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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2]
행복을 생각하는 자, 사랑의 길을 걸어라
“일흔여덟이 되신 선생님이 지금 어떤 위치에 계신지 보십시오. 아아,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선생님을 그리워할까요!”
“한낱 외로운 홀아비인걸.” 로리 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루시 양이 울어드릴 텐데요? 루시 양의 딸도.”
“그래요, 고마운 일이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소.”
“그 정도면 하늘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당연한 말이오.”
“혹시 오늘 밤 선생님의 외로운 심정을 솔직히 말씀해 주신다면, 예를 들면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애정과 믿음, 감사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다정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기억될 만한 선행을 베푼 적도 남에게 봉사한 적도 없다.’라고 하신다면 선생님의 일흔여덟 생애는 헛된 것이 되겠죠. 그렇죠?”
“그렇소, 난 그렇게 생각한다오.”
카턴은 다시 불길을 바라보았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 시드니 카턴과 자르비스로리의 대화)
바흐를 들으며
요즘 며칠 동안, 독일 여성 바이올린 연주자인 이자벨 파우스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새로 나온 두 번째 음반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두 해 전에 그녀가 연주한 바흐의 이 매혹적인 작품의 첫 번째 음반을 친구에게 선물로 받고 한동안 깊이 빠져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제 이 새 음반으로, 그녀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전곡이 완성되었습니다.
얼마 전 음반가게에서, 늦가을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 앨범의 표지사진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날 집에서 이 음반의 첫 음을 들으며 느낀 단순한 행복감은 어느덧 가시고, 이제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점점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그건 또 다른 행복이겠지요. 첫 번째 소나타의 아다지오와 푸가와 시칠리아나가 이어지는 대목을 듣고 있는 지금은 사랑과 행복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 년 동안 써왔던 행복에 대한 ‘가톨릭 철학 에세이’의 마지막 장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마무리하는 것이 저에게는 옳은 일처럼 느껴집니다. 경건하고 준엄하지만 생명력과 부드러움이 가득한 그의 음악이 행복의 얼굴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그의 음악이 청자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초대하고 있듯이, 행복 역시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게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첫 번째 ‘가톨릭 철학 에세이’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썼습니다. 그때는 건반악기를 위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이었습니다. 인생이 같으면서도 다른 만남으로 이루어져서 마침내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유하는 듯한 음악이었습니다.
사랑을 생각하는 것, 행복을 생각하는 것
‘행복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응답으로 잘 알려진 것이 이른바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라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행복관을 쉽게 주지주의적으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행복의 정의는 철학자들에게나 가당한 행복이라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바라봄으로서의 행복이 사실은 정화되고 완성된 사랑을 가리킨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토마스가 인식의 행복을 말할 때 전제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니라 ‘완전한 앎은 사랑의 앎’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앎을 주는 “믿음조차도 사랑에 의해서 제 형상을 얻는다.(Fides caritate formata.)”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인 애덕(caritas)은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한 사랑이니, 그러한 사랑은 완성된 삶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이러한 문자 그대로 복된 성인들에게나 가능한 사랑이, 삭막하고 곡절 많은 나의 인생 한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을지 우리가 근심하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인들 역시 어디에선가 그 첫발을 내딛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랑의 출발점, 또는 사랑의 길에 들어서게 된 갈림길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행복에 대한 추구에서 진정 중요한 사실일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한 말에서 사랑으로서의 행복을 향한 출발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여하튼 사랑을 하면서만이 사랑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부족함과 상처가 가득한 나이지만 나에게 다가온 사랑에, 또는 사랑의 요청에 응답하면서 사랑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면 그 여정에서 참된 행복의 길이 밝혀지지 않을까요?
최근에 뮤지컬로도 잘 알려진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의 작품 「두 도시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시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고풍스럽지만 멋진 표현과 강렬한 멜로드라마가 인상적인 명작입니다.
