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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 쉬게 하리라 말씀/ 마태복음 11:1-30 요절/ 마태복음 11:28 | 2020.6.28 |
마태복음 17강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현대인들은 쉼이 없이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직장 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고 아이들도 공부하느라 피곤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쉬는 날을 가장 좋아합니다. 진정한 쉼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우리 인생들을 예수님께서 초청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은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전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신 후에 세상에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온 유대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고, 자신의 역할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이 옥에 갇혀 있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시는 예수님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과연 그런 예수님이 스승이 증거한 바로 그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하는지 헷갈렸습니다. 요한은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인지 아닌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곧 순교하게 될 그들의 스승 요한의 운명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답을 주셨습니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6) 예수님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셨고,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셨고, 못 듣는 자를 듣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오시리라고 약속된 그 메시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더딜지라도 예수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코로나 19 상황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실족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위기상황을 빨리 해결해 주지 않을까 조급해하며 예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빨리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원망하지 말야야 합니다. 양들이 빨리 변화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뜻을 거스리고 탕자와 같이 산다고 예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을 크게 떠서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자들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갈대와 같이 흔들리기 잘하는 사람을 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러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명품 옷을 입은 부자들은 왕궁에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를 보기 위해 광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라기 3:1에 예언한대로 요한은 예수님의 사자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요한의 위대성은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에 충성했다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요한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은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큽니다. 이는 인격이나 능력이 요한보다 크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더 많이 누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 때부터 천국이 얼마나 힘있게 전진하고 있는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서 ‘침노하는 자’는 천국을 얻고자 간절히 소원하는 자, 적극적으로 믿음과 순종을 드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영적 소원과 믿음이 강한 자일수록 천국을 더 많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한 말씀을 븥들기 위해 몸부림칠 때 천국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마가복음 10:45과 마6:33과 롬1:5을 여러 해 동안 요절로 붙들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 나라를 깊이 맛볼 수 있었고 기적과 같은 일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요한복음 21장 15절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에 순종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이라 양을 먹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환난의 때야말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입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자를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무관심했고 비방하는 데 빨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피리를 불고 잔치를 해도 춤추지 않았고, 세례 요한이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요한의 사역을 우습게 여기고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역사가 일어나려면 영적 소원을 가지고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고 집중해서 듣고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내면에서 살아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치 않는 도시들을 책망하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예수님은 그 도시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보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수많은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실망스럽고 힘 빠지는 일입니다. 그들의 완악함은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 비교될 정도였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양무역을 통해서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심판을 받아서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두로와 시돈보다도 더욱 악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 지역에서 행하셨던 일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했다면 벌써 그들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많은 말씀과 이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치 않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늘에까지 높아지고자 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체험하고도 여전히 회개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예수님을 몰랐거나 믿지 않았던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보다 더 무서운 심판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많이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자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서 낙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서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은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배우고자 힘씁니다. 이들은 팔복에 나온 대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며, 애통하는 자들이며, 온유한 자들이며, 의에 목마른 자들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며,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며,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며,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늘 겸손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간절히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창조와 섭리와 계시를 아들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매우 친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고 아들은 아버지를 압니다.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아버지 하나님을 압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노력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야 아버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현대인들 가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선희의 ‘안부’라는 노래가 다시 뜨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어떤가요 밤새 안녕하신가요..’ 우리에게는 생활의 짐이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세상은 먹을 것이 풍성했고 노동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실낙원이 되었고 노동은 짐이 되고 고통이 되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생존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토익 만점을 맞고도 은행이나 공사에 취업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취업도 알바도 포기하고 놀고 있는 니트족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직장을 얻은 사람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언제 잘릴지 모르기에 늘 긴장하며 살아야 합니다. 얼마 전 매스콤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임계장’이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임계장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임시계약직노인장’의 준말입니다. 생활의 짐은 계속하여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또한 율법의 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암기하고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짐에 눌려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우리에게도 지켜할 법과 규칙들이 많이 있습니다. 법과 규칙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멍에가 되어 우리에게 고통을 줄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무거운 짐이 있는데 바로 죄의 짐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죄인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짐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몸도 무거워집니다.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자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잠을 실컷 자기도 합니다. 책을 읽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상담을 받기도 합니다. 담배를 피고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무거운 짐과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 위해 바다를 찾기도 하고 산을 찾기도 합니다. 트롯트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트롯트가수 탑7의 노래를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짐을 완전히 없어주지 못하고 참 쉼을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우리 인생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오는 자를 예수님은 쉬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쉼을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딱딱한 사람, 교만한 사람에게서는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과 함께 할 때 쉼을 얻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도 온전한 사람,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연약하고 부족하고 한계가 많습니다. 사람에게서 쉼을 기대했다가 도리어 상처받고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온전한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진정한 쉼을 주실 수 있습니다.
참 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가야 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그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29)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배울 때 힘이 나고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 쉼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한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진정한 쉼입니다. 어디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진정한 쉼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올해는 무더위가 빨리 시작되어 코로나 19와 함께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무더위와 피곤과 모든 짐을 견디려면 진정한 쉼과 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날마다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을 힘써 배움으로서 주님의 은혜로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