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
―스스로 문장의 물결을 일으키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집 근처 세탁소에 옷을 맡길 일이 있었다.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삐걱대는 미닫이문을 열고 작은 세탁소에 들어섰다. 주인장 할아버지는 실뭉치를 늘어놓은 선반에 몸을 밀착한 채, 두툼한 마분지에 피아노 그림을 그려 넣은 ‘종이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피아노 치세요?”
“최근에 배우기 시작했어. 피아노 치는 애들이 참부러웠어.”
“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으셨나 봐요?”
“아니, 피아니스트 말고 그냥 피아노 배우는 게 꿈이었다니까. 만날 생각만 하다가 엊그제 학원에 등록했어.”
“예, 피아노 배우는 일….”
“모퉁이를 돌면 피아노 학원 하나 있잖아, 얼마 전부터 다니고 있는데, 손가락이 건반에 착착 달라붙는 게 얼마나나 신이 나는지 몰라.”
어르신은 피아노를 배우면서 느낀 보람과 재미를 들뜬 목소리로 펼쳐놓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얼굴에 피어난 미소의 꼬리도 점점 길어졌다.
몇 분 뒤 세탁소를 간신히 빠져나온 나는 눈썹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돌려다보았다. 어르신의 또렷한 눈동자를 빼닮은 따스하고 맑은 햇살이 정수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미국 작가 매튜 퀵 《용서해줘, 레너드 피콕》이라는 소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소설은 자신의 생일날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를 살해한 뒤 스스로 삶에 마침표를 찍기로 결심한 한 소년의 이야기다.
이런 장면이 나온다. 레너드 피콕이라는 반항기 가득한 소년이 미술관에서 가느다란 선 하나로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면 “이런 건 나도 그리겠네” 하고 빈정거린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교사가 대꾸한다. “그래? 하지만 안 했잖아! 레너드 피콕은 제꺽 입을 다물어 버린다.
살면서 의미 있는 생각을 머릿속에 심기도 어렵지만 걸 밖으로 끄집어내 실천으로 옮기는 건 더 어렵다. ‘섣불리 행동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어쩌지?’하는 두려움이 생각의 목덜미를 붙잡는 탓이다.
생각이 행동을 끌고 나가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생각의 상당수는 행동 뒤에 몸을 숨긴 채 꿈쩍도 하지 않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손자병볍孫子兵法》에 “졸속拙速이 지완遲緩을 이긴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는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머뭇거리기보다 일을 저지르는 편이 낫다”는 뜻으로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다.
글쓰기야말로 몸과 마음을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행위다.
생각과 감정이라는 뇌의 흔적을 활자 형태로 바꾸는 것이 글쓰기의 근간이므로 글의 재료는 다분히 정신적이다.
반면 글을 짓는 절차만큼은 육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펜을 잡고 종이에 글자를 새기든 키보드는 자판을 두드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든 능동적인 육체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우린 글을 쓸 수 있다. 지면과 화면에 문장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 능동은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장르의 예술에서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
한국에서 독일로 건너가 명성을 쌓은 한 화가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예술에 대한 정의를 좀 내려주세요. 예술이 뭔가요?” 하고 기자가 질문하자. 현지에서 ‘세상에 없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는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흠, 다리가 네 개 달린 책상을 만들면 뭐가 되죠? 그냥 평범한 가구입니다. 그럼 다리가 세 개 달리 책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면요? 그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성은 창작자의 능동성과 주관성이 잘 버무려질 때 생겨납니다.”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무릎을 쳤다.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쉽고 명쾌하게 예술의 본질을 짚어 냈기 때문이다.
예술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아트art’는 ‘법칙에 따른 제작 기술’을 뜻하는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인데, 일부에선 팔을 의미하는 단어 ‘arm’에서 파생했다는 가설도 제기한다. 후자의 설을 따른다면, 예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은 육신과 정신의 팔을 뻗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능동적으로 읽어내고, 그 세계가 주는 울림을 고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다!”
능동성의 중요성은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 문학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오래전 일본의 어느 소설가는 “I love you”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오늘 달이 참 밝네요”라고 썼고, 어떤 작가는 “당장 죽어도 좋아”라는 문장으로 옮겼다고 한다. 두 작가 모두 원문에 서로 다른 관점을 부여함으로써 문장을 능동적으로 재해석한 셈이다.
아침에 다락방을 청소하다 창문턱에 눌어붙은 먼지와 이물질을 깨끗이 벗겨낸다. 청소를 마치고 걸레를 털어내면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 청소 시간을 떠올렸다.
청소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몇몇 갈래로 나뉘었다. 우렁찬 목소리로 “여기 먼지가 많네!” 외치면서도 정작 빗자루질 한 번 하지 않고 입으로만 청소하는 아이가 있고, 그런 아이의 추종자가 되어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가 있었다.
청소할 곳을 적극적으로 찾기보다 그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청소를 마칠 무렵 홀연히 나타나는 녀석, 자발적으로 몸을 움직여 묵묵히 먼지를 떨고 교실 곳곳을 반짝이게 하는 아이도 있었던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본다. 청소 시간에 나는 어느 부류에 속했는지, 그리고 질문을 던져본다. 세월이 흐른 지금 과연 자가로서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글쎄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아니, 함부로 답해서도 안 된다. 삶의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평생 글을 쓰고 나서 생을 마감할 즈음에야 난 질문에 대한 답을 겨우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답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만의 답을 구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세상을 헤맬 것이다. 나는 믿는다. 시끄럽고 번잡한 것에 끌려 다니지 않고 스스로 일으킨 삶의 물결에 올라탄다면, 언젠가 그 답에 다가설 수 있을 거라고.
―이기주, 『글의 품격』, 황소북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