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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삶
장 그르니에
[여행]
여행에는 옮겨 감으로 인해 치르게 되는 희생에 대한 저항이 따른다. 이를테면 이곳을 위하여 라는 관념은 끊임없이 다른 곳을 위하여 라는 관념보다 우위에 선다. 또한 머무르려는 욕망은 이동하려는 기질을 이겨내며, 영원에 대한 향수는 순간적인 것의 유혹을 물리친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자나 원양 항해자도 결국은 정착한다. 그는 더 이상 여행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여행의 패러독스이다. 즉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의도된 변화, 존재를 상정했을 때에만 실재하는 그 변화가 이제는 존재 그 자체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여행하는 자는 자신의 습관에 집착한다. 그는 이전의 그 호텔 그 방에 다시 머무르려 하고 그 음식점의 그 테이블에서 식사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 방랑자는, 자기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착민이 된다. 말하자면 여행하지 않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여행은 그 의도적인 성격으로 인해 단순한 장소 이동 이상의 무엇이 된다. 여행 가방은 비록 여행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가방이 여행하는 것은 아니다. 동물도 여행을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럴 수 있을까?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간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장 속의 앵무새는 다만 주인과 함께 장소 이동을 할 뿐이다. 그러나 철새는 여행한다.
-여행에 대한 분석-
여행의 여러 방식들은 피상적인 흥미만을 제공한다. 그 사이에는 가술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1) 필요에 의한 여행
정착민들은 거주지와 일터가 서로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유목민들은 양식을 한 장소에서 계속 얻을 수 없어서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방목을 하려면 양 떼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유랑 생활 자체가 좋아서 유랑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2) 강압에 의한 여행은 가장 덜 의도적이다
유형流刑은 강요된 여행이다. 시베리아 등지의 강제 수용소가 보여 주듯이 우배는 사디즘적인 집단 독재 문명의 한 특징이다. 그것은 보복을 위한 문학이 생겨나게 했으며, 19세기 몇몇 경우에는 마조히즘 문학으로 나타났다. 유배는 말하자면 순례의 반대다.
이민은 그보다는 의도적인 여행이다. 여기서 가난하게 사는 것 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은 동향인들과 함께 새 땅을 개척하고 새 도시를 세운다. ~~~은퇴는 거의 의도적인 행위이다. 몰리에르의 <인간 혐오자>에 나오는 알세스트처럼 예민한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물러나고자 한다. 물러나기 위해 그들은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마치 후송되는 부상병처럼) 차라리 상처라도 입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샤토브리앙이 아메리카로 간 것은 결코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스냥크루와 로티의 경우는 또 어떤가?
(5) 시간 조작을 통한 여행
워싱턴 어빙의 소설에서 주인공 립 밴 윙클은 잠에서 깼을 때 주위에 있는 어떤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잠들어 있던 백 년 동안 모든 것이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문제는 그러한 여행이 진행되는 동안 무엇이 움직이지 않는 기준이고, 어느 것이 항상 변하는 독입 변수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즉 사람인가 아니면 그를 둘러싼 주위 환경인가? 위고처럼 오, 자연이여, 그대는 벌써 잊었는가! 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라마르틴을 따라 자연은 언제나 한결 같도다라고 할 것인가. 프루스트는 변화를 보편화한다. 근대 수학이 이룬 기적만큼이나 놀랍게도 그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미분)을 통해 영원한 전체(적분)을 회복한다. 잃어버린 시간의 입자들을 다시 정돈함으로써 깨어지지 않는 시간의 덩어리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하는 여행은 어느 쪽에 놓아야 할까?
(6)초월을 위한 여행
모든 통과 의례는 상승을 위한 여행의 서주이다. 샤머니즘에서의 통과 제의가 그러하며, 어떤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옮겨 가는 것을 여행이라고 부르는 프리메이슨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경우 단계 이동과 상승은 비유적이며 상징적이다.
신비주의 신학에서도 역시 단계의 개념을 사용한다. 즉, 상승하는 순서에 따라 이어지는 세 갈래의 길 - 속죄의 길, 계시의 길, 합일의 길이 있다. 뿐만 아니라 신비주의의 수련자들은 제각기 자신이 밟아 온 혹은 애써 올라온 특별한 단계들, 말하자면 긴 여정 중에 자기가 묵어 왔던 숙소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은 참된 것일수록 더욱 남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 된다.
고행 없이는 초월도 승화도 없다. 고행은 일련의 시련을 의미한다. 천로역정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을 영상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고 있는 듯하다. 투르드 프랑스(프랑스 전역을 일주하는 전통적인 자전거 경주 대회)는 어떻게 보면, 갈보리로 올라가는 여정을 나타내는 세속화된 이미지일 것이다. 그 대회에서는 중간 기착지마다 성스러운 여인들이 나와 선수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준다. 마들렌 드 스퀴데리의 소설<크렐리>에 나오는 사랑의 지도 역시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대풍의 여행이; 속세로 투사된 것이리라.
영혼의 이정표를 담지 않은 위대한 작품은 없다. ~~~마시뇽은 ‘신은 도처에 존재하는데 무엇 하러 예루살렘으로 가는가? 라고 묻고는 그것은 그 장소가 기도를 강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기도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한다. 순례자가 자기 조국을 떠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조국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장소를 창조해 냄으로써 역사적인 것이 영원 속으로 편입된다.
그러므로 여행의 양식은 다양하다. 그것은 멀리서 별처럼 반짝이는 목적들에 부응한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위한 여행이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여행은 거의 기분 전환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풀이로 여행한다고 할 때 그것은 장난삼아 하는 이동일 뿐이다.
아이들이 타는 회전목마는 여행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순환적인 여행이다.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 여행자는 움직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빙빙 도는 것 말고는 어떠한 목적도 없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유추해서 생각하면, 여행기를 읽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빙빙 도는 사물과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어떤 방향, 목적은 있다.
-여행의 변증법-
여행에는 언제나 목적지가 있다. 그것이 없다면 그 여행은 존재 의의를 잃게 된다.. 그럴진대, 이처럼 다른 곳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여행에 인습적인 것이 스며들 수는 없을 것이다.
여행에는 모름지기 신성함이 깃든다. 예컨대 기차 여행을 보자. 역은 견고한 자재로 건축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모든 교통수단들은 역 주위로 몰려든다. 그것은 하나의 즉자卽自이며, 어떤 경우든 이곳을 위한 것으로 거기 있다.
기차의 행선지는 정해져 있다. 여행자는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며 또 그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후기-
인생이 여행에 비견될 수 있을까? 이 비유는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이 사용해 왔다. 보쉬에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자기가 지나가는 장소에 멈춰 서서 그곳의 아름다움을 음미해 보고자 하지만 걸어라! 걸어라! 하고 외치는 어떤 준엄한 힘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나그네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끝내는 삼켜 버리고야 말 심연의 끝에 어김없이 도달하는 것이다.~~~
[산책]
-정의와 첫 좌표들-
이리저리 가게 하다. 이끌다 라는 뜻의 불어 동사 프로므네는 자동사의 의미(산책하다)로 그리고 타동사의 의미(산책시키다)로도 쓰인다. 말이나 개를 이리저리 산책시키며 때로 자기의 정신을, 시선을, 심지어 라신의 작품에서처럼 욕망을 산책시킬 수도 있다.
