문도들에 의한 그러한 대응의 변화로
는 내앞의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통한 교육과 계몽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 두드러졌다. 협동학교에는 김대락이 내놓은 집에서 청계종손 김
병식이 초대교장으로 김동삼(김긍식)이 운영으로 참여했고, 대한협회 안동
지회는 이상룡에 의해 결성되어 당시 사람들에게 공개토론의 장을 제공해
민족의 현실 문제를 파악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들의 이러한 선택은
유학적 가치에 대한 신념은 그대로 지닌 채, 그 이전 스승인 김흥락의 서구
문물에 대한 배척적 태도와 달리 서구적 교육제도 등의 도입을 통해 유학
적 가치의 현실적 대응을 모색한 결과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동도동기적
입장에서 동도서기적 입장으로의 선회였다. 즉, 유학적 가치에 대한 신심
을 지니되 유학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수양과 전통적인 학문만을 통해서는
당시의 문제를 타개할 수 없음을 자각한 새로운 모색의 결과였다. 또한
그것은 전통적으로 유학이 추구하던 치국평천하의 사회적 기능을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 서구의 제도와 사조를 수용하고 새로운 서구식 교육과 계
몽을 통해 실천하려는 모색이기도 했다.
김흥락 사후 변화된 국내외 정세에 대응한 문도들의 선택은 국내에서의
서구적 문물의 수용이라는 타협을 통해 교육과 계몽을 통한 구국의 모색,
유교종교화를 포함한 유교혁신을 통한 새로운 대안의 모색, 새로운 사회
190 ∙ 국학연구 Vol.31
체제에 대한 전망을 전제한 해외 망명의 항일투쟁 등으로 나타난다.
석주 이상룡을 포함한 그의 문도들이 초기 위정척사의 의병운동으로부
터 벗어나 교육계몽, 유교혁신, 망명 항일투쟁 등 다양한 선택으로 시대의
문제에 대한 대응을 넓혀가는 것은 1905년의 을사늑약과 이를 이은 1910
년의 국망을 계기로 유학의 가치를 배타적적으로 고수하던 위정척사의 한
계를 인식하면서 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도 김흥락의 문도들은 한결같이
단발령에 항거한 을미의병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위정척사 유림이
었다. 그 이전시기 위정척사 활동이 학파적 차원의 일사불란한 대응이었
다면, 이후 이들의 다양한 선택은 개별 인물들의 자각에 의한 주체적 선택
과 결단의 산물이었다.
석주 이상룡의 경우를 보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인 의
병활동에 나서 1만5천냥을 들여 가야산에서 기의한 차성충과 함께 정예
부대를 양성했고, 이병장 신돌석 등과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의병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조직이 드러나 실패로 끝났고, 이상룡의
지원 아래 경북 동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돌석도 피살되고 만다. 이후 그
는 의병항쟁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구국방안을 모색하던 중 교
육과 계몽운동에 투신함으로써 1907년경 혁신유림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훗날 이 시기 자신의 사상적 변화의 계기에 대해 “50여년
간의 공자의 맹자의 글을 읽으며 명주실처럼 얽힌 의리義理를 남김없이
분석했지만 결국은 공언空言에 지나지 않았다”371)고 하고, 또 “시골의 암
혈 속에 살면서 승패를 점쳤으나 한 번도 맞추지 못했으니 틀림없이 시국
에 어두워서 그렇다”372)고 하면서, 자신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 무지했음
을 회고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동서양의 여러 나라에 관한 서적을 구입
371) 석주유고, 20쪽.
372) 위의 책, 334쪽.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91
해 읽어 세계의 대세와 일본의 실체를 이해한 후 서구문물의 수용과 그를
통한 자강론에 입각한 구국계몽의 길로 옮겨가게 된다. 이는 그의 스승인
김흥락이 철저한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서구의 문물과 사조를 배격하던 데
서 벗어난 것이다. 그가 1907년 협동학교 설립을 지원하고 1909년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해 활동하게 된 것은 그러한 전환의 결과였다.
협동학교는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와 밀접한 관
계를 맺으면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교사로 활동한 이관직‧김기수‧안상덕
등은 신민회의 추천에 의해 파견되는 등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지원을 받
고 있었다. 그가 밝힌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 취지는 다음과 같다.
