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포4득 (四抛四得)
기도를 초등학교 2학년 6월에 시작하였다.
6월 어느 날 아침에 나는 고열에 시달려서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엄마는 나를 업고 이웃 마을에 있는 점포,담배집에 가서 해열제를 사서 먹였다. 그리고 나를 안방에 눕혀 놓고 논에 김을 매러 갔다. 나는 안방에 누워 땀을 흘리며 찢어진 창호지 문구멍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하얀 구름이 마치 하얀 상여처럼 보였다. 갑자기 두려움과 슬픔이 북 받쳐 올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빠와 엄마가 없을 때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고 내가 죽어 있으면 오빠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 오빠가 올 때 까지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열이 계속 올라 몸이 불덩이가 되어 나는 오빠가 오기 전에 죽을 것 같아 펑펑 울었다. 그 때 전광석화처럼 ‘기도’가 떠올랐다.
당시 마을에서 오리정도 떨어져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혼자 기도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어린이 잡지에서 본 기도 생각이 떠올랐다.
한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각자 자신들이 보낸 응모권이 당첨되게 해달라고 각자의 신에게 비는데 할아버지는 공자에게, 할머니는 부처에게, 아버지는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었다.
나는 윗방으로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고 세분의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공자님, 석가님 제 병을 치료해주시면 당신들의 뜻대로 선하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부디 저를 고쳐주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기도를 마친 순간, 나는 호흡이 편해졌고 열이 사라져서 몸이 서늘해졌다.
그 뒤로 나는 예수님, 공자님, 석가님께 약속한 대로 선하고 바르게살기를 기도하였다.
중고시절에 나 자신을 위해 구체적으로 많은 기도를 드렸다. 당시 많은 기도를 드렸지만 핵심은 세 가지 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 속에서 성장한 나는 나 자신이 20세기의 위대한 성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언제 어디서나 성 프랜시스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에 삶의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남북 평화통일의 과제를 이루는 피스 메이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하나님께 써주시라고 간구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청춘의 피가 끓어오를 때 한국 사회와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를 위한 한 방법으로 평신도신앙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 속에서 깨어지고 부서지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성자가 되려는 것도, 피스 메이커로 사는 것도, 평신도신앙공동체를 세우려는 것도 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말 초라한 모습으로 쓰임을 받는 자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선교현장으로 나갔다. 그러나 선교지의 불의한 신분제도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조직에 경악하며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위한 투쟁과 기도를 생명 걸고 시작하였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많은 고뇌와 고통이 밀물처럼 몰려왔고 사람들과 자연적 환경이 주는 불편과 고난이 따랐지만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밑바닥 자리에 견디었다. 그러나 우연한 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한국으로 떠밀려 들어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일천한 경험과 지식과 지혜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세상을 유랑하며 계속 가르치며 훈련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였다. 일에 몰입하여 세상도 나도 잊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내가 기대하는 만큼의 성자가 못되었고 기대하는 교회는 변하지 않았다. 그 많은 세월의 분투와 기도에도 불구하고 나도, 교회도 변하지 않음에 하나님 앞에 엎으려 깊이 묵상하고 성찰하면서 나는 이미 성숙한 사람이므로 변화될 필요가 없다고 믿었던 나 자신의 오만하고 방자한 속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나의 교육과 훈련, 나눔과 섬김, 희생과 헌신으로 기필코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확신과 치열한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모범을 보이려는 나의 의지와 영적인 탐욕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나는 모세처럼 광야에 머물렀다. 가시덤불과 바위만 있고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태고의 고요 속에서 나의 교만과 허영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천지를 창조하신 분, 천지의 모든 만물의 생명의 원리와 법칙 기능과 활동, 역할과 한계를 정하시고 만물을 직접 디자인하시고 조성하신 분, 그리고 영원에서 영원까지 천지를 운영하시며 만물을 섬기시는 분께 먼지 한 터럭에 불과한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을 의심하며 집요하게 ‘정의와 심판’을 요청한 사실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수많은 열매들로 말미암아 주변의 찬탄과 칭찬을 받으며 나 자신을 그렇지 못한 주변의 형제자매들과 비교하며 영적인 우월감으로 거리를 두며 고고하게 처신해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양한 영적인 교만, 탐욕, 허영의 실체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가 정말로 무익하고, 무능하고, 무용한 존재임을 드러내주었고 나는 욥처럼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나이다.” 고백하며 엎드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은사요, 소명이요, 과제요.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네 가지를 포기하기로 하였다.