산책은 의도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여행보다는 훨씬 덜 의도적인 것 같다. 여행은 목적지가 있지만 산책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피상적인 차이일 뿐이다.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산책시킬 때 결코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그러는 것은 아니다. 산책에서 장소는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공원들은 그 이름이 아예 산책(로)이다. 그리고 극장이나 뮤직홀에는 프롬누아르, 즉 입석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 말은 원래 주민들이 자주 산책하는 가로수 길을 의미했다.
파리에서 넘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기차역이 사람들을 끄는 곳이다. 기차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산책하는 사람들은 역으로 몰려든다. 십중팔구 모르는 이들인 여행객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한다.
시간은 어떤가? 산책하기에 좋은 시간이 있는데, 낮의 열기가 사라진 뒤나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난 뒤의 시간, 그러니까 온대 기후에서는 해 질 무렵이 그렇다. 다른 기후대에서는 밤이 좋다. 그 밖의 시간대에 하는 것은 산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루 일을 마친 후 잠시 쉬면서 거니는 소요 정도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산책하느냐의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간단치가 않다. 어쨌거나 육체와 정신의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산책하면서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집에 머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산책자로 남는 일보다 더 미묘한 일은 없다. 진정한 산책자는 이렇듯 양자의 사이에 놓이는 존재이며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강요에 의한 산책-
산책시키는 자와 산책당하는 자는 동일한 치욕 속에서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산책은, 그 구성원의 행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는(감시받는)자유와 (조종 받는) 훈련을 채택한 어떤 사회, 그런 사회가 갖는 복합적인 사디즘의 한 형태이다. 그렇지만 감옥의 뜰에서 하는 산책과 기숙사에서의 산책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채찍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에 산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나가면서 군인 한 사람에게서 한 대씩 매를 맞는 벌을 받은 불쌍한 캉디드는 이런 식으로 두 번의 산책을 당했다.
-목적이 있는 산책-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산책할 수도 있다. 회복기의 환자들에게 의사가 권하는 산책이 그렇다. 환자들은 그들이 남겨 두었던 기력을 써 버림으로써 다시 새 힘을 얻는다.
기계화되기 전에는 군대에서도 병사들의 전투력 배양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군악 소리에 맞추어 점점 더 무거운 장비를 지고 점점 더 긴 행군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렇지만 행군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산책과는 상반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병사들에게 행군을 시키는 것은 앞으로 잇을 전쟁이 적군 쪽에서의 가벼운 산책쯤으로 끝나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행군을 잘하는 병사에게는 전투가 그저 산책 정도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친교를 위한 산책-
산책은 널리 애호되는 교제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가을에는 사냥터에서, 겨울에는 살롱에서 그리고 옛날 극장의 휴게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름에는 산책이 서로 신분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다.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를 읽어 보면 아우구스트 대공의 문예 담당 대신이었던 괴테가 그와 함께 얼마나 자주 산책을 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숲속에서 야영하면서 두 사람은, 궁정의 분위기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토록 고귀한 친교가 다른 시대에도 있었을까? 나는 그러한 예를 알지 못하지만 있기를 바란다.
-철학적인 산책-
말브랑슈는 이미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의 첫 머리에서 해설자들로 하여금 닫힌 방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내리도록 했다. 버클리는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세 대화>를 쓰면서 그들의 대화를 야외에서 진행시키며 아침의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순수하고도 감미로운 기쁨을 첫 페이지에서부터 예찬한다. 그러나 그 역시 자연의 은밀한 황홀함 앞에서 결코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정원의 고요함과 아침나절의 정적을 이용해 기껏 자신의 두 등장인물들의 머리를 맑게 해 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솟아오를 때나 떨어졌을 때나 동일한 물리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분수, 그 분수의 마지막 물줄기만큼도 멀리 가지 않는 그의 산책이 무용하고 공허하다고 결론짓고 만다.
나는 산책에 대한 애정은 자연에 대한 감정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자연을 향한 감정은 고대인들의 사상에 단지 간접적인 영감만을 제공했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감정이 암묵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책하는 방식 또한 어떤 철학 학파냐에 따라서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면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마치 오늘날의 신학생들처럼 서로 마주 보면서 걸었을 것이다. 한쪽이 나아가면 다른 쪽이 뒷걸음질하고...... 꼭 상반되는 주장들이 체계적으로 대립하는 듯 한 형상이었으리라. 칸트의 저 유익한 저녁 산책은 규칙적인 휴식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그를 엄청난 작업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게 해 줄 뿐이었다. 이와는 달리 니체의 산책은 그의 저작들을 탄생시킨 자양 그 자체였다.
“모든 숭고한 장소에는 산책로가 있어야 한다. 일으켜 세워 걷게 하지 않으면 내 사유들은 곧 잠들어 버린다.”
-자연과의 교감을 위한 산책-
-약식의 산책과 완전한 산책-
키르케고르에게 그의 아버지가 시킨 산책은 특이하게 축소된 산책이었다. 일요일에 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대신에,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들이 들렀을지도 모를 모든 장소를 마치 이미 가 보기나 한 것처럼 상세히 묘사해 주었다.
-산책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하여(혹은 거대한 공백)-
이 모든 것은 어떤 의도적인 공(空)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매우 진보된 문명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뷔퐁읕 이렇게 썼다. “야만인들은 산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들의 생활양식 가운데서 앞으로 곧장 걸어 나갔다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이 이상한 행동보다 더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 은 없다.”
야만인들 - 은 우리가 들판과 동장과 같은 일터에서 그러는 것처럼 사냥, 낚시, 과일 따기 등에 쫓겨 힘들게 살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누리는, 아니 허비하는 여유 시간을 갖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즉 그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관습의 망에 갇혀 있었으며 아득한 옛날부터 계속된 습관들의 사이클 속에서 마치 수인처럼 사는 것이다. 그들에게 빈 시간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 시간들은 이해력이 짧은 우리 눈에만 비어 있는 것으로 비칠 뿐 정작 그들 자신에게는 결코 빈 시간이 아니다. 그들은 단 일 분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프랑스로 건너왔으나 생활수준이 다른 유럽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이것은 내가 아니라 관계자들의 견해이다 - 일군의 주민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어떤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물론 자신도 원래 그곳 출신인 그 사람이 안젠가 나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진술을 가능케 한 경험의 풍부함과 중요성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매일 방문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할 수 있고 또 그들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게다가 내 조상들 중의 한 사람이 그곳 원주민인 관계로 그녀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여자들은 집에 머물면서 별로 할 일이 없을 때에도 행동이나 말에서 결코 머뭇거리는 법이 없어요. 단 한순간일지라도 생활의 매 정황들 속에서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어, 또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잇닿아 있기 때문에 그녀들은, 말하자면 모든 것이 꽉 차서 더 이상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그런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다 한두 번인가 정지되어 있는 시간을 목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어떤 형태의 삶이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이지요. 아니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예감, 즉 사물들과 행위들이 어쩌면 지금과는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 같은 것이 그들 정신 속에 불현듯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랍니다. 이런 순간은 매우 드물지만 한번 찾아왔다 하면 일련의 정신적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그 사건들은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들을 낳을 수도, 또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바로 이것이, 지적이며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어떠한 사회학이나 민속학 혹은 인류학서적도 읽은 적이 없는, 어떠한 연구에도 참여한 적이 없고 어떠한 통계 자료도 참조한 적이 없는, 그래서 자기가 하는 모든 말이 자기의 독창적인 견해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한 말이었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하게 해 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 주는 수단이 나닐까?
