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망할 무렵에 명장 계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흑치상지라는 명장이 있었으며, 7척 장신에 지략에 뛰어나 계급이 달솔에 이르렀으며,
풍딜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계백처럼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고, 소정방에게 항복하였다.
하지만 소정방이 늙은 의자왕에게 함부러 행동하자 격분하여, 복신(의자왕 4촌),
도침(승려) 등과 함께 임존성(예산 예당저수지 인근의 봉수산 400여미터)과 주류성(한산 인근)에서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한 때, 당군과 신라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인근 200성을 회복하였으며,
도성인 사비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등 잃어버린 왕국의 회복의 꿈을 꾸게 하였다.
이런 저항운동은 3국 중 백제만이 가능했으며, 신라나 고구려의 경우 저항운동다운 저항이 없었다.
그것은 이들 3국의 멸망의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신라와 고구려는 망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망했다.
그러나 백제는 문화나 군사력이 절정의 시기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힘에 의해 망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성공적인 저항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저항운동은 엉뚱하게도 내부 분렬에 의해 3년만에 와해되었다.
즉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왕이던 부여풍(의자왕의 아들)이 복신을 죽이는 사건이 야기된 것이다.
게다가 당나라 고종은 흑치상지를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그의 투항을 성사시켰다.
변심한 흑치상지는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던 지수신을 죽이고,
당 고종의 사주를 받은 유인괘를 맞아들였다. 그후 당나라로 가서,
대장군에 이르는 등 출세를 거듭하다가, 결국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들 저항운동의 지도자들이 만약 마음을 합쳐 끝까지 저항하였다면,
망한 백제가 부흥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고도 400여미터가 넘는 봉수산은 예당 저수지 왼편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서쪽 사면에는 오래된 천년 고찰 대련사가 있었다.
산성은 바깥 쪽은 돌로 되었고, 안쪽은 흙으로 되어 있는 퇴메식이었다.
그 흐릿한 흔적을 따라 보수작업이 한창이었다.
백제의 생명이 3년간 더 연장되었던 여기 임존성이말로 진정한 백제의 숨결이 남은 것이다
의자왕과 세자이던 부여융, 그리고 흑치상지와 아들의 비석이 중국 낙양 인근의 북망산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