첫째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였다.
나는 가르치는 일에 은사가 있었다.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잘 가르쳤고 항상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생들이 졸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일 때 나는 행복했으며 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반드시 변화한다는 과신에 이르렀다. 이런 나의 과신은 어디서나 내가 가르쳐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형성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을 심어 주었다. 겉으로는 묵묵히 듣지만 속으로는 내가 가르치면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달라지고 사람들이 달라질 것이란 어리석은 교만이 깨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가르치는 내용대로 자신이 살지 않고 있으며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된다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영적 우월감으로 늘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나의 교만이요, 허영이었다. 자신도 행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나는 문자 그대로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이었다. 나의 양심이 나를 '위선자'라고 고발하였다. 가르치려는 마음 자체가 위선이었다. 나는 진실을 보았고 공항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나도 적당한 선에 머물러 있듯이 나에게 듣고 배운 자들이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눈을 떴다. 아무도 탐욕을 버리지 않았고 아무도 겸허해지지 않았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았다. 아무도 물질과 영광, 명예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악하게 살지는 않지만 부와 성공 집착하며 경쟁과 시기, 질투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탐욕이 가져오는 염려와 걱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둘째로 이웃들이나 관계하고 있는 모임이나 단체를 고치고 개선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어느 집단이나 사회의 불의하고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조직이나 구조는 반드시 개선하고 개혁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기준과 정의감, 능력과 열정, 사상과 이념으로 하루아침에 뜯어 고치려는 것은 개선이나 개혁이 아니라 또 하나의 커다란 폭력, 문제를 낳을 뿐이다.
특별히 함께 지내는 주변 사람들이나 관계하고 있는 기관이나 단체를 자기 생각과 뜻대로 뜯어고치려고 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도 고치지 못하고, 그 부모나 심지어는 하나님도 고치지 못해서 그대로 둔 사람을 사람의 얄팍한 사랑이나 관심으로 고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비록 선의로 고쳐주려고 할지라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갈등을 유발하고 자칫하면 서로 원수가 될 수 있으므로 남을 고치는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자기 기준과 시각으로 사람을 고치려는 일은 다양한 존재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 있으며 획일화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기 뜻대로 변화되지 않을 때 비난과 정죄로 상대방에게 분노와 상처를 주고 관계가 단절되는 절망으로 끝이 나기 쉽다. 한두마디의 호의적인 충고와 배려, 따끔한 야단과 잘못의 지적으로 바꾸어질 사람이면 처음부터 이기적이고 안일하고 의존적이고 방만한 무책임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잘 경청하였으며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였으므로 특별히 청년들이 대화중에 문제를 인식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들이 왕왕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부모의 자리, 교사의 자리, 어른의 자리에 앉아 훈계를 시작하였고 권위의식을 가지고 잘못을 지적하며 고치라고 강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위선과 이중성으로 몰아갔고 특히 30대의 철벽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속이 아팠고 자존심이 상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여야 한다는 나의 강박관념이 나로 하여금 조바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단점과 잘못된 생활방식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는데 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실로 세상에 의인은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는 없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인간은 이기적이며 게으르고 탐욕과 시기심, 불신과 무지와 교만으로 스스로 악하고 부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직접 나서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며 직접 뜯어고치지 아니 하신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관용,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품고 바라보며 기다리신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신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사사건건 개입하셔서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뜯어 고치려고 했으면 세상이 어찌 되었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에 있지 비난하며 고발하며 정죄하며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었다.
