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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강절 첫째주일입니다.
대강절(待降節, Advent)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成肉身, Incarnation)을 기다리는 4주간의 절기를 말하는 것으로서... 오늘은 이러한 대강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이기 때문에...
앞에 있는 대강절 화환에 촛불을 하나만 밝히고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대강절 화환의 촛불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녹색 사철나무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사시사철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부터 대강절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설교하여 오던 창세기를 계속 강해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음성이 이 말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였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이상한 꿈을 두 차례나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이 너무나 선명할 뿐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꿈을 이해할 수 없어서 여기 저기 꿈 해석을 알아보던 중 감옥에 있던 요셉까지 불러내어
꿈 해석을 받아내는 진풍경이 일어났는데 그 두 꿈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꿈은 먼저 살찐 일곱 암소가 등장하고 이어 파리한 일곱 암소가 등장했는데 나중에 등장한 파리한 일곱 암소가 먼저 등장한 살찐 일곱 잡아먹는다는
그러한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꾼 꿈도 줄거리는 같은 것으로서
나중에 등장한 파리한 일곱 이삭이 먼저 등장한 충실한 일곱 이삭을 잡아먹는다는....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원래 소란 원래 채식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소를 잡아먹지 못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이삭이라는 것도 다른 이삭을 잡아먹을 수 없는 식물이었기 때문에
그 꿈은...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난해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로왕 주변에 있던 박사들이나 술객들도 풀어내기 못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창 41:8).
그런데 그 어려운 꿈을....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명쾌히 해석해 드리자 마자!!..
바로왕은 요셉에게 애굽이라는 나라 전역의 총리로 지명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 백성이라고 할찌라도 감옥에 있다가 뭐.. 꿈 하나 해석했다고 해서 갑자기 국무총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것도 자기 나라 국민도 아닌 외국인이면서도 또 감옥에 갇혀 종살이하고 있는 사람에게 왕의 꿈을 시원스럽게 해석해 드렸다 해서 나라 전체의 총리로 삼았다는 것은 정말로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고와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창 41:38)
바로왕은 역시 왕... 다왔습니다! 사람을 볼 줄 아는 눈.. 통찰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요셉을 총리로 지명하였는데... 그것은 정말 적중하였습니다!!
바로 왕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창 41:39-41)
아니나 다를까 애굽 전역은 요셉의 꿈 해석대로 7년 대풍년에 이어, 7년 대흉년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요셉은 총리가 되자마자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용기 그리고 통찰력을 가지고 그 결과 애굽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흉년은 비록 들었지만 애굽 백성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곡식수급정책으로 인하여 그런대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굽 지역 이외의 인근 여러 나라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그 기근은 애굽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인근 여러나라 백성들은 살기 위해 애굽에 쌀사러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1장 57절입니다.
"각 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때마침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물론 애굽의 총리가 요셉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때 야곱은 아들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창 42:1)
아버지 야곱은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 큰 아들들이 재빠르게 움직여 곡식 사러 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내심 섭섭해하면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창 42:2)
이렇게 해서 야곱의 아들들은 먼 이방나라인 애굽까지 가서 곡식을 사기 위해 먼저 그 나라의 총리인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게 되었습니다.
20여년만에 서로의 처지가 완전히 달라져 이렇게 만나게 된 이 사건은 정말 극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20여년전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때 그 꿈을 생각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2장 6절 이하입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체 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창 42:6-9)
요셉은 모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모를 수 없었습니다! 비록 세월은 20여년이나 흘렀지만 타향살이 20여년 동안 아마 한시도 고향을 잊은적 없었을 것이고 형제들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저 먼 객지나 외국에 나가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 공감하는 바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침착했습니다! 참으로 침착했습니다!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차근차근 진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중하게 대처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였고 그동안 수많은 고생하면서 몸에 익힌 훈련 덕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요셉의 태도를 보고... '아 이제 요셉이 형들을 서서히 복수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시각으로.. 어느 정도는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은 만일 요셉이 과거에 자기를 그렇게 괴롭혔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때... 살려주지 않고... 구덩이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외국들에게 팔아먹은 것을 생각하고 복수하려고 했더라면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단단히 그리고 철저히 복수할 수도 있었지만 요셉은 그렇게 철저히 복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요셉이 진행하고 있는 여러 행동들을 그렇게 복수적인 행동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요셉의 행동은... 그 형님들이 스스로 과거의 잘못들을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요셉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섭섭하게 헤어졌던 형제들의 만남이 이제와서 진정한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 만일 형들이 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요셉이
"형님들 보십시오, 제가 그때 형님들이 괴롭히고 던지고 팔아먹었던 요셉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절 좀 보십시오. 제가 바로 아우 요셉입니다.
