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턴의 참자아 거짓자아 Robert Inchausti, 「Seeds」, 강창현 역, 「토마스 머턴의 씨앗」, (서울 : 생활성서사, 2005), pp, 20-47.
모든 죄는 자기중심적 욕망 속에만 존재하는 거짓 자아가 삶의 근본 실재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삶의 근본 실재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거짓 자아에 옷을 입히고 거짓 자아의 허무함을 어떤 객관적 실재로 구성하기 위해 쾌락을 열망하고 체험과 권력, 명예와 지식과 사랑을 갈망하는 가운데 나의 참을 허비한다. 나는 마치 가시적인 어떤 것으로 표면을 덧씌울 때에만 눈에 보이는 투명 인간처럼, 내 주변을 체험으로 감싸고, 나 자신과 세상이 나를 인지할 수 있도록 쾌락과 영광이라는 붕대로 덮는다. (NS 34-35)
만일 우리가 우리의 연약한 껍데기를 우리의 참된 정체성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우리의 가면을 우리의 참된 얼굴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실을 더럽히면서까지 날조하며 그것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회의 집단적인 시도로 보인다. 사람들이 더욱 바쁘게 사회에 헌신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욱더 집단적인 환상이 된다. 결국 우리는 그저 허구적 정체성들에 불과한 '자아들', 객체로 여겨지는 '자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강박적이며 통제 불가능하고 역동적인 무수한 거짓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자아들은 뒷자리로 물러나서 스스로가 재미있게 노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재미는 자기들이 진짜라고 부추기는 환상에 불과하다. (RU 15)
내가 죄 중에 태어났다는 말은 내가 거짓 자아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나는 가면을 쓰고 태어났다. 나는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따라서 예정된 나 자신을 부정하는 누군가로 존재한 모순의 표징 안에서 태어났다. 첫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닌 어떤 존재였기에, 나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였다. (NS 33-34)
나 자신의 깊은 존재의 비밀은 흔히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해 내린 평가 때문에 나에게서 가려져 있다. 내 존재에 대한 나의 견해는 내가 한 일에 대한 숭배로 왜곡된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환상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전염되어 자라난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날조된 위대성을 모방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진정한 나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나 자신에게 진정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원하는지 물어본 적이 결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내가 경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진정으로 살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나는 스스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의무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진실과 내영혼의 고결함을 배신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고통스러운 의무에서 해방될 것이다. (NM 125-26)
인간이 자신의 행위 거울에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보고 또 볼 때, 그의 영적인 이중적 비전은 자신을 두 사람으로 분열시킨다. 그리고 만약 그가 자신의 눈을 지나치게 써서 상하게 한다면, 그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잊어버린다. 사실상 실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서도 그의 그림자 안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실체가 그 자체에서 빠져 나와 그림자 속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진정한 사람이 아니라 두 개의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싸움이 시작된다. 한 그림자는 한편으로는 다른 그림자를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비난한다. 그를 찬양하기 위해 했던 행동은 그를 꾸짖고 저주한다. 그것은 결코 실제적이지 않으며, 결코 효율적이지도 않다. 그는 존재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점점 더 행동해야 한다. 그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한히 풍요로운 실재를 일으켜 세우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노예 십장이 되어 하나의 그림자를 채찍질하여 죽이려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되고 만다. (NM 119)
우리 모두는 가공의 인격, 곧 거짓 자아로 그늘져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은둔이다. (NS 34)
