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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1-4 내 영혼아 : 칼빈
본 시편은 하나님이 자기 교회에 베푸신 특별한 은혜의 혜택들을 다루지 않습니다.
또 우리에게 하늘의 삶에 대한 소망으로 격려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의 생생한 표상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한 아버지로서 나타내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만큼 바로 앞에 있는 시편과는 다르겠습니다.
1. 본문 1-2절은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가 다윗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먼저 자신을 독려합니다.
그리고 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양할 풍성한 주제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시편기자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찬양을 돌리지 않고 있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배은망덕한 처사를 간접적으로 정죄합니다.
하나님이 옷 ‘입고 계신 것’으로 서술하는 “빛”의 비유에서 비록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일지라도 그의 영광은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본질에서 하나님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광채로 온 세계를 비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숨어 계신 하나님이 보이게 나타내시는 옷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아는 지식은 극히 중요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계시는 지극히 높은 곳에 이르고자 시도한다면 저희가 비록 구름위로 날아오른다 할지라도 그 높이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는 자들은 확실히 매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으려면 그가 그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세계의 구조에 우리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친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본질을 파헤치려 들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의 옷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04 편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저희가 살아갈 구실들을 찾는 사람들은 저희의 나태함을 핑계하기 위해 하나님이 깊은 흑암에 숨어 계신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하나의 휘장이다’ 는 하늘 아래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하늘을 통해서 그의 위엄과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왕궁 누각이라는 뜻입니다.
2. 본문 3-4절은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 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입니다.
1) 다윗은 이제 보다 길게 하나님의 옷의 비유로 간단히 말한 바를 설명해 갑니다.
본 절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세계의 구조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시고 또한 도처에서 우리에게 아주 생생한 장면들을 나타내 보여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목적으로 구름 위로 뚫고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데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세계 창조를 통해 그의 본질적 완전성과 영광에 어떤 부가적 요소를 받으시기라도 하신 것처럼 그분 안에 어떤 파생적인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옷을 입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라는 하나님에 대한 비유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더 감탄케 하려는 것이 선지자의 의도입니다
만일 들보가 견실하고 강하지 않다면 보통 집의 무게조차도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하늘 궁전 기초 삼으실 때 그 놀라운 이적에 누가 경탄치 않겠습니까?
우리 이해가 무딘 것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과장된 표현은 꼭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그와 같은 표현이라 할지라도 우리로 하나님께 대한 극히 미미한 지식을 얻게 하여 주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2) “바람 날개로(날개들 위로 - 칼빈) 다니시며” 라는 의미는 “바람으로 자기 사자들을 삼으시며” 라는 다음 절에서 보다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타시고 바람 날개 위로 운행하십니다.
이는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바람과 구름을 운행 하시고, 또 원하시는 속도로 그것들을 이리저리 보내심으로써 그것들로 자기 임재의 표적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바람이 우연히 불고 번개들이 예기치 않은 충격에 의해 번쩍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기 절대 주권적인 권능을 행사하셔서 환경의 동요와 혼란을 다스리고 지배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시편 104 편
이 교리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유익을 얻습니다.
첫째로, 만일 어느 때에 해로운 바람이 일거나, 남풍이 공기를 오염시키거나 아니면 북풍이 곡식들을 말라죽게 하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 놓을 뿐 아니라 집들을 무너뜨리고 또 다른 바람이 땅에서 나는 소산들을 망쳐놓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섭리 아래서 떨어야 합니다.
둘째로, 만일 하나님이 부드럽고 서늘한 미풍으로 과도한 열기를 식히시거나 북풍으로 오염된 환경을 정화시키시거나 남풍으로 바싹 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셔 주신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순한 섭리 가운데 마땅히 그의 선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3) 히브리서에는 바울사도가 본 절을 인용해 그것을 천사들에게 적용시킵니다(히1:7.)
사도 바울이 시편 19장 4절을 그의 로마서 10장 18절에 인용하면서 사도들에게 거기에 하늘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는 바를 적용시킵니다.
그러므로 그 시편 전체는 마치 하나의 비유라도 되는 양 지각없이 해석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울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는 적절하게 바람이 하나님께 대해 분명하게, 또 인식할 수 있게 보여 주는 순종과 천사들이 그에게 보여주는 순종 사이에서 한 가지 유사점을 이끌어 냅니다.
그 의미는 곧 하나님께서 바람을 자기 사자들로 사용하사 그것들을 이리저리 향하게 하시고 자기 기뻐하시는 때에 따라서 잠잠케도 하시고 일어나게도 하셔서 그것들의 사역을 통해서 스스로 자기 권능을 선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사들도 역시 자기 분부를 거행하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세계에 나타나 있는 영적인 영광의 표상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우주의 본질을 고찰하는데서 거의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시편 104 편
시104:5-9 땅에 기초를 두사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신 사실을 찬송합니다.