[비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 즉 배제 당했거나 혹은 선택받은 것은 무릇 비밀스럽다. ~~~누군가 격리되어 있다고 할 때 그건 좋은 의미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을 따로 불러낸다는 것은 그에게 갖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에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가 간직하고 있던 비밀이다.
-비밀의 덧없음-
매우 뜻밖의 사실이지만 비밀은 그 본질상 잠정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여행이나 산책 등 일상의 활동들 대부분이 이렇듯 다 덧없다. 이것들은 결국 스스로 소멸하거나 폐기되고야 마는 행위들이다. 종점을 향해 나아가는 게 여행이라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지 않는가.
비밀은 말하자면 외적인 원인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사법 제도는 자발적인 방법으로가 아니면 외적인 힘에 의해서라도, 혹은 그 둘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작동되는 장치이다. 그리고 굳이 물어볼 필요 없이 친밀한 눈짓만으로 모또는 공감의 표시만으로도 비밀을 털어놓게 할 수 있다.
또한 비밀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제시해 주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 계시는 신탁, 점술, 전조, 예언들처럼 해석해 내야만 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것이거나 때로는 선지자나 선택된 사람에게 내려지는 것처럼 직접적이다.
한갓 인간들 사이에서 비밀은 결코 지켜지지 못한다.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고 아무리 애써 봐야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애당초 사람의 비밀이란 밝혀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은근슬쩍 털어놓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제삼자가 부추기지 않아도 스스로 토로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당신에게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남이 알아주는 것은 더 소담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그게 비밀인지조차 모르는 바에야 그 비밀의 내용이 잘 지켜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리고 자기에게 비밀이 하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그렇듯이, 그 내용을 드러내기로 마음먹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 비밀의 베일은, 너만 알고 있으라는 식의 공모의 분위기가 마련되어야만 벗겨진다. 그래야만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어쩌랴, 결국은 그렇게 퍼지고야 만다. 죄의 고백은 원칙적으로 은밀한 가운데서 이루어지지만 물론 공개적일 때도 있다. 이 경우, 처음에는 남몰래 애써 감추어 왔지만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은 죄과가 만인 앞에 밝혀졌을 때, 비로소 그 죄인은 용서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과오의 쓰라린 기억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너세니얼 호손의 <주홍글자>에서처럼 치욕적인 기호 하나가 그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기도 한다. 그 소설에서 간통한 여인은 자기가 범한 죄악을 사람들에게 공지하는 붉은 글자 하나를 가슴에 붙이고 다니도록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글씨를 떼어 버릴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계속해서 그걸 붙이고 다닌다는 것이다. 게다가 색이 바래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그 글자를 다시 선명하게 수놓기까지 한다. 또 자기 딸이 그곳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자고 해도 거부할 따름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복수의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위선적인 청교도들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교도들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치욕적인 형벌을 나타내는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 만드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낫과 망치 역시 마찬가지다..... 수치로 여겨지던 것이 명예스럽게 되고 애써 감추던 것이 떳떳이 공표해야 할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비밀의, 이를테면 가치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래된 비밀이라느니 기사도 시절의 비밀 혹은 기사 수도회의 비밀 운운 하면서, 또는 무의식적인 비밀을, 비교秘敎의 통과제의를 얘기하면서 사람들은 비밀이 과거에 속하는 것인 양 말한다. 그렇지만 비밀은 흔히들 생각하듯 그렇게 과거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비밀이 애당초 밝혀지게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비밀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비밀이란 미래를 향해 존재하며 온 힘을 다해, 발각되려고 몸부림친다.
-비밀-
세상이 오랜 세월을 두고 탐구하면 결국 다 밝혀지는 표면만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도무지 거기에 어떤 이면이라는 게 없다면 인간이 처한 상황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비밀은 정말이지 도달하기 힘든 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왜 존재하는가? 왜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가? 그것이 있다고 믿지 않을 수 없는가? 그리고 이 절대에의 염원은 어떤 점에서 비난받아야 하는가?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의 한계 안에 머무르게끔 만들어졌기 때문인가? 절대와 창조주가 지향하는 완성, 그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괴테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비장한 느낌을 갖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다. 모세도 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볼 수는 없었다. 모세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신을 보려 해서는 안 되었다.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모세와 괴테가 서로 다른 점은, 전자에게는 비밀이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에 속하지만 후자에게 그것은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어떤 자연에 속한다는 점이다.
언제나 비밀은 있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속 깊은 믿음, 이것이 바로 괴테가 그의 시<복된 갈망>에서 그토록 서정적으로 표현한 진정한 신비이다. 그러나 그 비밀을 알아내려 들지 말 것. 이것이 또한 그의 절실한 충고이기도 하다.
거룩한 갈망
현자에게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세속 사람은 당장 조롱하고 말리니
나는 진정 사는가 싶이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그대를 낳고 그대가 낳았던
사랑을 나눈 밤들의 서늘한 물결 속에서
그대 말없이 타는 촛불을 보노라면
신비한 느낌 그대를 덮쳐 오리
그대 더 이상 어둠의 강박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사랑의 욕망이 그대를 끌어올린다
먼길이 그대에겐 힘들지 않다
그대 마술처럼 날개 달고 와서
마침내 미친 듯 빛에 홀리어
나비처럼 불꽃 속에 사라진다
죽어서 성장함을 알지 못하는 한
그대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길손에 지나지 않으리
[침묵]
침묵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일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소리 없음은 소리의 있음과의 관계 하에서만, 말하자면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든 가능한 현존(즉, 소리 남)을 통해서만 감지된다. 그 침묵에는 어떤 의미가, 다시 말해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 무신론자를 향했던 것이든 자기 자신에게 했던 것이든 ‘무한한 우주의 저 침묵은 나를 떨게 한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그 무엇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무게를 갖는다.