당신의 거짓 자아를 참 자아로 체험하기 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우연성과 당신의 비실재성과 근본적으로 궁핍한 당신의 상태에 대한 의식을 억눌러야만 한다. 당신은 스스로 급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을 창조함으로써 이런 일을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전능에 대한 환상이다. 집단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환상, 집단의 구성원들이 더욱 자기중심적이고 완고한 거짓을 제공할 때 그 개별 구성원들이 같은 비율로 그것을 나누기로 집단이 동의하는 환상이다. 당신에게는 개인적인 욕구가 있다. 그러나 당신이 순응하고 얌전히 따른다면, 당신은 집단적 권력에 참여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당신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집단은 당신에 대한 권력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욕구를 증가시킨다. 집단은 또한 일치를 위한 요구도 강화시킨다. 당신이 이렇게 집단적 권력에 더욱 절망적으로 저당 잡힐수록 당신은 집단적 환상에 가장 충실히 종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집단은 당신에게 당신이 되고자 하는 매혹적인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행복과 재미있는 살을 향한 당신의 의지를 불어넣고 틀 지운다. 재미있는 삶은 완벽하게 믿을 만한 것이어서 의심이 간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론상 이런 좋은 시간은 너무도 확신적인 것이 될 수 있기에, 당신은 만족감을 덜 주는 어떤 것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실제로 비싼 대가를 치르는 재미는 언제나 의심을 허용하고 이 의심은 또 다른 욕구로 발전하며, 그런 다음에는 여전히 더욱 믿을 만하고 더욱큰 만족을 요구하며, 다시 당신을 패배시킨다. 이 순환의 끝이 바로 절망이다. (RU 15-16)
분열 속에 사는 사람은 인격체가 아니라 '개체' 이다.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아닌 것이 바로 나다. 나는 당신이 못 가진 것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이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았다. 그래서 당신은 고통을 겪고 나는 행복하며, 당신은 경멸당하고 나는 칭찬받으며, 당신은 죽고 나는 산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중요하며,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나의 차이를 경탄하며 세상을 바라본다. 때때로 분열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내가 받지 못한 것을 받은 사람, 나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은 사람과 내가 칭찬받지 못할 때 칭찬받는 사람, 나의 죽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등을 잊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분열 속에 사는 사람은 죽음 속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실재이기를 멈추었다. 그가 자기라고 믿는 사람은 악몽이다. 그는 죽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이미 오래 전에 존재하기를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실재이며 모든 존재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NS 48)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지상의 욕망들은 그림자들이다. 진정한 행복은 그런 욕망을 채우는 데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끊임없이 실체 없는 기쁨을 추종하고 있는가? 추종 자체가 기쁨을 위한 우리의 유일한 실체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만족을 계속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의 불만을 잊으려고 애쓴다. 이러한 추구 속에서 욕망 자체가 우리의 주된 만족이 된다. (ATT 17)
인간 존재의 중심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를 알 필요가 있다. 이 역설이란,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거의 또는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철학과 우리의 윤리만 좇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생각이 순전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절망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물의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초자연적 삶을 지향하는 본성을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영혼을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자체의 질서로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는 질서 안에서 인간을 완성할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은 순전히 세상적인 살만을 살도록 정해진 것이 결코 아니며, 순전히 세상적인 복락만을 지향하도록 정해진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무상의 은총인 우리의 본성은, 또 다른 무상의 은총인 생명의 은총으로 완성되고 향상된다. (SSM 169)
특권적이고 자율적인 입장에서 나온 실재에 따라 행동하고, 그 실재를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선의 위치로 끌어 오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자아 정체성(ego-identity)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자아 정체성을 외적 현실로 구현하려고 시도하고, 이를 위해 실용적인 원리들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무책임하게 되는 방식이다. 만일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만든 개념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우리는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만들어 낸 언어를 따르고 있는 것이고, '현실주의' 는 무엇인가 그럴듯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현실에 대한 어떤 참된 존중도 의미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나 그들의 요청에 대한 어떤 실제적인 경의도 함축하지 않은 것이므로,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심오한 신비에 대해 끊임없이 성가신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손쉽게 닿을 수 있는 체험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시시하고 엉뚱한 정체성을 날조하게 된다. (CGB 242)
