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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불견첩(目不見睫)
눈으로는 자기 눈썹을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허물을 잘 알지 못하고 남의 잘못은 잘 봄을 비유한 말이다.
目 : 눈 목(目/0)
不 : 아닐 불(一/3)
見 : 볼 견(見/0)
睫 : 속눈썹 첩(目/8)
출전 : 한비자(韓非子) 第21 유노편(喩老篇)
여간 수양이 된 사람 아니고는 자신의 허물을 알기 어렵다. 남의 흉은 일부러 찾지 않더라도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남의 흉 한가지면 제 흉은 열 가지인데도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묻혀있는 남의 흠을 찾기까지 한다. 털을 불어 허물을 찾는 취모멱자(吹毛覓疵)다.
자기 자신의 결점을 반성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남의 결점을 보고 있을 틈이 없다. 탈무드에 있는 말이다.
자신의 결점은 알지 못하고 남의 잘못은 잘 본다는 비유로 눈으로는 자기의 눈썹을 보지 못한다는 이 성어를 쓴다. 도끼가 제 자루 못 찍는다는 속담과 같다.
중국 법가(法家)의 확립자 한비(韓非)가 쓴 한비자(韓非子)는 진시황(秦始皇)에게 영향을 준 책으로 유명하다. 역사적인 고사들을 노자(老子)의 사상과 비교 설명한 유로(喩老)편에 이 성어가 실려 있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월(越)나라의 내부 혼란을 틈타 월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신하인 두자(杜子)가 장왕에게 간언하였다. '왕께서 월나라를 치려고 하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楚莊王欲伐越, 莊子諫曰: 王之伐越, 何也.
장왕이 대답하였다. '지금 월나라는 내부 혼란으로 병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공격할 좋은 기회다.'
曰 : 政亂兵弱.
두자는 웃으면서 장왕에게 말했다. '왕께서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만, 사람의 지혜라는 것은 눈과 같아서 능히 백 걸음 밖을 내다 볼 수는 있으나 자기의 눈썹은 보지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莊子曰: 臣患智之, 如目也, 能見百步之外而不能自見其睫.
지금 왕의 군대는 진(晉)과 진(秦)나라에게 패하여 수백 리의 땅을 잃었는데, 이것은 병력이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王之兵自敗於秦晉, 喪地數百里, 此兵之弱也.
또한 나라 안에는 장교(莊蹻)와 같은 도적들이 날뛰고 있는데도 이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莊蹻爲盜於境內而吏不能禁.
그러므로 왕의 군대가 약하고 정치가 혼란한 것은 월나라 보다 더 심각한 것입니다.
此政之亂也, 王之弱亂, 非越之下也.
이럼에도 불구하고 월나라를 정벌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눈이 눈썹을 보지 못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而欲伐越, 此智之如目也.
이에 장왕은 월나라 공격을 포기하였다.
王乃止.
그래서 노자는 '자기 자신을 잘 보는 것을 밝음(自見之謂明)'이라 했다.
목불견첩(目不見睫)에 대한 비판적 사고
만약 신께서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아주 가까운 데 있는 것(눈썹)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런데 한번 보자. 자기 눈으로 자기 눈썹은 보지 못한다는 목불견첩(目不見睫)이라는 이 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末) 법가(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진시황(秦始皇)에게 크게 영향을 준 한비(韓非)가 쓴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데 이야기는 이렇다.
중국의 춘추시대 말기 초(楚) 나라 장왕(㽵王)은 웅대한 포부를 지닌 군주였다, 그는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자신이 계획했던 부국강병의 뜻을 이루고 마침내 자신의 야심을 밝힐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문무백관들을 소집하고 말했다.
장왕이 말했다. '오늘 과인은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뜻을 전하고자 하오. 이제 우리 초나라는 제후국 중에서 유일하게 나라살림은 물론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소.
지금까지 나라 경제를 부흥시키고 강력한 군대를 키운 것은 제후국을 토벌해 패권을 손에 넣기 위한 과인의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오.
그러므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여러 대신들에게 묻겠소. 현재 정세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적합하겠소.'
예나 지금이나 아첨하는 자들이 왜 없으랴? 어느 아첨 잘하는 신하가 나섰다. '폐하 소신의 판단으로는 월(越)나라가 우리 수중으로 넣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월나라는 정치 불신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탓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궁핍한 생활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부 혼란을 틈타 공격한다면 일거에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우리 초나라가 자신들을 구원해 준다고 믿고 협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초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절호의 기회라 여겨집니다.'