취지를 말한다면 정치고 교육이고 산업이며, 목적을 말한다면 나라를 보
존하는 것이고 집을 보존하는 것이고 종족을 보존하는 것이다. 본유의 구
학을 열심히 배우고 미비한 신법을 참작하고 연구하여 정신을 단합하고
지덕을 병진하여 대한의 자립권을 부흥시키고 회복하고자 한다.373)
그가 추진한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은 처음에는 보수적인 유림의 반대
로 어려움이 많았으며, 일제 경찰의 방해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를 따르는 시민들의 시위로 석방된 이후 지속적인 계몽활동을 통하여 대
한협회 안동지회는 드디어 1909년 3월에 결성되고 그는 창립대회에서 회
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협회 안동지회는 서양 근대사상과 제도를 수용하
면서 민주주의를 훈련함으로써 민족을 계몽시키는 데 그 주된 목적을 두
고 있었다. 즉 지방자치를 실제로 추진하는 것을 계획하고 주민의 정치참
여 훈련을 위하여 자유토론을 통한 의사결정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또한
항일 무장 투쟁을 염두에 두고 군사단체 조직을 위한 의용병 양성 계획을
373) 위의 책, 207쪽.
192 ∙ 국학연구 Vol.31
추진하였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는 1910년 나라는 망했고, 이는 그에게 실력양성
론에 입각한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이라는 일본에 대한 유화적 대응책이 가
진 한계를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가산을 정리
해 1911년 김대락 등과 함께 망명길에 나서 서간도에 정착하고 무장투쟁
을 통한 독립과 국권회복에 주력하게 왼다. 이후 그는 한인의 자치와 무장
투쟁의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는데, 경학사를 설비해 사장으로 취임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학교를 세웠다. 신흥학교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
전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중추적인 기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 그는 그간 축적한 서학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국권회복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더욱 세련화시키고 다져가게 된다.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중
화주의로부터 탈피하고 계약론에 근거한 새로운 국가관을 수용하고, 신분
적 사고에서 벗어나 대중의 역량을 중시하며 양육강식의 사회진화론에 입
각해 민족의 역량을 키울 것을 강조하는 강한 민족주의 등은 그러한 기초
위에서 나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실인식과 대응의 근저에는 여전히 유학적 가
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유학의 현실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서학
을 통해 보완하려 한 것이 곧 유학에 대한 부정이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유학의 토대 위에서 서양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
여 이를 현실에 유효하게 대응하는 체계로 재구성하려 한 것이기 때문이
다. 이는 그가 서구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춘추의 삼세론三世論과 예기
禮記의 대동사회론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상룡의 이러한 시도에 일관되는 생각은 현실의 문제에 입각해 유학의
출로를 모색하고 그를 통해 구국과 독립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는 유학의 모든 명제들이 시대를 넘어서 언제나 불변의 진리인 것은 아니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93
므로 시대의 요구를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옛사람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옛사람들 또한 학설을 통해 당
시의 폐단을 구제하려고 했을 뿐이고 따라서 사서육경이 결코 오늘에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374) 이러한 그의 생각의 저변에는 유교
적 가치가 지닌 의의를 인정하되 그것이 현실적으로 봉착한 한계를 동서
고금의 여러 사상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
하고 유효하며 시대에 부응하는 사상으로 혁신하려는 의도가 깔려있
다.375)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그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에 이르게 된다. 그는 전통적으로 화이
론의 근거가 된 춘추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화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
디까지나 예의禮義의 유무이지 종족이나 지역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당시
사대주의적 중화사상을 고수하던 유림을 비판한다.376) 그리고 그러한 관
점에서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단군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지는 역사를 정통으로 간주한다.377)
또한, 이상룡은 이를 통해 전통적 신분제의 한계에서 벗어나 사민평등
의 평등적 인간관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374) 위의 책, 213쪽.
375) 이러한 개방성은 시대적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의 개방적 학문관도 작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心卽理의
주장을 담은 한주 이진상의 문집 간행과 관련된 서산 문도들의 일반적인 반응과 대비
되는 그의 태도였다. 그는 스승에게 이진상의 심즉리설을 이단시하고 격렬하게 배척하
던 당시 유림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편지를 스승인 김흥락에게 보냈으며 이진상의 제
자이기도 했던 南健에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을 제시하도록 했다.
376) 앞의 책, 209~211쪽.
377) 그가 국권회복의 터전으로 만주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무장투쟁의 독립운동을
도모한 것 역시 그러한 사관에 따라 만주가 우리의 고토古土라는 인식을 지녔기 때문
이다.