칸트는 <음수>라는 소책자를 쓰면서, 이 수가 결코 단순한 제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려 했다. 즉 양수와 똑같이 음수도 세어져야 하며, 피타고라스학파를 들쑤셔 놓았던 무리수를 무시해 버릴 수 없듯 음수 역시 제쳐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침묵에는 의도가 실려 있게 마련인데, 이는 부정적, 상대적, 적극적이라는 세 측면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부정적 측면-
말을 하려야 할 수 없는 벙어리는 침묵하는 게 아니다. 침묵하는 자는 바로 말로나 글로 할 수 있는 말을 참고 있는 자이다. 즉 표현하는 데 무관심함으로써 침묵하게 된다. 그런데 자기표현을 하지 않는다 고 했을 때의 이 부정이 원래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즉 어떤 계기로 인해 사후에 그렇게 된 것이다. 둘은 애당초 침묵했겠지만 말하기를 그만둔 자는 다르다. 침묵이란 이렇듯 의도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그 의도란 어떤 것일까?
철학자들이 다양한 이름으로 설파해 온 저 무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 의도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자의 침묵이란 곧 삶의 부정일진대, 여기에 대해서는, 아, 침묵은 침묵을 부르나니, 정말로 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기독교도의 태도는 아니다. 무릇 성서의 종교들은 신과의 대화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내면에 어떤 존재가 있어 그와 대화하고 거기서 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초월의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내재적 존재의 당당한 현존인 셈인데, 이렇게 되면 無를 운운할 수는 없다.
신비주의자들의 저 침묵의 대화는 참으로 놀랍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 수녀가 그것에 관해 잘 기록해 놓았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 있으니, 바로 자연에 내재하는 어떤 힘과 대화하는 자들이다. 나는 라마크리슈나 파의 한 힌두 승려가 친구들의 초대를 받은 어느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승려는 힌두교도들이 정신 집중을 위해 취하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기도를 마친 후 참석자들은 그가 말문을 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중 몇몇은 벌써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루어지는 주제가 심오할수록 그 표현은 소박하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숭고한 것들은 언제나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이한 말들로 설법되는 법이다. 어쨌든 조바심을 내는 자들도 있었으나 설법이란 모인 사람들에게 어떤 마력을 행사하는 것이기에 우리 중 대다수는 희망을 품고 기다렸다. 처음 몇 분간 그 승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약 15분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그가 침묵하면 할수록 어떤 종교적인 경건함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경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귀들을 쫑긋 세우고 있었으니 그의 침묵은 분명히 경청되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문을 열지 않자 그때까지 기다리던 이들의 주의력이 많이 감소되는 듯했다. 그러나 귀에서 감소되었던 집중력은 이번에는 눈으로 옮겨졌다. 주위 환경 따위에 아랑곳 하지 않는 어떤 절대적 희열을 누리고 있는 듯 부드러운 빛으로 환해진 그의 얼굴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고요한 평정에 참여하는 듯했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그것을 구성하는 한 축인 정靜에 의해 그 순간 주제되고 있었지만 또 다른 한 축인 동動 역시 그것의 배음倍音으로 깔려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흘렀지만 과거나 미래는 느낄 수 없었으며 단절되지 않고 무한히 연장되는 현재만 잇을 뿐이었다. 나는 이와 같은 경험이 종교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가능할까 생각해 보았다. 위에서 내가 묘사한 태도는 평범하고 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예술적 창조로 이어지는 태도도 아니다. 그것은 떠오른 영감과 그것을 통한 예술적 창조, 그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막 시작하려는 순간의 창작이리라.
모든 부정의 방법들은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작품에 대해 떠들썩하게 광고해놓고는 예정된 날짜에 전시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순수한 의미에서의 예술 작품이나 미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세상에 대해 일정하게 거리를 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분명 미적 태도이다. 그런데 생산과 행동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문명권에서는 이러한 거리 두기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분노한 관객들이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은 갤러리의 유리를 깨부수면서 항의하곤 한다.
가장 기본적인 규범을 어기고 들어가는 작품들도 있는 데, 이것들은 그러나 적어도 눈앞에 뭔가 보이는 게 있으니 위에서 말한 경우보다는 덜 부정적이다. 가령 이브 클라인의 단색 그림들이 그러한데, 그 그림들은 모두 똑같은 형태로 e나 한 가지의 청색으로만 되어 있었으며 서로 크기만 다를 뿐이었다. 이것들은 무언가를 구성한 결과가 아니므로 창작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언어의 세계에 대해 취하는 하나의 태도인 셈이었으며, 어찌 보면 태도를 넘어 근본적인 입장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 청색은 앞에 나온 힌두 승려의 침묵과 같은 것이다. 말해야 할 것이 단 한 가지일 때 그 승려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으며,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를 말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존재는 그 고귀함 안에서라면, 오로지 좁은 문으로 지나갈 뿐이다.
1963년쯤이었는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토머스 블로트라는 사람이 런던의 위그모어 홀에서 침묵의 피아노 독주회를 열었다. 약 100명의 청중이 쿠펜하이머의 <침묵의 파르티타>, 베르가모의 <지리학적 침묵>, 볼벡의 <새로운 제사들> 등의 대작들을 감상하러 2실링 6펜스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다. 그 헝가리 피아니스트가 펼쳐 보이는 열기 어린 몸짓에도 불구하고 허공을 가르는 피아노 해머들의 미세한 바람소리 외에는 연주회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플루트와 콘트라베이스가 함께했지만 그 또한 침묵의 트리오였다. 그런데 사실 이 연주회는 한 민영 TV제작자가 연출한 일종의 기만극이었다. 그 제작자의 말인즉,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려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참석한 청중이 그렇게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중에는 상당수의 속물들도 섞여 잇을 테고 또 영국인들이 워낙 그렇듯, 단순한 호기심으로 신기한 것을 구경하러 온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창조의 또 다른 차원이 보여 주는 매력을 찾아서 온 사람들이 없으리라는 법이 있는가?
-상대적 측면-
그러므로 순수하게 부정적인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어떤 이상을 표상하고 있다. 반면 상대적인 침묵은 우리의 실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향해 소리와 소리의 부재가 번갈아드는 - 의 일부를 이룬다. 침묵의 순간이 과거를 환기시킬 때, 그것이 늘 해 오던 습관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그 침묵은 과거를 회상하는 말보다도 더 큰 의미를 담는다. 침묵은 과거라는 저 돌기둥, 그 깨어진 비석 -그 깨어짐으로써 단절을 상징하는-을 되살린다.
침묵이 미래를 향할 때는 향수가 아니라 호기심이, 때로는 불안이 스며든다. 그게 바로 서스펜스이다. 그러나 외부를 향한 이러한 침묵은 내부의 동요와 소란에 응답한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날이 밝으면 드디어 기사로 서임 받게 될 자를 철야식 내내 지배하는 침묵은 마음의 평화를 나타낸다.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또 내가 어린 시절 알았던 한 점쟁이 여인이 손님들에게 빌어 주었던 그 마음의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러한 평화는 그러나 기사 서임 전야의 철야식이나 무슨 입문식 때의 것과 같은 긴장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평화에 수반되는 침묵을 시간의 범주 속에 넣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마음의 평화는 시간을 뛰어넘으려 하기 때문이다.