1. 본문 5절은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땅의 견고함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땅이 공중에 매달려 있고 오직 돌기둥에 의해서만 떠 받혀져 있는데도 어떻게 그것이 제 처소를 그처럼 견고히 지켜서 요동치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실로 이것은 자연의 원리들에 근거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땅이 세계의 중심부가 되는 가장 낮은 처소를 점유하고 있으므로 자연히 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설계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이 빛을 발합니다.
물이 더 가벼워 땅 위에 있다면 왜 물이 온 땅을 다 뒤덮지 않습니까?
철학자들이 이 질문에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사람에게 거할 처소가 마련되도록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물이 온 땅을 뒤덮지 못하게 제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저희가 물이 하나님의 확고한 결정에 의해 제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저희는 부패와 배은망덕할 뿐 아니라 저희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요 아주 야만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믿어지지도 않고 경험조차도 그 사실을 보여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이적을 하나하나 열거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만일 그처럼 확실한 증거를 통해 깨우침을 받고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붙들림을 받고 있지 않는 한 세계에 견고히 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로 야비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세계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연의 전체 질서는 하나님의 결정에 의존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바에서 자연의 모든 요소들이 각자 고유한 성질을 유지해 갑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께 감사드리라는 권면으로 간주돼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근심가운데 살지 않도록 미래에 관한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닙니다.
시편 104 편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거주할 처소로 땅을 주셨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으로 지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영원한 기둥들 위에 굳게 세우셨다는 확신을 주심으로 우리가 동요치 않는 마음으로 땅위에 거주하게 하신 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특별한 복입니다
비록 도시들이 자주 지진으로 무너진다 할지라도 땅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실로 땅 위에 일어난 모든 요동들은 만일 땅이 하나님의 신비한 권능으로 보전되지 않았다면 일순간에 삼킨바 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다 충분히 확증해 줍니다.
2. 본문 6-8절은 “(6)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7)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8)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입니다.
본 절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다가 땅을 옷처럼 덮는다는 것을 뜻하거나 태초에 하나님이 전능한 말씀으로 물을 한 곳에 모으기 전에 땅이 바다로 덮여 있었다는 사실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적절한 의미는 바다가 이제 땅의 덮개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 초기에는 바다가 옷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무덤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에 땅은 혼돈과 공허의 상태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판단에는 여기에서 바다가 비록 형체는 없다 할지라도 땅의 옷 역할을 하고 있는 그 경이적인 배열이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맥이 어떤 다른 견해로 이끌려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주석가들은 그 말을 땅의 물들이 한 분리된 곳으로 모이기 전에 바다로 덮여 있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설명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는 선지자의 말이 ‘물이 산들 위에 설(수도 있을)것이로다’라는 가정법으로 해석된다면 이 난제는 쉽게 풀릴 것입니다.
이 같은 가능법은 히브리어 용법의 지지를 충분히 받습니다.
우리는 실로 선지자가 하나님이 땅을 물로 옷 입히셨다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그 물들이 하나님의 책망에 달아나지 않았다면 산들 위에 섰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어찌하여 산들이 솟아오르며 골짜기들이 내려앉겠습니까?
그것은 물이 되돌아와 땅에 넘치지 못하게 경계를 정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다는 그것이 비록 거대하여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할지라도 땅에게는 하나의 아름다운 옷이라는 뜻으로 적절히 해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시편 104 편
은유법이 바다를 땅의 옷으로 표현한 이유는 땅 표면이 덮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것이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이 물을 제지하지 않았다면 당장에 온 땅을 뒤덮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표면 일부가 드러난 것이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분명한 이적입니다.
하나님이 바다에게 고삐를 늦추셨다면 물들은 이내 산들을 뒤덮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책망으로 인해 달아나서 물들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라는 말은 바다의 격노를 제지시키신 하나님의 엄하신 명령을 뜻합니다.
비록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만으로 확고한 경계들 안에 바다를 제한하시고 그 경계들이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하셨을지라도 우리가 만일 바다가 요동할 때 그것이 얼마나 요란하게 그 물거품을 일게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선지자가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으로 그 물이 제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예레미야 5장 22절과 욥기28장 25절에서 하나님이 아주 위엄이 있게 자기 권능을 나타내시는 것과 같이 태양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권능을 나타내십니다.