194 ∙ 국학연구 Vol.31
설립하면서 “회원은 신사상공紳士商工을 막론하고 어떤 직업에 있든 협회
내에서의 권리와 의무가 모두 평등”378)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만주에서의
경학사 결성을 시작으로 추진한 일련의 결사운동에서 대중적 역량을 강조
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해방된 사회를 대동사회로 묘사하기고 했다.379)
또한 그는 춘추의 공양삼세설公羊三世說과 예기의 대동사회론과
사회주의의 역사발전관과 이상사회에 관한 사유를 접목해 ‘거란세據亂世-
승평세昇平世(小康)-대동세太平世(大同)’의 직선적 발전관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학적 역사관을 주장한다.38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상룡은 전통적인 주자학자이자 척사유림
출신으로 출발해 1895년 의병활동에 참여했으며, 1907년에는 동도서기
적 혁신유림으로 애국계몽 운동에 참여하고, 1911년 이래 193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개월의 짧은 임시정부 활동기를 제외하고 무장 독립투쟁에
투신하는 삶을 살았다. 비록 혁신유림으로서 유학의 현실적 한계에 주목
하고 서양의 새로운 사조와 사상을 수용하긴 했지만 그의 현실대응의 저
변에는 가학과 스승인 김흥락의 가르침을 통해 온축한 유학적 사유가 깊
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선, 그가 조부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뜻을 견고하게 세움’(立志)
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은 평생토록 변치 않는 일관된 실천을 가능하게
한 강고한 의지를 부여하는 원동력이었다.381) 또한 김흥락은 학문방법론
378) 앞의 책, 204쪽.
379) 위의 책, 133쪽.
380) 위의 책, 133~136쪽.
381) 그는 일찍이 스승에게 올린 편지에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천하 영웅재사가 어지 끝이 있으랴만, 끝내 성취하지 못한 것은 모두 뜻
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는 조부 이종태의 가르침을 언급하며 학문에서 立志의 중
요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석주유교上 ‘西山先生別紙’), 입지는 김흥락의 학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95
에서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수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경敬’을
제시했는데, 그가 스승과 주고받은 여러 편지에서 ‘경’의 중요성에 관해
의견을 개진하고 가르침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의병활동의 참여와 실패,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설립과 실패에 이
어 국망의 참담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도 그는 다시 떨쳐 일어나 만주 망명
을 통한 항일투쟁의 길로 나서는데, 이러한 결행의 장면에서도 그의 스승
이 드리운 가르침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든 바른 길을 택해야함은 예로부터 우리 유가에서 날마다 외
다시피 해온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연연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능히
결단하지 못해서이며, 마음에 두려운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능히 단정하
지 못해서이다. 다만 대장부의 철석같은 의지로써 정녕 백번 꺾이더라도
굽히지 않는 태도가 필요할 뿐이다. 어찌 속수무책의 희망 없는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382)
김흥락은 「입학오도」의 ‘입지立志’에서 주자의 말을 인용해 이익(利)과
의로움(義) 간의 선택이 죽음과 삶의 갈림길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앞에
두고 오직 의로움을 택해 과감하게 결단해 굳건히 나아가야 할뿐임을 강
조한 바 있다.383)
또한 이상룡은 정통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에서 출발했지만 그
한계를 현실 속에서 절감하면서 50에 가까운 중년에 이르러 사유의 혁신
을 추구함으로써 성리학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동양사상 전반에
대한 이해로 넓혀가고 서양사상과 과학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까지도 수용
문방법론에서 출발점으로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382) 석주유고, 「서사록」
383) 주 16)‧18) 참조.
196 ∙ 국학연구 Vol.31
해 우리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폭넓은 사상적‧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
이 되었다.384) 이처럼 그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실천을 통해 이론의 현실
적합성과 타당성을 검증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갔다. 전통적 성리
학자로서 위정척사에 근거한 의병활동, 동도서기적 입장에 선 교육과 계
몽을 통한 자강의 추구, 다양한 동서양 사상과 과학기술의 수용을 토대로
한 항일 독립투쟁과 이상사회를 목표로 한 공동체 구상과 실험 등 근현대
민족사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이상룡의 실천적 대응의 토대는 부단한 모
색을 통해 얻은 앎이었다. 앎과 실천의 합일을 추구한 이러한 사상적 특
징은 그가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문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배움은 힘써 실천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85)
이는 거경居敬을 토대로 지식의 추구인 궁리窮理와 현실에서의 실천인
역행力行을 강조한 스승 김흥락의 학문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상룡은 초
기 전통 성리학의 둥지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물과 사조를 수용함으로써
스승인 김흥락의 위정척사 사유의 한계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다양한 변
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러한 변화의 시도
는 배움과 실천의 합일을 강조한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었다.
