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간
세월의 바람
어머니는 십 년 넘게 이석증을 앓고 있다.
요즘도 가끔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며 어지러움 증세를 토로하신다.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으면 상태가 호전되곤 하지만, 질환자체는 뿌리 뽑히지 않아서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얼마 전 어머니가 이석증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니와 나는 구급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빨리 병원에 도착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인지 실제론 속도를 높여 도로를 내달리는 구급차가 달팽이처럼 더디게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병이 위중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변수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요소는 시간이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다.
따라서 구급대원은 아픈 사람을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은 환자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삶의 물꼬를 튼다.
환자의 시간이 막다른 길로 흐르지 않도록 애쓴다.
이날 구급대원과 병원 의료진의 대처 덕분에 어머니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의사의 권유에 따라 어머니는 다음날 오후에 퇴원했다. 그는 당부했다.
"이석증 환자는 제때 치료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 식단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특히 짠 음식은 당분간 먹지 마세요."
퇴원 절차를 마치고 우린 1층에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음료를 주문하면서 어머니를 슬쩍 쳐다봤다.
평소보다 부정한 자세가 어딘지 애달팠다.
순간 어머니가 앉아 있는 자리 벽면에 단출하게 적혀 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아픈 어머니를 바라보며 수없이 떠올렸던 문장을 누군가가 날 대신해 간명하게 정리해 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눈길을 잡아당겼다.
'당신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가 당신 곁에 있겠다고 약속할게요.'
이 문장은 내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이 수정됐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가 어머니를 위해 시간을 건네줄게요.
살아가는 일은 시간과 공간과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일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곁에 머물기 위해선 그 사람과 내가 동일한 시간과 공간 속에 함께 존재하는 경우를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타인과 시간을 공유해야 한다.
다만 현대인은 분주하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간을 쫓기며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스스로 '시간 빈곤층'을 자처하며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늘 고민은 한다.
때론 시간의 무게를 측정하기도 한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은 무겁다고 여기고,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과의 시간은 가볍다고 여긴다.
사실은 그 반대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우리가 시간을 귀하게 사용할지라도 시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역전되지 않는다.
시간은 결코 인간에게 끌려 다니는 법이 없다.
시간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위치에서 우리를 근엄하게 내려다보며 흘러갈 뿐이다.
인간은 시간의 보폭을 따라잡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때가 되면 세월의 바람에 으깨어져 시간의 바깥쪽으로 내쫓김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뿐이다.
그 안온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느끼며 삶의 허무를 가라앉힐수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시간 속에선 흔히 말하는 추억이 생겨난다.
추억에는 그것이 생겨날 당시의 온기가 묻어 있다.
그래서 세상 풍파에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다.
사람들이 바쁜 와중에도 각자의 일상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하는 이유도,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그 순간을 다시 꺼내 현재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보편의 단어
이기주 산문집 중에서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바쁜 일상에 조그만 쉼터로,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는 글멍의 공간으로.
전공서가 아닌 마음을 데우는 글로,
어린시절로 되돌려보는 기회로.
감사햐네요 잘보구갑니다
종종 들러주세요!
좋은글귀가 마음에 와닿네요...
비오는날 아침....
많이 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