“산은 오르고” 라는 말과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라는 말은 시적인 표현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바다의 한계를 정해 두지 않았다면 땅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산과 골짜기 사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바다가 온 땅을 삼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골짜기들을 위해 한 처소의 기초를 놓으셨다”고 말한 셈입니다.
이는 만일 하나님께서 물들을 제지하여 바다에 덮이지 않은 공간이 있게 하시지 않았더라면 산 밑에 마른 땅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9절은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이적이 본 절에 다시 부연됩니다. 그 이적은 영원한 것인 사실이 분명합니다.
자연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물이 순환하며 땅과 공기의 중간 지역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은 저희의 제1원리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땅 일부가 마른 채로 남아 사람들의 거주에 알맞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것은 선원들이 가장 만족스러운 증거를 갖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실로 무례하고 우둔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들이라도 눈을 떠 보기만 하면 바다에서 파도의 산들이 지면보다 훨씬 더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04 편
어떤 제방으로나 어떤 철문이라도 본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물을 한 곳에 모아 고정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일부 지역들에 파멸을 가져다 주는 지진들이 이제까지 그리하였거니와 대체로 지구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바다가 세계의 일부 지역들에서 그 경계들 위로 넘친다 해도 땅이 사람들에게 적합한 거처가 되도록 그 물을 어떤 일정지역의 한계들 안에 고정시킨 법칙은 건재합니다.
우리 시대에 발트 해(The Balric Sea)가 땅의 넓은 지역에 범람하여 플랜더즈 국민들과 이웃 나라에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바다에 가하여진 제재가 풀릴 경우 그 결과가 어떠하겠는가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우리가 그 큰 물에 삼키운 바 되지 않은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으로 그 물의 광포한 힘을 억제하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물의 자연적인 성질은 땅을 뒤덮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으로 반작용의 법칙을 굳게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일은 있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그의 진리는 영원하므로 이 법칙도 영원히 굳게 설 것입니다.
시편 104 편
시104:10-15 여호와께서 샘으로
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누구이신 사실을 말합니다(1, 2).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사람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를 하늘로 가리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지 않다는 사실이 신구약 성경 말씀의 신관입니다.
부패한 인간성은 하나님을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것으로써 오히려 자기 존귀와 권위를 유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셨고 그것들을 주장하신다는 것이 이 시편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무생물도 주장하십니다(7-9). 하나님은 모든 동물들도 주장하시되 심지어 사나운 사자나 악어까지도 주장하십니다(11, 12, 21, 26).
만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고 합니다(15, 19, 20).
1. 본문 10-13절은 “(10)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1)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13)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신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입니다.
1) 먼저 10-12절을 관찰해 보십시다.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권능과 및 그의 선하심에 관한 또 다른 예를 제시합니다.
곧 하나님이 산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시고 그것이 골짜기 가운데로 흘러내리게 하신 데 나타난 그의 권능과 선하심을 서술합니다.
비록 땅이 우리에게 적합한 거처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는 말라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땅이 그 맥들을 열지 않는다면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다 멸절하고 말 것입니다.
선지자는 땅이 말라 있으되 물로 습기를 공급해 주는 조화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샘”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נחלים(네할림)은 ‘샘들’이 보다 적합한 번역입니다. 동일한 의미로 그것들이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라는 말이 덧붙여집니다.
샘이 바위와 돌투성이의 처소에서 솟아날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지자가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들짐승들이 저희의 갈증을 풀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가 사람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습니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찬양할 목적으로 그와 같이 말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둡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 곧 “들나귀들” 에게까지도 돌보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기서 들나귀들 안에는 그 밖의 모든 종류의 들짐승들이 포함됩니다.
시편 104 편
또 시편 기자는 의도적으로 황량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는 우리 각자가 그러한 곳들을 땅이 보다 쾌적하고 경작이 잘 된 곳 곧 다음에 언급할 곳들과 비교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강도 드넓고 황량한 광야들조차도 가로질러 흐릅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들짐승들이 하나님의 베푸신 복을 누립니다.
새들이 저들의 즐거운 노래 소리로 온 하늘을 울리게 할 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라지 않는 곳보다 더 황량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황폐하고 경작되지 않은 지역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권능에 대한 분명한 증표들을 나타낼진대 잘 경작되고 조건이 좋은 지역들에서 보게 되는 모든 선한 것을 지극히 풍성히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을 우리는 더 마땅히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이 흐르거나 들짐승들이 먹을 풀이 자라거나 새들의 노래 소리가 여러 나무들에서 들릴 뿐 아니라 도처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좋은 것들이 우리 눈에 풍성하게 보이는 지역에서도 우리가 만일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그의 영광을 깊이 묵상하지 못한다면 우리 우둔함은 실로 짐승보다 더한 셈입니다.
