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대 교황인 성 그레고리오는 레오 1세에 이어 ‘대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은 2번째 교황으로, 서방 교회 4대 교부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며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서기 540년경 부유한 귀족 고르디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로마를 위협하고 있을 당시에는 로마의 장관으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는 평소 꿈꾸어 오던 수도 생활을 실현하기 위하여 574년 로마와 시칠리아에 수도원을 세우고 35세 무렵에 수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579년부터 585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황 대사로 활약하다가, 5년 후에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온 뒤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수사가 교황으로 선출된 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하였으며,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선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교회와 주교들을 기반으로 하는 행정망을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이후의 중세 교황들이 웬만한 군주 이상으로 세속적 권력을 누리게 되는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혜롭게 로마 교회 재산을 관리했으며, 랑고바르드 왕국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는 데 일조하였고,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였으며, 기근으로 삶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의 구호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593년 마침내 그는 랑고바르드족 침략군을 설득하여 로마를 지켜냄으로써 사람들로부터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게 됩니다.
당시 그의 학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았는데, '주교의 직책과 의무', '욥기 주해', '대화집' 등을 비롯하여 서한 800여 통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 교회의 공식 예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그는 잉글랜드의 선교사업을 진척시켰고,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였으며,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위대한 설교가로서의 그는 로마가톨릭 전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레고리오 성가의 편집자로도 높게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겸손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자신이 라틴어 문법에 밝지 못하여 학문이 깊지 못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그레고리오는 이교도에 대한 선교사업에도 큰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601년 ‘앵글로색슨족’의 전교를 위하여 파견한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멜리토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에 선교 방법을 제시하며 "이교 신전은 살린 채 단지 우상들만 치운 뒤 성당으로 개조하라."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문화적 우월주의의 입장에서 야만족에게 그리스도교를 무작정 주입시키는 식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종교관습에서 그리스도교와의 연결점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내용으로 승화시키도록 하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선교 방식은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601년 그는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라고 기록할 만큼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이후 604년 3월 12일 64세를 일기로 선종하게 됩니다. 그는 사후에 바로 성인품에 올랐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에 개정된 현행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력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의 축일을 9월 3일로 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전까지 로마 교회의 전례력은 그의 축일을 선종한 날짜인 3월 12일로 지정하고 있었는데, 3월 12일은 언제나 사순 시기에 속해있어 이 기간에는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참회하고 속죄하는 시기였기에 503년 그가 주교로 서품받은 날인 9월 3일로 축일을 옮겨 기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후에 그의 부제였던 베드로 사제는, 성인이 책을 쓸 때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그의 머리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는데, 그런 이유로 성인의 성화에는 귀밑에 흰 비둘기가 속삭이는 모양을 그려 넣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한 역사가는 “중세 시대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없었다면 중세의 혼란한 상태는 물론 불법과 혼잡이 어떠했을지 생각조차 불가능하며, 중세 시대 교황 중의 진정한 교황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뿐”이라고 그의 저서에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로 혼란한 중세 시대 유럽 사회의 치안에서 그나마 자정 활동을 가톨릭교회가 감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는 음악가와 가수, 교사,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