한편, 이 시기 김흥락의 문도들 중에서는 양육강식의 국제 경쟁에서 살
384) 임종진, 「석주 이상룡의 공교미지에 대한 분석」, 철학논총 44, 새한철학회.
385) 국역석주유고 상권, 278쪽.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97
아남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유학의 종교화를 중심으로 한 유학혁신에 주
목한 인물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 역시 전통유학의 가치를 긍정하되 동
도서기적 절충을 통해 새로운 출로를 찾으려 했던 사상적 모색과 실천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이상룡의 초기 활동에서 두드러진 교육과 계몽, 그리고 조
국의 독립과 새로운 체제의 실현을 위한 노력이 전통 유학이 지녔던 치국
평천하로 대표되는 사회적 기능의 회복을 위한 시도라고 한다면, 유학
종교화는 천주교를 비롯한 서구 기독교의 도전에 직면했던 유학이 그 토
대가 되는 수신의 측면을 새롭게 강화함으로써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
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386) 이는 국권상실로 나타난 위정척사에 의
거한 의병활동이 노정한 한계에 대한 인식과 개항이후 기독교로 대표되
는 근대종교의 급속한 파급을 계기로 자강에 있어서 정신적 요소 내지는
종교의 힘이 지닌 중요성에 주목한 것이다.387)
이 시기 중국과 조선에서 활발하게 추진된 유학 종교화의 연원은 청말
강유위康有爲(1858~1927)가 중국의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주창한 공교
운동이다. 강유위의 공교운동은 전통유교의 방향을 서구의 기독교 형태로
전환한 활동으로, 기독교를 서구 부국의 기틀로 보고 유교를 종교화함으
로써 종교가 가진 신앙의 힘으로 혼란에 빠진 민족정신을 결집하고 구국
을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이러한 강유위의 유교 종교화운동
386) 조광, 「개항 이후 유학계의 변화와 근대적응 노력」, 국학연구 5, 한국국학진
흥원, 90쪽.
387) 당시 의병투쟁은 1908년 격전회수 1,415회에 참여인원 69,828명으로 정점
에 도달했다가 1910년에 이르면 격전회수 147회에 참여 의병수 1,891명으로 줄어
들다 국권상실 후 1911년에는 333회에 216명으로 격감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교
세는 1900년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쳐 56,110명이었던 것이 1910년에 이르면
213,987명으로 4배 가까이 늘어난다(조광, 앞의 논문, 93‧95쪽).
198 ∙ 국학연구 Vol.31
은 중국과 비슷한 실정의 우리나라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어 빠르게 수
용되었다.388) 강유위는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배에 놓인 조선의 진로에
대한 이병헌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다.
국가의 명맥은 민족의 정신에 있는데, 민족을 단결시키고 정신을 유지하
는 방법은 하나뿐으로 종교에 있다. 중국과 조선 두 나라의 종교는 유교이
므로 유교를 자기 나라의 생명으로 여기고 유교를 구출하는 것을 나라를 구
출하는 전제로 삼으면 이미 멸망한 나라도 희망이 있을 것이다.389)
강유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인도와 나라를 상실한 유태의 경우
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방법으로서의 종교의 중
요성을 역설하고 유교를 민족정신의 생명력을 이루는 종교로서 재정립할
것을 이야기 했다. 종교화를 통한 유학의 혁신과 재건이 국권회복의 관건
임을 강조한 것이다.390) 이러한 강유위의 영향아래 영남지역에서 특히 두
드러졌던 공교운동은 해창 송기식, 한계 이승희, 동산 류인식, 진암 이병
헌 등이 관심을 기울였고, 석주 이상룡도 저술 가운데서 공자교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체계적인 저술을
남긴 송기식의 공교운동을 동도서기적 유교혁신과 그것을 통한 구국의 모
색이라는 시대적 대응의 대표 사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391)
388) 황영례, 「한계 이승희와 해창 송기식의 공교운동의 상이성」, 유교사상연구
39, 한국유교학회, 92쪽.
389) 李炳憲文集 下, 「眞菴略歷」, 599쪽.
