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평(2008. 5월호)
일상과 문학의 상호 삼투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은 문학이다. 문학은 크게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된다. 수필 평론을 하면서 내용은 좋은데 문장의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글을 발견할 때, 평자는 가장 당혹스럽다. 수필가로서 문의 형식을 갖추는 것은 기본인데, 이런 기본이 제대로 안 된 사람들이 수필가로 행세하면서 수필의 기반을 흔든다는 것은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평자는 수필전문지 월평을 통해서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문장의 기본 원리를 알고 글을 써야 한다고 다소 무리가 따르는 걸 감수하고 여러 차례 비교적 직설적으로 문단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여기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젊은 비평가가 너무 혹독하게 비판한다는 볼멘소리였다. 그때마다 평자는 수필 바로 세우기 작업에 대한 한계를 느끼며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수필을 제대로 쓴다는 것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글을 많이 쓰고, 책을 많이 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글의 원리에 대해 잘 모르는 수필가는 글을 글답게 하는 원리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수필을 잘 쓰는 원리를 배우기 전에 먼저 문장론의 기본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글에는 일정한 원리가 있는데, 일부 수필가들이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스럽게 쓰려다보니, 오늘날 우리 수필은 다른 갈래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로부터 수필도 문학이냐는 경시를 당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글의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글을 수필로 인정하여, 수필가란 이름을 달아주니, 다른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수필가들을 우섭게 여긴다는 것이다.
수필은 생활 경험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글이다. 일상 생활과 문학이 바람직하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일상 생활 경험의 성찰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유의해야 한다. 생활 경험을 성찰한다는 것은 삶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이는 어느 정도 자기 공명 내지는 자기 감동의 요소를 수반해야 한다. 또한 경험의 반추와 성찰에는 인간의 모든 지각 기제가 다 동원된다.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면 형상성, 참신성, 함축성, 탄력성 등을 갖추어야 한다. 이번 월평의 관점을 두 가지로 적시했다. 평자는 첫 번째 것의 중요성을 인지시키기 위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문단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작품은 일단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기로 했다. 본론에서는 생활 경험의 문학적 형상화를 논리 분석적으로 진단해 보겠다.
문학회 순례 코너에 <산영수필문학회> 편이 실렸다. 산영 수필문학회는 1988년 이정림 선생의 문하생들이 모여 만든 수필동인회다. 서정숙, 홍애자, 서길원, 윤영전 등의 눈에 익은 수필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서정숙의 <중국에서 물건사기>는 중국인과 거래를 한다거나 사업을 해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을 직접 경험하면서 실감한다는 내용이다. 사람에 따라 값을 다르게 부르는 중국 상인을 상대로 해서 원하는 가격에 물건을 사고 나서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을 느끼는 작가의 익살이 재밋다. 상인 한 사람을 보고 그 나라의 수준과 국민성을 가늠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작가는 이런 오류를 의식해서 ‘물건 값이 제멋대로인 중국이지만 거리를 내다보면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고 전개부에 적고 있다. 단면을 보고 중국의 수준을 얕잡아 보면서도, 그러한 단면보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전략적 반론꺾기가 잃어버릴 뻔한 공감을 준다. 주제 중심의 일관성은 좋았으나 문단 형식에 유의했으면 좋겠다.