긴장은 오전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 그에 비해 저녁은 이완의 시간, 휴식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종종 이 저녁 시간도 아침의 소리들과는 또 다른 소리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상대적인 침묵마저도 제대로 견뎌 내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도시에 살면서 늘 시골로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골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오락거리를 찾는다. 물론 시골 사람들도 오락거리를 찾기는 마찬가지지만 도시인들은 훨씬 더 복잡한 쾌락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골의 침묵이 충분히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소용없는 것은, 비어 있음의 무게를 잘 견디지 못하는 도시인들에게 그것이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탓이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 올 때 가지고 온 온갖 장치들을 동원하여 도시 세계와 시각, 청각으로 접속함으로써 그 무게를 떨 내려 한다.
침묵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열등한 자의 침묵은 존경을 의미 한다. 그래서 우월한 자는 존경을 나타내는 다른 어떤 표시보다 먼저 침묵을 요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돈 후안의 하인 레포렐로는 자기 주인이 싫어할 말들을 거침없이 해 대다가 돈 후안이 정숙을 명하자 갑자기 멈춘다. “이제는 섬기지 않으리” 하고 노래를 불렀으나 주인이 등장하자 입을 다무는 것이다.
동등한 관계에서도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해 침묵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관계가 우호적인 감정에 근거해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면, 가령 당신에게 체질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은 어떤 사람과 함께 산책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한 고역이 어디 있겠는가. 함께 걷는 내내 그가 말이 없거나 아니면 당신이 말이 없거나.... 그렇지만 다정한 침묵에는, 그것이 동의이든 공감이든 혹은 사랑이든 어떤 공모의 감정이 깔려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침묵도 있으니,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침묵이다. 이것은 냉정함이나 없신 여김, 혹은 승낙을 의미한다. 그것은 스탕달의 주인공들이나 비니의 신이 보여 주는바, 우두머리의 침묵이다. 나폴레옹은 다스리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바로 냉정함이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그것은 친근함의 부재인데, 평소에 매정해야만,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씩 내비치는 친근함이 더욱더 돋보이며 환영받는 것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두머리는 침묵과 다정한 말, 그 둘의 비율을 잘 조절하고 또 그 선택의 순간을 잘 포착할 줄 알아야 한다.
-적극적 침묵-
전설에 따르면 아시아의 성 프란체스코와 성 도미니크가 만났을 때 그들은 한참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짧은 순간에 서로에게 할 말을 다 했다는 것이다....
-의학적 종교적 측면-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믿는 신의학에서도 환자의 침묵은 질책의 대상이다. 전에는 환자는 입을 열면 안 되었다. 환자의 호소로 인해 가족이 겪는 시달림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말이 의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환자는 자기 병의 원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오늘날의 의사들도 이 점에 대해 생각을 바꾼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점차 정신 신체 의학의 개념에 눈 뜨게 되어, 이제는 신체적인 것에 대해 소위 정신적인 것이 미치는 영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아가 육체적 장애의 원인을 정신 현상에서 찾아, 긴장하고 있는 신체 기관이 정신적 안정을 취하면 이완되리라 기대하기도 한다. 물론 요즘의 의사들이라고 해서 환자가 자신의 병을 훤히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환자에게 조리 없는 말이라도 자꾸 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그의 말 밑바닥에 얽혀 있는 환상과 고아기를 통해 병의 뿌리를 발견해 낼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또 환자 자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바라도록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증에 시달리는 자에게 침묵이 어떤 내적인 완화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침묵은 망각을 돕는다. 우리를 갉아먹는 까닭모를 내적인 고통을 침묵시키려면 그저 침묵하기만 하면 될 때가 많다. 우리 마음속의 고통은 우리가 내밭는 말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나아가 침묵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비니가 호소해 마지않았던 바, 하나의 커다란 담대한 행위가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인간이란 결국 자기뿐이라고 믿게 된 자에게 침묵은 -기도 따위가 그에게 의미를 가질 리 없으니 - 가장 위대하고 용감한 행동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을 침묵시킬 때 비로소 인간은 그의 비어 잇음을 하나의 현존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침묵 요법은 신앙으로 향해 있다. 신앙이 그것을 좌우하는 것이다. 침묵은 생명의 원천이다. 봄베이만(灣)과 시가지 전체가 가장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침묵의 탑에 그 이름을 빌려준 저 피해갈 수 없는 침묵에 육신을 넘겨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독서]
-단계-
읽기는 부수적인 행동이다. 누군가 먼저 무언가를 써 놓은 다음에야 읽기가 가능해진다. 쓰기가 애초에 그리기로 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읽기는 그 창조를 발견하는 행위일 따름이다.
진보가 일직선상으로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처음에 지시와 표현이었던 쓰기는 그림에서 음소로 넘어가면서, 의미 작용이 되었다. 우애를 악수하는 두 손으로 표현했을 때, 이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애(fraternite)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는 달라진다. 각각의 음절은 즉각 이해되지 않는다. 일단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프랑스 말을 아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제한 두기에는 추상화가 뒤따른다. 의사소통의 수단들이 세련되어 감에 따라 이젠 그 누구도 아무 하고나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수학적 언어는 그것이 난해 하지만 않았더라면 보다 더 믿을 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되는데 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1세기가 더 지나면 도서관이 음반 보관소와 필름 보관소로 대체될까? 책은 사라지고 말까?
-방식-
미래는 알 수 없으니 현재에 머무르자. 독서라고 하면 혼자 하는 독서만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든 소리 높여 읽는 행위는 거의 사라졌다. 경전들은 예외인데, 요즘도 회당이나 절, 교회 그리고 회교 사원에서 신도나 사제들은 그렇게 읽는다. ~~~반면에 복음서는 혼자서 낭독한다. 개신교에서는 식사 전에 집안의 어른이 성서의 한 구절을 읽는다.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로빈슨 크루소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을 읽는다. 그 결과 그의 고립감은 완화되어 가끔씩 그는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도 한다.
-목적-
무언가를 읽는 행위가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무슨 목적을 갖고 있는지 이제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1. 무엇보다도, 갖가지 사건들에 대한 정보 획득이 읽기의 목적일 것이다. ~~~정보 혹은 소식이 원래 시사적인 뉴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점점 더 시사적인 것들에 초점이 모아진다.
2. 독서를 통해 우리는 가르침을 얻기도 한다.
3. 기분전환이다.
4. 사회생활에서 독서는 비록 영상에 의해 조금씩 대체 되고 있기는 하지ㅐ만, 그 역할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성과 속-
성스러운 책: 아침에는 <분노한 롤랑>을 읽으며 심심 파적하다가 오후가 되면 <시편>으로 교훈을 얻고 저녁에는 <에스더서>나 <베드로> 공연 중에서 골라 볼 수 있다.