390) 강유위의 이러한 공교사상은 그의 제자인 梁啓超에 의하여 계승 강조되어 당
시 중국사회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진화론‧민족주의‧계몽주의 등 서구사상의 적
극 수용을 주창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의 저작 음빙실문집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사회진화론의 확산, 서양 문명의 수용과 제창, 애국
계몽 사상의 확산 등을 가져왔다.
391) 금장태는 이 시기 다양한 유교혁신론의 갈래를 주자학을 배경으로 하는 것, 애
국계몽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것, 양명학을 배경으로 하는 것, 금문경학을 토대롤 하는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199
송기식은 18세이던 1895년 을미의병에 부통副統으로 임명된 조부를
따라 의병에 참여했고, 다음해에는 김도화 의진에서 대장영서기를 맡았다.
을미의병 해산 후 1898년 21세 되던 해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 입문했다.
서산 김흥락 사후 척암 김도화와 향산 이만도에게서 배웠다. 1909년에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에 참여했고 협동학교 건립에도 참여했으며 그 자
신 봉양서숙을 설립해 운영했고 안동 하회의 동화와 보문학교 일에도 관
여하는 등 교육을 통한 구국에 매진했다. 1919년 3월 17일 3.1만세운동
에 참여하려던 당일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
종교화를 통한 유교혁신의 구상을 담은 유교유신론을 저술했고, 1930
년에는 관련 내용을 담은 한글가사 「인곡가麟谷歌」를 지었으며, 그 외 그
의 문집에도 공자교의 구상과 관련된 내용을 다수 남겼다.
이를 통해 그는 일제와 서구사상의 유입으로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당
시 사회를 유교의 종교화를 통해 치유하고 유학의 혁신을 도모하는 방안
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 요지는 전통적 학파 중심 학문으로서의
유교에서 탈피해 서구의 종교처럼 회당을 만들고 공자를 교주로 높이는
종교화의 길만이 유교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유학이 처한 현실 상황에 대한
반성의 결과였다. 당시 그가 목격한 현실은 국권 회복의 희망은 점차 희미
해져 가는데 제 몫을 해야 할 유학은 도리어 사람들에게 외면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여타 종교들 틈새에 질식되어 가고
있었다.392)
이러한 그가 유학의 혁신을 위한 유교종교화 방안을 제시한 유교유신
것 등의 4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송기식과 이승희의 유교혁신론을 주자학을 배경으로
하는 사상적 모색과 실천으로 분류하고 있다(금장태, 「유교개혁사상과 이병헌」, 예문서
원, 2003, 208~209쪽).
392) 「麟谷歌」, 20~22쪽.
200 ∙ 국학연구 Vol.31
론은 서언과 14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요 항목을 중심으로
그의 주장을 개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언은 유교부흥의 당위성을 선언한 것으로, 과거와 달리 군왕이 헌법
의 아래에 있는 시대이자 종교의 역할을 강조되는 시대인 지금이 지공무
사至公無私의 진리인 유학을 부흥시킬 시기라는 것이다.
2‧3‧4장은 유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을 제시했는데, 인재선발에 있어서
문벌주의의 폐단, 과거를 위한 문장에 치우쳐 유학의 참뜻을 도외시 한
폐단, 당론의 폐단 등이 과거의 유학이 끼친 부정적 영향이라고 했다. 그
리고 당시의 유학자들을 겨냥해 과거와 사장의 잡다한 지식에 매달리고
새로운 학문을 외면하며 사고가 고착되어 성현의 참된 가르침을 알지 못
하고 조상의 유업만 고수할 뿐 혁신을 외면하며 서양의 새로운 학문에 현
혹되어 유학을 배반하고 비판하는 등이 유교 쇠락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두 가지가 공자 이래 포용성을 장점으로 하던 유학
을 학파간 대립과 주장의 충돌로 인해 협애한 유학으로 전락시켰다고 지
적한다.
5‧6장은 유학이 그처럼 쇠퇴해 제 역할을 못함으로써 공명과 이익만을
추구하고 의존적이며 비합리적이며 굴욕적인 등의 조선인들의 부정적인
습성을 고질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했음을 지적했다.
7‧8장은 당시와 같은 혼란한 시대일수록 절대적 진리를 담고 있는 유학
의 본면목이 빛날 수 있는 때임을 말하면서, 특히 유학의 ‘대동사상’, 전국
에 산재한 교육공간으로서의 향교와 서원, 그리고 유학적 생활의식에 익
숙한 대중, 고을마다 가르침을 줄 선비들의 존재 등이 유학부흥의 유리한
자산임을 강조했다.