홍애자의 수필<떼장과 어머님>은 한국적 수필로서 전통 미학이 돋보인다. 우리 조상들의 솜씨가 묻어나는 음식에서 손맛을 우려내기 때문이다. 서울토박이로 어렸을 적부터 시어머니의 상차림을 보아왔던 작가가 토속식품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을 찾았다가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떼장 요리를 해서 어머니의 손놀림을 떠올려 본다는 내용이 발단부에서 전개부까지 수놓아져 있다. 어머니의 손맛을 부각시키기 위해 실패한 화전요리를 언급하고, 화전을 시식하고 그 맛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결말부 가서 이 글의 핵심 제재인 떼장을 버리고, 강계국수와 두부장과 돼지고기 삼겹살 풋고추볶음에서 어머니의 맛을 찾고, ‘이 음식들을 만들 때마다 아름다운 어머님의 미소와 손놀림이 애듯하게 그리원진다‘는 진술은 주제적 양식의 수필 구성의 전략으로는 좀 부족하다. 수필은 이 장을 보아도, 저 장을 보이고 주제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수필 구성도 이런 차원에서 전략이 요구된다. 수필과 같은 문예문은 보이지 않는 무논리의 논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향순의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수필은 창작의 모티브가 매우 인상적이라서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은 잘 모른다. 일반인들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듯, 간혹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평가한 평론을 읽고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수필은 스승이 작품세계에서 써준 글귀를 단서로 자신의 내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영혼과 생명을 불사르며 삶을 열정으로 채운 빈센트 반 고흐의 모습이 담겨 있을까 싶어 고흐를 알기 위해 화집을 뒤적이고 그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열정을 찾아나서는 작가의 노력이 바로 수필적 삶이다. 이 수필이 지향하는 또 하나의 가치는 본질은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의 나타냄이다. 그저 광기어린 천재화가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가 자신의 숨은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알려진 바와 또 다른 고흐의 평범한 일면을 발견했다는 대목은 삶에 있어서도 인식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본 대로 느낀 대로'의 수준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려고 애쓴 흔적은 작가의 성실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결말을 ‘나도 수필의 글밭에 알찬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가꾸어 보련다’는 진술은 제목에서도 나와 있기 때문에 중언부언이다. 또한 마무리를 진부한 다짐으로 끝내 처음의 참신한 발상으로 얻은 점수를 모두 까먹은 건 아쉬운 부분이다.
김창송의 <그래도 내일은 있다>는 수필은 유조선 사고로 황폐화된 태안반도로 봉사활동을 나가 쓴 봉사활동기다. 새벽잠을 설치며 집을 나서는 장면부터 도착해서 자원봉사자로 등록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데까지 시간 순서적으로 단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헌신과 봉사정신을 알리는 이런 류의 글은 제재로 선택하기 쉽지 않은 글이다. 잘못하면 자랑거리가 되어 자신을 홍보하는 글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필에서 ‘의잡’의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 일까, 발단부에 작가는 ‘매스컴은 망연자실한 태안 주민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전하라고 외친다’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제목은 내용의 단적인 표현이 되어야 하고, 수필은 주제의식을 구체화시켜야만 좋은 수필을 낳을 수 있는 글이다. 제재에 주제의식을 담아 함축하려는 전략은 세우지 않고, '본 대로 느낀 대로' 한꺼 번에 경험을 다 쓸려고 하니, 주제의식의 구체화가 치밀하지 못해 ‘그래도 내일은 있다’는 핵심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들은 이제 영원히 저 바다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에 이어지는 ‘그래도 내일은 있다.’의 형식논리로는 참이지만, 인식논리로 이해하기에는 ‘내일이 있다’고 확신할만한 진술이 구체화되지 못해서 아쉽다. ‘그 날이 어소 속히 임하기를 손 모아 기원해 본다’는 기도문도 진부한 마무리다. 발걸음을 적절히 옮기면서 흔적을 적어 나가는 글이 수필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선한 충동이 되려면, 활동의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 수필이다. 주제의식이 선명하면서도 간접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회 순례 코너의 글과 특집, 테마에세이, 사색의 뜰에 실린 글은 확실히 달랐다. 문학회 순례 코너의 글이 아마츄어적이라면, 후자의 수필들은 프로다운 면모가 드러나 보였다. <에세이21>이 창간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량에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다고나 할까.