제가 이 큰 나라의 총리가 되었으니 여기서 함께 사십시다!" 이렇게 제안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형들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래, 거참 잘 됐구나. 고맙다 아우야.. 지나간 그 때 그 일은 참으로 미안했다.
다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이크, 이제 우린 다 죽었다. 그때 살려달라 애걸복걸할 때 좀 살려줄걸.. 이제 우린 끝장이로구만..." 이렇게 반응하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은... 금방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서서히.. 그리고 형님들이 과거의 삶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게 하면서 서로 가까워지는 그러한 길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을 정탐꾼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래서 며칠동안 감옥에 있어야 한다 하면서..
실제로 3일 동안 감옥에 가두어 보았더니... 형들은 점점 과거를 뉘우치기 시작하였습니다.
42장 21절 이하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42:21-22)
이제 형들은 마음이 서서히 과거를 뉘우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때를 기다리면서 모든 일을 철저하게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진행하면서 형들에게는 충분한 곡식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자루 속에 곡식 값으로 받은 돈도 다시 자루 속에 넣어 돌려보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괴롭히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아버지와 형님들을 사랑하는 동생 요셉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애써 공들여 사온 곡식을 다 먹은 후 야곱에게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그 애굽 땅으로... 곡식 사러 자식들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럴 때 옛날 같았으면.. 자식들을 보내어 곡식 사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가족을 전부 이끌고 애굽으로 가 살다가 기근이 끝난 후 돌아오는 그러한 방법을 택하였겠지만.. 이제 야곱은 그렇게 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아제.... 나이도 많이 들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욕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과거... 벧엘에서 서원 기도하며 매달렸던 모습이나... 얍복강 가에서 밤새 씨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내 라헬도 베냐민을 낳다.. 죽고... 채색옷을 입히고 애지중지 곱게 기르던 요셉도 형들 만나러 세겜에 보냈다가... 죽고... 이제 막내인 베냐민까지 애굽에 데리고 갔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을 것 또 믿음도 발동하지 않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누군가 다가가서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절실히 필요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2장 38절입니다.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아버지 야곱은 심신(心身)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아들 중 4째 아들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저 않은 신앙도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본문 8절부터 10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면 벌써 두번 갔다 왔으리이다..."
사실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시도는 이미 있었습니다.
장남 르우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장인 42장 37절입니다.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대단한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장남으로서... 모든 자녀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아버지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정성껏 드렸으나... 그 위로의 말은 아버지의 가슴에 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르우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장남 르우벤은 나름대로는 애써 하느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막내 아들 베냐민을 절대로 보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이번에는 4째 아들 유다가... 지난번 르우벤이 드렸던 말씀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아버지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유다의 말을 아버지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을 돌이켜....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대단한 결심도 하면서 막내아들 베냐민과 함께 곡식을 사러 보내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면... 남을 위로한다는 것이... 그저 무턱대고 몇마디 말을 내 뱉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여기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교사'(Good Teacher)라는 한 월간잡지가 있습니다.
이 '좋은 교사'라는 잡지 2001년 12월호에 한 글이 실렸는데 그 글이 너무 좋아 이 시간 함께 나누기 위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글을 쓴 글쓴이는 현재 수원 연무초등학교 교사인 정선희 씨(26세)로서 그 내용을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남을 격려하는 것이란 어떤 것이며... 격려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인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좋은 글이었기 때문에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캐나다에서 유학을 마치고 아내와 그리고 만 5세가 안된 아들과 함께 남은 유학기간을 보람 있게 보내려고...... 캐나다에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남은 기간은 약 4개월.
그들은 영국 남동부 지방에 있는 라아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곳 라브리에서 그동안 쌓인 유학 중의 피로를 다 씻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기간을 효과적으로 보내기 위해 런던으로 옮겨 모슬렘 선교 사역을 하시는 모 선교사님 댁에 얼마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
때는 1997년 7월 27일, 한참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당시 5살도 안된 그의 아들은 힘이 넘쳐서 눈 뜨면 잠들 때 까지 가만있질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별명도 그에 걸맞게 붙여졌는데 별명은 "울트라 수퍼 액티브 보이(Ultra super active boy)"였습니다.
