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통치자이자 개혁가였다.표트르는 알렉세이와 그의 2번째 부인 나탈랴 키릴로브나 나리슈키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표트르는 그의 이복형제들과는 달리 건강하고 활동적이며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1676년 알렉세이가 죽었을 때 표트르는 4세에 불과했다.
병색이 짙은 그의 이복형이 표도르 3세로 왕위를 계승했으나 실권은 표도르의 외척인 밀로슬라브스키가의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표트르와 나리슈킨가(家) 사람들을 권력으로부터 소외시켰다. 1682년 표도르가 후사 없이 죽자 밀로슬라브스키가와 나리슈킨가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크렘린에 모인 여러 신분의 대표들은 밀로슬라브스키가의 연약하고 소심한 이반 대신 건강하고 영리한 표트르를 지지했지만 결국 이반과 표트르는 공동으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반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표트르는 어렸기 때문에 25세 된 이반의 누이 소피아가 섭정이 되었다. 정치로부터 소외된 표트르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 근처의 한 마을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살았다. 이 모든 일들이 어린 차르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표트르는 통상적인 차르가 받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궁정이라는 좁은 곳에 갇혀 지내는 대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는 밖에서의 놀이를 좋아했으며 특히 군대놀이를 즐겼다. 또한 그는 목수일·대장장이일·인쇄일도 해보았다. 그가 살고 있던 마을 근처에는 외국인 거주지가 있었다. 그 주민들과 친숙해진 관계로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헛간에 버려져 있던 영국의 범선은 항해에 대한 그의 정열을 불러일으켰다. 수학·축성·항해는 표트르가 가장 좋아하던 것들이었다.
또 그는 모형 요새를 하나 건설했고 최초로 '놀이'로 군대를 조직했다. 근대 러시아군의 핵심이 되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와 세묘노프스키 연대는 이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1689년 표트르는 어머니의 주선으로 아름다운 예브도카야와 결혼했는데, 이는 17세의 표트르가 이제 스스로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결혼은 오래가지 않았다. 표트르는 곧 왕비를 무시했고 1698년에는 수도원으로 보내버렸다.그가 결혼한 해에 스트렐치(근위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소피아와 그의 파벌은 이 반란을 쿠데타로 발전시키려 했으나 표트르는 소피아를 권력으로부터 제거했다. 이때부터 1696년 이반이 죽을 때까지 나리슈킨가가 권력을 장악했다. 한편 표트르는 군대놀이와 항해놀이를 계속했는데, 그의 놀이는 장차 그에게 놓여진 과업을 위해서는 좋은 훈련이었음이 입증되었다.
표트르의 재위초에 러시아는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이 후진성이 대외정책을 저해했으며 심지어는 러시아의 독립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표트르의 목표는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 바다로의 접근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서유럽 국가들의 발전을 따라 잡는 것이었다. 종래의 토지귀족인 보야르(boyar)들과 성직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엄하게 처벌한 그는 25년간 국민생활의 모든 부문(행정·산업·상업·기술·문화)에 걸쳐 일련의 개혁에 착수했다. 표트르의 재위초에는 이미 러시아 여러 지방에서 경제적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수공업자들이 소기업을 세우고, 소규모 생산은 팽창하고 있었으며 노동자와 농노를 고용한 작업장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에는 막 탄생한 부르주아지가 국민적 산업과 교역의 발전을 목표로 한 표트르의 정책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다. 도시행정의 개혁은 특히 중요했다. 1699년의 칙령에 의해 도시민들(수공업자·상인)은 지방의 군사총독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그들 자신의 시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지방도시의 시 정부는 모스크바의 시정부(라투샤)에 종속되었다. 모든 도시민들은 '정규시민'과 '하급시민'으로 나누어졌다. 정규시민들은 2개의 길드에 속했는데 하나는 부유한 상인과 자유업 종사자(의사·배우·예술가)를 포함했으며 또다른 하나는 직업에 따라 분류된 장인들과 소상인들로 구성되었다.
