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를 때면 난 늘 깨닫는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임을.
산을 좋아하지만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후회가 시작된다. 쉬운 코스도 힘들어하고, 다른 사람들은 정상까지 오르고 남을 시간에도 여전히 올라간다. 보통 3시간 완주코스라면 난 거기에 두배를 더 잡아 산에 오른다.
그래도 나름대로 언젠가는 한국 100대 명산을 완주하겠다는 목표가 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논어>의 메시지처럼, '빨리' 보다는 목표를 상실하지 않고 꾸준히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나름의 위안을 가진 채.
구미에 온 이상 100대 명산인 금오산을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금오산 때문에 구미에 오긴 했다.
여행 마지막날 일정으로 잡았다. 등산후에는 몸이 너무 힘들어 남은 일정을 다 망치기 때문이다.
금오산 정보 : 1970년 6월 한국최초 도립공원 지정. 산세가 높아 등산코스는 중상(나에게는 상급). 정상 현월봉(976.5m)
마애보살입상(보물 490) 등 문화재 보유. 특히 금오산 입구 도선굴은 도선국사에 이어 고려 말 길재 선생이 수련하던 곳.
잠시 포근했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며칠 전 산간지방에는 눈이 내렸다고 한다. 지난 겨울 정선 만항재에서 아이젠이 없어 산길을 미끄러졌던 기억이 나를 주춤하게 한다. 역시 난 등산 초보다.
그나마 케이블카가 있다는 말에 힘을 냈다. 정상까지는 3.3km인데 케이블카를 타면 800m를 덜 걸을 수 있다. 산길을 걷는 걸 싫어하면서 산에 왜 가냐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 그냥 난 산이 좋다. 산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패기가 좋다. 그리고 나름 네팔 안나푸르나 트래킹도 했고 마지막 샹그릴라라 불리는 4,600m 중국 야딩 트래킹을 한 적도 있다.
금오산은 주차장이 두개다. 1주차장이 케이블카에서 가깝지만 그만큼 주차장은 늘 만석이다. 그래서 보통 2주차장에 세워놓고 500m를 걸어와야 한다. 이른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1주차장에 주차했다. 운이 좋았다.
매표소에서 케이블카 표를 사고 바로 옆 가게에 들러 간식거리를 샀다.
"정상에 눈 많이 왔어여? 길은 미끄럽지 않을까요?"
가게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금오산은 다행히 눈이 안와서 전혀 미끄러울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길이 험하다면 그 핑계를 대고 안올라갔을텐데, 왠지 아쉽다.
별수없다. 툴툴 거려도 늘 정상까지 결국 올랐던 것처럼 그냥 다시 맘을 잡자.
금오산 입구


해운사까지는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다
앙증맞은 트램같은 분위기의 빨간색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길. 발 아래에는 깍아지른 암벽이 가득한 금오산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산세가 높고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룬 금오산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바로 해운사가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풍수지리를 도입한 인물이다. 해운사 뒤로는 도선굴이 있는데 도선국사는 이곳에서 도를 수련했다. 고려 말 충신으로 꼽히는 야은 길재 또한 나라멸망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인 구미로 내려와 도선굴에서 도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길재이야기를 덧붙이면 금오산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채미정도 있다. '채미'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멸하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는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따온 단어다. 길재는 고려가 망하자 구미로 내려와 금오산에서 은든했으며 영남학파의 주춧돌을 이뤘다. 길재가 백이숙제와 같은 '충'을 행했다며 후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해운사
대해폭포. 폭포물이 얼어붙어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도선국사와 야은길재 선생이 수련하였던 도선굴
폭포물마저 꽁꽁 얼어붙어버린 대혜폭포를 지나면 계단이 시작된다.
500여개의 계단을 올라갔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숨이 차오른다. 금오산 입구에서 많이 보이던 등산객들도 많이 사라졌다. 요즘 도선굴이 SNS에서 인기를 끌면서 도선굴 때문에 금오산에 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몇 미터 가다 쉬다 반복하며 속도를 조절했다. 다시 한번 깨닫는다. 산을 좋아하는 것과 잘 오르는 것은 별개라는 것을.
울퉁불퉁 바위 오르막도 힘든데 강한 바람이 계속 불어온다. 보통 한겨울에도 산에 올라갈 땐 열기가 조금씩 나는 법인데, 걸어갈 수록 날카로운 칼날같은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아 고개조차 들 수가 없다. 다행히 핫팩을 가져왔지만, 강풍에는 별 실력발휘를 못했다. 털장갑과 털목도리로 감싸고 걷는데도 자꾸만 추위에 의지가 약해진다. 손가락 끝은 이미 얼어서 스틱을 잡기조차 힘들었다.
나중에 내려오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케이블카 관리 직원 말에 의하면 금오산 정상은 원래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조심해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 말이라도 듣지 않았으면 괜히 혼자 유난떨었다고 생각할 뻔했다.


춥고 바람불어 고생했던 금오산 등산

암벽사이에 놓인 약사암




무료로 나눠주는 따뜻한 차 한잔의 고마움
산은 고마운 존재다. 속도는 느리더라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정상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사실 금오산에서 정상보다 더 가보고 싶었던 곳이 약사암이었다. 정상 바로 앞에 있는 약사암은 기암괴석 암벽위에 놓인 작은 암자다.
해남 도솔암도 그렇지만, 험한 암벽위에 사찰을 짓기 위해 금오산을 수없이 오르며 고생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 정성에 감탄하다 못해 경외감까지 전해진다. 사진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진정한 사찰의 모습이다.
사찰 앞에는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다. 스님들의 자비심이 느껴진다. 따뜻한 차 한잔으로 내 몸에도 자비심이 퍼지는것같다.
약사암보다는 조금 허전한 현월봉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 바람이 거세고 날이 추워 정상에서 간식 먹을 여유도 없었지만 역시나 잘 올라왔구나 싶다. 천천히 가더라도 목표만 잃지 않으면 언젠간 100대 명산 또한 다 다녀올 날이 있을테다. 근데 아직도 나에게는 93개의 산이 더 남아있다!
금오산 정상, 현월봉
덩그러니 놓여있는 정상 표지석. 왠지 허무하기도 하다.
정상에서 바라본 구미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