상상의 속박물인 피상적 자아(ego)를 나의 참된 자기(self)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 자신과 실재를 더럽히면서 시작된다. 나는 굴욕적인 적응과 반항적인 태도 사이에서 선택을 종용받는다. 굴욕적인 적응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의 자아 개념을 조종하며, 반항적인 태도는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을 조롱하려고 시도하지만 여전히 자아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적응'은 끊임없이 "예"와 "아니요' 사이를 오간다. 하나의 모호한 조직 체계인 이 놀이는 모호함의 중심을 맴도는데, 그것은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상대적이고 우발적인 자아이미지이다. 여기에서 처음에 우리가 절대적 "예"로 지향하던 것은 냉혹하게도 절대적 "아니요'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부정이 아닌 긍정에 초점을 두려고 노력하면서, 더욱더 절망적인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투사는 사실 완전히 쓸데없는 일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처음이란 무엇인가? 우리 생각의 시초? 아니면,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참된 시작?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거기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어디로? 그 시작이란 바로 '지금' 이다. (CGB 242-243)
'사물'에 집중된 삶, 사물을 붙잡고 조작하는 데 집중된 살의 비극은 마치 자아 자체가 목적인 양 자아를 밀폐시키고, 힘과 만족을 줄 소유물들을 얻기 위하여 왜곡되고 적의에 찬 다른 자아들과의 절망적인 투쟁 속으로 자아를 빠뜨린다는 데 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세상을 향해 개방하는 대신 세상에 폐쇄적이 되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상을 건설하려는 그들의 엄청날 노력은 자신들 안에 있는 모호함과 파괴력으로 결국 파멸을 맞는다. 그들은 밝아 보이지만 무감각한 도덕적 어둠속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다. (Z&B 82)
만일 우리가 소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소외의 가장 깊은 뿌리 닿는 곳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뿌리는 언제나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소외는 문화, 문명, 사회의 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나쁜' 문화나 '썩은' 문명, 도시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내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예정된 의심스런 특전이 아니다‥‥‥‥ 문화가 나 자신에 반대하여 나를 분리시키고, 나에게 가면을 씌우고, 내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역할을 나에게 부여할 때, 소외는 시작된다. 내가 나의 가면과 완전히 일치할 때, 내 역할에 완전히 만족할 때, 그리고 다른 정체성이나 역할을 상상할 수 없을 때, 소외는 완성된다. 그러나 자기가면 속에서 땀을 홀리고, 맡은 역할이 불편해서 스스로 참을 수 없으며, 자신 안에서의 분리를 혐오하는 사람은 이미 자유의 관문에 들어서 있다. (LE 381)
참된 '세상' 을 발견하는 길은 그저 우리의 외부 세계를 바라보고 관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내적 토대를 발견하는데 있다. 나의 가장 심오한 자아의 안, 바로 그곳에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내가 신비롭게 즉시 제시하는 장소인 이 '토대', 이 '세상'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객관적이지 않으며, 법률과 요구를 지닌 확정된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이 되게 하는 생생한 자기 창조적 신비이며, 내가 나 자신이 되는 나의 독특한 문이다. (CIWA154-155)
개인주의의 피상적인 '나'는 사로잡힐 수 있고, 발전될 수 있고, 계발될 수 있고, 영합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 그것은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이익과 만족을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중심이다. 그러나 영과 고독과 사랑의 심오한 '나'는, '미리' 사로잡히거나, 발전되거나, 완성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내적 법칙들은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바람처럼 움직이는 성령의 법칙들이다. 언제나 혼자인 이 내적인 '나'는 언제나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이 가장 내부에 있는 '나' 안에서 나의 고독은 다른 모든 사람의 고독과 하나님의 고독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리를 넘어서고 한계를 넘어서며 이기적인 긍정을 넘어선다. (DQ 207)
'선함' 을 마치 자신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선의 본성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고 이해하고 분석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성과 다양한 의견의 혼미함 속으로 더욱 빠져 든다. '선함' 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할수록 그것은 마치 특별히 고결한 기술로 획득할 수 있는 어떤 것처럼 취급되며 덜 실제적인 것이 된다. 실제적인 것이 될수록 그것은 더욱 추상적이고 미래적이며 획득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이에 따라 목적은 더욱 멀어지고 단지 수단에 대한 연구만이 중요한 것이 되며, 모든 노력이 이 수단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오류만 남는다. 결국 목적은 잊혀진다. (WOC 23)