세속적인 책:
매일 신문을 읽는 것은 아침 기도와도 같다는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 헤겔의 말은 옳다. ~~~쓰기가 없다면 읽기는 불가능하며 역으로 쓰기를 위해 읽기는 꼭 필요하다.
-위험-
독서가 위험을 내포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즐겨 읽는 책 중에는 좋은 책들이 있는가 하면 나쁜 것들도 있다.
[수면]
-딜레마-
잠은 내가 떠올리기만 하면 이내 달아나 버리고 그 반대말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와 자리 잡는다. 그렇다고 잠들어서 잠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생리학에서 본 수면-
-치유로서의 수면-
-우주로서의 수면-
수면에 플러스 기호를 붙일 것인가 아니면 마이너스 기호를 붙일 것인가....? 서양인들에게는 답이 이미 나와 있다. 잠은 깨어 있음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사 잠이 긍정적인 가치를 갖는다 하더라도 그건 깨어 있음이 갖는 것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다.
동양의 가르침은 -브라만 전통의 베단타 교리나 불교에서의 마하야나 교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 잠을 우위에 둔다. 수면은 근원으로의 회귀가 보여 주는 저 단순함이 가장 완벽하게 실현되는 상태이다. 열를 들면 어머니의 삶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 삶을 영위하는 자궁 속의 인간, 혹은 도스토엡스키가 말하는 백치나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의 백치, 이들은 단순한 개인들이지만 공통점이 있으니, 그들은 마침내는 그 누구도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꿈속에서조차 행동적인 우리로서는 다다르지 못할 이상이다. 과연 진실은 어느 쪽에 있는가? 칼테론은 서양인들 중 유일하게 그 물음에 대답하길 머뭇거렸다.
중국에서는 노년기가 청년기보다 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사람은 예순이 넘어야 삶을 제대로 살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도가의 사상가들에게는 청년기가 탕진의 시기라면 노년기는 삶의 축적기였다. 그들은 자기의 숨결을 아끼고 생명력을 비축해 나감으로써 불로장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정반대 편에 서 왔다. 삶은 짧고 죽음은 언제나 미리 찾아온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행복한 죽음, 그것은 가장 고양된 순간에 이루어지는 삶의 소멸이다. 은혜로운 그 순간에 이르면, 삶이 지속되어 봤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믿게 된다. 심지어는, 삶을 지속하면 자신의 힘만 소진되며 악운이 다시 찾아올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죽음에 대한 욕망을 갖는 것은 잠들기 위해서가 아니라(죽음을 생각하는 그에게 잠이란 기껏 허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 아니면 비겁한 도피일 뿐이리라.) 오히려 그 무엇도 넘어설 수 없는 삶의 정점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다. 그러한 죽음은, 비록 개인적 행복의 향유보다 더 숭고한 어떤 대의를 위한 희생은 못 된다 할지라도, 자못 영웅적이다. 불꽃이 꺼지는 것은 다시 한 번 힘차게 타오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자라투스트라는 받아들인다. 또한 그는 그것을 다행스러워한다.
-의연한 수면-
몽테뉴가 수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대한 인물들이 매우 중요한 일을 앞둔 날 밤, 잠을 자면서 보여준 침착함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그들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온전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칭송해 마지않는다.
알렉산더 대왕은 다리우스와의 운명의 일전을 앞두고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이침에 그를 깨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다음 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게르만의 오토 대제와 카토 같은 사람들의 경우 밤새도록 코 고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잘 잤다. 폼페이우스와의 해전을 앞 둔 아우구스투스와 술라와의 전투를 앞둔 마리우스 역시 너무나 깊게 잠들어서 잠을 깨고 나서야 전자는 자신의 승리를, 후자는 자신의 패배를 전해 들었다.
고대 역사에서 근대의 소설로 넘어오면,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알베르 드 모르세르가 이 같은 대담성을 보여 준다. 로마의 한 강도 두목에게 붙잡혀,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몸값으로 4000피아스터가 지불되지 않으면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 그는 자신의 운명이 그토록 불확실한데도 불구하고 깊이 잠든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한밤중에 자신의 석방 소식을 알리려고 깨우자 벌컥 화를 내면서 두목에게 말한다. 앞으로는 나폴레옹 대제의 유명한 말을 명심하시오. 나쁜 소식이 아니면 나를 깨우지 말라. 두목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으며 돈을 가져온 친구는 알베르가 그처럼 훌륭하게 고국의 명예를 지켜 낸 것에 매우 기뻐한다.
-세속의 수면-
오비디우스가 잠의 궁전을 묘사한다. 꿈의 왕은 깊은 산 기슭 어느 동굴에 살고 있다. 거기에는 결코 햇볕이 드는 법이 없으며 자욱한 안개만 뿜어 나온다. 수탉도 개도 없으며 거위들도 없다. 그리고 잎사귀가 바람에 살랑거릴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무도 없다. 사방에 휴식이 침묵과 함께 깃들어 있다. 다만 바위 밑으로 망각의 시냇물이 흘러나오기는 하지만, 작은 조약돌 위로 흐르면서 내는 졸졸거리는 물소리는 오히려 자장가처럼 들린다.
-기독교에서의 수면-
꿈은 허용된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점을 치는 것은 금지된다.
[고독]
나는 혼자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함께 있을 존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 말인가?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나는 내 동포들로부터 혹은 가족들로부터 그리고 드문 일이지만 일체의 인간들로부터 단절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럴 때라도 내 주위엔 무언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어 나와 함께한다.
감옥에 갇힌 실비오 펠리코는 거미 한 마리를 길들이고. 발자크의 소설 <사막에서의 정열>에서 암사자는 그의 주인과 사랑에 빠진다.
-고립과 고독-
고립과 고독, 혹은 떨어져 있음과 외로움은 구분되어야 한다. 고립은 일시적이며 상대적이다. 망명객이나 죄수는 격리되어 있다. 그런 시련을 겪어 보지 못한 자들이 흔히 그러리라 여기는 것과는 달리, 고립된 자 -다시 말해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혼자된 자-는 결코 계속해서 고립된 채 남아 있지는 않다. 그는 낯선 땅의 사람들과, 혹은 간수들과, 아니면 그 불행의 동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그를 둘러싸고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며 그 구성원들간의 유대는,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관계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른 것이니만큼, 훨씬 더 공고하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유대관계는 밖으로 가지를 치게 된다. 발자크의 소설 속의 보트랭은 감옥에 있을 때건 나와 있을 때건 언제나 가장 강력한 관계망을 소유한 사나이다.
반대로 고독은 본질적이며 결정적이다. 그것은 모든 개인의 근원적인 성향이다. 낭만주의 시대와 같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는 고독은 대중적으로 내세워진다. 그럴 때면 그것은 과도하게 표현되어서, 그 진실성이 의심받기도 한다. 사제 랑세는 사막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기가 고독하다고 소리 높여 하소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샤토브리앙은 그와는 다른 상황에서도 그렇게 했다. 진정한 고독은 말이 없다.
