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서(이중섭의 戀書)
심완 박전상환
1.
현해탄
저 너머에
내 사랑이 살고 있다
2.
여성적 남자인 나
남성적 여자인 너
3.
널 위해 시(詩)를 쓰노니
그대 보고
있는가
4.
오~~ 나의 가장
그리운 사람이여
아~~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어떻게 나의 마음을
당신에게 전할까
5.
당신이
보고싶어
만나고 싶어져서
6.
또 다시 재회해서
꼭 만나고 싶어져서
7.
머리가 멍해졌다오
나의 사랑
마사코
ㅡ 마음그릇 心椀 ㅡ
::::
천재 화가 이중섭과
일본인 아내
마사코(山本方子)의
사랑 일기(The Love Letter)
"
1955년 5월 10일
이남덕(山本方子)이
이중섭에게
그 무슨 나쁜 일이라도
혹시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지금 까지와 같이
위대한 인내력(기다림)으로
당신으로 부터의 길보(吉報)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꼭, 꼭, 꼭
좋은 일이라도
나쁜 일이라도 소식(疏識)을
전해 주세요.
- 마음으로 부터 당신의 남덕 -
(1955년 5월 10일 편지 中)
살아서는
비록 궁핍했으나
죽어서 신화(神話)가 된
화가 이중섭(1916~1956)
마흔의 나이로 요절한
그의 극적(極的)인 삶에서
유일한 위안은 일본인 아내
이남덕(현재 일본 도쿄 거주)
여사(女師)였었다.
야마모토 마사코
(山本方子)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식민지 청년과 사랑에 빠져
혈혈단신 대한해협을 건너왔고
결혼(結婚) 후
한국인의 풍습에 따라
이름까지 바꿨다.
일본 유수의
부유한 집안 딸이었던
그(山本方子)는
일본
도쿄문화학원 회화과 선배인
이중섭을 만난 이후
그의 예술세계에
직접적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6·25 전쟁 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이 여사(山本方子 마사코)가
"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만나자.
"
약속을 하며
아들들을 데리고
1952년 일본(日本)의 친정으로 떠나면서 두 사람은 이별한다
이 때부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재회(在會)를 기약(期約)하는
편지들이 오고 갔다
당시
남편의 안부를 걱정하는
애타는 마음을 담은
이 여사(山本方子)의
편지 세 통이 최근 공개돼
눈길을 끈다.
사흘에 한 번꼴로
오고 가던 남편의 편지가
뚝 끊기자
아내가
이를 걱정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세 통의 편지는
이 화백이 숨을 거두기
꼭 1년 전 1955년에
쓰여 졌다
두 통은
남편 이중섭 앞으로
보낸 것이고
나머지 한 통은
최근 작고한 구상 시인이
수신인이다
4월 24일과
5월 10일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아내(마사코 山本方子)의
심정이 애가 타고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
어떤 세세한 일이라도 좋으니
당신에 대한
모든 일을 알고 싶은 것이
부인으로서의 심정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글로 써서
소식을 주세요
무슨 나쁜 일이라도
혹시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지금 까지와 같이
위대한 인내력(기다림)으로
당신으로 부터의
길보(吉報 좋은 소식)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꼭, 꼭, 꼭
좋은 일이라도
나쁜 일이라도 소식을
전해 주세요
- 마음으로 부터 당신의 남덕 -
”
그래도
남편에게서 소식이 없자
이 여사(山本方子)는
남편 이중섭과
절친한 교분을 나누었던
구상 시인에게 6월 22일
편지를 쓴다
“
제 편지(編紙)를
(남편이) 받고 계신지
아닌지
그 것도
알 수 없는 상태라
불안합니다
생활력이 왕성하여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분이라면
이렇게 걱정하지 않을 텐데
님(구상 시인을 가리킴)도
아시다시피 그분(이중섭)은
그런 성격이고
신경도 둔한 분이라
하루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
당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황달
신경쇠약까지 겹쳐
성가병원
수도육군병원
성베드로병원 등을
전전하고 있어
편지(編紙)가
전달되지 못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9월 6일 오전 1시 40분
아무도 지켜보는 이가 없는
가운데
홀로 숨을 거둔
이중섭 화백의 시신(屍身)은
3일간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시체실에 방치 되었을
정도였다.