인간의 내적 자아를 발견하고 일깨우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기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내적 자아란 무엇보다도 자유로우며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적 자아를 정의 내리려고 시도한 다음, 내적 자아의 근본적 특성들로부터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확실한 수단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우리가 뽑아 낸 핵심은 연약한 내적 자아의 길잡이가 될 수 없고, 내적 자아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실존적 실재에 대한 완벽한 오해를 시사한다. 내적 자아는 자동차에 귀속된 엔진처럼 우리 존재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고결하고 가장 인격적인 측면으로 가장 실존적인 차원에서, 흠 없이 실체적인 실재 자체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며, 가장 생기를 띨 때 우리의 영적 생명이 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생명이다. 그것은 우리를 만드는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을 넘어서 있다. 그것이 일깨워졌을 때 그것은 자기가 거주하는 존재에게 새로운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그 존재가 자체로 살아 있는 자각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이 자각은 우리를 구성하는 어떤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새롭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우리 존재의 속성이다. 내적 자아는 하나님처럼 비밀스럽고, 마치 그분처럼 완전히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개념을 빗겨 간다. 그것은 물건처럼 붙들 수 없고 대상으로 연구될 수 없는 하나의 생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사물' 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상을 포함하여 태양 아래에 있는 모든 방법을 이용한다 해도 파악되거나 설득당하지 않는다. 영적 훈련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내밀한 침묵과 겸손과 초월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내적 자아가 다소 조심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는 무관심이 요청된다. (CQR 5-6)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양심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양심을 무시하려고 해도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끈질긴 양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부정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의 지성적 영혼은 도덕성과 영적 자유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요구한다. (NM 41-42)
우리의 존재 안에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근본적인 "예"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드물고 독특한 상황을 제외하고,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진짜로 온전히 체험조차 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근본적인 "예"에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 정말로 무의식이며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내 존재는 제한된 자아의 긍정이 아니라, 나의 선택과는 무관한 존재 자체의 긍정이다. '나'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내 자유의 "예"와 내가 선택하기 전에 이미 있었던 존재의 "예"가 일치하는 그곳에서 온다. 이것은 '적응'이 아니다. 여기에는 적응할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는 실재가 있고, 자유로운 동의가 있다. "예"라고 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이 현실 속에서 '적음에 대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ego)는 사라진다. (CGB 243)
우리는 '참 자아' 안에서 인격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이 참 자아는 기본적으로 통일된 의식 안에서 드러나며, 통일된 의식 안에서 주체와 객체는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최고선이란 '자아와 최고 실재의 융합'이다. 인간의 인격은 이러한 융합을 낳는 힘으로 보인다. 사실, 외면적이고 개체적인 자아의 희망과 욕망은 모두 이 지고한 일체성과 대립된다. 그것들은 개체성을 긍정하는 일에 집중되어있다. '인간의 진정한 인격' 은 개체적 자아의 희망과 공포가 배제되고 망각되는 순간에만 드러난다. 그러니까, 최고의 영감(spiritualsense)으로 인간의 인격을 실현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선이며, 모든 생활은 최고의 영감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Z&B 69)
우리의 진정한 존재는 우리가 하는 체험의 격렬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혼의 혼란은 영적 취약함의 표징이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기쁨이 표범처럼 포효한다고 해서 자랑스러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우리 영혼의 생명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강한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보다 언제나 더 위대하며,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의 영혼은 많은 물고기들이 사는 깊은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고기들은 결코 바다위로 나오지 않으며, 그들 중 어느 것도 고요한 수면을 흔들어 놓을 만큼 크지 않다. 그가 '존재한다는 것' 은 그가 느끼거나 행하는 모든 것보다 위대하다. (NM 125)