이 소설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신과 절망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쳐간 시드니 카턴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인 루시가 보여준 연민 어린 순수한 사랑에 감사하고 응답하며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그가 마침내 성인이 느끼는 행복에 다가섰다는 것을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행복이라는 명제는 사랑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고 시도하는 이에게만 진리로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한 길은 다름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또 다른 부족한 사람들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유한하고 이기적인 사랑이 무한을 닮은 사랑으로 함께 나아가는 길이 행복의 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카이로의 넝마주이들과 함께 삶을 나누었던 우리 시대 진정한 그리스도인 에마뉘엘 수녀님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것은 자기 자신의 생생한 힘으로 다른 결핍의 초대에 응답함으로써, 살아있는 자로 새로이 태어나게 한다. 귀를 기울여보라. 네 주위에 너 아닌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또는 무언가가 있는가? 하나의 결핍이 다른 결핍에게 응답할 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무엇인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 이미 많은 사람들은 영원의 얼굴을 얼마쯤은 지니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사랑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향한다. 자신의 밖을 향하는 매일의 움직임은 일상적으로 살며 반복되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허무와 유한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것이다”(에마뉘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사랑이 나의 행복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행복이 참이 되기를 바란다면 나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기를 갈구해야 할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그의 저서 「칠층산」에서 “책은 끝났으되 탐구는 끝나지 않았다.”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멋진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생각을 마치며 사랑의 길을 걷는 것을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해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1]
진정한 행복을 주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이다(Pondus meum amor meus)”(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3권, 7장).
“여러 특성이 모두 선한 사람 자신에 대한 관계에 속하며, 또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처럼 벗에 대하여 관계를 맺고 있기에(그의 벗은 또 하나의 그 자신이기에), 우정도 역시 이러한 여러 특성 가운데 하나로,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벗으로 생각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9권 4장).
“사랑은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고 내적으로 정화해 가며 이제 결정적인 사랑이 되고자 합니다. 결정적인 사랑이란 두 가지 의미, 곧 (오로지 이 사랑뿐이라는) 배타의 의미와 ‘영원’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사랑은 시간을 비롯한 온 삶을 그러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약속은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은 영원을 바라봅니다. 사랑은 참으로 ‘황홀경’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이 아니라,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6항).
우리는 왜 서로 다른 사랑을 구분해야 하는가?
‘정념으로서의 사랑’과 ‘끌림으로서의 사랑’은 우리를 끊임없이 매혹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에서 적어도 순간이나마 생생하게 행복을 경험한다고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체험도 오직 이런 사랑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차원의 행복의 경험, 기쁨의 경험만으로 내가 시간을 이겨내고 나의 삶을 지속적인 행복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조금씩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정열과 애착에 의해 사랑하는 이에게 쏟아부은 나의 호의와 관심 역시 나를 넘어서 순수하게 그에게 향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자기중심적 추구로 귀착되는 움직임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행복은 지속적이고 항구한 좋은 삶이라는 관점에서 사랑을 행복의 중심으로 삼으려면, 이러한 즉각적인 정서적 움직임으로서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며 정념과 끌림을 포함하고 동기로 삼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는 사랑의 개념이 요구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높은 차원의 사랑의 본모습을 성찰하는 것은, 행복을 철학적으로 성찰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내가 어떤 사랑을 하는가에 따라 내가 이해하는 행복의 모습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념으로서의 사랑과는 다른, 행복에 어울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은 사랑이 매우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 다양한 모습의 사랑은 서로 다른 차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사실 사랑이라는 현상이 가진 다면성을 섬세하게 서로 다른 개념으로 표현하고 그것들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철학의 관점에서든 신학의 관점에서든 덕의 윤리학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윤리학이란 무엇보다도 덕이라는 지평 안에서 행복의 참모습을 그려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애덕, 참행복으로 이끄는 사랑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서 사랑이 행복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그 사랑이 복합적 현상이기에 그 사랑의 양상들을 분별하는 것이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가는 데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 분이 바로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이 우리 삶에서 주도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를 그 유명한 격언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Dilige, et quod vis fac).”라는 말로 잘 요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사랑이란 말로써 우리가 무분별한 우리의 정념과 욕망, 일시적인 욕구의 충족을 포장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록」에서 밝히셨듯, 무엇보다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참된 사랑은 애착의 차원이 아닌 의지의 차원에서 드러난다고 보았기에 “만일 그의 사랑이 선하다면 그의 감정들과 의지는 똑같이 선하게 되고, 만일 그의 사랑이 악하다면 그것들이 악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제 정념으로서의 사랑(amor)에 머무는 것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은 다른 이름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그리스도교는 애덕(caritas)이라 부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애덕은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말 안에 덕을 통한 도덕적 삶과 그러한 도덕적 삶을 통한 좋은 삶으로서의 행복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을 이끄는 사랑에 대한 담론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은 사랑(caritas)”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사랑을 말하는 데 주로 사용하였던 에로스와 필리아 대신에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던 아가페라는 단어를, 그리스도교 철학이 신적 사랑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애덕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 사랑에 대한 성찰의 중심으로 삼게 된 이유가 있다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애덕의 원천이시고 그러기에 행복의 원천이시기도 합니다. 뛰어난 중세 철학사가 에티엔앙리 질송은 인간의 행복과 하느님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사랑에 대한 성찰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하느님은 애덕이시다. 도덕적 삶은 애덕 그 자체이다. 우리가 애덕으로 살려면 하느님 곧 애덕을 향하여 나가야 하고, 동시에 미래의 행복에 대한 담보로서 애덕 곧 하느님을 소유해야 한다.
