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 동안 한국 역사를 탐구하여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자신이 창간하고 주필로 있었던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에 4년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어서 1905년 단군 시대부터 고종 시대까지를 망라한 최초 종합 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영어로 출간하였다. 사진 권태운
2024년 8월 30일, 서울 마포구의 100주년기념교회 선교기념관에서는 호머 헐버트 박사의 7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모인 교계, 정치, 사회의 각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국회의장 우원식, 서울지방보훈청장 전종호, 광복회장 이종찬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헐버트 박사의 숭고한 업적을 재조명했다.
행사장 내부에는 한국과 미국의 상징을 나타내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걸려 있었으며, 추모식의 현수막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국회의장과 국가보훈부장관, 광복회장이 보내온 근조화환은 헐버트 박사의 고귀한 업적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상징으로 자리했다.
김동진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헐버트 박사의 생애와 업적을 조명하며, 그의 헌신이 현재와 미래 세대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헐버트 박사의 기념회 발기인 대표 명단을 공개하며, 헐버트 박사에 대한 감사와 공훈을 자손만대에 전해야 한다는 선열들의 요청을 상기시켰다.
고종의 밀사로서의 헐버트 박사
헐버트 박사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아 고종의 외교 특사로서 1905년 워싱턴과 1907년 헤이그에 파견되어 일제의 침략 부당성을 세계에 알렸다. 특히, 헤이그에서의 활동은 헐버트 박사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어떤 헌신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맞서 세계에 한국의 정당한 독립 요구를 피력하며, 국제 사회에 한국의 처지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러한 외교적 노력 외에도 비자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이는 헐버트 박사가 단순히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독립과 자주성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비자금 찾기 활동은 당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한글 소개 및 저작의 우수성
헐버트 박사는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글 자강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문장부호인 쉼표, 마침표, 점찍기 등을 도입하여 한글의 표준화를 선도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한국의 언어학 발전에 기여하며,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저작물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889년에 출간된 <사민필지>이다. 이 책은 한글로 작성된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세계의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했다. 헐버트 박사는 <사민필지>를 통해 한국의 독자들에게 글로벌 시각을 제공하고, 당시 한국의 교육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그의 저작물은 한글의 우수성을 입증하며, 한글이 갖는 문화적 가치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헐버트는 또 한국 YMCA를 탄생시켰다. 그는 YMCA 창립준비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03년 10월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서 이 땅에 YMCA 탄생을 선포하였다. 아울러 YMCA 헌장을 기초하며 YMCA 목적을 선교, 교육, 계몽으로 정하였다. 사진 권태운
130년 전 한류 예언과 선견지명
헐버트 박사는 그의 생애 동안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그의 예언적인 통찰력은 130년 전 한류의 탄생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한국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을 서양에 소개하며, 아리랑을 미국과 캐나다에서 찬송가로 채택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아리랑은 한국의 민족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세계적인 인지도와 보편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예언적인 발언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한국 상황 속에서도 한국 문화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이를 세계에 전파하려는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헐버트 박사의 통찰력은 당시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세계 무대에서 인식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현재의 K-POP과 한류의 선구적인 역할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된다.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밀약
헐버트 박사의 일생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미국과 일본 간의 밀약에 대한 그의 인식과 비판이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일본 간의 밀약으로 한국이 국제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시기에 헐버트 박사는 이를 비판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비판적 시각과 행동은 한국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그의 헌신을 잘 보여준다.
헐버트 박사는 이러한 국제 정치적 맥락 속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며, 한국과 한국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그의 정치적 비판과 노력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당시의 국제 정치 환경 속에서도 한국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민필지(士民必知) 이 책 이름이 시사하는 바는 메우크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로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1889년 집필. 세계 각국의 산천 ·풍토·사회·학술 등을 한글로 간략하게 설명, 김대건.유길준등 선구적 상황파악자가 있고, 이 헐버트가 이런 글을 썻는데도 캐캐묵고 낡은 관료와 선비, 그리고 권력자는 민중을 기만하고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해 아집과 독선으로 일관하다가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 악습의 씨앗이 아직도 뉴라이트니 뭐니 하면서 바이러스로 남아 이땅의 민중을 괴롭히고 있다. 사진 뉴스매거진
헐버트 박사의 유산과 미래 세대에 대한 교훈
헐버트 박사의 75주기 추모식은 그가 남긴 유산과 그의 헌신을 재조명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한글의 우수성을 증명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업적은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큰 교훈을 제공하며, 헐버트 박사가 남긴 유산을 기리기 위한 노력이 계속될 필요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김동진 회장은 추모식에서 헐버트 박사의 기념회 발기인 대표 명단을 공개하며, 그의 업적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교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헐버트 박사의 삶과 업적은 한국의 독립과 자주성, 그리고 문화적 자부심을 증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유산은 계속해서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추모식은 헐버트 박사가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남긴 크나큰 기여를 되새기며, 그의 정신과 가치를 잊지 말고 계승해 나가야 한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는 자리가 되었다. 헐버트의 정신은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선과 한국의 위대성을 인식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며 예언한 선지자였다. 또한, 그는 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청교도 아메리컨의 참된 가치를 구현하며,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통해 한국과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글 권오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