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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전고진(乌镇古镇)
본래 이름은 오돈(乌墩)이며, 강(江)·절(浙)·호(沪) ‘금삼각(金三角)’ 지역, 즉 항가호평원(杭嘉湖平原)의 중심에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호주시(湖州市) 남순구(南浔区)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강소성(江苏) 소주(苏州) 오강시(吴江市)와 접하며, 두 성(二省, 절강·강소)과 세 시(三市, 가흥·호주·소주)의 교차 지점에 해당한다. 절강성(浙江省) 가흥시(嘉兴市) 동항시(桐乡市) 석불남로(石佛南路) 18호에 있으며, 태호유역(太湖流域)에 속하는 십자 모양의 내륙 하천에 의 동, 서, 남, 북 네 구역으로 나뉘어, 각각 동책(东栅), 남책(南栅), 서책(西栅), 북책(北栅)으로 불리는데, 전체 면적은 79㎢이다. 그 중 동책(东栅)과 서책(西栅)은 이미 개발된 경구(景区)이다.
주요 하천으로는 금우당(金牛塘), 백마당(白马塘), 강정당(康泾塘), 장안당(长安塘), 함산당(含山塘), 영안당(灵安塘), 고양당(羔羊塘), 서성대당(西圣埭塘), 장산하(长山河) 등이 있고, 하천 총연장은 2,401km이며, 수역 면적은 46.3평방킬로미터로, 시 전체 면적의 6.73%를 차지하며, 하천망의 밀도는 3.3km/㎢이며, 이 지역은 전형적인 강남 수망 평원(江南水网平原)에 속한다. 경항대운하(京杭大运河)가 진(鎭)을 따라 지나간다. 옛 이름은 오돈(乌墩)과 오수(乌戍)이며, 7,000여 년의 역사와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된지도 1,300여 년이나 되는 중국 강남 지역의 전형적인 고대 수향 마을이다.
명(明)·청(清) 시대 강남수향(江南水乡)의 건축 풍모를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옛부터 ‘어미지향(鱼米之乡, 물고기와 쌀의 고장)’, ‘사주지부(丝绸之府, 비단의 고을)’, ‘ 중국 마지막 수향마을(中国最后的枕水人家, )’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강으로 이어진 거리와 거리를 연결하는 다리, 강변에 지어진 가옥과 거리 위의 아케이드, 대나무와 돌로 만든 난간과 수변 정자 등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강남목조진열관(江南木雕陈列馆), 수진관고희대(修真观古戏台), 회원당포(汇源当铺) 등 명청 시대 강남 수향 주택들이 많이 있고, 우전 민속 박물관, 강남 백상 박물관, 전통 공방 구역, 샹산 홀, 복싱 보트 공연, 풍원 쌍교 등 주요 명소를 아우르고 있으며, 원래 수향마을의 양식과 배치를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2013년 우전연극제를 개최하였고, 2014년부터는 세계인터넷대회의 상설행사장으로 지정되었다. 2010년, AAAAA급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오진(乌镇)의 옛 이름은 오돈(乌墩)·오수(乌戍)이다. 오돈(乌墩)의 ‘돈(墩)’ 자에 대하여, 왕우주(王雨舟)는 "이계편(二溪编)"에서,
乌镇古为乌墩,以其地脉坟起高于四旷也……
오진(乌镇)은 옛날 오돈(乌墩)이라 불렀는데, 그 지맥이 솟아 있어 주위 사방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乌)’ 자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越王诸子争君长海上分封于此,遂为乌余氏,故曰乌墩
월왕(越王)의 여러 아들들이 군장(君长)의 지위를 다투다가, 해상(海上)에서 각각 분봉(分封)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이 지역에 봉해져 오여씨(乌余氏)가 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오돈(乌墩)’이라 불리게 되었다.
혹은
因土地神乌将军而名乌
토지신(土地神)인 오장군(乌将军)의 이름을 따라 오(乌)라 불렀다.
혹은
乌有乌陀古迹,青有昭明青锁
오(乌)에는 오타(乌陀)의 고적(古迹)이 있고, 청(青)에는 소명(昭明)의 청쇄(青锁)가 있으므로, 이로부터 오(乌)와 청(青)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등의 설이 있다.
노학박(卢学博)이 편수(编修)한 "오청진지(乌青镇志)"에 따르면, 청 강희(康熙) 27년(1688년)에 향현(乡贤)들이 "오청문헌(乌青文献)"에서 제기한 설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乌墩、青墩之名,其从来远矣……
오돈(乌墩)과 청돈(青墩)의 이름은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
大都江山自开辟以来,何有其名字?