하루 종일 이 아들은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선교사님댁의 모든 방문과 가구들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이 일이었고 놀이였습니다. 아이는 매일 그 놀이가 즐거웠지만 부모는 날마다 민망하며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아이가 그렇게 문을 여닫는 실력이 어디서 늘은 실력이었는가 하면 런던에 오기 바로 직전 몇 달 머물렀던 라브리 공동체에서 늘었던 실력이었습니다.
그때 그 라브리에서 이 아들의 별명은 "도어 보이(Door boy)"라고 불리울 정도로 매일 문을 열고 닫고 열고 닫고 할 뿐만 아니라 현관문 출입문 할 것 없이... 라브리의 모든 문들을 타고 노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러니 수백년 동안 끄떡없던 현관문도 별수 없었습니다.
이 아이가 타고 놀면서부터 점점 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부터는 바닥으로 완전히 처져서 문 지나가는 자국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극기야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 전력이 이렇게 화려했던 터라 이 아들의 부모는 런던에 와서 더욱 긴장하고 아들의 행동을 교육하고 주시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힘은 넘치고... 매일 매일 그리고 순간 순간 여기 저기 쫓아다니면서 말릴 수도 없고...
그러던 어느 날 그 선교사 사모님이 편지를 보내왔으니 가슴이 덜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습니다.
희찬에게
문을 좋아하는 아이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의 아이
문을 무심코 지나쳐 버리지 않는 아이
너처럼
우리도 꽁꽁 얼려진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용기 있게
어둠으로 닫혀진 세계의 문을
활짝 열게 하고 싶구나.
희찬이를 처음 만난 날
1997년 7월 27일에 선웅이 아줌마가
이 글은 정말 남을 격려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격려라는 것이 얼마나 멋있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장남 르우벤은 나름대로는 애써 아버지께 위로와 결심의 말을 전했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심금(心琴)은 울리지 못했으나
얼마있지 않아 4째 아들 유다가 그와 비슷한 말로 아버지를 위로했을 때는
그 말이 아버지의 심금을 울렸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내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막내아들 베냐민도... "잃으면 잃으리로다" 하면서 보내게 되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왜 이 일이 그렇게 됐는지.... 왜 르우벤의 위로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고 유다의 위로의 말은 받아들였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대분분의 사람들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장남 르우벤과 4째 아들 유다가 아버지 야곱을 위로할 때 드렸던 말의 내용을 따로따로 살펴보면... 아버지의 반응이 왜 그랬는지 깨달을 수 있는 것으로서.. 다시 한번 더 그 두 본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장남 르우벤의 위로의 말입니다. 앞장인 42장 37절입니다.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또 이번에는 4째 아들 유다의 위로의 말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자, 무엇이 다르다고 느껴지십니까? 이유를 어느 정도 발견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장남 르우벤이나 4째 아들 유다가 둘다 똑 같이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고 책임지겠다는 정신은 같으나... 그 일이 문제가 뜻대로 잘 되지 않고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는 그러한 부분에서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만일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곡식 사러 갔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장남 르우벤은 그 모든 책임을 장남인 자기가 다 책임지고 자기 목을 걸겠다고 말하지 않고 물론 그 책임을 통감하기는 통감하지만.. 만일 그렇게 되면 아들 둘을 다 죽여도 좋다는..
어떻게 보면 자기 목을 내어놓겠다는 말보다도 더 어려운 말 같기는 하지만....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그러한 말은 빠진 내용으로 위로하고 있는데 비하여... 유다는 만일 이 문제가 잘 성사되지 아니하고 베냐민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목을 바칠 것이고... 또 그 죄를 자기 자신이 영원토록 직접 지겠다고 표현한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다가 아버지에게 솔직히 간청하니... 아버지 마음이 동(動)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면서 그의 신앙도 회복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야곱은 그동안 신앙적 깊은 침체 상태 속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신앙 침체는 창세기 37장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사실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형들이 세겜에 가서 양들을 잘 치고 있나 가보라고..
자기가 말했기 때문에.. 그 날 이후.... 죽었다고 보고된 '요셉의 죽음' 때문에..
아마 야곱은 그 말에 대한 죄책감으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밥맛도 잃고... 삶의 의욕도 잃고.... 하나님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한다거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죽으면 죽으리로다' 하고 밀고 나가는..
그러한 신앙적 뚝심도 다 잃어버린 채 헤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4째 아들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삶의 의욕을 다시 회복시키는 위로의 말을...
다시금 주를 바라보게 하는 위로의 말을...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오랫만에
아버지의 입에서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위로의 말을.. 드림으로 아버지의 신앙을 회복시켜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3-14절입니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