2) 동일한 주제가 13절에서 계속됩니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영원히 메마를 것처럼 보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산이 습기가 풍부한 것은 보통 이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 풍성함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은밀히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행사에서 나오는 열매라고 결론짓습니다.
그 본래 의미로서 노동이라는 말이 하나님께 돌려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하나님께 돌려지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처에서 단순히 땅에 복을 내리시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진력하여 쉬지 않고 일하는 것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4절은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로 특별히 돌보시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야생의 피조물들에 관하여 말한 다음에 시편 기자는 곡식이 생산되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게 하신 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하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 덧붙여 사람의 필요를 공급해 줄 뿐 아니라 저희 삶의 낙을 누리는 데에도 기여할 두 가지 것들, 곧 포도주와 기름을 언급합니다.
시편 104 편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의 소용을 위한” 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לעבדת (라아보디트)가 사람들이 집안 살림살이에 쏟는 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풀이 산에서 사람이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는 것에 반하여 곡식은 오직 사람의 노력과 땀에 의해서만 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해석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밭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수고에 복을 베푸신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다듬어 놓은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떡’(양식) 이라는 말에 관하여 우리는 비록 그 말이 온갖 양식을 다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그 말을 엄밀히 배제시키는 이들의 견해를 싫어할 뿐입니다.
저희가 이 견해를 취하기 위해 인용하는 이유, 곧 다음 절에서 떡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나오는 이유의 설명에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음 절에 보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해준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같은 것이 서로 다른 말들로 표현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땅으로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내게 하신다고 말함에서 땅이 사람들에게 곡식으로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채소와 과실들로도 양식을 공급해 준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의 생존 수단이 한 종류의 음식에 제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5절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입니다.
1) 본 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시고 삶의 일반적인 목적들에 충분한 만큼만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하심에 따라 포도주와 기름으로 저희 마음을 기쁘게 하심으로써 보다 풍부하게 대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연은 분명히 마실 물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를 더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여분의 선물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슬픔은 얼굴에 우울한 기색을 띠게 하므로 사람이 술과 기름 같은 것들을 마시게 되면 그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게 된다는 해석을 내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근거 없이 다듬어서 이것이 ‘등불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내립니다.
그밖에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ם(멤) 이 비교급을 표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사람이 기름을 발랐을 때보다도 포도주가 사람의 얼굴을 더 빛나게 해 준다는 해석을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일반 필요에 충분한 것을 공급해 주실 뿐 아니라 여기서 나아가 저희에게 온갖 진미들까지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04 편
2)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떡)을 주셨도다” 를 해석합니다.
떡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표현을 빌어 쓴다면 덧붙여 저희에게 포도주와 기름까지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떡의 용도에 대한 반복적인 언급은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친절한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풍부하게 베풀어 주신데서 나타난 그의 선하심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 떡을 공급해 주심에 있어서 자신을 지극히 관대한 아버지로 나타내 보여주시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미를 공급해 주심에 있어서는 그의 관대하심이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말씀이 여기에 다시 언급됩니다.
3)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택을 과도히 남용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풍부하게 베푸시면 베푸실수록 저희는 저희에게 제공된 부요를 부절제로 말미암아 남용하지 않도록 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고 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쫓기로 들면 한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부히 공급해 주시는 만큼 우리 각자가 자발적으로 그의 허락하신 부요를 절제하여 사용하도록 절제의 법을 제정하여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와 나귀를 초장으로 보내십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요로 만족을 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풍족히 허락해 주신 반면에 탐욕스럽게 그의 은택을 남용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절제의 규칙을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필요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절제를 시험하십니다.
체력의 유지에 관한 바른 규칙은 유리가 그 규칙을 지킴으로써 삶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지 결코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육신의 부양을 위해 필요한 것의 상호 분배는 부절제를 막는 데에 매우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부자들이 저희의 부요의 특전을 받은 것은 저희 형제의 부족한 것들을 메꾸어 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섭리의 선하심을 이같이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부절제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지자의 말에서 필요할 때 뿐 아니라 또 그것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고자 할 때에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절주(節酒)를 통해서 조절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104 편
이는 첫째로 사람들이 자신을 망각하고 이성과 감각을 잃고 저희의 힘을 소멸시키는 일이 없이 모세의 명령에 따라(레23:40) 저희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게 하려 함입니다.