대체로 강산은 개벽 이래로 어찌하여 이름이 생겨났는가?
皆世谛流布相承耳,
모두 세상에서 전해 내려오며 자연스럽게 굳어진 것일 뿐이니,
如‘齐鲁青未了’,‘澄江静如练’,是为山水传神写照语也。
예컨대 ‘제(齐)와 노(鲁)의 푸른 빛이 끊임없이 이어져온다’거나 ‘강이 맑고 고요함이 마치 비단과도 같다’거나 하는 표현은, 산수(山水)의 생동하는 정취를 전하고, 그 모습을 충실히 옮기려는 어구(语)이니,
乌青之义盖类此。
오청(乌青)의 뜻 또한 대체로 이와 같다.
오진(乌镇) 근교의 담가만(谭家湾) 유적 발굴조사에 따르면, 약 7,000년 전, 오진(乌镇)의 선주민이 이미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신석기시대, 마가방문화(马家浜文化)에 해당한다. 춘추시대, 오진(乌镇)은 오월(吴越) 국경지대였고, 오국(吴国)은 이곳에 군대를 주둔하여 월국(越国)을 방비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오수(乌戍)’라 불렀다. 진나라때, 오진(乌镇)은 회계군(会稽郡)에 속하여, 차계(车溪, 지금의 시하 市河)를 경계로 삼았는데, 서쪽은 오돈(乌墩)으로 오성현(乌程县), 동쪽은 청돈(青墩)으로 유권현(由拳县)에 속하여, 오진(乌镇)이 각각 분할되어 통치되었다. 이후, 오진(乌镇)은 때때로 절강성(浙江)의 호주(湖州)·가흥(嘉兴) 관할에 속하기도 하고, 강소성(江苏)의 소주(苏州) 관할에 속하기도 하였다.
당나라때, 오진(乌镇)은 소주부(苏州府)에 속하였고, 후량(后梁) 때에도 소속은 변하지 않았으며, 오월국(吴越国) 지역이었다. 후진(后晋) 천복 5년(天福五年, 940년), 수주(秀州)를 설치하였고, 청돈(青墩)은 가흥현(嘉兴县)에 속하여 수주(秀州) 관할이 되었다.
송(宋) 순화 3년(淳化三年, 992년), 오진(乌镇)은 오성(乌程) 속 호주(湖州)에 속하였다. 희녕 10년(熙宁十年, 1077년), 가흥현(嘉兴县) 서쪽 경계의 오동(梧桐), 영신(永新), 청풍(清风) 등 5개 향(乡)을 숭덕현(崇德县)으로 귀속시켰을 때, 청진(青镇)은 청풍향(清风乡)에 속하여 숭덕현(崇德) 수주(秀州) 관할이 되었다. 송(宋) 원풍 초기(元丰初年, 1078년)에는 오돈진(乌墩镇)과 청돈진(青墩镇)을 분리하여 기록하였으며, 이후 광종(光宗)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 각각 오진(乌镇), 청진(青镇)으로 개칭하였다. 송(宋) 가정 연간(嘉定年间, 1208-1224), 가흥(嘉兴)을 군(军)으로 승격시키자, 청진(青镇)은 숭덕(崇德) 소속으로 가흥군(嘉兴军) 관할이 되었다. 보경 2년(宝庆二年, 1226년), 호주(湖州)를 안지(安吉)로 개칭하고, 오진(乌镇)은 안지주(安吉州) 오성현(乌程县) 소속이 되었다. 송대(宋代)에는 진(镇) 지역에 감진관(监镇官)을 설치하여 화재 예방과 주세(酒税) 관리, 군사 모집을 통한 방어를 담당하였다.
원(元) 지원 14년(至元十四年, 1277년), 오진(乌镇)은 호주로(湖州路) 오성현(乌程县) 소속, 청진(青镇)은 가흥로(嘉兴路) 숭덕현(崇德县) 소속이 되었고, 진(镇) 지역에는 도순검(都巡检)을 설치하였다. 명(明) 선덕 5년(宣德五年, 1430년), 숭덕현(崇德县)의 모화(募化), 천금(千金), 보녕(保宁), 청풍(清风), 영흥(永兴), 오동(梧桐) 6개 향(乡)을 분리하여 동항현(桐乡县)을 설치하였으며, 청진(青镇)은 이에 속하여, 가흥부(嘉兴府) 관할이 되었고, 오진(乌镇)은 여전히 오성현(乌程) 소속 호주부(湖州府)에 속하였고, 이러한 행정 구속 관계는 청대 말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고, 민국 원년(民国元年, 1912년)까지도, 오진(乌镇)과 청진(青镇) 두 진(镇)은 여전히 분할 통치되었다.