셋째로 내 편, 패거리, 동조자 만들기를 포기하였다.
나는 진실이면 통한다는 자세로 살아 왔으며 체질적으로 패거리를 만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하였지만 친구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으므로 나는 오야붕이 되거나 누구의 똘마니가 되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객관적으로 옳고 선한 것이 분명하여도 사람들이 나를 지지해주지 않았다. 나의 의견을 아예 무시하고 들을려고 하지도 않았다. 패거리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옳고 선한 것이 중요하지 않았고 자기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였다. 나의 의견과 제안이 바람직하고 타당하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내가 자기 패거리가 아니고 같은 그룹 멤버가 아니므로 나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를 폄하하고 루머로 나를 괴롭히며 방해하였다. 억울하고 힘이 들어서 나도 오야붕이 되어 사람들을 내 편, 나의 지지자로 만들고 싶었다. 또한 힘이 있는 사람의 패거리에 가입하여 든든한 보호와 지지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 패거리의 이합집산, 분열과 파당. 주도권을 잡으려는 치열한 싸움을 목격하며, 그일에 에너지와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보니 너무 가엾고 불쌍하였다. 하나님과 진리, 정의와 선을 말하는며 자신과 패거리를 위해 이중적으로 행동하는 정신분열이 너무 심각해 보였다. 패거리를 만드는 일도 패거리가 되는 일도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님이 영원한 거처요 산성이며 안식처라는 사실에 깊이 안도하였으며, 창조주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며 아버지요, 보호자라는 사실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살아 왔던 그대로 하나님 품에 안겨 있으면 되었다. 그대로 세상의 소외와 왕따, 폄하와 왜곡, 루머로 인한 상처와 분노도 하나님 손길에 맡겼다. 내 사람, 지지자, 호위자, 똘마니, 대변자를 만드는 일을 머리속에서 완전히 지웠다. 하나님 그분이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동행하시면 그것으로 인생은 충분하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인생은 고독을 즐기며 살며 사랑하며 세상 모든 사람들과 우주 만물들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이다.
넷째로 선입관과 편견,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 사람과 시대를 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내가 본 것,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다. 나의 주장과 해석이 거짓이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속 오해하며 왜곡할 수도 있고 계속 바르게 통찰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속 빗나간 추측을 할 수 있고 계속 억측으로 거짓을 생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선입관과 편견으로 사람에 대한 선악과 애호가 분명하였다. 작은 경험과 지식으로 세상을 보며 내가 아는 것이 세상의 다인 것처럼 착각하였으며 내가 옳게 여기는 것은 옳고 아닌 것은 불의한 것으로 여겼다. 마치 나 자신이 세상의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을 판단하는 지식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신뢰하였다. 그러나 나의 선입관과 편견이 바르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으며 차별적이며 배타적이며 폐쇄적이 비인간적이며 반 복음적이라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시각과 통찰력이 사물과 사건, 사람과 역사를 보는 기준점, 표준점이 아니라는 사실에 인정하는데 어이없게도 참 많은 세월을 보냈다.
아! 아! 내가 사람들을 선입관과 편견으로 대할 때 사람들 또한 나를 선입관과 편견으로 대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님 외에 누가 인간과 역사, 사물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겠는가!
우주를 창조하시고 섬기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만이 판단의 근거이며 기준점인데 인간이 어떻게 종합적으로 통전적으로 전체적으로 인간과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유랑의 길에서 시작되어 코로나광야에서 하나님과 씨름 끝에 환도뼈가 위골된 야곱처럼 절뚝거리며 나는 네 가지를 포기하며 나 자신에 대하여 손을 들었다.
치열하게 잘 살았다고 자부했던 지난날을 내려놓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삶을 조용히 기다리며 받았다.