둘째로 저희 마음에 감사한 생각을 불러일으켜 더욱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게 함입니다. 이와 같이 기뻐하는 자는 또한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에 슬픔을 당하게 하실 경우 그 슬픔을 이길 준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하나님의 진노의 증표가 나타날 경우에는 넘치도록 풍성한 온갖 종류의 진미를 가진 자라 하더라도 그가 굵은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 있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로 알아 금식하게 될 것입니다.
가난으로 절제와 금주가 요구되는 자는 마땅히 그러한 진미를 멀리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병으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되었을 경우 또 만일 누가 김빠진 포도주만을 갖고 있을 경우 또 만일 누가 물밖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각자 자기 처지에 만족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러한 기쁨들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그와 동일한 해석이 기름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본 절에서 기름의 다른 동방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름을 사치품으로 사용하기보다 치료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사람들이 자기 몸에 바르도록 하나님이 저희에게 기름도 역시 공급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쾌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으므로 절제의 법이 하나님의 은택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과도한 사치에 빠져 저희의 부요를 남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이 교훈에서 방종의 구실을 못 찾게 이 단서는 항상 덧붙여져야 합니다.
5) 더욱이 사람들이 저희 육욕을 제어하도록 주의 깊게 가르침을 받아온 이상 저희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공급하실 수 있는 곳에서 절제하는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신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떡과 포도주조차도 평안한 마음으로 먹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실로 저희가 물 한 모금 맛보는 것조차도 주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식탁을 대하는 것조차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편 세계의 보다 큰 부분은 하나님이 저희에게 허락하신 바를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별없이 쾌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친절하심이 우리에게 절제를 가르쳐 주는 가장 훌륭한 선생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편 104 편
시104:16-26 여호와의 나무가
시인은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을 볼 때 그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관하(管下)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관찰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성령 하나님에게서 떠나 심령이 어두워지면 천하 만물이 모두 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같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이 시편의 저술자와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24절에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1. 본문 16-18절은 “(16)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17)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18)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시금 세계 모든 부분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일반 십리를 다룹니다.
먼저 시편 기자는 앞서 언급한 하나님이 주시는 물로 나무가 흡족하여 혹은 활기로 충만하여 새들의 거처가 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다음에 시인은 산과 바위는 들사슴들과 너구리들도 피난처들을 갖는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아버지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신 하나님께서 세계 어느 부분도 잊지 않고 계시며 어느 피조물도 그의 돌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선지자가 화제의 초점을 사람에게서 나무들에게로 옮기는 것은 마치 하나님은 나무에게까지도 그의 돌보시는 은혜 베푸시기를 꺼려하지 않으시므로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사람들을 그처럼 관대하게 기르시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나무” 라는 말은 높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나무를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이 그 나무들에게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땅의 자양분이 그처럼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그 나무들이 해마다 새잎을 내는 것은 거의 믿기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시편 104 편
2.본문 19-20절은 “(19)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20)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제 해와 달이 서로 번갈아 교대하는 과정의 아름다운 조화에서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는 데 이릅니다.
그것들의 상호교대에 서로의 다양성이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고 너무나 질서정연해 그 이상 더 훌륭한 일정표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데 주석가들은 의견 일치를 보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저희의 월력을 달로 계수하는 데 익숙해 있으므로 이 말은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막론하고 절기의 날과 집회의 날을 계산하는 데 기여되었습니다.
선지자가 이 비유로 일부를 전체로 연관시켜 달이 낮으로부터 밤을 구분 지어 줄 뿐 아니라 절기의 날들을 표시해 주고 연수와 달수를 계수해 줍니다.
그럼으로써 결국 그 과정에서 시기가 구분되도록 여러 가지 유용한 목적에 사용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에 관해 우리는 그 말을 해의 매일 매일의 순환(칼빈은 천동설에 입각하여 모든 우주와 지구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그 말은 또한 해가 한때에는 우리에게로 점차 더 가까이 왔다가 다른 때에는 우리에게서 점차 더 멀어지므로 여름과 겨울, 봄과 가을을 구분 짓는 자기 움직임의 주기 계산하는 법을 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다음에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라는 말이 덧붙여집니다.
이는 그것들이 저희 굴들에서 나오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히브리어 동사 רמש (라마스)를 ‘걷다’의 뜻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번역한 본래 의미가 부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비록 굶주림은 들짐승들을 광포하여 날뛰게 만들지라도 그것들이 저희 피난처에서 비교적 먼 거리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밤의 어두움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짐승들이 기어 나온다고 말합니다.
3. 본문 21절은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입니다.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사자들이 비록 저희 굴에서 나와 한낮에도 부르짖지만 시편 기자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의 형편을 서술합니다.