1950년 5월, 오진(乌镇)과 청진(青镇) 두 진(镇)이 마침내 합병되어 오진(乌镇)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동항현(桐乡县) 소속으로 가흥(嘉兴)에 편입되었다. 1999년, 오진(乌镇) 동책구(东栅区)는 구체적인 복원 및 정비 계획을 수립, 시행하여 ‘동책경구(东栅景区)’를 조성하여, 2001년, 동책경구(东栅景区)가 정식으로 대외 개방되었으며, 유엔 전문가 조사단으로부터 중국 전통고진 보호의 ‘오진모식(乌镇模式)’이라 평가되었고, 유네스코에 의해 오진(乌镇)은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世界文化遗产预备名单)에 등재되었다. 한편, 2007년 2월 18일, 서책경구(西栅景区)가 정식으로 대외 개방되었다.
동책경구(東栅景區)
동책경구(東栅景區)의 관광코스는 약 2km에 걸쳐, 동책노가(東栅老街), 관전가(觀前街), 하변수각(河邊水閣), 낭붕(廊棚)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회원당포(匯源當鋪), 방려각(訪廬閣), 피영희(皮影戲), 한림제(翰林第), 수진관(修真觀), 고희대(古戲台), 모둔고거(茅盾故居), 여류량전비관(余榴梁錢幣館), 목조관(木雕館), 남인화포염방(藍印花布染坊), 공생조방(公生糟坊), 오진민속풍정관(烏鎮民俗風情館), 강남백상관(江南百床館), 전통작방구(傳統作坊區), 향산당(香山堂), 권선표연(拳船表演), 봉원쌍교(逢源雙橋), 즉 통제교(通濟橋)·인제교(仁濟橋) 등 20여 개 명소가 있다.
강남목조진열관(江南木雕陳列館)
원래 동책(東栅) 서가(徐家) 저택으로, 백화청(百花廳)이라 불리며, 정교한 목조(木雕)로 유명하다. 현재 정실(正室) 편옥(偏屋) 안에는 ‘팔선과해(八仙過海)’, ‘곽자의 축수(郭子儀祝壽)’ 등 민간 전설, ‘어획(打魚)’, ‘투귀쾌(斗蟋蟀)’ 등 생활 장면, ‘용봉呈祥(龍鳳呈祥)’, ‘매란죽국(梅蘭竹菊)’ 등 전통 도안 등 강남(江南) 특유의 다양한 중국 고대 목조품을 진열하고 있다.
모둔고거(茅盾故居)
오진(烏鎮) 시(市) 하동(河東) 측 관전가(觀前街) 17호에 위치하며, 4간2진(四開間兩進), 층목결구(層木結構) 목조 건물로, 좌북조남(坐北朝南)의 배치로 동서 두 구역으로 나뉘며, 모둔(茅盾, 1896-1981)의 증조부가 두 차례에 걸쳐 구매하였다고 하며, 침실(卧室), 서실(書房), 식당(餐廳) 등의 건물이 포함되어 있고, 가구배치는 모둔(茅盾) 거주 당시 그대로이다.
노가장롱(老街長弄)
우전(烏鎮)의 가(街), 방(坊), 항(巷)의 수와 규모는 상당하여 통칭 ‘사문팔방(四門八坊) 수십 항(數十巷)’이라 불릴 정도인데, 팔대가(八大街)에는 상춘리대가(常春里大街), 등강리대가(澄江里大街), 통리대가(通里大街), 남대가(南大街), 중대가(中大街), 북대가(北大街), 관전가(觀前街), 동대가(東大街) 등이 있다.
봉원쌍교(逢源雙橋)
상부에 낭붕(廊棚)이 있어, 낭교(廊橋)로도 불리며, 다리 아래쪽으로 수책란(水柵欄)이 있어, 예전에는 수로를 거쳐 출입하는 관문이었다. 전해지기를, 쌍교(雙橋)를 건널 때 남좌여우(男左女右)로 걷는 풍습이 있었는데, 다리를 한 번 걸을 때 좌우(左右)로 나누어 걸어야 하기 때문에, ‘이 다리를 건너면 일이 능숙하게 잘 풀린다’는 속설이 생겼다.