이 말에 장왕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흡족해 했다. 그러나 어느 문제든 반대 논리도 있는 법, 이 반대 논리를 소홀히 해서 큰코 다친 위정자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며칠 후 신하 중에서 직언을 잘하기로 유명한 두자(杜子)라는 신하가 장왕을 알현했다. 그는 며칠 전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미 월나라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시점에 또다시 전쟁으로 군사들은 물론 백성들을 고통과 불안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왕을 찾은 것이다.
두자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越(월)나라를 치려하십니까?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산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러자 호탕한 장왕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가 알다시피 우리 초나라는 풍족한 가운데 강력한 군사력까지 보유했으니 월나라 하나쯤이야 일거에 점령할 수 있을 것이오.'
왕의 말을 듣고 잠시 말이 없던 두자는 다시 질문했다. '폐하께서 그토록 월나라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계시니 특별한 책략이라도 가지고 계시는지요?'
장왕이 말했다. '아니오. 특별한 책략보다 신하들의 소견에 의하면 지금 월나라는 조정 대란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군대는 기강이 마비되고 백성들은 생활이 궁핍하여 원성이 높다고 하니 우리가 공격하면 일시에 무너질 것이므로 이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 생각되오.'
논리에 밝은 두자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예로부터 언관(言官)이나 언론(言論)은 정론직필(正論直筆) 해야 하는 법, 묵묵히 장왕의 이야기를 듣던 두자는 조심스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두자가 말했다. '폐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 올리겠습니다. 이 나라 만인의 군주이신 폐하께서 자신의 눈썹을 볼 수 있습니까?
신(臣)이 비록 어리석으나 사람의 지혜란 눈과 같아서, 능히 백보 앞을 내다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있는, 자기 눈썹은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 초(楚)나라도 진(晉)나라에게 패배하여 수백 리의 영토를 잃었지 않습니까? 이는 병력이 약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도적들이 여기저기 날뛰고 있어도 관리들이 이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정치가 문란해진 탓입니다. 그러니 나라를 수습하는 것이 더 급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越)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이것이야말로 지혜가 마치 눈썹을 보지 못하는 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두자(杜子)의 말을 보자. 논리상으론 그럴 듯하다. 한비가 그렇게 말한 것을 후대로 이어오면서 수많은 논객들이나 위정자들이 그 말을 인용해 아전 인수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자. 남의 잘못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잘못을 볼 수 있다고? 천만에, 자기 잘못은 느낄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잘못을 보고도 느끼지는 못한다면 그것은 공염불과 같은 것이다. 아주 가까이 있는 눈썹을 볼 수 있도록 신이 만들었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논객(論客)들과 위정자(爲政者)들이여, 한비가 에로든 이 고사를 이럴 경우에 인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데 그런 예화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가까이 있는 눈썹은 아예 볼 수 없도록 신(神)께서 만든 것이지 못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두길 바란다.
고사에 나왔으니까, 남들이 그렇게 사용하고 있으니까 어떠냐고? 그건 비판적 사고가 없다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 목불견첩(目不見睫)을 아무 비유에나 사용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목불견첩(目不見睫)
눈은 눈썹을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람들은 남의 허물은 볼 줄 알아도 자신을 제대로 보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소통력, 윤리 의식, 회복 탄력성… 리더의 요건으론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기본은 '자기인식'이다. 목적지 못지않게 출발지를 제대로 설정해야 한다. 많은 리더가 이를 간과한다.
리더십에서 출발지 설정은 자기인식이다. '내가 누구인데'를 과시하며 알아주길 바라는 이는 많지만 '나는 누구인가'를 성찰하며 알려고 하는 리더는 드물다. 리더가 도덕적 말, 옳은 말을 할수록 냉소를 사는 것은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해서일 때가 많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자는 명철하다(知人者智 自知者明)'고 말한다. 요컨대 자기인식이 명(明)이라면, 상대 판단은 지(智)다.
한비자의 유로편(喩老篇) 중 목불견첩(目不見睫) 고사를 살펴보자.
초나라 장왕이 월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였다. 신하인 두자(杜子)가 이유를 묻자 왕은 답한다. '월나라는 정치가 어지럽고 병력이 약하기 때문이오.'