권남희의 <유리병에 넣어둔 사랑>은 자석처럼 눈길을 잡아당기는 수필이다. 사랑이란 말 때문만은 아니다. ‘유리병에 넣어둔 사랑’이란 제목이 우선 호기심을 끈다. 한 번 읽고 또 읽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추억으로 남고, 추억은 아름답게 남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제하면서 작가는 특유의 문장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작가 그레이엄 그린처럼 앙큼한 작가의 열 한 살이 머물렀던 골목길을 찾아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추억의 실체에 실망하는 장면을 전반부로 설정하고, 작가는 본격적으로 풋사랑인 첫사랑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 전에 그레이엄 그린의 “THE Innocent"란 소설에서 중년의 주인공이 고향에 남아있는 자신의 천진성을 찾아 잠깐 귀향을 하여 사랑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찾아 실망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열한 살의 작가가 스물일곱 살의 청년을 사모했던 순간의 마음을 풍경화로 그린 것이 단연 압권이다. ”색시감 순위에서 아예 제껴져 있는 내가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느닷없이 넘어지거나 남동생과 싸움을 벌이고 흘쩍거리는 일이었다“는 고백에 이르러서는 열한 살 아이의 전략에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이까지의 이야기가 절정이라면, 이 수필은 구성상 위기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모했던 삼촌이 어둑한 골목에서 동네 언니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배신감이 치를 떤다. 이 엄청난 사건의 충격으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방황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는 이 수필의 결미는 ”아무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는 유리병에 넣어 강물에 띄운 편지처럼 꿈으로 남아 세상을 부유할 뿐이다.“는 진술로 장식된다. 이 수필은 절정-위기-해결의 획기적인 전환을 통해 "첫사랑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세상의 진리를 다시 한 번 건져내는 데 성공한다. 이런 주제의식의 의미화말고도 이 작품의 우수성은 마음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고 참신하게 그려내는 형상성에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하필 유리병일까. 강물을 따라 흐르다 돌에 부딪쳐 유리병이라도 깨어지면, 그 편지는 젖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작가는 꿈으로 남아 세상에 부유할 뿐이라고 했나보다.
정인조의 <나의 작은 보물들>이란 작품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이 수필은 인간성의 특성을 발견해서 보여주는 것을 주제 지향성으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인상적인 경험을 반성적 성찰로 풀어낼 때, 감동을 준다. 특히 사물의 모습이나 느낌 등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형상화 측면에서 작가의 기량이 돋보인다. 나상의 고백으로 써나가는 이 수필은 서두에서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인간 본성을 인간의 모험성과 호기심에서 찾는다. 이런 명제로부터 작가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은 자기모순이라고 말한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저가 하면 로맨스라더니 지금 내 꼴이 딱 그 처지가 되고 말았다”는 대목에서, 자기 중심적인 이해를 반성적인 성찰로 연결시키고, 그 결과를 실천으로 행동하는 장면에서 감동을 준다. 수필이란 자기 성찰의 글이다. 수필을 쓰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작가는 상투적인 생각에 젖어서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작가가 구사하는 열거법에 의한 문장이 재미있게 다가서는 데는 특유의 비법이 있다. ‘몽돌’의 묘사에서도 그랬지만, 작가는 문갑 위의 돌에서도 여인의 이미지를 기억해낸다. 그러고 보니 작가는 여인의 형상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낭만주의자가 아닌가. 표현이 갖는 탄력성과 참신성은 이 수필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마지막 결말의 자작시 한 편의 주제의식이 실리니, 이보다 더 멋진 주제의미화가 또 있으랴. 돌의 무게가 솔방울의 가벼움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다는 표현이 인간화되면서 작가가 그리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럼으로써 여운의 문학으로서 수필의 틀을 유지한다.
최석구의 <어느 지망생>은 내과의사이자 교수가 쓴 수필이다. 작가가 글 쓰기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문학가 지망생으로서의 소망을 비교적 솔직하게 쓴 글이다. 이 수필에서 눈길을 단연 끄는 것은 ‘나는 부러운 것이 많다’는 발단부 첫문장이다. 의사이면서 대학 교수라면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별 부러운 것이 없으리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 수필은 첫문장이 ‘부러운 것이 많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잘사는 집 아이들이 부러웠다’는 진술을 내세워, 독자들의 공감대를 생성하고, ‘생활기록부에 자택에 동그라미를 해야 하나, 셋집에 동그라미를 해야 하나 양심을 저울질했던 때도 있었다는 보조문장을 통해 어린 시절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들을 꺼집어내어 가난의 경험이 있는 중년 독자들의 누선을 자극한다. 수필의 발단의 미학이 빛나는 글이다. 서두부터 어렵게 살아온 독자를 구원하고자 시도한다. 두 번째 단락의 첫 문장을 보다간 또 놀라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또 하나, 싸움을 잘 하는 아이가 부러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발단이다. 분위기 잡는 기능으로 충분하다. 수필은 주제의식을 일반화하여 의미화하기 전에 전개부에서 주제의식의 구체화 작업을 미리 해두어야 한다. 작가는 이 같은 사실을 흔히 꿰뚫고 있다는 듯 본격적인 이야기 단락인 전개부 앞에 두 가지의 부러움을 적고, 이는 어렸을 때, 동심의 부질없는 욕심이었다고 말하면서, 이순이 머지않은 요즘엔 글 쓰는 사람이 부럽다고 썼다. 이까지는 좋았는데, 다음 단락에서 또 부러운 것이 하나 더 제시된다. 젊음이 부럽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대목이 마지막 결말 단락에 스며있는 주제의식의 의미화에 상응하려면 부러운 이유가 글을 잘 쓰는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나와 비교한 누구가 아닌 바로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 한 것은 사족이다.