강남백상관(江南百床館)
중국 최초로 강남(江南) 고상(古床)을 전문적으로 수집·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조가청(趙家廳)으로도 불리며, 내부에는 명(明), 청(清) 및 근대 강남(江南) 고상(古床) 수십 점을 보관하고 있다. 부호에서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상(木床)이 구비되어 있으며, 사치스런 귀족에서 검소한 일반 백성의 생활상을 모두 보여준다.
여류량전폐관(余榴梁錢幣館)
여류량(余榴梁)은 우진(烏鎮) 출신의 저명한 화폐 수장가로, 『중국화전(中國花錢)』, 『중국감상여수장(中國鑑賞與收藏)』, 『전폐학강요(錢幣學綱要)』 등 10여 종의 학술 저서를 남겼다. 그는 40년간 세계 230여 개 국가와 지역의 각종 화폐 약 26,000종을 수집하였다. 재질은 금(金)·은(銀)·동(銅)·철(鐵)·주석(錫)·알루미늄(鋁)·연(鉛)·도기(陶)·니켈(鎳)·죽(竹)·골(骨)·유리(琉璃)·플라스틱 등 15종에 이른다.
그가 소장한 중국 고전(古錢) 화폐(貨幣)는, 상(商)나라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아래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삼천 년에 걸쳐 이어지며, 거의 만 종(種)에 달한다. 그 가운데에는 가장 오래된 상대(商代)의 유금동패전(鎏金銅貝錢)이 있고, 희귀한 한대(漢代)의 착판(錯版) 반량(半兩)과 청(淸) 함풍(咸豐) 시기의 유리화폐(琉璃幣)가 있으며, 가장 귀중한 ‘성송통보(聖宋通寶)’ 당오전(當五錢)도 있다. 전해지기로는, ‘성송통보’ 당오전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단 5매(枚)뿐인데, 그중 3매는 외국으로 흘러갔고, 1매는 민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신화사(新華社)가 그가 이 희귀하고 오래된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발표한 뒤, 전 세계 18개 국가에서 대서특필되었다.
그는 ‘강희통보(康熙通寶)’ 화폐에 관한 이야기를 필자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길, ‘강희통보’는 강희제(康熙帝)가 예순 살 생일을 맞아 주조한 축수전(祝壽錢)이며, 당시에는 ‘만수전(萬壽錢)’이라 불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도광(道光) 연간에 항저우(杭州) 정사(淨寺)를 보수할 때, 절의 한 승려가 우연히 한 존(尊)의 나한(羅漢) 불두(佛肚) 안에서 한 줄의 ‘강희통보’ 옛 동전을 발견하였다. 승려는 ‘이런 돈은 나한의 뱃속에서 나온 나한전(羅漢錢)이며, 몸에 지니면 나한의 가호를 받아 사악함을 물리치고 재액을 피하며 태평길상(太平吉祥)을 가져다준다’고 선전하여, 이에 신봉자들이 앞다투어 헌금하여 이 화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강희통보’ 동전은 청년들이 서로 사랑을 정하는 신표(信標)인 ‘나한전(羅漢錢)’이 되었다.”
우전(烏鎮) 모둔고거(茅盾故居) 동측의 한 고가(古家) 민거(民居) 안에, 특별한 ‘은행(銀行)’ 한 곳이 있는데, 이 은행에는 전 세계 200여 개 국가와 지역의 2만여 종의 화폐가 소장되어 있어, 사람들은 ‘만국은행(萬國銀行)’이라 부르는데, 바로 여류량(余榴梁) 화폐관(錢幣館)이다. 진열된 화폐는, 그가 소장한 전체 장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수진관(修真觀)
우진(烏鎮) 중시(中市)에 위치한다. 북송(北宋) 함평원년(咸平元年, 998)에 도사 장동명(張洞明)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도를 닦아 수진(修真)하였다고 하며, 이후 창건된 도관(道觀)이 ‘수진관’이다. 소주(蘇州)의 현묘관(玄妙觀), 부원(濮院)의 상운관(翔雲觀)과 함께 ‘강남삼대도관(江南三大道觀)’으로 불릴 만큼 격식이 높았다. 삼진(三進) 구조이며, 제1진은 산문(山門), 제2진은 동악대전(東岳大殿), 제3진은 옥황각(玉皇閣)이고, 좌우에는 염왕(閻王)전, 온원수(瘟元帥)전, 재신(財神)전 등이 병설되어 있다. 산문 전의 광장은 넓고 웅장하며, 문 상단에는 거대한 주판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대련(對聯)이 쓰여 있다.