두자는 이렇게 답한다. '저는 사람의 지혜가 눈과 같은 것이 될까 두렵습니다. 지혜는 눈과 같아 백 보 밖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눈썹은 볼 수 없습니다(臣患之智之如目也, 能見百步之外而不能自見其睫). 왕의 병력이 쇠약하고 정치가 어지러운 것은 월나라보다 더한데도 정벌하려 하니, 이것은 지혜가 눈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에 장왕은 월나라 공격 계획을 포기한다. 한비자는 '지혜의 어려움은 다른 사람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데 있다'고 말한다.
관행편(觀行篇)에 나오는 목단자견(目短自見)도 같은 뜻이다. '예전에 이주(離朱)라는 사람은 백 보 밖에서도 털끝을 분별할 정도로 시력이 좋았다. 그런 이주도 자기 눈썹을 보지 못한다. 백 보 밖이 가깝고 눈썹이 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이치상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군주는 이(자기 눈으로 눈썹을 보지 못하는 것)를 몰아세우거나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다.'
자기 눈으론 자기 눈썹을 보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근본 속성이다. 거울이 필요한 이유고, 리더십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쓰이는 이유다.
중국에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룬 당 태종은 1개도 아닌 3개의 거울을 가진 것을 자신의 성공 비결로 꼽았다. 의관을 바로잡을 청동 거울, 역사의 흥망 사례를 돌아보는 역사 거울, 직언을 서슴지 않는 충신 거울이 그것이다.
하긴 요즘은 거울을 봐도 제 모습 그대로 보기가 힘들다. 온갖 애플리케이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정해 눈썹이 비뚤어지기는 커녕 성형한 모습으로 미화, 왜곡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리더들이 스스로 도취해 자기인식을 하지 못하는 목불견첩 세태를 보면 '누가 제일 아름답냐'고 끊임없이 피드백(?)을 구하던 '백설공주' 속 계모 왕비가 자기인식 면에선 오히려 앞섰다는 생각조차 든다.
목불견첩(目不見睫)
자기 눈으로 자기의 속눈썹을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악(惡)함이나 허물은 괜찮고, 남의 약점이나 허물은 강하게 비방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약 2~4년여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말은 뭐니 뭐니 해도 '내로남불'일 것이다. 이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로, 남의 잘못에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자신이나 자기 편의 잘못에는 너그러운 이중 잣대를 드리댐을 의미한다.
이 말은 1996년 당시 박희태 전 국회의원(전 국회의장)이 처음으로 사용해 현재까지 자주 쓰이고 있다. 곧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 하는 태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그 후 이 단어는 정치권에서 주로 고위직인사들이 많이 사용하여,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고, 2020년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교수신문이 교수 9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588명(32.4%, 복수응답)이 '아시타비'를 뽑았다.
이 '내로남불'의 행동은 사회의 질서를 허물고, 법치를 부정하며, 남을 속이는 등 가장 비열하고 지혜롭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특히 조직의 중요한(리더)직책을 수행하거나 국가의 공무역할을 하는 자는 더욱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이를 경계하는 가르침으로는 우선, 성경(聖經/마태복음 7장 3절)에 '왜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고.
동양에서는 '스스로(자신이) 최고라고 하는 자는 남이 그를 하찮게 여기고, 스스로(자신이) 하찮다고(겸손)하는 자는 남이 그를 최고로 여긴다(自上者人下之 自下者人上之)'라고 자신에게 관대함을 경계(警戒)하고 있으며,
철인 노자(老子)도 '도덕경(道德經)'에서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하고, 자신을 아는 자는 명철하다 한다(知人者智 自知者明)"고 말한다.
따라서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하다는 자승자강(自勝者强)와, 자신에게는 인색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는 자인타관(自吝他寬)이나,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하고 자기를 대할 때는 가을서리처럼 하라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등 동양에서는 남을 배려하는 인격을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목불견첩(目不見睫) 고사(故事)를 보자.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월(越)나라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총명한 충신인 두자(杜子)라는 신하가 이유를 묻자 왕이 대답하기를 "월나라는 정치가 어지럽고 군대가 약하기 때문이오."
그러자 두자는 "저는 사람의 지혜가 눈과 같은 것이 될까 두렵습니다. 지혜는 눈과 같아 백 보 밖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눈썹은 볼 수 없습니다. 왕의 군대가 월나라 군대보다 더 쇠약하고 정치가 어지러운 것은 월나라보다 더한데도 월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이것은 지혜가 눈과 같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장왕은 월나라 공격 계획을 포기한다.