시편 104 편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사자들이 낮 동안에는 멀리까지 나아가지 않고 밤의 어둠을 의지하여 저희 먹이를 찾아 나선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짐승들이 그처럼 두려워 굴 안에만 들어앉아 있도록 하여 사람들이 보다 큰 자유를 가지고 멀리까지 나다니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만일 사자들이 이따금씩 보다 큰 자유를 가지고 돌아다닐 것이면 이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돌려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사람들에게서 들짐승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치 쇠로 된 우리나 쇠사슬로 붙잡아 두듯이 낮의 빛으로 수많은 들짐승을 붙잡아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래의 복이 다소나마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는 저희가 하나님을 양아버지로 인정하기나 하는 듯이 자신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맡긴다는 뜻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그처럼 굶주린 짐승들에게 먹이를 공급해주신다는 사실 자체를 지적합니다.
4. 본문 22-23절은 “(22)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23)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동일한 주제를 계속 언급해 나아갑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이 낮 시간은 주로 사람에게 속하도록 시간을 배정하신 사실을 보여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대적인 수많은 들짐승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으셨더라면 인류는 곧 멸절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로 들짐승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만나는 자마다 갈기갈기 찢어 놓게 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 잔혹함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제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들짐승을 저희의 굴들 안에 가두어 두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유일한 수단은 단순히 해의 밝은 빛으로 저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예를 당연히 더욱 찬양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저희 생업에 종사하러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같이 빛으로 들짐승의 해에서 보호받으므로 아버지와 같은 모양으로 자기에게 편의와 복지를 제공해주신 하나님의 비길 데 없는 선하심에 접하게 됩니다.
시편 104 편
5. 본문 24절은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끝이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는 특수한 일만 다룹니다.
이는 누구나 다 그러한 일을 생각하므로 보다 주의 깊게 하나님이 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개체적인 부분을 다스리시는 지혜를 살펴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그의 서술을 잠정하고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라고 감탄합니다.
우리가 놀라움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때일지라도 우리의 혀와 모든 지각으로 그처럼 위대한 주제를 바로 찬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들의 한 작은 부분이 우리를 놀라게 할진대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 하나님의 일 전체를 파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먼저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라는 말씀이 나오고 곧이어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라는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지혜만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의미는 곧 세계에는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혼돈 상태에 있기는커녕 거대하고 다양한 것이 온통 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극히 큰 지혜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무엇을 감하거나 무엇을 개량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 찬양은 죄악 된 생각과는 반대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 가운데 의도를 발견해 낼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실로 우리들처럼 어리석어 그의 일들을 생각하는 일에 눈이 어두운 자들의 비난을 들으셔야 할 것 같은 죄악된 생각이 종종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데 이것은 본 찬양과 대치됩니다.
선지자는 동일한 찬양으로 에피큐러스(Epicurus)가 원자들로 구성돼 있다는 원에 대해 떠들어 댄 것처럼 세계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의 미친 생각을 책망합니다.
그처럼 훌륭하고 그처럼 뛰어난 장식으로 배열되어 있는 천지의 구조가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상상이라기보다 오히려 불합리한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또 세계를 온전히 통치하는 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주목할 것을 명합니다.
‘하나님의 부요’ 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택이 포함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땅을 그처럼 부요로 충만케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04 편
하나님이 우리 유익에 관계되는 것이 모자라지 않게 그 같은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땅이 저절로 그와 같은 부요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땅의 부요를 우리에게 자기 관대하심을 타나내시는 방편으로 삼으십니다.
6. 본문 25-26절은 “(25)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 하니이다
(26)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입니다.
땅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증거를 다룬 다음에 선지자는 바다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나타내는 새로운 거울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비록 바다에 고기가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단순히 그 거대함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습니다.
특히 한때는 바람과 폭우로 물결이 흉용하다가도 다른 때에는 고요하고 잔잔한 것을 볼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항해술은 노련한 사람이나 습득할 수 있는 특수 기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로 심히 깊고 강한 바다를 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됩니다.
그러나 고기가 풍부하고 다양함에 못지 않게 바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것들 가운데 시편 기자는 ‘리워야단’ 혹은 ‘고래’를 찬양합니다.
그 이유는 이 동물이 비록 우리의 눈에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나 하나님의 두려운 권능에 대한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증거를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논증을 욥기에서 더욱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동물의 뛰노는 것이 바다를 크게 요동시킬 뿐 아니라 또 사람의 마음을 놀라움으로 가득하게 하므로 선지자는 “노나이다” 라는 말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동물의 요동하는 것이 한낱 노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인은 바다가 리워야단들에게 운동장으로 제공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104 편
시104:27-35 이것들이 다 주께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거기서 손을 떼신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물론 기본 창조인 의미에서 특수성을 띱니다.