人有千算,天則一算).
사람에게는 천 가지 셈이 있으나, 하늘은 오직 한 가지 셈 뿐이다.
고희대(古戲臺)
수진관의 부속 건물로, 청 건륭 14년(乾隆十四年, 1749)에 창건되었다. 여러 차례 훼손되었으나, 현재 건물은 1919년 중수된 것이다. 면적은 204㎡로, 북쪽은 관전가(觀前街)와 마주하고, 남쪽은 동시하(東市河)에 접하며, 동쪽은 흥화교(興華橋)에 기대어 있다. 이층 건물에 사산식(歇山式) 지붕을 하고 있으며, 1층은 벽돌로 둘러쌓였고, 부두로 통하는 측문이 있다. 상층은 후부(後部)의 분장실과 전부(前部)의 무대로 구분된다.
회원당포(匯源當鋪)
응가교(應家橋)와 남화교(南花橋) 사이에 위치하며, 5칸의 대면(門面)을 가진 2층 건물이다. 『우청진지(烏青鎭志)』에 따르면, 우진에는 한때 전당포가 13곳 있었으나, 1931년에는 이 곳 회원당 한 곳만 남았다. 건물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였고, 외벽 하단은 인두 높이의 조석(條石)으로 쌓아 절도 방비를 강화하였다. 문은 두꺼운 은행나무판에 철피(鐵皮)를 입혀 방화(防火) 효과를 높였고, 내부에는 관제(關帝)당이 있어 충의(忠義)를 표했다. 점물 거래장인 점청(店廳)에는 높은 카운터와 목책이 있었으며, 전당자는 그 너머로 물건을 올려놓고 가격을 불렀다. 뒤쪽은 창고로, 화재를 막기 위해 ‘태평항(太平缸)’이라 불리는 물항아리를 다수 배치하였다. 이 당포는 도광(道光) 연간에 서씨 가문의 서환조(徐煥藻, 호 명향茗香)가 창립하였다.
강남민속관(江南民俗館)
청 말(清末)에서 민국(民國) 시기 사이 우진(烏鎮) 지역의 민간에서 행해졌던 수경(壽慶)·혼인·출산 등의 의례와 세시(歲時) 풍속 장면을 전시하고 있다. 혼속청(婚俗廳)에서는 밀랍 인형으로 신랑·신부·중매인·부모 등의 인물을 재현하고, 화가(花轎)·가장(嫁妝) 등의 실물을 배치하여 혼례의 흥성한 장면을 재현하였다. 의속청(衣俗廳)에서는 실물, 밀랍상, 사진 등을 이용하여 100여 년 전 강남(江南) 지역 민간의 복식 풍속을 보여준다. 절속청(節俗廳)에서는 춘절(春節) 세배, 원소(元宵) 다리 걷기, 청명(清明) 향시장, 입하(立夏) 사람 달기, 단오(端午) 종자(粽子) 먹기, 수룡대회(水龍大會), 천황(天贶) 벌레 말리기, 중원(中元) 하등(河燈), 중추(中秋) 달맞이, 중양(重陽) 등고(登高), 동지(冬至) 제조(祭祖) 등 세시 풍속을 전시하였다. 수속청(壽俗廳)에서는 노인의 수연(壽宴)을 주제로, 현장에는 ‘수(壽)’ 자 병풍, 서화(書畫), 수도(壽桃), 수면(壽麵) 등 축수 물품을 전시하였다.
서책경구(西栅景區)
서책경구(西栅景區)는 오진(烏鎮) 서대가(西大街)에 위치하며, 고대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와 인접하고, 공로(公路)가 장강(江蘇), 소주(蘇州), 통향시(桐鄉市區)까지 바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동책(東栅)이 체험, 관람 등을 위주로 하는 것과 달리, 서책(西栅)은 상업관광과 휴양을 주로 한다. 넓은 면적에 걸쳐 서로 교차하는 하천과 72개소에 달하는 옛 다리(石橋), 높은 하천밀도는 모두 전국 고진(古鎮) 중 최고이다. 주요 명소로는 소명서원(昭明書院), 초목본색염방(草木本色染坊), 수각(水閣)과 공부석비(公埠石碑), 수상희대(水上戲台) 및 평서장(評書場), 교리교(橋里橋), 정승교(定升橋) 및 정승고(定升糕), 오장군묘(烏將軍廟), 월로묘(月老廟), 북습지(北濕地),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용형전(龍形田), 원보호(元寶湖) 등이 있다.