우리의 존재는 단순한 활동이나 체험만으로 풍요로워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는 행위와 체험의 '질' 에 달려 있다. 올바르게 행하지 않은 수많은 행위와 체험은 단지 우리의 살을 소진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갉아먹을 뿐이다. 올바르게 행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비현실성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우리의 죄의식을 키운다. 그러나 우리 양심의 순결은 존재의 깊이와 행위의 질에 정비례한다. 우리의 활동이 습관적으로 무질서할 때, 잘못 형성된 우리의 양심은 행위의 질을 개선함 없이 행위의 양을 증가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욱더 나빠져서 우리 자신을 소진시키고, 우리의 전 삶은 텅 비게 되어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활동 속에 빠져 완전히 자기 자신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맞아서 쉬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 그에게는 쉬는 행위 자체가 가장 힘들고 가장 용감한 행위이며, 흔히 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해야만 한다. (NM 123)
내면적 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무시되는 요소들 중 하나는 현실에 응답하는 능력과 평범한 것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물 속에 있는 우리 주변의 광채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이것들로부터 물러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물러나 있어야만 한다. 현대 생활에서 우리의 감각은 모든 면에서 지속적으로 자극적인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일종의 방어적인 무감각을 계발하지 않는다면, 모든 광고들에 대해 동시에 반응을 보이려고 노력하다가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내면적 생활로 들어가는 첫 단계는, 오늘날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물을 보지 않고 맛보지 않고 듣지 않고 느끼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잘못된 방식으로 보고 맛보고 느끼고 하는 것들을 버리고, 옳은 방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단지 텔레비전과 담배와 술을 끊는 문제만이 아니다. 금욕주의자가 되기 전에 우리는 우선 삶이 매혹적인 텔레비전 방송보다 더 나은 무엇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담배와 술 이외의 다른 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는 이 사치품들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어야할 것이다. 우리의 양심이 그것들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단념하라거나 그러지 말라고 우리에게 일러 줄 수 있겠는가? 단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양심은 우리가 그것들을 더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양심은 우리가 그것들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일 현실이 우리를 배반한다면, 우리가 단지 싫증이 나서 그것으로부터 얼굴을 돌린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그것을 희생으로 바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봉헌할 것인가?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선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NM 33-34)
참된 고독은 무한히 풍요로운 겸손 안에 있다. 거짓 고독은 교만의 피난처이며 끝없이 빈곤하다. 거짓 고독의 빈곤은 자기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 그 자체를 숭배함으로써, 한 개체적 자아가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구별되는 것처럼 꾸미는 환상에서 나온다. 참된 고독은 사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침묵과 사랑과 평화 속에서 풍요롭다. 참된 고독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여할 소진되지 않는 선의 원천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 거짓 고독은 자기중심적이다. 자기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거짓 고독이 접촉한 모든 것은 거짓 고독 자체의 무(無)에 감염되어 붕괴되고 만다. 참된 고독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며 관대하게 만든다. 거짓 고독은 모든 사람들을 거슬러 문을 닫고 스스로 쌓아놓은 사적 쓰레기를 부어 넣는다. 두 고독 모두 개인을 군중으로부터 구분하고자 한다. 그러나 참된 고독은 이 일에 성공하고 거짓 고독은 실패한다. 참된 고독은 한 사람을 나머지 사람들에게서 분리하여 자신의 선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다른 모든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그의 진정한 목적을 실현하게 한다. 거짓 고독은 한 사람을 형제들로부터 분리하여 어떤 것도 효과적으로 그들에게 줄 수 없고, 그들로부터 어떤 것도 자기 영혼 안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그를 빈곤과 비참과 무분별과 고통과 절망의 상태에 빠지게 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으로 성을 내며 자기 것이 아닌 만족과 소유물을 붙잡지만, 그것들은 결코 그를 만족시킬 수 없고, 그는 결코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는 정말로 자기 것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자기에게 속할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NM 248-249)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오류 중 하나는, '인격'을 경험적 자아(ego)인 외적 자기(self)와 동일시하고, 오직 자아(ego)의 계발에만 전념하는 피상적 '인격주의' 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흔히 '성격'이라고 상상하는 환상, 더 심하게는 '역동적'이고 '성공적인 성격이라고 상상하는 환상을 숭배한 것일 뿐이다. 