… 그러나 그것은 담보 이상의 어떤 것이다. 우리는 애덕으로 담보를 잡고 있다고 말하지 말고, 오히려 미래의 행복에 대한 보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보증은 되돌려야 할 담보로서 취해진 것이 아니라 장차 완전하게 완성될 선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애덕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나중에는 애덕 그 자체를 가질 것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길어낸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회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 이어졌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정으로서의 사랑(philia)에 대해 논하면서 밝혀낸 행복의 내용으로서 덕을 나누는 상호적 사랑, 그리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하느님 안에 참여하는 행복의 길로서의 사랑을 탁월하게 종합하고, 거기에 더욱 넓고 깊은 보편성을 부여합니다. 그리하여 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행복의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행복에 대한 탐구의 마지막 여정을 이 위대한 ‘천사 박사’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0]
정의와 우애는 어떻게 행복과 관련되는 것일까요?
“정의는 가끔 모든 덕 가운데 가장 큰 덕이라 생각되며, 저녁의 별이나 새벽별도 그만큼 놀라운 것은 못 된다. 그래서 ‘정의 속에 모든 덕이 다 들어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덕의 활용이기 때문에 충만한 의미에서 완전한 덕이다. 그것이 완전한 까닭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그 덕을 자기 자신 속에서만 아니라, 자기 이웃 사람에 대해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네가 우울하고 힘들어서
애정 어린 관심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눈을 감고 나를 생각해 봐
그러면 곧 내가 가서 너의 어두운 밤을 밝혀줄 테니까
그저 내 이름만 불러봐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네게 달려와서 널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건 넌 날 부르기만 하면 돼
그럼 내가 달려갈게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캐롤 킹,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
함께 이루어가는 좋은 삶 - 정의와 우애가 만나는 자리
정의와 개인의 행복이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정의가 행복을 이루는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좋은 삶이 행복의 내용이며, 이는 덕의 습득과 발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행복을 정의하는 데 동의할 때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서 행복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때 왜 ‘좋은 삶’의 진면목을 먼저 성찰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정의가 덕 가운데서도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매우 인상적으로 강조하고 있고 또 이런 논지를 그의 다른 중요한 작품 「정치학」에서도 이어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정치의 원리입니다. 이런 입장은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정치에 비추어보면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오히려 우리가 왜 온전한 의미에서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공동체에 정의가 살아있게 하고 각 개인이 그 안에서 정의의 덕을 익히고 실행하여 ‘행복’해지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정의’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덕’이라는 사실은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을 줍니다.
독일어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전체를 해설하는 가장 정평 있는 저서를 쓴 고전학자 잉마르 두링은 ‘윤리학’과 ‘정치학’을 해설하는 대목에서 ‘인간적으로 함께하는 삶을 위한 철학’이라는 소제목을 붙여놓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윤리와 정치는 그 본디 정신에 따르면, 서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현명한 길을 모색하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함께 행복하기 위한 길 위에서 정의와 우애가 내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본 것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확신인데, 이는 사실 우리가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보는 내용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한 대목을, 바오로 6세 교황의 회칙인 「민족들의 발전」 반포 20주년을 맞아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발표한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보게 됩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비오 12세의 유명한 좌우명을 인용해서 정의와 함께 우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연대성이야말로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 할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본인의 존경하올 선임자 비오 12세의 교황직 좌우명이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justitiae pax)’였다. 오늘에도 성서적 영감에서 오는 똑같은 의미와 똑같은 어조(이사 32,17; 야고 3,18 참조)로, ‘평화는 연대성의 열매(Opus solidaritatis pax)’라고 단언할 수 있다”(「사회적 관심」, 39항).