강절분부(江浙分府)
명대(明代)에는 절직분서(浙直分署)라 불렸으며, 소금 순찰 및 도둑 체포를 관할하고, 동시에 지방의 송사(訟事)를 처리하였으므로, 속칭으로 ‘이부아문(二府衙門)’이라 하였다. 명 조(明朝) 가정 연간(嘉靖年間)에 설치되어, 민국(民國) 초기에 폐지되기까지 여러 차례 혁파와 복설을 거듭하며, 약 370여 년간 존속하였다.
목심미술관(木心美術館)
화가, 문학가, 시인인 목심(木心, 1927-2011)의 평생에 걸친 유산을 기념·전시하고 있으며, 현대적인 양식에 길쭉하고 간결한 외양의 건물로 좌북조남(坐北朝南)으로 배치되어 있다. 목심(木心)의 제자이자 화가인 진단청(陳丹青)이 관장으로 취임하였다. 미술관에는 목심의 각 시기 회화 작품과 문학 원고가 전시되어 있고, 소규모 영상관도 설치되어 있다. 목심의 유작으로는 회화 600여 점, 문학 원고 수천 편이 남아 있으며, 그중 엄선된 약 100점의 회화와 50편의 원고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백련탑(白蓮塔)
백련탑(白蓮塔)은 서책(西栅) 대운하(大運河) 옆의 환하도(環河島)에 위치하며, 7층으로 높이 약 51m이며, 우전(烏鎮)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탑 아래에는 팔각형 승련광장(升蓮廣場)이 있으며, 광장 중앙에는 방생지(放生池)가 있고, 동쪽 강변에는 석방(石舫) 한 척이 있다. 송원(宋元) 시대 강절(江浙) 일대에서 유행했던 벽목 혼합 구조(磚木混合結構)의 각식탑(閣式塔)으로, 외형은 척형(梭狀)이나, 실제 평면(平面)은 정방형이며, 탑기초(塔基) 역시 24m × 24m 정방형이고, 내부 바닥은 청수방전(清水方磚)이 깔려 있다.
모둔기념관(茅盾紀念館)
입지서원(立志書院)은 모둔고거(茅盾故居) 동측에 위치하며, 읍신(邑紳) 엄진(嚴辰)이 동치 4년(同治四年, 1865)에 최초 건립하였는데, 현재는 모둔기념관(茅盾紀念館)으로 운영되고 있다. 원래 우전(烏鎮) 북책(北栅) 분수돈(分水墩) 서쪽에 있었다고 하는 분수서원(分水書院)이 전신이었는데, 가흥·호주(嘉, 湖)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입지서원(立志書院) 앞쪽은 관전가(觀前街)에 면하고 있고, 뒤쪽은 관후가(觀後街)에 닿아 있으며, 총 5진(直落五進)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 문미(門楣)에는 ‘입지(立志)’ 두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양쪽 기둥에 서원 명칭에 대한 주석(注解)인
先立乎其大,有志者竟成
먼저 큰 뜻을 확고히 세우면, 그 뜻한 바를 마침내 이룰 것이다.
이 걸려 있다. 천정을 지나 강당(講堂)에 접어들면, 위쪽에 절강부정사(浙江布政使) 양창준(楊昌濬, 1820-1891)이 쓴 ‘유지경성(有志竟成)’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양쪽으로 대련(對聯)은 국학대사(國學大師) 유월(俞樾, 1821-1907)의 글로, 내용은
分水舊規模,但願聞風皆立志;殳山鐘秀杰,定知異日有成材)”
예전 성했던 분수(分水)의 전당이여, 그 풍문을 듣는 모든 이가 뜻을 세우기를 바라노라.
수산(殳山)의 수려한 기운이 인재를 품었으니, 장차 이들은 반드시 큰 재목으로 자라나리니.
유월은 모둔의 동시대 작가였던 유평백(俞平伯, 1900-1990)의 증조부이다.
문창각(文昌閣)
입지서원(立志書院) 문 앞의 하포(河埠) 위에 위치한 누각으로, 서원과는 좁은 관전가(觀前街)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옛날에는 유생들이 하인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문창각으로 와서 독서하였고, 하인들은 누각 아래 부두가의 긴 의자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곤 하였다.