9장에서는 유학을 부흥시킬 수 있는 구체적 종교화 방안 11가지를 제
시했는데, 공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 것, 종교적 예식의 구비, 신도조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201
직의 양성과 교회의 설립, 일요일 강연회와 교육, 강습소 설립에 의한 강
사 육성과 활용, 불평등한 계층구조의 타파, 여성교육을 통한 부인회 조직
과 활동 등으로 기존 종교와 같은 조직과 인원의 구비에 관한 제안이다.
10장과 11장에서는 유학의 핵심을 ‘경敬’을 통해 하늘에서 품부받은 본
성을 함양해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고전에 나타난
성현들의 경에 관한 언급을 통해 경의 의미와 실천방법을 제시하며 경이
종교로서의 유학이 지향하는 이상세계인 대동세계를 실현하는 핵심공부
임을 강조했다.
12장에서는 타 종교 및 사상과 대비해 유학이 지닌 우월성에 대한 내용
으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유학은 모든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음을 제시했다.
13장은 유학이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포괄하는 사상임을 천
명하고, 그 내용으로 시중주의時中主義‧집대성주의集大成主義‧일용사물당
연주의日用事物當然主義‧지어지선주의止於至善主義를 제시하고 있다.
14장은 이러한 유학의 장점을 살려 부흥시킨다면 유교사상을 토한 태
평세계의 실현이 가능함을 밝힌 것이다.
송기식은 이러한 구상을 통해, 역사 속에서 형성된 부정적인 요소와 그
로 인한 부작용들을 걷어내고 종교화를 통해 유학을 혁신시킨다면 유학부
흥이 가능하고 그것을 통해 자강과 국권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부
응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의 유학 종교화 구상에서 주목할 것은 ‘경敬’
을 강조한 점이다. 경은 퇴계철학에서 학문과 수양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
소일 뿐 아니라, 이후 퇴계학파에서 중시한 수양방법론이기도 하다. 특히,
앞서 이상룡의 경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서산 김흥락의 사상에서 리기
론理氣論 등 성리학적 이론에 대한 천착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신 실제 수
양공부의 요체인 경을 두드러지게 강조됨을 볼 수 있다. 송기식은 바로
202 ∙ 국학연구 Vol.31
그러한 학파적 유산인 경을 유학 종교화의 관건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경
을 통한 유학의 종교화가 유학개혁과 국권회복의 첩경임을 강조한 것이
다. 송기식은 이러한 유교종교화의 구상을 실현하는 노력에도 힘을 기울
여 녹동서원을 중심으로 강사를 양성하는 한편, 전국 단위의 조선유교회
운영에 참여했으며 전국 각 지역에 공자예배소를 설치하고 전교사를 파견
하는 등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송기식의 유교 종교화는 양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서구에 뒤진 과학
기술 등 물질적 조건의 열세와 제도적 개혁의 한계를 정신적 요소를 통해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학의 개인적 수양인 수신과 치국평천하라
는 이상적 사회의 구현인 사회철학을 종교 신앙화 함으로써 그 실효성과
실천력을 담보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유교내부 보수적 유학자에
의해 전개된 항일 의병투쟁이 봉착했던 한계에 대응한 유학 내부의 방향
전환이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느꼈던 외세 위협의 중심에는 외래 종
교인 기독교가 있었고, 이들 종교는 조상제사의 거부 등 유학적 전통가치
와 심각한 충돌의 상태에 있었으므로, 전통적 가치와 의례를 본질로 하면
서 서구의 기독교에 대응할 수 있는 유학의 종교화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이
다.393)
절망적인 국권회복의 가능성과 기존 유학의 현실적 무기력 등의 현실
상황에서 유학적 가치를 지키면서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려는 절충적 시
도가 동도서기적 대응이었다. 이들은 유학의 핵심 가치가 윤리도덕에 있
고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며 불변의 진리라고 인정하는 점에 있어
서는 그들의 스승인 위정척사파와 인식을 같이한다. 다만 그들은 당시의
393) 이러한 배경에서 초기 이승희, 이병헌 등에 의해 시도된 공자교 운동을 시작으
로 이후 大同敎, 太極敎, 孔子敎會, 大聖敎 등으로 다양한 유교의 종교화가 나타나
게 되었다.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203
유학이 이용후생의 실용적(器)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냄을 인정하면서 일
제의 침탈에서 벗어나는 자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개혁과 유학의
개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구 문물의 도입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
했다. 그러면 이들이 유학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지니면서도 위정척사에
서와 달리 서기西器의 수용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내재적 계기는 무엇
인가?