하급시민들은 고용된 노동자들로서 정규시민들이 갖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개혁에 힘입어 경제활동과 도시인구가 증대되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시에 정착하여 해당 시민범주에 등록하는 것이 법으로 허용되었다.
그래서 '모든 계급의 인민들에게 자유로운 상업'의 권리가 부여되었다.
원로원은 중앙과 지방의 여러 기관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세수와 지출을 감독하며 차르의 칙령에 부응하는 법을 제정했다. 군대 규율이 민간제도에까지 확대되었으며 근위대의 장교는 원로원에서 상주 근무했다. 더욱이 1722년 원로원과 그 사무국의 일상작업을 감시하고 '군주의 눈'의 역할을 하는 검찰총장직이 생겼다.
1700년부터 스웨덴에 대한 전쟁으로 인해 산업발전은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무기를 공급하고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러시아에는 전함이 사실상 없었음) 대규모 야금업과 제조업이 세워져야 했다. 표트르는 지치지 않고 이러한 일에 헌신했다. 대규모 자본투자가 이루어지고 많은 특권들이 기업가들과 산업가들에게 부여되었으며 이러한 특권들 가운데는 작업장의 노동력을 위해 농노를 구입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있었다.
그래서 특정한 지역에서 생활하고 공장에 예속된 '등록' 농노계급이 생겨났다. 다른 나라의 생산방법이 더욱 연구되고 외국의 전문가들이 초청되었다. 전반적인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육군과 해군의 물자 수요가 충당되었고 주로 농노노동력을 이용한 다수의 제조업체들이 세워졌다. 야금업은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여 18세기 중엽 러시아는 이 분야에서 유럽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그의 치세중 외국과의 교역량은 7배나 증가했다.
1721년 러시아 정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기 위해 표트르는 모스크바 총교구를 폐지했다. 그로부터 교회의 우두머리 지위는 차르의 뜻에 따르는 위계적인 대표자들로 구성된 성의회(Holy Synod)로 넘어갔다.
표트르의 국내정책은 러시아 지배계급인 지주들과 막 탄생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다. 토지귀족의 물적 지위는 그의 통치하에서 상당한 정도로 강화되었다. 통치의 전반기에만 거의 1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와 17만 5,000명의 농노들이 귀족들에 할당되었다. 더욱이 장자상속제를 제도화하여 대토지재산의 분할을 방지한 1714년의 칙령은 '포메스치야'(귀족들의 봉사에 대해 차르가 귀족에게 양도해 준 토지)와 '보트치니'(세습재산 또는 자유보유지) 간의 오랜 구분을 없애고 이제 모든 토지는 세습재산으로 되었다. 귀족의 지위는 표트르가 제정한 관등표(1722 제정)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로 인해 혈통에 따라 차등지워진 낡은 승급체계가 업무에 따른 승급체계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체계에서 모든 직무는(군대나 일반행정 모두) 14등급으로 구분되었고 세습귀족은 8등급부터 시작되었다. 관료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나 공장주도 귀족이 될 수 있는 새로운 혈통을 형성했다.
표트르의 재위초에도 러시아는 영토면에서는 큰 나라였으나 흑해, 카스피 해, 발트 해로 나아가는 통로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 통로를 얻는 것이 표트르의 대외정책이 가진 주된 목표였다. 이러한 의도로 수행된 것이 투르크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던 크림 타타르족으로부터 아조프 해를 빼앗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투르크에 대항한 '신성동맹'(오스트리아·폴란·베네치아와 결성)에 러시아가 굳게 결속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행된 것이기도 했지만 흑해로 접근하고, 타타르의 공격에 대해 남부 국경지역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 원정을 계기로 그는 돈 강에 함대를 건설했으며 1696년에는 아조프를 차지했다.