소명서원(昭明書院)
우전시(烏鎮市) 하서측(河西側)에 있으며, 남조(南朝) 양무제(梁武帝, 464-549) 태자(太子) 소통(蕭統, 501-531)이 이곳에 관(館)을 세우고 공부한 데에서 유래하였으며, 퉁샹시(桐鄉市) 주요 문물 보호 단위(重點文物保護單位)이다. 청(清) 건륭(乾隆) ‘오청진지(烏青鎮志)’에 따르면, 양천감 2년(梁天監二年, 503)에 소통(蕭統)은 스승 심약(沈約, 441-513)을 따라 우전(烏鎮)에 와서 수학(讀書)하였고, 서관(書館) 1채를 세웠는데, 이후 서관(書館)은 무너져, 터만 남았다가, 명대(明) 만력 연간(萬曆年間), 우전 동지(烏鎮同知) 전정훈(全廷訓)이 소통(蕭統)의 재능을 흠모하여, 서관(書館) 옛 터 앞에 석방(石坊)을 세웠고, 마을사람 심사무(沈士茂)가 석방(石坊) 상부에 ‘육조유승(六朝遺勝)’, ‘양조명태자(梁昭明太子) 동심상서(同沈尚書) 독서처(讀書處)’ 편액을 글씨로 새겼다. 1977년, 모둔(茅盾)은 고향에서 이 유적이 문화대혁명 이후에도 파괴되지 않았음을 듣고, 고향에 바치는 시 한 수를 지어, 당대(唐代) 은행나무는 여전히 무성하고, 조명서실(昭明書室)이 아련하게 남았다는 문구를 남겼다.
소통(蕭統)이 편집·정리한 문선(文選)은 중국 최초의 시가·산문 선집이다. 오랜 기간 동안 "문선"은 후대의 "고문관지(古文觀止)",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등과 함께, 고대 독서인(讀書人)들의 책상 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문학 독본이었으며, 그 영향이 심원하였다. 청(淸) 건륭(乾隆) 오청진지(烏青鎮志)의 기록에 따르면, 양(梁) 천감(天監) 2년(503)에 소통은 스승 심약(沈約)을 따라 오진(烏鎮)에 와서 독서하였고, 이때 서관(書館) 한 좌가 건립되었다. 후일 서관이 붕괴하고 흔적만 남았다. 서원은 좌북조남(坐北朝南) 배치의 반회랑(半回廊) 이층 경산식(硬山式) 구조이고, 주루(主樓)는 도서관으로서, 다방면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중앙의 교문대(校文台)는 저술과 편교(編校)를 하던 장소이다. 전방 정원에는 사안수지(四眼水池)가 있고, 사방에는 고목이 하늘을 찌를 듯 우거져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정문 입구에는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1573–1620)에 세워진 석패방이 있으며, 높이 3.75m, 너비 3.8m이다. 상부에 ‘육조유승(六朝遺勝)’이라 새겨져 있고, 용봉판(龍鳳板) 위의 ‘양소명태자동심상서독서처(梁昭明太子同沈尚書讀書處)’는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 마을사람 심사무(沈士茂)가 쓴 것이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시기에는 누군가 석회를 발라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서원의 서쪽에는 불풍각(拂風閣)이 있고, 연못 가운데에는 명대 경당(經幢)이 있다. 서원 뒤편은 모둔문학상 수상 작가 및 작품 전시관이다. 오진은 문학 거장 모둔둔의 고향으로서, 제5회부터 이미 마오둔문학상의 영구 시상지가 되었고, 이 전시관에는 역대 모둔문학상 수상 작가의 사진·소개·수상 작품이 진열되어 있다.”
특산물
우금(烏錦)
우진의 명문 실업(絲業) 상호 ‘익대사호(益大絲號)’의 창립자 심영창(沈永昌)은 아들 심학문(沈學文)에게 가업을 이어주었다. 그는 시장에서 전통 목기면사(木機綿絲)의 판매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직금(織錦)으로 제품을 대체하였다.
사면(絲綿)
우진은 양잠(養蠶)과 견직(絹織)의 중심지로, 생산되는 사면은 질이 부드럽고, 매끄럽고, 불순물이 없다. 지방에서는 이를 ‘대환면(大環綿)’ 또는 ‘수면(手綿)’이라 부른다.