이 오류가 종교 안으로 들어오면 최악의 상태가 된다. 우리의 온전한 문화적 · 영적 자아를 손상시키는 심리주의와 자기표현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실재 그리고 참된 자아는,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빈 것으로 보이는 것 안에 숨겨져 있다. 즉, 실체이지 않은 듯한 무엇, 비실재인 것 같은 무엇 안에 숨어 있다. 우리는 이런 비실재를 넘어 부상할 수 있고, 우리의 숨겨진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때문에 실재로 가는 길은 겸손의 길이다. 겸손은 거짓자아를 물리칠 수 있게 하고,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빈' 자기를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빈 자기가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참된 실재이다. 이 실계는 '하나님 안에', '그분과 함께 완전히 그분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실재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구별되며,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님 본성의 일부이거나 하나님 본성에 흡수된 것이 아니다. 깊은 내면에 있는 이런 자아는, "나는 원한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안다.", "나는 느낀다."라고 말하는 경험의 범위를 넘어선다. 자신만의 독특한 앎의 방식과 사랑의 방식과 체험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 방식은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이다. 정체성을 밝히는 길이고 일치의 길이며 '결합'의 길로서, 여기에는 모든 선과 진실을 자신을 향해 끌어당기는 별개의 심리학적 개체가 없다. 그러기에 스스로 알고 스스로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는 '한 영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 중에, 순수함과 비움의 심연인 하나님의 문간에 서서 그분께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순수한 명상인 가장 친밀하고 비밀스런 일치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다. 문간의 맞은편인 우리 쪽에서 볼 때, 이 어둠과 비움은 깊고 광대하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 장애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계를 넘어서 우리가 길을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는 심연마저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뛰어내린다면 다음 단계는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는 자신을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NS 281-282)
영성 생활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다. 우리는 눈이 멀었고 수많은 환상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시간에 실수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우리는 반복적인 실패를 받아들여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부인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화가 날 때, 자신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비천하게 만든 것을 고치고 싶어 한다. 우리의 실수가 만들어 낸 수치심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위안과 보상을 찾으며 성급하게 정반대의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는 집착의 대상을 옮기면서 살을 허비한다. 만일 이러한 것이 우리의 자기 부정이 쌓은 결과라면, 우리는 실수에서 결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실수했을 때 해야 하는 일은, 하던 일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옹졸하게 했던 일에서 다시 시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그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OSJ 242)
오늘날 영성 생활의 많은 문제들과 고통들은 근거가 없는 허상이든지, 아니면 참지 말아야할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 구조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건강하고 결실 있는 영성에 요구되는 '완전한 응답'을 하지 못한다. 사실 '영성은, 그것이 분열되어 있고 스스로 완전한 응답을 못하게 하는 한, 건강하지 못한 성향을 지닌다. 그래서 영성 생활은 '내적으로' 그리고 '영'으로 살아야할 막연한 어떤 것이 되어 버린다. ('상상'에 불과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더 나쁜 것이다) 몸은 '나쁜' 것이거나 아무리 좋아도 '비영성적' 인 것이 되기 때문에‥‥‥ 무시되고 만다. 그래서 생각으로는 '믿지만' 마음과 몸으로는 따르지 않기 때문에, 결코 생겨서는 안될 문제들을 만들어 낸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혼란된 생각을 따라 마음과 감정이 자체의 방향대로 움직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성 생활의 지루한 추상성은 사람들을 황페하게 한다.‥‥‥‥ 모든 것이 '지향'과 '내적 활동'으로 축소되고, '지향을 순수하게' 하라는 지침을 받으며, 육체적이고 심리적으로는 더욱 피로하고 불안해지며 비이성적이 되고, 심지어는 비인간적이 되는 한편, 십자가는 정신으로만 지게 된다. (CGB 253-254)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오직 선물로만 다가오며, 그것들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 우리는 열려 있어야만 한다. 