우선 이들은 대체로 주자를 넘어서 공자의 본원유학으로 소급해 그 속
에 담긴 실용적 경세사상에 주목한다. 내성內省 위주의 존덕성尊德性 중
시에서 기인한 주자학적朱子學的 협애성에서 벗어나 외물이 쓰임을 다함
으로써 개체 생명의 존속에 기여하고 나아가 내면의 덕성 실현의 현실적
토대가 됨을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외물을 덕성함양과 대립적 관계로 이
해하는 데서 벗어나게 되고, 나아가 그것에 대한 적극적 이용도 정당화된
다. 이처럼 일단 외물이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하고 궁극적으로 덕성의 함양
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의의를 부여받게 되면, 서기西器라 하더
라도 현실적 효용성을 지니고 이로움을 주는 한 적극적으로 긍정되게 된
다.
이들은 그러한 실용적 관점에서의 서기西器를 포함하는 외물에 대한
긍정적 의미부여의 가능성을 공자에게서 찾는다. 즉, 그들은 공자로 소급
해 유학의 수기修己와 경세經世를 겸전兼全하던 유학 본래의 전통을 회
복하자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송대이래 성리학이 내성적 차원의 수기에
치중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경세의 실질적 측면을 소홀히 한 결과 유학을
협애화시켰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394)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선 이
394) 海窓 宋基植 역시 儒敎維新論 「緖言」에서 당시의 유학에 대해 넓게 포괄
하는 사상(儒敎包圍主義)에서 협애한 사상(近古狹隘主義)로 빠졌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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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유학의 실용적 경세의 측면과 더불어 ‘경敬’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경건주의의 요소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협애한 철학으로 축소되고 교조
화와 형해화의 길을 걷던 유학에 대한 일대 재정비를 주장한 것이다.395)
한편, 위정척사론자의 주자일존적 입장과 달리 동도서기론적 절충의 관
점을 지녔던 이들에게서 ‘복원復原’이라는 공자에의 회복 혹은 공자사상
의 강조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396) 그것은 내성
적 수기에 편향된 주자학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공자로 대표되는
본원유학에서 수기와 나란히 중시되었던 경세經世의 의의를 다시 인식했
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위정척사파의 주자중심주의와는 대비된다.
공자에로 복원을 주장하는 이러한 동도서기론적 입장은 유학적 진리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는 위정척사 진영의 유학이해와 입
장을 같이한다. 그런데 그들은 유학 자체는 긍정하되 당시 유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러한 유학의 한계는 본원유학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계승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당대 유학과 유학자들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유학자체에 대
한 긍정 동시에 한계를 지닌 현실의 유학에 대한 개신의 주장을 양립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95) 정주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이들의 유교혁신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孔
敎 운동의 원조격인 康有爲에게서도 동일하게 보인다. 강유위는 공교 복원의 전제로
공자이래 축소 왜곡된 여러 유학사조들을 비판하는 가운데 송대 성리학에 대해 공자
의 전체 사상 중에서 修己의 학문만을 말하고 공자의 救世의 학문을 밝히지 않았다
고 비판하고 있다(梁啓超, 飮氷室文集, 6장 「宗敎家之康南海」).
396) 결국 그들은 모순적인 현실과 그에 대한 대응에서 무력한 당대의 유학을 넘어
서는 길을 객관적 조건의 열세를 극복할 주체의 정신적 역량 혹은 주관적 능동성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이미 실학이 시도한 바 있는 유학의 경세적 측면의 부활, 유학
적 규범에 대한 시의적절한 재해석 등에서 찾았는데, 뒤의 두 모색을 공자로의 복귀
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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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이상에서 근대전화기 역사적 격변의 시기 서산 김흥락과 그의 문도들의
현실 인식과 대응을 살펴보았다. 퇴계학파의 적전을 자임하며 학맥과 혼
반으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지역에서 함께 강학하던 특성상 이들의 현실
인식과 대응에서 그 실천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서산의 문도들 705명 중
50명이 넘는 인물들이 의병투쟁을 비롯한 다양한 항일활동에 참여하는
양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해방에 이르기까지 3.1운동시위, 교육계몽운동,
유교의 종교화, 무장투쟁 등 다양한 항일활동을 이어간 지속성에서 확인
된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현실인식과 대응 가운데서 우리는 서산에서
그의 문도들에게 퇴계이래 전승된 敬의 중시라는 학문과 수양방법론, 앎
과 실천의 일치를 추구한 지행합일의 사상이 관철되어 그러한 대규모의
지속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서산 문도들의 현실 인식과 대응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주도적인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실용성의 강조와 주체성의 강화이다. 이는
서산학단만의 고유한 경향성이라기보다는 폐쇄적이고 따라서 자족적인
체제에서 주도적 사상으로서 배타성을 지닌 채 기능했던 유학이 근현대
전환기의 외재적 충격에 직면해 대응하는 과정에서 체현하게 된 공통적
경향성이다. 우선, 실용성의 강조는 서구의 기술과 무력이라는 현실적 힘
에 대응할 수 있는 객관적 역량의 강화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된다. 전통적
개념인 기器로 포괄될 수 있는 물질적 역량의 강화라는 실용 중시를 통한
자강自强의 길이다.