포사(布鞋)
중국인의 전통 생활 필수품으로, 일종의 천으로 만든 신발인데, 우진 포사는 전통 수공(手工) 천층저(千層底) 방식으로 제작된다.
비소(篦梳)
우진은 죽(竹), 목(木), 양각(羊角), 우각(牛角) 등 자원이 풍부하여, 장인은 선별·개형·정형·광삭(光削) 등의 공정을 거쳐 다양한 형태와 기능의 빗을 제작하고 있다.
호필(湖筆)
우진은 역사적으로 호주부(湖州府)에 속하였기에, 호주 지방의 전통 붓인 호필 제작이 성행하였다. 산양모, 황서랑모, 산토끼모 등으로 만들며, 70여 공정을 거친 수공예품으로 ‘첨(尖)·제(齊)·원(圓)·건(健)’의 네 가지 특성을 갖는다.
백수어(白水魚)
우진 수역의 야생 담수어로, 오염되지 않은 하천에서 자라 살이 연하고 맛이 뛰어나며, 희귀 담수 식재로 꼽힌다.
수공장(手工醬)
천연 발효를 기반으로 하며, 청 함풍 9년(咸豐九年, 1859)에 토인 도서창(陶叙昌)이 ‘서창장원(叙昌醬園)’을 창립하였다.
삼백주(三白酒)
‘백미(白米)·백면(白麵)·백수(白水)’ 세 가지 재료로 만든다고 하여 명명되었다. 55℃의 삼백주 외에도 12℃의 백나미주(白糯米酒), 4℃의 감미백주(甜白酒) 등을 생산한다.
고속병(姑嫂餅)
우진의 전통 과자로,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시누이와 올케가 다투다 만들게된 과자로, 모양은 기자병(棋子餅)보다 약간 크다.
훈두차(熏豆茶)
‘홍두차(烘豆茶)’라고도 하며, 향두(薰豆)에 계화(桂花), 볶은 깨, 귤피, 무채, 소자(蘇子), 박자(柏子) 등을 더해 만든다. 우진에서는 이를 ‘먹는 차(吃茶)’라 부른다.
생철과(生鐵鍋)
1866년, 대장장이 심제(沈濟)가 우진에서 야방(冶坊)을 열어 야금업의 시초가 되었는데, 후대 장인들은 여전히 전통 방식으로 철기를 제작하며, 연료는 석탄에서 전기로 바뀌었으나 기술은 전승되고 있다.
항백국(杭白菊)
1999년 5월, 농업부로부터 ‘중국항백국지향(中國杭白菊之鄕)’으로 지정된 통향시(桐鄕市)는 중국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감국(甘菊)이라 불리며, 절팔미(浙八味) 중 하나로 꼽힌다.
남인화포(藍印花布)
‘석회고화포(石灰拷花布)’ 또는 ‘고화남포(拷花藍布)’라고도 불리는데, 면사로 직조하고, 황두분(黃豆粉)으로 풀을 바르며, 남초즙(藍草汁)으로 염색한다. 전통 수공예·환경친화적 공법으로, 의류, 두건, 찻잔 받침, 우산, 가방 등 다양한 생활용품에 활용된다.
목조죽각(木雕竹刻)
생활용품에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우진 장인의 영민하고 섬세한 수공예를 보여준다.
정승고(定勝糕)
전승에 따르면, 옛날 우진 주민이 전쟁에서 승전한 장수를 맞이하기 위해 만든 과자이다. 붉은 색을 띠며, 승전과 경축을 상징한다. 후일에는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유생에게 합격의 기원을 담아 전하였다. 모양은 연화(蓮花) 형태로, 외피는 정제된 향미·찰미 분으로, 속은 두사(豆沙)와 설탕·계화가 혼합되어 있다.
인물
우진은 인물의 고장으로, 천여 년 동안 수많은 문화인을 배출하였는데,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양조(梁朝) 소통(蕭統, 昭明太子) 은 이곳에서 서재를 짓고 독서하였으며, 『소명문선(昭明文選)』을 편찬하였다. 이는 『시경(詩經)』, 『초사(楚辭)』와 함께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근현대에는 정치가 심택민(沈澤民), 은행가 노학보(盧學溥), 언론인 엄독학(嚴獨鶴), 농학자 심려영(沈驪英), 작가 공잉경(孔另境), 예술가 목심(木心) 등이 있다. 특히 문학가 모순(茅盾, 본명 沈雁冰) 은 『자야(子夜)』, 『춘잠(春蠶)』, 『임가포자(林家鋪子)』 등 명작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