고립은 그것이 강요된 것이라는 점에서 고독과 다르긴 하지만 때로 고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난 자는 다시 얻은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묶인 채로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서 그는 사슬에 너무나 길들여진 나머지 더 이상 주도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이 혼자라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조건에 대해서 거기에 덧입혀진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우리는 결정적인 탈출이란 없으며 인간의 고독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것이다.
-고독의 단계들-
그런데 우리가 절대 고독에는 다다르지 못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회로부터 결코 격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사드는 절대 고독에 도달하기 위해 바스티유의 독방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서 그는 간수들로부터 방해받지 않으려고 빗장을 지르고서 자신에게 강요된 고립을 의도적인 고독으로 심화했다. 그는 왜 그토록 혼자 있으려 했을까? 그것은 언젠가는 공개될 어떤 사유를 남몰래 표현해 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바깥세상으로 내보낼 출구를 은밀히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담배 마는 종이 같은 얇은 종이에 쓴 원고를 그는 머리핀에 돌돌 말아서 자기 가발 속에 숨겼던 것이다. 자신의 원고가 독자를 만날 수 있게 하려고 그는 얼마나 치밀하게 행동했던가가! 지금의 삶이야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그의 고독은 미래에는 얼마나 붐빌 것인가!
-보상 심리-
몽테뉴나 마키아벨리처럼 여러 가지 일에 능하며 또 그 사실을 증명해 보여 준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식처를, 이미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자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고독이라는 공간에서 찾는다. 한편 고독을 달래 줄 사람이 없는 이들은 동물이나 식물 혹은 광물에 매달린다. 루소는 협죽도 한 송이에 마음이 움직여 애틋한 마음으로 그 표본을 만든다. 이럴 경우 대개 사람을 멀리하려는 마음이 큰 만큼 그 대상과의 친화력은 강해진다. 사람마다 그 무엇엔가 쏟아 부을 情의 총량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저 많은 도둑고양이나 길 잃은 개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의 동종에게는 그렇게도 모질게 대했던 폴 레오토는 그의 암원숭이와 다른 동물들을 향해서는 끝없는 애정을 쏟았다.
또한 가까이 있는 사람은 견디지 못하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사랑이 넘쳐 날 수도 있다. 디킨스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선행을 베풀면서도 자기 아이들에게는 먹을 것조차 주지 않는 한 부인을 그리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보여 주는 아량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가 느끼는 연민은 실상 많은 경우 하나의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멀리 있는 자들을 향해 사랑으로 양심을 편안하게 만들기는 쉬운 노릇이다.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자기 밖으로 나갈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 즉 소통 가능상의 문제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굳이 말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것들을 보고 듣기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견디기 힘들다. 비니는 에바와 여행하면서 단지 저 위대한 말없는 풍경들을 그에게 보여 주기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걸 끝까지 감내하지는 못한다. 눈짓으로 그녀에게 묻고 당신의 눈이 그렇다고 말할 때 그것들은 아름다운 것 같군요라는 그녀의 대답에 동의를 나타낸다.
사랑하는 사람과 혹은 친구와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기분 좋은 일만은 아니다. 타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거울이거나 메아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말은(혹은 시선이라도 좋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의 신분에서 주체의 신분으로 넘어가게 한다. 본질적 고독은 대상의 고독이다. 왜냐하면 대상은 주위에 다른 것들이 아무리 많아 봐야(마치 벽이 책들로 둘러싸이고 포도나무를 올리브나무에 접목했을 때처럼) 말의 가장 깊은 의미에서 혼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말을 줄이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그는 돌을 닮아 가는 것이다. 고독에는 침묵이 동반한다.
자기 여행에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러시아 시인 주콥스키에게 낭만주의 화가 카스피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곁에 두고 싶어 하시는군요. 그렇지만 함께 간다 해도 당신의 맘에 드는 그런 나는 옆에 없을 겁니다. 주위의 자연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것을 온전히 소유하려면 나는 혼자여야 하고 또 내가 혼자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내가 나이기 위해 나는 나를 둘러싸는 것들에 나 자신을 내맡겨야 하며 구름과 바위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답니다.”
혼자 있음으로 프리드리히가 하나의 대상이 되어 간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 대답은 뜻밖이다. 그가 구름과 바위와 일체가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자신이 되는 것이 오히려 바로 그가 대상이 될 때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가? 언어의 거부가 그 자신에게 그 사실을 드러내는가? 그래서 자기 자신은 이제 하나의 사물인가? 아니다. 그는 사물들과 소통하기 때문이ㅐ다. 모든 소통은 흔히 인격이라 부르는 것들을 전제한다. 그게 아니라면 거기에는 병렬이나 얽힘 혹은 상호 침투는 있을지언정 결코 주고받음은 없을 것이다. 이 주고받음은 결국 한 인격을 다른 인격 속으로 이동시켜서 그 인격은 자신이 아니라 타자 속에서 살게 된다.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시 삶의 근간을 자기가 아니라 타자에게 두는 이른바, 자기로부터의 탈출이다.
[review]
작은 산문이라도 하나 글로 쓰려고 하면 많은 자료들이 필요하다. 익숙한 것이라도 다시 한 번 내용의 진위여부를 확인하여야 하고 또 문맥을 다듬어서 오해의 소지가 없게 써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물의 보편적인 모습에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론이 독자들의 생각과 상충되더라도 서로 친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철학은 좀 다른 것 같다. 비사교적이고 독선적이다. 그래서 딱딱하다.
작가는 언제나 일상적인 것의 이면을 보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것 같아도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그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인생의 모습처럼 분주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채찍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에 산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나가면서 군인 한 사람에게서 한 대씩 매를 맞는 벌을 받은 불쌍한 캉디드는 이런 식으로 두 번의 산책을 당했다.”(본문-산책)
장 그르니에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의 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이다. 특히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고 사색과 글쓰기로 평생을 보내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푸른 바다, 하늘, 눈부신 햇빛 아래 반짝이는 지중해의 아름다움과 연결된 소재들의 글은 서정적이면서도 인생의 고독과 허무 사랑이 함께 어우러져 독자들로 하여금 감동과 영감을 얻게 해 준다.