열려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 우리의 자율성 그리고 스스로 만든 정체성에 대한 고착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고통스럽고 연약하며 무력한 '나' 안에 스스로를 읽히게 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속박을 완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속박을 완화하지 못하는 습관적인 무능력은 절망을 낳는다. 속박은 허무에 대한 의미 없고, 어리석으며, 헛된 긍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것에 반대하여 허무에 끊임없이 빠져 들고 만다. 결국, 우리가 허무에 휘말려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좌절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는 "아니오"를 제외하곤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에 대한이 "아니오"는 우리 자신에게는 애처롭게도 "예"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미봉책의 정체성일 뿐이다. (CGB 204)
개인주의의 이단은 이런 것이다. 오직 자기 충족적인 단위로 자신을 고려하고, 다른 모든 타자에게 반대하는 가상의 '조화'를 주장한다. 자기에 대한 긍정은 그저 '타자가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누군가와 관계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스스로 추락할 때까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이를 부정함으로써, 당신이 만들어 낸 조화를 추구한다면 과연 긍정해야 할 것이 남아 있겠는가? 비록 긍정할 어떤 것이 있다고 해도, 당신에게는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참된 길은 정반대의 길이다. 나 자신 안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그들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즉 내가 내 안에서 타인들을 긍정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 참된 나가 된다. 내 마음이 모든 이에게 "예"를 한다면, 나는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그늘을 논박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긍정하고 더욱 성숙할 수 있다면, 나는 더욱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무슬림, 힌두인, 불교인들과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혼합주의나 무관심주의가 아니고, 아무생각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맥 빠지고 경솔한 우애도 아니다. 우리가 '긍정'하고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우선 가능한 한 "예"를 말해야만 한다. 만일 내가 그저 모든 무슬림, 유다인, 기독교인, 불교인 등을 부인하고 가톨릭 신자임을 긍정한다면, 결국 나는 자신을 가톨릭으로 규정할 만한 것이 많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가톨릭성을 긍정할 만한 성령의 기운도 확실히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CGB 128-129)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우리 자신의 삶을 이끄는 데 있어서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적인 계획과 결정들을 받아들이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이 상상하듯 순교자도, 신비가도, 사도도, 지도자도, 하나님의 연인도 아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여러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 주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당치 않은 독선 때문에 귀가 멀어 버렸다. (NM 38)
문제는, 모든 이가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부조리와 무질서를 받아들였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 분노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느냐 하는 것이다. 해결책을 찾을 만큼 강한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원이 반드시 옳은 해답은 아니다. 수도원에도 분노가 있으며, 같은 이유로 어디든지 분노는 존재한다. 분노를 끊고 싶다면, 혼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혼란에 의해 스스로 협박당한다고 느끼는 어두운 자아를 끊어 버려야 한다. 조직, 단체, 사회 또는 자기가 경멸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는 것, 바로 이것이 문제다. 그렇게 의존하며 살면서도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기가 증오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본질적으로 굴욕적이며 의존적인 '나'로 사는 것,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예속하는 폭군에게 끊임없이 아첨하고 찬양함으로써 자기의 노예 근성을 드러내는 '나' 가 문제인 것이다. (NS 109)
내게 주어진 삶을 스스로 잘 살아가는 일은, 모든 인류의 행복과 인간의 공동 목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공헌이다. 만일 내가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자유롭게, 지혜롭게 살도록 도와줄 수 있겠는가? 