그러나 그 피조물들의 보존도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됩니다.
또 만물은 하나님을 순종하여 그 활동을 쉬지 않습니다.
본문 32절에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란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이 시인은 성령의 감화로 대자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굳게 서원(誓願) 합니다.
시인의 서원은 그가 일생동안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인간의 죄로 상한 그대로 내버리시지 않고 나중엔 그가 모든 죄를 소멸하시므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리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이 시편 기자의 종말관입니다(계21:1-7).
1. 본문 27-28절은 “(27)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입니다.
1) 시편 기자는 다시 하나님을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에 대해 모든 것을 후히 공급해 주시는 가장으로, 또 아버지로 역할 하시는 분으로 서술합니다.
(1) 시편 기자는 앞서 하나님께서 가축들을 부양하기 위해 산 위에 풀이 자라 먹이가 되게 하시고, 또 비록 사자들이 저희 사냥하는 먹이로 살아갈지라도 저희가 삶을 지탱하여 나아가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살아 있는 피조물의 다양한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또 각 종류에 그 숫자도 엄청나게 많은 한편 그중 단 하나도 매일의 먹이를 필요 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2) ‘모든 것들이 주를 기다린다’ 는 말씀은 곧, 만일 하나님께서 저희의 매일 필요한 먹이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시고 저희를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보살펴 주지 아니하신다면 저희가 불과 며칠도 살아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가 그처럼 다양하게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각기 적합한 먹이를 지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4) 짐승들은 하나님께 필요를 공급받고자 하는 이성과 판단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땅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저희 배를 채울 먹이를 구합니다.
시편 104 편
하지만 선지자는 짐승들이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할 때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저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말미암아 먹이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에게 관대함을 보여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이내 죽어버릴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저희에게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신다고 한 것도 불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저희가 일년 내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방편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때를 따라 먹이를 예비해 두시기 때문입니다.
겨울에는 땅이 얼어붙어 버리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저희에게 먹이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신다면 저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정한 때에 땅이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셔서 이와 같이 우리를 굶주림과 기근으로 위협하는 한 해의 남은 계절에까지 그의 복이 미치게 하시는 것은 현실 가운데서 더욱 큰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땅의 새로운 산물에 대한 소망으로 격려 받지 못한다면 겨울에 땅이 그 부요를 닫아 버릴 때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3)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적절히 하나님이 “주께서 손을 펴신즉” 이라고 단언합니다.
만일 밀이 매일같이 자란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리 분명히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메마를 때는 마치 하나님이 그의 손을 닫으신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땅이 열매로 충만케 하실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의 손을 내미사 우리에게 양식을 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이제 만일 하나님이 들짐승들에게 때에 따라 저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먹이를 공급해 주실진대, 우리가 불신앙으로 우리에게 흘러 넘치는 것을 막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의 복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다함이 없는 부요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2. 본문 29-30절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 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붙드시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삶을 영위해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주시는 영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즉시 죽고 맙니다.
플라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확히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만물이 오직 그 안에서만 생명 혹은 존재를 유지해 나아간다고 종종 가르쳤습니다.
시편 104 편
우리는 이방인 저술가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저희가 자신이 아닌 타 근원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지식을 일깨워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점을 의심치 않습니다.
1) 먼저 시인은 ‘만일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숨기시면 저희가 두려워할 것이며, 또한 만일 그가 저희 영을 취하시면, 저희가 죽어 저희 티끌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로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때 그 보시는 것이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평온한 얼굴이 빛나는 한 그것은 모든 피조에게 생명을 약동시켜 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편에서 온 세계에 생명을 주는 그 선하심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우매함은 배나 더 용서받을 수 없게 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은밀한 활력을 거두어 가실 경우에 초래하게 될 살아 있는 피조물의 파멸을 단계적으로 서술해 나아갑니다.
이는 대조를 통해 만물이 생명과 활기를 유지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영감을 더욱 효과적으로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기자는 더 나아가서 만일 하나님께서 붙들지 아니하신다면 만물이 다 무로 돌아갔으리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말로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부패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2) 기자는 “주의 영을 보내어” 세계를 매일같이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살아있는 피조물의 번식에서 우리는 분명히 계속되는 세계의 새 창조를 봅니다
시편 기자가 앞서 살아 있는 피조물의 영으로 언급한 바를 이제 하나님의 영으로 호칭하는 데에는 모순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머물러 있는 영을 그가 기뻐하시는 곳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보내시자 마자 만물이 창조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것이었던 바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니교도의 오랜 꿈을 결코 뒷받침해 주지 않습니다.