“태양이 아프리카의 산 위로 다갈색 색조를 솟아오르게 하니 그 색조는 하루 종일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바닷물에 발이 잠길 정도로 기지개를 켜는 이 짐승을 쓰다듬어주고만 싶어진다. 빛은 아직 짙어지지 않았고 당신 뒤로 남아 있던 빛의 자취는 즐겁게 조잘대다가 움츠러든다. 얼마나 영광에 찬 대낮인가! 나는 술잔 속에 담긴 한 송이 꽃처럼 태양이 진종일 내려와 쉬는 팔레르모의 금빛 소라 고동을 생각한다.“-지중해의 영감-
이 책 <일상적인 삶>은 생활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여행, 산책, 고독, 비밀, 침묵, 수면 고독 등 다양한 주제를 조금은 특이한 형태로 엮은 책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냄새가 나는 책이다. 책을 읽다가 여러 번 지루함을 느끼게도 하였고 그러다가 다시 책을 펼치면 새로운 감동을 얻기도 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여행에는 옮겨 감으로 인해 치르게 되는 희생에 대한 저항이 따른다. 이를테면 이곳을 위하여 라는 관념은 끊임없이 다른 곳을 위하여 라는 관념보다 우위에 선다. 또한 머무르려는 욕망은 이동하려는 기질을 이겨내며, 영원에 대한 향수는 순간적인 것의 유혹을 물리친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자나 원양 항해자도 결국은 정착한다. 그는 더 이상 여행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여행의 패러독스이다.”(본문-여행)
“침묵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열등한 자의 침묵은 존경을 의미 한다. 그래서 우월한 자는 존경을 나타내는 다른 어떤 표시보다 먼저 침묵을 요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돈 후안의 하인 레포렐로는 자기 주인이 싫어할 말들을 거침없이 해 대다가 돈 후안이 정숙을 명하자 갑자기 멈춘다. “이제는 섬기지 않으리” 하고 노래를 불렀으나 주인이 등장하자 입을 다무는 것이다.“ (본문-침묵) ■
(본문)
"인생이 여행에 비견될 수 있을까? 이 비유는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이 사용해 왔다. 보쉬에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란 자기가 지나가는 장소에 멈춰 서서 그곳의 아름다움을 음미해 보고자 하지만 걸어라! 걸어라! 하고 외치는 어떤 준엄한 힘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나그네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끝내는 삼켜 버리고야 말 심연의 끝에 어김없이 도달하는 것이다." -여행
“산책은 의도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여행보다는 훨씬 덜 의도적인 것 같다. 여행은 목적지가 있지만 산책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산책
“채찍으로 사람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에 산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나가면서 군인 한 사람에게서 한 대씩 매를 맞는 벌을 받은 불쌍한 캉디드는 이런 식으로 두 번의 산책을 당했다.”-산책
“키르케고르에게 그의 아버지가 시킨 산책은 특이하게 축소된 산책이었다. 일요일에 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대신에,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들이 들렀을지도 모를 모든 장소를 마치 이미 가 보기나 한 것처럼 상세히 묘사해 주었다.”-산책
“야만인들 - 은 우리가 들판과 동장과 같은 일터에서 그러는 것처럼 사냥, 낚시, 과일 따기 등에 쫓겨 힘들게 살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누리는, 아니 허비하는 여유 시간을 갖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즉 그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관습의 망에 갇혀 있었으며 아득한 옛날부터 계속된 습관들의 사이클 속에서 마치 수인처럼 사는 것이다. 그들에게 빈 시간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 시간들은 이해력이 짧은 우리 눈에만 비어 있는 것으로 비칠 뿐 정작 그들 자신에게는 결코 빈 시간이 아니다. 그들은 단 일 분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산책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하게 해 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 주는 수단이 나닐까?”-산책
“어떤 사람을 따로 불러낸다는 것은 그에게 갖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에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가 간직하고 있던 비밀이다.”-비밀
“애써 감추어 왔지만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은 죄과가 만인 앞에 밝혀졌을 때, 비로소 그 죄인은 용서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과오의 쓰라린 기억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너세니얼 호손의 <주홍글자>에서처럼 치욕적인 기호 하나가 그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기도 한다. 그 소설에서 간통한 여인은 자기가 범한 죄악을 사람들에게 공지하는 붉은 글자 하나를 가슴에 붙이고 다니도록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글씨를 떼어 버릴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계속해서 그걸 붙이고 다닌다는 것이다. 게다가 색이 바래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그 글자를 다시 선명하게 수놓기까지 한다. 또 자기 딸이 그곳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자고 해도 거부할 따름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복수의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위선적인 청교도들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교도들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치욕적인 형벌을 나타내는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 만드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비밀
“나는 라마크리슈나 파의 한 힌두 승려가 친구들의 초대를 받은 어느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승려는 힌두교도들이 정신 집중을 위해 취하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기도를 마친 후 참석자들은 그가 말문을 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중 몇몇은 벌써 초조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루어지는 주제가 심오할수록 그 표현은 소박하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숭고한 것들은 언제나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이한 말들로 설법되는 법이다. 어쨌든 조바심을 내는 자들도 있었으나 설법이란 모인 사람들에게 어떤 마력을 행사하는 것이기에 우리 중 대다수는 희망을 품고 기다렸다. 처음 몇 분간 그 승려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약 15분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그가 침묵하면 할수록 어떤 종교적인 경건함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경청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귀들을 쫑긋 세우고 있었으니 그의 침묵은 분명히 경청되고 있었다. ”-침묵
“긴장은 오전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 그에 비해 저녁은 이완의 시간, 휴식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종종 이 저녁 시간도 아침의 소리들과는 또 다른 소리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상대적인 침묵마저도 제대로 견뎌 내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도시에 살면서 늘 시골로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골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오락거리를 찾는다.”-침묵
“침묵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열등한 자의 침묵은 존경을 의미 한다. 그래서 우월한 자는 존경을 나타내는 다른 어떤 표시보다 먼저 침묵을 요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돈 후안의 하인 레포렐로는 자기 주인이 싫어할 말들을 거침없이 해 대다가 돈 후안이 정숙을 명하자 갑자기 멈춘다. “이제는 섬기지 않으리” 하고 노래를 불렀으나 주인이 등장하자 입을 다무는 것이다.“-침묵
“아랫사람에 대한 윗사람의 침묵이다. 이것은 냉정함이나 없신 여김, 혹은 승낙을 의미한다. 그것은 스탕달의 주인공들이나 비니의 신이 보여 주는바, 우두머리의 침묵이다. ”-침묵
“잠은 내가 떠올리기만 하면 이내 달아나 버리고 그 반대말에 해당하는 것이 들어와 자리 잡는다. 그렇다고 잠들어서 잠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수면
“알렉산더 대왕은 다리우스와의 운명의 일전을 앞두고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이침에 그를 깨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다음 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게르만의 오토 대제와 카토 같은 사람들의 경우 밤새도록 코 고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잘 잤다. 폼페이우스와의 해전을 앞 둔 아우구스투스와 술라와의 전투를 앞둔 마리우스 역시 너무나 깊게 잠들어서 잠을 깨고 나서야 전자는 자신의 승리를, 후자는 자신의 패배를 전해 들었다.”-수면
“자기 여행에 동행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러시아 시인 주콥스키에게 낭만주의 화가 카스피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곁에 두고 싶어 하시는군요. 그렇지만 함께 간다 해도 당신의 맘에 드는 그런 나는 옆에 없을 겁니다. 주위의 자연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것을 온전히 소유하려면 나는 혼자여야 하고 또 내가 혼자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내가 나이기 위해 나는 나를 둘러싸는 것들에 나 자신을 내맡겨야 하며 구름과 바위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답니다.”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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