그 전쟁 이후 표트르는 250명이나 되는 인원으로 구성된 대사절단을 이끌고 서유럽을 순방했다(1697~98). 주목적은 국제상황을 검토하고 반투르크 동맹을 견고히 하는 것이었으나 유럽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주요한 일이었다.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여행한 그는 사르담에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조선소에서 4개월간 목수로 일하기도 했으며 그후 영국으로 건너가 공장들·병기창·학교·박물관을 찾아다니고, 의회의 회의를 참관하기도 했다.
1698년 여름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가 수백 명의 군위병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추방했다.
해양강국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조차도 다가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준비하고 투르크와는 화평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그는 아조프에서 흑해로 남하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투르크와 화친했다(콘스탄티노플 조약, 1700). 대신 그는 선왕들의 전통을 따라 발트 해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스웨덴은 카렐리아·잉그리아·에스토니아·리보니아 등을 장악하고 발트 해로 나아가려는 러시아를 막고 있었다. 표트르는 작센, 덴마크-노르웨이 등을 끌어들여 스웨덴과 전쟁을 했는데 이렇게 해서 1700년에 시작된북방전쟁은 21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표트르는 이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 엄청난 정력을 쏟았다. 그는 전투를 직접 지휘도 하고 외교에도 나서고 심지어는 도끼를 들고 조선소에서 직접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외교를 위해 다시 덴마크·북독일·네덜란드·프랑스를 방문했다(1716~17). 1703년에 네바 강변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712년에는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니스타드 조약에 의해 발트 해 동부 연안 지역은 러시아에 넘어가고 스웨덴은 이류국가로 전락했다. 이제 러시아가 폴란드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원로원은 1722년 표트르의 칭호를 차르에서 전러시아의 황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과정에서, 그리고 그의 근대화 작업으로 농노들과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가장 큰 부담을 져야 했다. 그들의 고통은 다수의 민중반란을 야기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반란은 아스트라한의 반란(1705~06)과 돈 강 유역에서 일어난 불라빈의 반란(1707~08)이었다. 그러나 모든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표트르에게는 아들이 1명 있었는데 그는 버림받은 예브도키야가 난 알렉세이였다.
알렉세이는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었으며 표트르의 개혁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움직임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표트르는 미천한 신분의 여성 예카테리나(뒤의 예카테리나 1세)와 관계를 가졌으며 1721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든지 아니면 그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수사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은 알렉세이는 신성 로마 제국 영토로 피신했으나 곧 돌아왔다. 그후 그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1722년 표트르는 후계자를 자신이 지명할 수 있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아무도 지명하지 않았다. 그는 과중한 일로 건강이 나빠져 1725년 2월 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예카테리나가 후에 표트르 2세가 되는 표트르의 손자를 제치고 1724년에 여제(女帝)가 되었다.
<표트르 1세>
심 산 네바강 선상 광광 , 강 양쪽 4.5 Km'의 '네바강 거리'에는 중요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구 해군성 청사,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성 이삭 성당 -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인 100톤의 금이 들어간 황금빛 돔 지붕이 눈에 띄는 성당으로 성 이삭의 날인 5월 30일에 태어난 피터대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청동 기마상 맞은편에 위치한 것으로 , 총 14,000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1818년 몽페란드가 설계하고 40년이 지난 뒤에 완공하였다. 성당 내부에는 성서 내용과 성인을 묘사한 러시아 화가들의 회화 작품 및 조각품이150점 넘게 전시되어 있고 62점의 독특한 모자이크 프레스코화도 전시되어 있다.43m 높이의 성당 전망대에 오르면 상테페테부르크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스도 부활 성당▼
카잔 대성당 - 러시아 정교회에서 추앙하는 카잔의 성모상을 기리기 위해서 지어졌다.▼
표트르대제 동상▼
표트르대제 기마상▼
네바강 선상 관광,러시아는 네바강을 통해 발틱해와 연결될 수 있었고 해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네바강 주변에는 주요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러시아 해군성▼
에르미타쥐 미술관▼
피터폴요새 - 표트르 대제가 스웨던 군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하여 건설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카잔성당▼
★상테페테부르그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내일은 모스크바로 이동한다.
The End