현재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에는
이 화백의 원화(源畵) 9점
외에도
그(이중섭)가
아내(마사코)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찍은 사진만이
소장(所藏)되어 있을 뿐이다.
천재 화가 이중섭이
평생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가
혼자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理由)는 무엇일까 ?
화가 이중섭은
우리에게 초등학교 미술 교과서
속 황소 그림으로
익숙하다.
실제로
이중섭의 작품
《소(牛)》는
2007년
경매에서 47억원에 낙찰되어
국내 작가의 작품 중
김환기 작품 다음으로
비싼 그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가 이중섭은 살아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의 반 고흐라고 불릴만큼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이중섭과
그의 아내 마사코의 절절한
사랑은
참으로 눈물겹다.
부유한 자신의 배경과
환경을 모두 다 버리고
운명적 사랑을 찾아
한국에 온 일본인 여성
마사코(山本方子)
그리고
화가 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절에
일본으로 미술 유학까지 갔으며
20살에
일본 분카가쿠잉으로 유학을 간
이중섭은 그 곳에서
2년 후배인
이 여사(山本方子 마사코)를
만나《운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일제강점 말기로
일본인 여성과
한국인 남자의 사랑을 이루기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때문에
이중섭은 마사코를 두고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결코
이중섭을 잊을 수 없었던
아내 마사코(山本方子)는
1945년 4월 전쟁 막바지
교통편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임시 연락선을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게 된다
이 여사(山本方子 마사코》는
일본(日本) 유수의 재벌
이츠이재단 임원에 딸이었지만
이중섭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자신의 배경을 전부 버리고
조선(朝鮮)이라는 나라에
멀고도 먼 길을 찾아 온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만난 이중섭과 마사코는
1945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만난
덕(德)스러운 사람
"
이라는 뜻으로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함께여서 행복했던 피난생활
두 사람은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냈고
조국(朝鮮國)도
해방(解放)이 되었지만
곧 그들의 행복(幸福)은
깨어졌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
대부분의
한반도 사람들이
겪어야 했듯
이중섭 가족도
부산으로 피란(避亂)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중섭이
피란민 조사를 받던 중
아내(마사코 山本方子)가
《일본인 여자》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면서
신분을 의심받게 되고
피란민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이중섭 가족은
힘든 피란(避亂) 생활 중에도
뜨내기 생활까지
해야만 했다
피란생활 1년 6개월 동안
부산과 제주도를 거쳐
다시
부산으로 옮기며
정처없이 생활을
영위했다
그 과정에
아내 이남덕(山本方子)은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했고
두 아이는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힘겨웠었다
시간이 지난 후
이중섭과 이남덕(山本方子)은
피란생활을 하던 이 시절을
자신들이 함께했던
가장 행복한 시절로 꼽았는데
너무 가난해서
바닷가에 조개를 주워
생활을 연명(連命)해야 할
정도였지만
가족(家族)이
모두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도 좋았다는 것이다
다시 꼭 만나자는 다짐을
끝내는 지키지 못한 약속
그도 그럴 것이 가난이 이어져
아이들의 건강까지 상傷)하자
이 여사(山本方子)는
하는 수없이 1952년 7월
귀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잠시 돌아가 있기로
결정하게 된다
《잠시》로
계획했던 가족의 이별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안타까운 상처 깊은 헤어짐이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보낸 후
이중섭은
혼자서 가난과 맞서 싸우며
그림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6. 25 전쟁 직후
척박한 상황을 이겨낼 만큼
강(强)하거나
억척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림을 빨리 그려서 많이 팔아
보고 싶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캔버스나
스케치북 살 돈이 없어서
합판이나 맨 종이 위에
또는 심지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어
연필이나 버려진 못으로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ㅡ 마음그릇 心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