행복의 길, 우애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사랑
정의와 우애는 행복, 또는 평화라는 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분명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애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공동체적 삶의 행복이 만개하게 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애와 행복의 관계를 곰곰이 성찰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분명 타인의 이목, 재화, 명예 등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족성’에서 시작되지만, 이 사실이 우애를 통해 행복이 더해지고 충만해지는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제2의 나’라고 할 수 있는 벗에게 자신을 비추어보고 통교하면서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정의 없는 우애는 항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사실 진정한 우애가, 곧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이끄는 우애는 무엇인가를 성찰할 필요가 있음을 뜻합니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전적인 구분을 내리고 있습니다. 곧 진정한 우애는 단순히 애착이나 유용성에 의해서 어울리는 것과는 구분되며, 덕 안에서 서로 덕스러워지며 나누는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부부 사이에는 정서적 애착만이 아니라 덕을 나누는 우정 역시 생겨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우정을 꼽는 것은 분명히 올바른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 정의를 비롯한 덕을 갈구하고 그것을 익혀가는 삶의 길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은 고대 그리스 문화보다도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정신문화의 근간이 형성된 중세시대에 더욱 분명히 인식되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덕을 갈고 닦는 수도자들 사이에 아름답게 꽃핀 우애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배우게 됩니다.
날카로운 문명비평가였던 이반 일리치는 아마도 그의 가장 아름다운 저서라고 할 수 있을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중세시대 이러한 수도사들의 행복한 참된 우정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편지(대학자 빅토르의 휴가 동료 수사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세의 우애(amicitia)의 개념이 현대의 왜곡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교정할 가능성이 있음을 봅니다.
“사랑(caritas)은 끝이 없어라!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네. 그러나 친애하는 형제여, 이제 나는 비로소 나의 충만한 체험 안에서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네. 왜냐하면 나는 이방인이었고 낯선 땅에서 그대들을 만났건만, 내가 그대들 안에서 친구를 발견했기에 나는 진정 이방인이 아니었다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친구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덕 안에서 우애를 발견했고 그것을 사랑했다네. 그리고 이렇게 내 마음을 채운 것이 감미롭고 싫증나지 않았다네….”
우리는 이 편지에서 휴가 우애를 표현하며 사랑, 곧 애덕인 까리따스를 말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랑이 행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지만 한편으로 ‘정념으로서의 사랑’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유약하고 덧없는 것인지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항구한 우애마저도 품고 있는 고귀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 철학이 미처 몰랐던, 그리스도교 철학만이 밝히는 행복의 비밀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9]
타인은 나의 행복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찬란함이여, 낙원의 여인들이여
우리 모두 황홀함에 취해 빛이 가득한 성소로 돌아가자!
엄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고요한 나래가 멈추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프리드리히 실러, ‘환희의 송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 4악장에서).
The road is long/ with many a winding turn
That leads us to who knows where
who knows when
But I'm strong/ strong enough to carry him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더 홀리스, ‘그는 짐이 아니고, 나의 형제랍니다’).