한비자(韓非子)는 "지혜의 어려움은 다른 사람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데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눈이 매우 밝아 백 리 밖까지 볼 수 있을지라도 자신의 속눈썹은 볼 수 없는 구조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주(離朱)라는 사람은 백 보 밖에서도 털끝을 분별할 정도로 시력이 좋았다. 그런 이주도 자기 속눈썹은 보지 못한다. 백 보 밖이 가깝고 눈썹이 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구조상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군주는 이(자기 눈으로 눈썹을 보지 못하는 것)를 몰아세우거나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다."
중국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룬 당(唐)태종(太宗)은 자신이 '3개의 거울'을 가진 것을 본인의 성공비결로 꼽았다. 그 첫째가 의관[외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청동거울'이요, 둘째는 역사의 흥망사례를 깨달을 수 있는 '역사거울'이며, 셋째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충신거울'이 그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도구로써 자신의 악함과 허물을 깨달을 수 있는 필수요건(必須要件)이기 때문이다.
옛 현인들은 '굽은 나무도 먹줄을 따라 자르면 바르게 되고, 군주가 신하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면 사리에 밝아질 수 있다(木從繩則正 君從諫則聖/목종승즉정 군종간즉성)라는 서경(書經)의 말을 인용해 임금의 올바른 판단을 조언하며 유도하고 있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소통, 윤리 의식, 회복, 탄력성, 자기인식(自己認識)등 많은 요건이 있다. 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기인식이다. 자기의 분수나 처지를 알고서야 남에게 관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불경(佛經/佛 四十二 章 經)에 "악한 사람이 어진 사람을 해치는 것은 마치 하늘을 우러러 침을 뱉는 것과 같아서 침은 하늘에 가지 않고 돌아와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요, 또 바람을 거슬러 티끌을 날리는 것과 같아서 티끌은 남에게 가지 않고 돌아와 자기에게 모일 것이니, 어진 이를 해치면 그 (禍)화는 반드시 자기를 멸한다"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는 곧 '남을 비방하면 그 해(害)가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꼭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요즘 대선주자들의 목불견첩(目不見睫) 난타전에 민심(民心)은 점점 환멸을 느껴 돌아서고 있다. 유권자인 국민들은 이제 지쳐서 찍어줄 후보가 없다고까지 한다.
모두 대선주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 허물은 숨기고 상대방의 허물만 들추어 내어 성토하는 목불견첩의 악습(惡習)을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습이 흥행처럼 번져 국민들 머리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까 무섭다. 모두들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 目(눈 목)은 ❶상형문자로 사람의 눈의 모양이다. 처음엔 보통 눈과 같이 가로로 길게 썼는데 나중에 세로의 긴 자형(字形)으로 변한 것은 글이 세로 쓰기인 데 맞춘 것이다. ❷상형문자로 目자는 ‘눈’이나 ‘시력’, ‘안목’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目자는 사람 눈을 그린 것으로 갑골문에 나온 目자를 보면 사람의 눈과 눈동자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 본래 目자는 가로로 쓰였었지만, 한자를 세워 쓰이는 방식이 적용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目자는 눈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보다’나 ‘눈의 상태’, ‘눈’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眞(참 진)자나 鼎(솥 정)자처럼 솥을 생략할 때 目자가 쓰이는 예도 있으니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目(목)은 (1)예산(豫算) 편제 상의 단위의 하나. 항(項)의 아래 절(節)의 위 (2)생물 분류학(分類學) 상의 단위의 하나. 강(綱)과 과(科)의 가운데임 등의 뜻으로 ①눈(감각 기관) ②눈빛, 시력(視力) ③견해(見解), 안목(眼目) ④요점(要點) ⑤옹이, 그루터기(풀이나 나무 따위의 아랫동아리) ⑥제목(題目), 표제(標題) ⑦목록(目錄) ⑧조목(條目), 중요 항목 ⑨이름, 명칭(名稱) ⑩그물의 구멍, 눈 ⑪우두머리, 두목(頭目) ⑫품평(品評), 평정(評定) ⑬보다, 주시(注視)하다 ⑭일컫다, 지칭(指稱)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눈 안(眼)이다. 