'신중', '허세 부리지 않음' '고결한 이성' 등 그 무엇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동백의 꽃말을 중얼거려본다'는 말은 사족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 뒤 '물욕과 허사에 들떠있는 나 같은 속인에겐 새겨두어야 할 교훈이다'는 말이 있어 부활한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말을 살리는 재주가 보통이 넘는다. 여행에서 마주친 자연과 사람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관계가 정겨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어 감동을 주는 글이다. 이 작품은 판에 박은 듯한 안내문 같은 정보 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예술적 감흥을 준다.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기행수필로써 조금도 손색이 없다. 앞의 기행수필과 비교된다고 하겠다.
배기훈은 자기의 회갑에 맞춰 강석호의 해설을 붙인 제2 수필집 <말하는 자동차>를 내었다. 발표된 수십 편의 작품을 한 편 한 편 읽어 보면, 작가의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사자성어로 된 제목만 해도 30개나 된다. 이는 배기훈의 수필적 특성을 나타내는 주요한 단서가 된다. 강석호의 지적대로 그의 글은 서정이나 서사성을 띤 수필이 아니라 설리수필이다. 자신이 회갑을 맞아 쓴 <이순기>는 친근감과 부드러움 그리고 유머적 묘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언덕배기에 오르고 나니 연륜의 수레는 저절로 잘도 굴러간다'라는 표현으로 그는 서두를 비유적으로 장식했다. '노인의 몰골'이 되어 당하는 사회적 참변을 유머러한 필치로 담담하게 그려내는 모습에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겠다는 작가의 겸허한 삶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늙은 것도 서러운데 가는 곳곳에서 배척당하는 신세가 서럽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러나 나와 동갑내기인 세계 헤비급 챔피언을 호령하던 알리도 파키슨씨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니 병이 없는 나로서는 그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같은 동갑내기인 김정일은 기쁨조와 즐기고 있다니 그보다는 약간 못한 것 같다'고 익살을 부리며 여유를 갖는다. <속이순기>란 작품에서는 평자의 직설적 지적에 따끔한 충고도 해주었다. 이 분의 풍부하고 유창한 사고가 질서정연한 언어 형식과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집
이다.
문학은 한 민족이 최고로 도달할 수 있는 사상과 정서를 언어로 표출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우리가 수필을 읽을 때 감동을 받는 것은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동은 모두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상적 충격과 정서적 울림을 주는 것이 예술의 기본적 기능이라 할 때, 수필은 예술적 창조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여기서 언급되지 못한 여러 작품 중에서도 내용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글의 원리를 소홀히 한 형식면에서 허점을 보이는 작품에는 가급적 손을 대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배기훈 씨로부터 격려와 동시에 비평이 가혹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정다감한 서신으로 평자에게 조언을 보내준 데 대하여 감사드린
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전한다.
강석호의 비평에 대한 언급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비평이란 말은 옳고 그름과 장점과 단점,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논하는 것이 그 본래의 뜻이지만, 문학 예술에서의 비평은 장점보다 단점, 옳음보다 그름, 아름다움보다 추함을 지적하는 데 그 역점이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의 가부를 판정하는 것보다 앞으로 발전과 개선을 지향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장점과 긍정적인 지적을 우선적으로 하다 보면 안주와 퇴보를 가져오기 쉬우며, 미흡점과 문제점의 지적은 일시적으로 의욕상실이나 의기소침을 가져올지 모르나 불원간 긍정과 향상을 가져오는 동기와 자극이 된다." 아무래도 이번 월평은 위의 관점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