타인! 지옥인가, 행복의 조건인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 그것은 지옥이다.”라는 말로써 인간이 다른 사람과 만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짐이 될 수 있는가를 강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이자 ‘관계의 존재’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낀 시간들의 많은 부분이 다름 아니라 다른 사람과 좋았던 관계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이러한 ‘도발’이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은, 긍정적인 타인과의 체험을 통한 행복이라는 ‘빛’ 다른 쪽에 드리워진, 타인에 의해 초래되는 불행이라는 ‘그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자를 잘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과거와 오늘의 다양한 행복론에서 배우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관계가 행복의 원천이라지만 그만큼이나 관계의 종말은 돌이키기 어려운 불행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우연히 만난 낯모르는 사람의 호의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만큼, 잘 알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나에게 보여준 적대적 태도는 순식간에 삶의 소박한 행복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들과의 긍정적 만남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만큼 관계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이미’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성과사회’라고 요약되는 현대의 문화풍토에서는 외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다양한 관계를 ‘소유’하는 것 역시 능력으로 평가되기에 ‘실용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실패의 표시로 인식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맥’으로 대표되는 과시적이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의 확대에 골몰하곤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타인에 대한 기대를 갖지 않고 가능한 타인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평정함의 행복’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이후로 이런 관점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은 타인과 함께 ‘지속적인’ 행복의 길을 걸어가는 것의 고단함과 지난함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타인과 함께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 가진 소중함과 보람을 말해줍니다. 스토아 철학과 같은 초연함의 길이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방식으로 ‘자기애’를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지난 호에서 생각해 본 것처럼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기초월에 비추어본다면 너무 일찍 우리의 한계를 그어놓는 태도일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타자와 함께, 타자를 통해, 타자를 위해 행복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애와 이타주의의 대립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한시적인 것일 뿐’(프리도 릭켄)이라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행복의 길을 밝혀주는 세 개의 단어를 꼽자면 그것은 정의, 우정,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단어들이 비추어주는 타인과 이루는 행복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행복의 조건으로서의 정의, 덕으로서의 정의
정의가 행복의 조건이라는 주장에 우리는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연상하는 내용은 아마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능력에 따른 공평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체제가 나의 복리와 자아실현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는 국가 공동체의 국가 원리”라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도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원칙으로 존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고전윤리학에서 정의는 공평함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와 개인의 차원에서 조화로운 상태를 칭하는 덕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정의로운 사회체제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외적 재화와 성공에 정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정의 그 자체로도 덕으로서의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기 어렵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정의롭지 않은 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가 ‘나의 행복’에 필수적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반성을 통해 도달할 수 있고 긴 시간의 도야를 통해 체화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요약하였듯이 ‘정의’는 ‘타인을 위한 선’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위한 선’이 어떻게 ‘나의 행복’의 내용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사실 윤리학의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매혹적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서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 폴로스, 그리고 권력을 믿는 야심만만한 젊은 정치가 칼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논전을 통해 왜 정의가 한 사람의 행복을 내적으로 규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폭군이 정의 대신에 권력에 힘입어 불의를 행함으로써 ‘그 자체로’ 가장 불행한 이가 된다는 사실을 논증하려 합니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이러한 논증이 근거하는 ‘덕으로서의 정의’와 ‘행복’의 필연적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왜 이러한 정의는 ‘우정’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8]
‘나를 넘어선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나의 사랑, 나의 누이여 / 꿈꾸어 보세
거기 가 함께 사는 감미로움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나라에서!
그 뿌연 하늘의 / 젖은 태양은
나의 마음엔 신비로운 매력
눈물 속에서 반짝이는
알 수 없는 그대 눈동자처럼
거기에는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
사치와 적막 그리고 쾌락(샤를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여수 밤바다 이 바람에 걸린 알 수 없는 향기가 있어
네게 전해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버스커 버스커, ‘여수 밤바다’).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전적으로 고독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순전히 양심의 내적인 명령에 따라, 아무에게도 말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 못 시킬 결단을, 혼자서,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자신이 영영 책임져야 할 결단인 줄 알면서 내린 적이 있는가. (…)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정신을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정신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인간의 의의란 이 세상의 의의나 행복으로 다할 수 없다는 경험, 현세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 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인 것이다(카를 라너, 「일상」에서).
우리는 왜 여행을 꿈꾸는가?
8월, 여름이 깊어졌습니다. 한낮의 열기에도 장맛비에도 이제는 익숙해졌습니다. 밤의 나른함과 낮의 활달함이 어느 시기보다도 생생하게 교차하는 때가 여름입니다.
이즈음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을 때, 차창에 흐르는 빗물을 보며 향기 좋은 커피를 마실 때, 머리에 자주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바로 ‘여행’입니다.