용례로는 직접 자기의 눈으로 봄을 목격(目擊), 안경낀 사람의 변한 말을 목사(目四),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실제적 대상으로 삼는 것을 목표(目標), 책 따위의 기사의 순서를 목차(目次), 눈 인사를 목례(目禮), 눈으로 셈함을 목산(目算), 눈으로만 가만히 웃는 웃음을 목소(目笑), 눈병을 고치는 데 쓰는 약을 목약(目藥), 오는 사람을 바라보고 맞음을 목영(目迎), 어떤 사물을 주의해서 봄을 주목(注目), 전에 비하여 딴판으로 학식 등이 부쩍 늘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봄을 괄목(刮目), 공부할 지식 분야를 갈라놓은 것을 과목(科目), 낱낱의 조나 항을 항목(項目), 사물을 분별하는 견식을 안목(眼目), 서로 미워함을 반목(反目), 형식 상 표면에 내세우는 이름이나 구실을 명목(名目), 사람이나 사물이 어떠하다고 가리키어 정함을 지목(指目), 물품의 명목을 품목(品目), 좋지 못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두목(頭目), 눈은 물건을 잘 보지만 자기의 눈 속은 보지 못한다는 말을 목단어자견(目短於自見), 고무래를 보고도 그것이 고무래 丁자인 줄 모른다는 말을 목불식정(目不識丁),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딱하거나 참혹한 상황을 이르는 말을 목불인견(目不忍見), 눈으로 책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목불지서(目不之書), 눈으로 부리고 기세로 부린다는 말을 목사기사(目使氣使), 눈으로 먹고 귀로 본다는 말을 목식이시(目食耳視), 눈초리가 다 찢어진다는 말을 목자진열(目眥盡裂),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계책이라는 말을 목전지계(目前之計)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見(볼 견, 뵈올 현)은 ❶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❷회의문자로 見자는 ‘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見자는 目(눈 목)자와 儿(어진사람 인)자가 결합한 것이다. 見자의 갑골문을 보면 人(사람 인)자에 큰 눈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눈을 강조해 그린 것으로 ‘보다’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다만 한자에서는 目자가 주로 ‘눈’과 관련된 뜻으로 쓰이고 있다면 見자는 ‘보다’와 같이 보는 행위에 주로 쓰이고 있으니 차이점을 알아두는 것도 좋다. 또 예전에는 見자가 現(나타날 현)자 대신 쓰인 적이 있기에 ‘나타나다’나 ‘보이다’와 같은 의미도 있다. 이때는 ‘현’으로 발음한다. 다만 見자의 기본 의미는 ‘보다’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보는 것’이나 ‘보이는 것’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그래서 見(견, 현)은 ①보다 ②보이다 ③당하다 ④견해 그리고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마음에 생각하는 점을 의견(意見),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알려지지 아니한 것을 찾아냄을 발견(發見),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편견(偏見), 서로 다른 의견을 이견(異見), 남의 일에 간섭함을 참견(參見), 사물을 식별하고 관찰하는 능력을 식견(識見), 무슨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짐작함을 예견(豫見), 보고 헤아리는 생각이나 올바로 인식하거나 올바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소견(所見), 신분이 높은 사람이 공식적으로 손님을 만남을 접견(接見), 지체 높은 사람을 찾아 뵙는 일을 알현(謁見), 임금께 나아가 뵈옴을 진현(進見),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뜻에서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 또는 대의를 위해서 부귀영화를 돌보지 않는다는 의미의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 지나치게 큰 대책을 세운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睫(속눈썹 첩, 깜작일 섭)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눈 목(目=罒; 눈,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妻(처, 첩)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睫(첩, 섭)은 ①속눈썹 ②안목(眼目) 그리고 ⓐ(눈을)깜작이다(섭) ⓑ(눈을)감다(섭) ⓒ눈 움직이는 모양(섭)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속눈썹으로 눈시울에 난 털을 첩모(睫毛), 속눈생과 눈썹을 이르는 말을 첩미(睫眉), 눈썹과 눈을 이르는 말을 미첩(眉睫), 눈 깜짝할 동안으로 아주 짧은 동안을 이르는 말을 순첩(眴睫), 눈과 속눈썹으로 뜻이 바뀌어 공간적 시간적으로 썩 가까움을 이르는 말을 목첩(目睫), 썩 가까운 사이를 이르는 말을 미첩간(眉睫間), 눈으로는 자기 눈썹을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허물을 잘 알지 못하고 남의 잘못은 잘 봄을 비유한 말을 목불견첩(目不見睫)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