아직도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행복하게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마도, 인간은 행복을 찾지 않음으로써 행복을 발견한다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행복을 향한 욕망을 신중하게 자제하라고 가르치는 지혜는,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않고도 이미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나에게 있어서 스스로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비밀스러운 것, 곧 나 자신 안에 있는 신비를 깨닫고 감사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비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 아닌 것이고, 내 안에 존재하면서 나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폭력과 자기 과시에서 오는 모든 방해물들을 이 거룩한 장소로부터 겸손하고 인내롭게 퇴치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이 방해물들이 실제로는 거룩한 장소를 침략할 수 없으나, 나를 그 장소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고, 비밀스런 문 앞에서 나를 죽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나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중요한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영성적 일치를 위해 기초를 놓는 작업을 그들과 함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허구를 없애기 위해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한다. (CGB 81-82)
영적으로 성숙한 정체성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허구와 선입견이라는 폐쇄된 자궁에서 자유롭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며, 인위적인 욕구를 만들어 내고,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체제와 과정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해방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개인적인 이익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필요성이라는 노예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적극적 삶이다. 두 번째는 관상적 삶이다. 그러나 시간과 사건으로부터의 탈출이나 사회적 책임과 감각적인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관상 생활로 이해하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오히려, 허무함의 공포에서 나오는 무지와 실책을 극복하기 위하여, 가난과 결핍을 대면하고 경험적 자아를 포기하면서 고독과 사막으로 전진하는 삶이다. (RU 17-18)
지상에서의 유일하고 참된 기쁨은 거짓 자아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모든 존재의 본질 안에 그리고 우리 영혼의 중심에 거주하며 노래하시는 생명이신 분과 사랑으로 일치하는 일이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며 그 결실을 즐기고 그 모든 것들 안에서 그분을 찾는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만나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은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정화하며 우리 안에 명상적인 것, 천상적인 어떤 것을 심어 준다. 이런 완덕에 이르지 못한다면 창조된 모든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때까지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가장 불행한 것은 우리가 받은 상처로 인해 죽어가는 것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할 때까지 하나님의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우리는 사물들 안에서 어느 정도 하나님을 찾는다. 그런가 하면 그들 안에서 하나님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 안에서 우리가 어떤 기쁨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에 그 기쁨은 슬픔으로 변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시작하는 그 순간 쾌락은 고통으로 바뀐다. 아직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창조된 모든 것 안에서 천상의 충만함을 보여 주는 어떤 것과 지옥의 고통을 말해 주는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축복의 기쁨 한 면을 볼 수 있으며, 상실의 고통인 어떤 면을 찾을 수 있다. 피조물 안에서 우리가 찾는 완성은 창조된 존재의 실재에 속해있다. 그 실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을 반영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보다 더욱 큰 실재를 추구하고, 창조된 그 어떤 것이 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충만을 바라는 욕망의 무질서함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우리는 언제나 피조물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숭배하려 한다. (NS 25-26)
이 외적 자아가 본성상 사악한 것은 아니다. 외적 자아가 허울뿐이라는 사실은, 외적 자아에게 어떤 범죄라고 뒤집어씌우는 것은 아니다. 외적 자아는 형이상학적 빈곤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가난한 모든 것은 동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의 외적 자아의 경우도 그렇다. 그릇된 신념으로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는 한 외적 자아도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의 축복을 받는다. 드러나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보잘것없고 덧없는 존재가 일으키는 우발적 사건들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터득하는 데에 투명한 매체가 될 수 있다. 외적 자아를 가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다시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각 사람이 쓰는 가면은 자기의 내적 자아에게만 속임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 안에서 순례자이자 방랑자로 떠돌아다니는 하나님 앞에서 조차 위장하기 쉽다. (NS 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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