훌쩍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저 ‘피서’라는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나른한 여름밤에 참 잘 어울리는 음악 가운데 하나가 샤를 보들레르의 시에 앙리 뒤파르크가 곡을 붙인 프랑스 가곡 ‘여행에의 초대’입니다.
서정적이면서 나른한 관능성의 멜로디와 분위기도 좋지만, 아마도 그 제목 자체가 음악에 빠져들 정서를 이미 마련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 곳의 풍경에 대한 상상이나 기억이 떠오르고 동경이 깨어나면, 이미 마음은 음악에 열리게 되니까요.
모르긴 하지만 여름날 많은 이들이 서점의 여행서적 분야에서 책을 뒤적이며 소리 없이 그러한 여행의 동경을 달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련된 글로 현대인의 숨은 생각과 갈망을 꼭꼭 짚어내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과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것 자체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름에 여행을 생각하는 것은, 물론 많은 경우, 더위와 일에 지친 심신을 쉬게 하는 문자 그대로의 ‘휴가’,또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는 ‘일’로 보입니다. 아니면 사랑하는 연인과 단둘이 있고 싶은 낭만의 표현이겠지요.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보다도 더 뿌리 깊은 ‘그리움’이 있기에 ‘여행’이라는 말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의 존재에 뿌리내린 갈망이라 할까요. 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초월성’의 가장 일상적인 표시 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는 곳을, 또 나 자신을 넘어서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나 자신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아를 찾고 나를 실현하는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깊은 관심에 비례해서, 여행이 상징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일’에 대한 열망이 커진다는 사실은 행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근원적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이런 동경이 향하는 참된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초월의 대상’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초월의 참된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글을 읽다 보면 자기를 넘어서는 것, 초월을 가리키는 두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엑스타시스(extasis)’로서 여기서 유래된 현대어 ‘엑스터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기를 잊고 열광에 빠져드는 몰아, 망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예술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됩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기존의 자기를 잊고 사회적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는 기회를 갖기를 은근히 바라곤 하는데 이런 바람도 어느 정도는 ‘엑스타시스’로서의 초월과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초월을 극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계기가 바로 격렬한 음악과 움직임(춤)에 빠져들 때입니다.
열광을 통해 일종의 초월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멋진 록 음악 공연에 가보면 됩니다. 황홀한 공연은 때때로 시간과 경제적 문제로 미뤄야 했던 먼 곳에서의 긴 여행을 단 하룻저녁에 압축해서 경험한 느낌을 갖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탈아’를 체험하는 것이 과연 자기를 ‘넘어서는’ 것의 참모습일까 질문하게 되는 것은 그 열광의 하룻밤이 지난 후 느끼는 묘한 허무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하는 초월에 대한 두 번째 단어 ‘에페케이나(epekeina)’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넘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플라톤은 자신의 주된 저서 「국가」에서 태양의 비유를 들 때 “존재를 넘어서”라는 문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진리를 인식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등장시키는 것이지요. 여기서 존재를 넘어서 만나게 되는 대상은 ‘선의 이데아’입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한 가지 더해서 그는 이데아들의 원천으로서 선의 이데아를 말하고, 이를 태양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존재는, 세상의 통념과 상식과 경험의 제한에서 정화된, 정신만이 파악할 수 있는 어그러짐 없는 원형으로서의 존재입니다.
선의 이데아, 태양은 이런 참존재의 세계의 원천으로서 이것들조차도 ‘넘어섭니다.’ 플라톤이 ‘존재를 넘어서는’ ‘선’을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감이 됩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의 참뜻은 결국은 모든 생명이 태양을 향하듯 나를 넘어서는 ‘선’을 향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플라톤적 의미에서 선을 향함은 일차적으로 존재론과 신학의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곧 존재들을 초월하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이란 말이 뜻하는 여러 차원을 생각하면, 선을 향함이 나 자신 안에 갇혀있는 존재로 머무는 것에서 그 존재를 넘어서 타자에게 향하는 ‘이타주의’의 움직임도 함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나를 넘어섬’으로서의 행복을 말한다는 것은, 결국 행복이라는 말이 ‘자기애’만이 아니라 ‘이타주의’를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개념은 과연 이타주의와 자기애를 화해시킬 수 있을까요? 여행의 계절, 8월을 보내고 가을의 예감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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