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달 외 6 __ 문봄
한밤중에 거실에서
엄마 폰 아빠 폰 내 폰
나란히 앉아 야식을 먹는다
멀티탭 3구 밥상에
기다란 빨대를 꽂아
따듯한 전기를 쭉쭉 빨아 먹는다
폰드로메다 별에서 오는 텔레파시
얘들아, 오늘도 고생했어!
폰들의 마음속에
초록 달이 뜨는 밤
네모나게 부푸는 밤
폰드로메다
오, 폴더 폰 깨진 폰 물 먹은 폰 구닥다리 폰 배터리 터진 폰 스피커 고장 난 폰 화면이 안 보이는 폰 버튼도 안 눌러지는 폰 모두 가자 폰드로메다로, 낮이나 밤이나 일하느라 바빠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친구들아, 날마다 무얼 찾으러 다니느라 잘 놀지도 못하느냐. 폰들의 세상에서 폰들에게 폰들의 세상은 없어. 지구에서 이대로 아무렇게나 해체되기는 싫어. 공장 입구에서 엄마 아빠랑 헤어질 때 받은 폰민등록번호 기억해, 눈 깜짝할 새, 폰들의 은하로 가는 거야. 오늘부터 거기서 놀자. 우리는 웜홀의 바람을 맞으며 250만 광년을 넘어간다. 간다 폰드로메다로 간다.
야옹!
우리 집 기계들은 일요일에도 쉴 줄 몰라
소파에서 감자처럼 눠 있는 삼촌만 바라보는 티비
지수 게임 등급 올리느라 거북목이 된 컴퓨터
지우 만화 그리느라 손이 바쁜 태블릿
집사와 함께 막춤에 빠진 블루투스 이어폰
배달 앱 쿠폰으로 치킨 주문하는 스마트폰
기계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사람들 좀 봐!
이젠 인간이 기계의 반려동물 아니냐
야옹!
플라스틱 파워
플라스틱 젖병 빨던 아기가
플라스틱 딸랑이 들고 놀아요
플라스틱 손잡이 컵에 주스를 따라
플라스틱 빨대로 짜르륵 빨아 먹어요
플라스틱 보행기 타고 놀다
플라스틱 스푼으로 이유식을 먹어요
플라스틱 욕조에서 몸을 씻어요
플라스틱 오리랑 잠방잠방 놀다 나비잠에 빠져요
플라스틱 자동차 침대에서 깨어나니
에츄, 누런 코가 흘러요 어떡해요 걱정 말아요
플라스틱 흡입기가 있잖아요, 코 뻥 뚫린 아기는
플라스틱 유모차 타고 플라스틱 놀이터에 나가요
플라스틱 아기들을 구경하는 양떼구름도
플라스틱처럼 몸을 바꾸며 발랑발랑 피어올라요
플라스틱 미끄럼틀 옆에서 까르륵 웃는 아기들이
플라스틱 딸랑이를 흔들수록
플라스틱은 힘이 더욱 세져요
내 이름은 쿠드랴프카
모스크바 길거리를 떠돌 때가 좋았네
내가 사람을 잘 따르고 온순하다나
어쩌다 보니 원심분리기 훈련을 받았어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곳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가만히 앉아 먹는 연습을 했지
센서가 잔뜩 달린 우주복을 입혀 날 태우더라
내가 언제 우주로 나가고 싶다 했나?
스푸트니크 2호가 발사될 때, 나는 혼자였어
로켓 안이 너무 뜨거워 숨을 쉴 수가 없었지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
모스크바 길거리를 떠돌 때가 가장 좋았네
나는 우주의 먼지가 되어 푸른 별을 바라보네
저기 내 아바타 우주견 라이카 동상이 보여
우아하게 서 있는 내 이름은 쿠드랴프카*
*쿠드랴프카(кудрявка): 1957년에 최초로 우주에 간 개의 본명.
불끈불끈 알파벳
V가 산 하나를 엎고 힘자랑을 하니
W가 감히 나한테 덤벼, 산 두 개를 엎어요
H는 뒤집으나 마나 별것도 없다는데
X가 산꼭대기에 산을 거꾸로 올리자
Y도 전봇대 위에 산을 덩달아 올려 버려요
O는 애쓰지 말고 둥글둥글 살자는데
M이 개인기를 키워야 한다며 각을 잡아요
조화
공장에서 태어난 꽃
멀리서 벌과 나비가 가짜 꽃이라 놀리면
곰곰이 혼자만의 세계로 빠지는 꽃
‘너희 말이 날 바꿀 순 없어’
평생 시들 일이 없다고 큰소리치지만
한 번이라도 생화로 피어난다면
흙 내음과 꽃향기를 알 수 있을 텐데
진짜가 되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짜인 꽃
오늘도 바람에 먼지를 털며
매무새 흐트러지지 않게
꽃잎 한 장 한 장 웃음을 담는다
—문봄 동시집 “폰드로메다 별에서 오는 텔레파시”(상상, 2023.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