김흥락 문도의 현실인식과 대응에서 ‘경敬’의 강조와 유학의 종교신앙
화 주장에서 확인되는 주체성의 강화는 서구의 기술과 무력이라는 압도적
인 현실적 힘을 넘어서는 길은 주관적 역량의 강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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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에 따라 제기된다. 전통적 개념으로 말하면 주관적 역량이란 곧 심心
이다. 이러한 방법 역시 주관능동성의 강화라는 정신적 역량의 극대화를
통해 추구한 자강自强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397)
397) 서산학단을 포함해 퇴계학파의 위정척사론에서 두드러진 理發의 강조나 동학의 守心正氣와 誠敬信에 대한 강조는 이 心으로 대표되는 주체역량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석주 이상룡에게서도 불 수 있듯 이 시기에 와서 전통적인 주자학
일변도의 유학에서 벗어나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고 양명학을 통한 시대적 대
응과 실천이 나타난 것도 心의 주체성과 능동성에 주목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2016. 12. 05 : 논문투고 ∙ 2016. 12. 07 ~ 12. 16 : 심사
∙ 2016. 12. 19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20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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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文峯集
西山先生言行總錄
西山集
石洲遺稿
儒敎維新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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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齋集
朱子語類
眞庵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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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209
Abstrac
t
Inheritance and Development of
Seosan Kim Heung-Rak’s idea
― Perception of reality and practice of Seosan disciples
at transitional period of modern times
Park, Kyung-hwan
Advanced Center for Korean Studies
Seosan Kim Heung-Rak and his students lived from
pre-modern to modern era which was a time of unprecedented
big changes and turbulences in Korean history. In
accordance with those changes, various differentiations of
confucianism started to appear. In response to such changes,
Seosan Kim Heung-Rak and his disciples tried to protect the
social system built on the value of Confucianism.
The core of Seosan Kim Heung-Rak’s idea is ‘Gyeng(敬)’,
this let him strengthen internal culture and act with decision
in response to the problem of Joseon society.
705 peoples in the name list of his disciples
「Boingyecheop」 inheritede master’s teachings that pursuing
learning must be based on the Gyeng(敬) and learning should
be led to doing.
210 ∙ 국학연구 Vol.31
As a result, after he died the disciples tried to protect
Confucian values and to defeat Japan. It is primarily the anti-
Japanese militia activity, the anti-Japanese struggle of his
disciples was prominent than that of other school’s.
In 1910 nation had succumbed and social dilemma was
deepening, his students judged it is impossible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by the conventional Confucianism, then they
made a variety of choices. In particular, since this time they
were away from the attitude of unilateral exclusion of
Western culture, attempted to make up for Confucianism
through accepting Western culture.
In awareness and response to the reality of his disciples,
two dominant pattern can be found. It is the emphasis of
practicality and enrichment of identity. Emphasizing practicality
is from the need to strengthen capabilities responsing
Western technology and arms. Trying to enriching identity,
emphasized ‘Gyeng(敬)’ and attemptted to make
Confucianism change as a a kind of religious faith like
Christianism. That was due to the idea that they could overcome
the overwhelming Western force represented by technology
and army by strengthening subjective positivity.
Key words
: Kim Heung-Rak(金興洛), Confucianism,
Toegye-Studies(退 溪學), Gyeng(敬),
Boingyechep(輔仁契帖), Wejeongcheoksa (衛正斥邪),
특집 : 서산 김흥락 학맥의 전승과 발전 ∙ 211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9.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