긴 세월을 걸쳐서 네 가지 교만을 깨닫게 하시고 포기시킨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서 네 가지를 선물을 주셨다. 네 가지를 귀한 선물, 자유를 얻었다.
첫째로 나의 가르침을 내려놓으니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보였다.
가르치려는 욕구, 스승이 되려는 욕구를 버리니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보였다. 하나님의 섬세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가르침을 들으며 순례자의 삶을 사는 자유를 비로소 누리게 되었다. 나를 가르치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왜 가르치지 않겠는가 말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정치권력과 경제의 위력과 과학의 눈부신 발명과 발견에 놀라 은퇴하고 숨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구 경영을 맡기셨지만 지금도 창조주로서 직무와 심김을 계속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주 질서와 법칙, 하늘과 땅의 순환과 작용, 기후와 사계절, 만물의 생로병사,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회와 제자들, 선한 양심 등을 통해 인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다. 그러나 자기 우상화에 눈이 먼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인류를 평화와 해방, 구원과 용서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있다. 성령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하고 있다.
둘째로 내가 직접 고치려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하나님의 터치하심이 보였다.
사람들의 나쁜 습관이나 성격, 모임과 단체의 불의와 패덕을 나 자신이 뜯어고치려는 것을 포기하니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직접 터치하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터치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터치하시는 방법과 시간은 사람이 원하는 시간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신과 상대방을 다 주님의 손에 내려놓고 기다리면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가장 적합한 시간에 터치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터치해서 지도자로 쓰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터치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터치해서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사람으로 써주실 것이다.
셋째로 사람을 의지하지 않기로 하니 하나님만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이 나이에 이르도록 사랑과 진실로 인생을 승부하며 살았다. 그러나 패거리 문화에 절망과 분노를 하며 패거리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의리와 돈으로 형성되고, 일시적인 인기와 지지는 돈과 이해타산, 권력과 명예를 따라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성의 권력자들과 도전하는 권력자들 모두가 신물이 나도록 말하는 자유와 정의, 평화와 공평, 인권과 공정은 자기 패거리, 자기 그룹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패거리를 만드는 것도 기존의 패거리에 가담하는 것도 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와 나그네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는 하나님, 패거리 사회에 눌리고 치여서 신음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을 들러리, 보조자, 구경꾼, 옵서버, 친구로 불러주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열심히 참여하여 그들의 친구, 이웃이 되기로 하였다.
넷째로 내 의견과 주장을 내려놓으니 저절로 사람들의 생각과 뜻이 보였다.
나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최고, 최선이라는 생각을 버리니 사람들의 생각에 마음이 열렸다. 교만이 사라지니 비로소 사람들의 생각과 뜻이 보였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쉬워졌고 다름도 수용이 되고 틀린 것도 문제를 위한 문제로 삼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지혜와 지식이 풍부하고 풍성하였다. 그런데 세상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가꿀 수 있는 그들의 지혜와 지식은 전문가들과 지도자들의 독선과 우월감 때문에 교류와 공유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전문가들과 대학교수들은 습관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견해를 가볍게 제치고 자신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견해를 최고, 최선의 것으로 그들에게 강권한다. 그리하여 인간과 역사, 사물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견해가 사라지고 한 두 사람의 생각으로 획일화 되고 고착되어 모든 것이 흑백논리가 되어버린다. 지식과 정보가 일방 통행하는 사회는 정체될 수밖에 없고 지식폭력의 사회, 문화 폭력의 사회가 된다. 사람들이 서로를 듣지 않는 세상은 단절과 고립으로 필경에는 우울증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한 사람의 생각이 여러 사람의 생각보다 뛰어 나겠는가!
어떻게 한 사람의 경험이 여러 사람의 경험을 능가하겠는가!
할렐루야!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듯이 나 또한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겸허한 사람들을 기다린다.
2021.8.6.새벽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