그 부정한 개와도 같은 것을 쎄르베투스(Servetus : 의사요 신학자로서 삼위 일체론을 부인한 칼빈의 숙적이었으며 칼빈이 속한 제네바 의회의 결정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가 더 악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니교도들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의 한 미립자이며 나무의 순과도 같이 하나님의 영에서 자라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비열한 인간(쎄르베투스) 은 뻔뻔스럽게도 소와 나귀와 개들도 하나님의 본체의 일부라고 주장했습니다.
마니교도들은 적어도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저희 오류의 구실로 삼았습니다.
시편 104 편
그러나 돼지나 가축에도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괴악하고 혐오할 일입니다.
선지자의 의도는 “주의 영”이 나아와서 그 일부가 본질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가지는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나온 “주의 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그의 영으로 일깨우도록 해 주셨으므로 시편 기자는 그 영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우리가 날로 쇠해 가고 날로 새로워져 가는 세계를 볼 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 안에서 우리에게 비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피조물들 가운데에 일어나는 모든 죽음들은 우리의 헛된 존재에 대한 수많은 예들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서 저희 방에서 자라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그 자녀들에게서 세계의 갱신(更新)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계가 매일 죽어있고 또 다양한 부분들에서 매일 새로워지므로 세계가 오직 하나님에게로서 나오는 은밀한 힘에 의해서만 보존된다는 것이 분명한 결론입니다
3. 본문 31-32절은 “(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 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32)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입니다.
영감 받은 시인은 그가 본 시편 앞 부분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을 찬양한 목적 곧 사람들을 독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계를 그처럼 훌륭하게 꾸며 놓으셔서 우리로 이 아름다운 장관을 구경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세계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풍성하고 다양한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신 것은 결코 작은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돌림에 있어서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이 특별한 보답으로 간주하시는 요소가 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 태초에 세우신 질서가 그의 선물들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일에서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6장 6절에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라는 말씀을 피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의 부패로 더럽혀지는 것을 보실 때 더 이상 저희에게 그와 같은 은혜 베푸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104 편
분명히 모든 요소들이 각기 제 기능과 위치를 지키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혼란과 무질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노여워하셔서 정상적으로 자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비록 하나님 마음에는 노여움과 조급함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와 같이 은혜 베푸시기를 중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온유하게 돌보시고 풍성하게 기르시는 데서 기쁨을 찾으시는 아버지들 가운데 가장 이상적 성품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음 절에서 세계의 견고함은 하나님이 그의 행사들을 기뻐하시는 이 기쁨에 의존된다는 사실이 지적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우시고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써 땅에 활력을 주시지 않으신다면 그가 엄한 얼굴로 땅을 보시는 즉시 땅은 그로 인하여 떨게 되고 또한 산들이 불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본문 33-34절은 “(33)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 을 찬양하리로다
(34)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결코 싫증내는 일이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선언함으로 자신이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각자 의무를 지적합니다.
죽음만이 그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그치게 할 유일한 경계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옮겨질 때 우리의 이 의무도 끝이 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처럼 값진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너무나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의식한 시편 기자는 34절에서 비록 부정한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께 부를 찬양이 열납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열납되거나 더 인정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찬미의 제사보다도 우리에게서 더 특별히 원하시는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정함은 본래 가장 거룩한 것을 오염시키므로 선지자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근거로 하나님이 그의 찬양을 열납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시편 104 편
따라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우리의 감사 제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려질 때 하나님께 열납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택들을 닥치는 대로 분별 없이 즐기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 은택을 주신 이를 바라보는 자는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희귀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같이 야만적이고 변칙적인 쾌락에서 마음을 돌이켜 오직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5. 본문 35절은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입니다.
이 저주는 31절 뒤의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에 걸립니다.
악인들은 저희의 부패로 세계를 오염시키므로 그 결과는 하나님이 그의 솜씨를 보다 덜 기뻐하시며 심지어는 거의 싫어하기까지 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계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있는 이 부정함이 그처럼 고상한 하나님의 솜씨를 오염시켜 놓은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선물들을 남용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그 본래의 상태에서 타락시켜 놓으므로 선지자는 정당하게 저희가 완전히 멸절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그가 거룩케 하사 우리로 즐기게 하신 것처럼 그의 은택을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 위해 그의 섭리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처럼 값진 보화들이 악하게 낭비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창조자를 잊어버릴 뿐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베풀어 주시든지에 고의적으로 사악하고 무가치한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것을 괴악하고 가증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